張哲均 ⊙ 63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 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주 라오스 대사·주 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서희는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침략군을 저지하고 강동6주를 확보했다.
서희는 고려 초 거란의 대군이 침입했을 때 ‘세 치 혀(三寸舌)’로 상대를 설득해 영토를 획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서희가 확보한 영토는 압록강 하구로부터 청천강에 이르는 평안북도 서편 280리의 옛 고구려 영토를 말한다. 이 역사적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사적으로 월등한 적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해 이해관계가 큰 요충지를 자신이 차지하지 않고 상대에게 양보하고 돌아간 사건은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국가 간 크고 작은 영토분쟁이 많지만, 협상을 통해 영토문제를 해결한 예는 찾기 어렵다. 우리의 영토임이 분명한 독도와 같은 작은 섬도 일본의 연고권 주장으로 분쟁 아닌 분쟁이 되고 있으나 일본의 주장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서희는 어떻게 해서 거란의 대군을 앞에 두고 담판을 통해 요충지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서희가 역사에 알려진 바와 같이 ‘세 치 혀’로 옛 고구려의 영토인 평안도 땅을 획득한 것이 사실이라면 ‘싸우지 않고 승리한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차지한 것보다 더욱 값진 승리인 것이다. 이러한 서희의 활약이 간단한 역사의 편린으로 소개됨으로써 그의 위대한 업적이 오히려 희석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서희 장군이 아니라 외교인물로서의 서희를 재조명해 보려는 것이다.
서희가 활약했던 고려 초의 東北亞
당(唐)이 붕괴된 후 중국은 5대10국(907~960년)이 부침하는 난세였다. 후주의 장군 출신으로 절도사였던 조광윤(趙匡胤)은 거란과 싸우기 위해 진군하던 중 왕이 사망하자 아군의 옹립으로 송(宋)을 건국(960년)했다. 중국은 다시 송에 의해 통일되고 당 멸망 후 54년의 혼란은 종식되었다.
한편 장성 밖에서는 거란이 발해를 점령하고 동란국을 세우자 발해의 피지배 계층이었던 말갈족은 곳곳에서 정치적 연합체를 결성하여 송과 고려와도 통교하면서 거란에 대한 조직적 저항세력이 됐는데 그 대표적인 연합체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해 있었다. 이 시기로부터 만주 지역에 산재해 있던 말갈족은 중국과 거란 그리고 고려의 사료에 여진(女眞)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송, 거란, 고려와 이해관계가 있었던 여진은 주로 압록강 하구 방면에 위치해 있었다. 이들은 송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거란과도 관계를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서쪽 방면에서도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길목인 청해 지역과 티베트 고원에는 당말 이래 티베트계의 당항족(黨項族)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항족의 일부는 당이 쇠락하자 동쪽으로 이주해 황하 상류의 오르도스 부근에 정착하면서 그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항은 군사용 말을 중국 왕조에 공급해 왔고 서역으로 통하는 교역로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항은 송과 거란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통해 어부지리를 하고 있었다. 훗날 당항의 수장은 거란으로부터 하주 왕으로 책봉되었는데 이 당항국을 역사상 서하(西夏)라고 부른다.
동아시아는 송과 거란의 두 강대국이 대치하는 가운데 동편에는 고려와 여진이 그리고 서편에는 서하가 자리 잡으면서 팽팽한 외교전과 함께 때로는 국지전을 병행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 모습은 당말 이후 혼란했던 동아시아 지역이 새로운 형태의 질서와 세력균형을 모색해 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宋-거란-고려의 이해관계
고려 초기 동북아 각국의 형세. 고려는 성장하는 요나라와 쇠약한 송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외교를 펼쳤다.
송은 960년 중국을 평정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거란이 장성 안에 차지하고 있는 연운 16주가 군사 전진기지로 작용하고 있어 안보상으로도 거란의 직접 위협하에 노출되어 있었다. 연운의 지세는 북으로는 산악이지만 남으로는 화북평야가 연결되어 송과 거란의 고량하전투(979년)에서도 기동성이 강한 거란의 기마군이 유리했기 때문에 비록 장성 안에서 싸우는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송군이 승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송은 거란과 대치하는 동안 서하가 어부지리를 하여 송의 후방을 계속 약탈하고 그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과의 관계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송은 거란과 대치하면서 서쪽의 당항을 유화하고, 동으로는 여진, 고려와의 안보협력을 통해 거란을 압박하는 외교전략 즉, 원교근공(遠交近攻)과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했다.
거란은 국내적으로 농경파와 유목파가 분열되어 중국 진출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속적인 남하정책도, 송과의 속전속결도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송과의 대치상태가 장기화하면서 거란에는 고려와 여진, 그리고 서하와의 관계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여진은 발해 멸망 이후 거란을 적대시하고 송에 복속해 부담이 되었고, 고려는 송과 화친하고 발해 유민을 대거 포용하면서 계속 북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으로서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려와 여진을 공격하면 송이 연운을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송-고려-여진이 동맹하거나 반(反) 거란전선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대비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북진을 계속해 서북계는 신라의 경계였던 대동강으로부터 청천강 북변에까지 이르렀다. 송이 건국한 후에는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것은 송으로서도 원하는 바였다.
다만, 고려는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중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 거란에 대한 견제와 완충지대로서 여진의 협력이 필요한 반면, 옛 고구려 영토의 회복을 위해서는 여진을 더욱 북으로 내몰아야 했다. 고려는 여진을 유화하고 내부한 자를 포용하면서도 여진 거주 지역에 성을 구축하면서 그 영토를 북으로 확대해 나갔다. 결국 거란의 남하와 고려의 북방정책은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송-거란, 거란-고려의 이해가 상충되는 그 한복판에 여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압록강 중·하구에 이르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여진은 송과의 정치·통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신을 왕래시켜야 하는데 거란이 요동을 막고 있으므로 육로로는 교류할 수 없고 압록강 하구에서 배로 송과 왕래하고 있었다. 발해 시대부터 당과 통교에 이용된 이 수로(水路)를 후세에 조공로(朝貢路)라 불렀는데 압록강 하구와 이 수로는 송이 거란과 전쟁을 하게 되면 선편으로 이곳에 군단을 수송해 거란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전략 지역이었던 것이다.
거란의 여진 공략과 고려 침공
거란은 마침내 고려 정벌을 결정하고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거란군은 고려까지 침공하지는 않고 여진을 공격한 후 패주하는 여진을 쫓아 고려의 서북 경계까지 진출했다가 회군했다.
거란은 다시 고려 정벌을 결정(985년 7월)하고 군대 장비와 도로를 점검했으나 실제 작전은 지난번과 같이 여진을 공략했다. 거란군은 포로 10여만과 말 20여만을 얻는 전과를 거두고 회군했다. 거란이 2차에 걸쳐 고려 정벌을 결정한 후 여진만 공격하고 퇴각한 것은 그 중간 지대에 위치한 여진을 완전히 정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습지, 산지 등 지형지세가 험준해 공략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란은 2차에 걸친 공략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준비를 갖춘 후 재침하여 여진을 복속시키고 송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거란은 991년 2월 압록강 하구의 강구에 위치한 위구(威寇), 진화(振化), 내원(來遠) 3곳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특히 내원성은 압록강 하구의 강 복판에 있는 섬에 있었다. 거란은 여진에 대한 8년간의 군사공략으로 드디어 최대 전략적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거란은 송을 제압했고(989년) 여진을 공략해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991년). 이 교두보가 거란의 다음 목표인 고려 침공의 전진기지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압록강 하구에서 서로 마주보게 된 거란과 고려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성종12년(993년) 마침내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군용을 갖추었다. 시중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徐熙)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량(崔亮)을 하군사로 삼아 방어군을 편성했다.
이때 거란군의 선봉은 이미 고려의 서북방 봉산군(태천과 구성의 중간)을 점령하고 고려군 선봉인 윤서안(尹庶顔)을 포로로 했다. 군 위무를 위해 청천강 안북부까지 나아갔던 성종은 거란군의 진군 속도가 빠름에 따라 일단 서경(평양)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서희는 봉산군을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는데, 거란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 고려가 그의 영토를 침범하므로 이에 정벌하고자 온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리고 또 수차례 고려에 글월을 보내 “거란은 사방을 통일했는데 아직 복속하지 않은 자는 기어이 소탕할 것이니 속히 항복하라” 하면서 “80만명이 쳐 나왔으니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멸할 것이다. 군신들은 속히 항복하라”고 했다.
서희는 소손녕이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계속 항복만 강요하는 것이 수상했다. 그는 서경에 있는 성종께 “거란의 행동으로 보아 화해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성종은 서희의 보고에 따라 거란 측이 협상 의사를 보인 것으로 판단하고 이몽전(李蒙戩)을 대표로 보내 거란 측과 협의하게 했다. 이몽전이 소손녕에게 거란의 고려 침입 사유를 물은 데 대해 그는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천벌을 가하는 것이니 화평을 원하면 속히 나와 항복하라”고 했다. 이몽전은 결론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割地論, 항복론, 협상론
거란 대군이 서경의 인근까지 공격해 봉산군(鳳山郡·평북 泰川과 龜城)을 점령한 채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수차 항복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성종은 신하들과 대책을 의논했다. 오늘날의 국가안보회의를 연 것이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대신들의 입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왕께서는 서울(개경)로 돌아가시고 중신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자”는 항복론이고, 다른 하나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황주로부터 절령(岊嶺·자비령)에 이르는 선으로써 경계를 삼는 것이 가하다”는 소위 할지론(割地論)이다. 논의 끝에 성종은 할지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경의 곳간을 열어 백성들에게 쌀을 가져가도록 했다. 그리고 지난번 서경에 보낸 쌀이 아직도 많이 남았으므로 이 쌀이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남은 쌀을 대동강에 던져버리도록 했다.
성종이 할지를 결정하고 쌀을 강에 버리도록 하자 전선에 있던 서희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식량이 족하면 성은 가히 지킬 수 있는 것이며 싸움은 가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싸움의 승부는 병력의 강약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적의 틈을 엿보아 행동하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곡식을 버리라 하시나이까. 하물며 곡식은 백성의 생명입니다. 설사 적에 이용될지라도 헛되이 강 가운데 버리는 것은 또한 하늘의 뜻에도 맞지 아니할 듯합니다”고 고언했다. 성종은 서희의 말을 옳게 여겨 쌀 수장(水葬)을 중단했다.
이어 서희가 대책을 건의하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요양)으로부터 우리 안북부(안주)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여진이 웅거하던 곳이었는데 광종 대에 그 일부를 되찾고 가주(嘉州)와 송성(松城) 등지에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번 거란이 침입한 목적은 두 성을 취하는 데에 있는 것 같으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취하겠다고 한 것은 위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거란의 군대가 크고 성한 것만 보고 선뜻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는 것은 무모한 일로 좋은 대책이 아닙니다. 또한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의 땅인데 저희들이 터무니없이 요구한다 해서 그대로 다 내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영토를 적에게 떼어 주는 것은 만세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개경으로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적과 더불어 한번 싸우게 한 뒤에 다시 논의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고 했다.
先항전 後협상
서희는 지금까지 논의된 항복 또는 할지와는 다른 ‘선항전(先抗戰) 후협상(後協商)’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거란의 군사 움직임으로 보아 침공 목적이 고려 정벌에 있는 것 같지 않고 일부 지역을 회수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전략상으로도 고려 측이 먼저 땅을 떼어 줄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서희의 의견은 성종이 이미 대신들과의 논의를 거쳐 할지론을 결정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사실상 직(職)을 건 충언이었다.
서희가 주장한 선항전은 항복, 할지를 주장한 화의론자에게는 무모하고 모험적인 주장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고 냉정한 상황판단에서 개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막강한 거란군이 쾌속 진군을 하지 않고 계속 말로 항복을 요구하고 있는 태도가 수상하다는 점, 먼저 고려가 할지로 화의를 청하면 거란 측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그러면 협상에 불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전하면서 거란 측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후에 협상에 임하는 것이 고려 측에 유리하다는 전략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성종은 서희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국난을 맞아 자신의 왕위와 고려의 사직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차대한 순간에 이미 결정한 할지를 버리고 항전을 수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다. 이렇게 하여 고려는 서희의 의견대로 쌀 수장을 중지하고 거란군에 일대 타격을 줄 수 있는 항전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되었다.
서희-소손녕 담판
거란군은 이몽전이 돌아간 후 회답이 없자 안융진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이곳을 지키고 있던 고려군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의 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제동이 걸린 소손녕은 더 이상 전진을 하지 않고 다시 사람을 보내 고려에 항복을 재촉했다.
성종은 합문사인 장영(閤門舍人 張營)을 거란 군영에 보내 협의하도록 했으나 소손녕은 대신을 보내 협상에 임하라고 응답했다. 자신이 거란의 대신이자 부마임을 과시하고 고려에 회담 상대의 격을 높이도록 주문한 것이다.
성종은 신하를 모아 놓고 “누가 적진에 들어가 세 치 혀(三寸舌)로 적군을 물리쳐 만세의 공을 세우겠느냐”고 물었으나 응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서희가 홀로 나서 말하기를 “신이 비록 부족한 점이 많으나 감히 왕명을 받들겠습니다”고 했다.
많은 대신 중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나서는 자가 없고 왜 서희가 홀로 나섰던 것일까. 적진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談判)한다는 것은 신변에 대한 위험이 수반되므로 이런 위험을 감수해 나선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 협상은 거란군과 싸워 이기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협상으로 국운을 건 중대사인 만큼 잘못되면 책임이 따를 것이므로 선뜻 나서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서희는 자신이 성종에게 건의해 고려의 입장을 변경시킨 만큼 협상에 자신이 나서는 것이 도리에 합당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희는 소손녕의 군영에 이르러 국서를 제시하고 통역을 통해 회견의 예를 물었다. 소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고려 사신은 마땅히 뜰에서 절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소손녕은 현직이 동경유수이며 거란 황제의 부마임).
이에 대해 서희는 “신하가 임금에게 절할 때에 아래에서 하는 것은 예이거니와 지금 양국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서 그러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고 응수했다. 서로 이러기를 두세 번 되풀이했으나 소손녕이 수긍하지 않자 서희는 숙소로 돌아가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마음으로 이상히 여겨 당에 올라 예를 청할 것에 동의하니 이에 서희는 영문(營門)에까지 말을 타고 와 이곳에 이르러서야 말에서 내린 후 뜰에 들어와 소손녕과 더불어 대등의 예를 하고 동서로 마주앉아 담판에 들어갔다(대표 지위가 차등이 있는 경우는 남북으로 앉아 대좌하고 동등한 경우는 동서로 앉아 대좌함).
儀典의 중요성
《고려사》에 기록된 이 내용은 서희와 소손녕이 회담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각종 회담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이러한 의전(儀典) 문제는 국제협약과 관례에 따라 행해지므로 비교적 문제발생 소지가 적으나, 까다로운 회담에서는 여전히 의전이 회담 내용 못지않게 민감한 사안이 되곤 한다. 또한 회담 개시 전 이러한 의전 다툼은 때로는 기(氣)싸움으로 회담의 내용과 결과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형식 문제가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서-소 회담은 전시에 개최된 강화회담으로 분위기도 무겁고 국가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담판이다. 서희는 적진의 군영 속에서 동아시아 군사대국의 백전노장인 소손녕을 맞아 회담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첫 번째 관문인 의전에서 당황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기선을 제압했다. 이런 점에서 서희의 태도는 회담 대표로서의 모범적 사례로 평가된다.
두 대표 사이에 담판(談判)이 진행되었다. 소손녕은 “당신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데 고려가 고구려 땅을 침식했고 또한 고려는 우리와 접경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와 통교하지 않고 바다 건너 송을 섬기는고로 출병하게 된 것이니 만일 고려가 영토를 베어서 거란에 바치고 복속하면 무사할 것이다”고 했다.
이에 대해 서희는 이렇게 응수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구지(舊地)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땅의 경계를 말한다면 거란의 동경도 우리 영토 안에 들어있는 것을 어찌 침식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압록강의 이쪽과 저쪽이 모두 우리의 영역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몰래 들어와 살고 있으면서 완고하고 교활하며 변태, 간사하여 양국 간에 길이 막혀 천자를 알현하는 길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려운지라, 이것이 여진 때문인고로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을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감히 예를 치르지 아니 하겠는가.
장군이 만일 내 말을 천자에게 보고하면 어찌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고려사》 기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소손녕은 회담에서 거병의 목적이 두 가지임을 밝혔다.
첫째는 옛 고구려의 영토가 거란에 속하니 이를 돌려줄 것과, 둘째 송과 단교하고 거란에 복속(사대)하라는 것이었다. 거란은 옛 고구려 영토를 현재 점유하고 있고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것이니 고구려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소손녕을 압박한 후, 현재 여진이 거주하고 있는 압록강 주변의 땅을 고려에 주면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복속할 수 있다는 ‘협상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 타협안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일단 검토해 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와 여지를 갖고 있었다. 사대와 영토를 연계해 여진이 가로막고 있는 영토를 고려에 주어야 거란에 복속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서희의 설득 논리는 뛰어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서희는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말미에 ‘성종에게 보고하면 승인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회담결과를 최고 정책결정자에게 상신해 확정짓자는 절차상의 제안까지 해 놓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소손녕은 마침내 서희의 타협안을 거란 성종에게 보고했다. 성종은 “고려가 이미 화의를 청하니 이를 받아들여 마땅히 병(兵)을 철군시켜라”고 회신을 보내왔다.
徐-蕭 협정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확보한 강동 6주.
서희와 회담 후 철군한 소손녕은 서희와의 합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서한을 고려 측에 보냈다. 이 서한은 거란 측이 서-소 회담의 합의 사항을 최종 확인하는 ‘비준(批准)’ 절차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사회에서도 중요한 회담 결과는 그 합의 사항에 회담 대표가 가서명하고 정식 효력은 각각의 국내적 인준 절차를 완료했을 때 발효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소손녕의 서한은 다음과 같다.
<이제 재가를 받았는바 성종께서는 고려와 조속히 화의하라고 지시하였고 또한 이제 국경을 서로 접하게 되었으므로 소(小)로써 대(大)를 섬기는 것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규범이니 이러한 원리로 출발하여 끝까지 가야 양국 간의 우호관계가 오래 지속될 것이고 만약 이를 서두르지 않고 미리 방비하면 양국 간의 우호관계가 중단될 우려가 있으니 고려와 더불어 협의하여 중요지점에 성을 쌓도록 지시하였음.
성종의 명령에 의거하여 고려가 알아둘 것은 거란은 압록강 서편 지역에 5성을 쌓는 일이며 이것은 3월 초에 공사를 착수하게 될 것임. 고려 측은 미리 안북부(안주)로부터 압록강 동편(江東)에 이르는 지역 280리에 걸쳐 전지될 곳을 답사하고 지리의 원근을 측량하여 아울러 그곳에 성을 쌓기 바람. 그리고 성을 쌓는 공사는 양국이 함께 착수하기 바라며 고려 측이 성 쌓을 곳의 수를 알려주기 바람.
중요한 것은 기마의 길을 터서 고려가 거란에 조공하는 길을 열어 영원히 거란을 섬김으로써 고려는 스스로 평안한 방안을 마련하는 것.>
이 서한을 통해 서희와 소손녕이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서-소 합의 내용이 별도의 문서나 협정으로 작성되어 문헌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은 없다. 《고려사》에 기록된 소손녕의 서한이 양측의 합의를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줄 수 있는 내용으로서, 이 서한은 서두에 거란 성종의 재가를 받았다고 해서 국서로서 효력을 가질 수 있으며, 이에 대해 고려 측의 반대나 이의 제기가 없었으므로 양국 간에 합의된 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의 서한이 역사상 고려-거란 간 협정으로 불릴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그 내용을 양측이 그대로 시행했다는 점에 있다.
후속조치
고려는 거란 측과 통교하고 친선우호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994년 압록강 이동 280리 땅에 성 구축 작업을 진행했다. 서희는 군대를 이끌고 이 지역 여진을 축출하고 장흥(長興), 귀화(歸化) 두 진과 곽주(郭州)와 귀주(龜州) 두 곳에 축성했다. 그리고 이듬해 서희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여진 깊숙이 쳐들어가 안의(安義)와 흥화(興化)의 두 진에, 또 이듬해에는 선주(宣州)와 맹주(孟州) 두 곳에 성을 쌓았다. 이로써 서희는 강동 280리에서 여진을 축출한 후 요충지에 8개의 성을 축성하여 단기간에 이 지역 전체를 영토로 확보했다.
이어 고려는 이승건(李承乾)을 압록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로 임명해 내원성과 마주보며 거란과의 압록강 왕래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고려는 거란과 약속한 복속의 문제와 관련해 같은 해(994년) 3월 거란의 연호인 통화(通和)를 사용하고 4월 시중 박양유를 거란에 파견해 연호 사용을 알리면서 거란에 억류중인 포로의 송환을 요청했다. 또한 고려는 거란어 학습을 위한 유학생 10명을 파견하고 거란은 소손녕의 딸을 고려에 출가시키기도 했다.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소손녕의 서한 내용은 양국 간에 충실히 이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거란과의 통교를 결정한 후 송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아시아의 질서와 관례를 존중하는 정주 문명국으로서 전통적 우방이었던 중국의 송조와 관계를 단절하는 데에는 고뇌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고려는 송에 원욱(元郁)을 밀사로 파견했다(994년 6월). 이 시기는 박양유가 거란을 방문해 거란의 연호 사용 결정을 알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고려 사절은 지난해 거란 침입과 이에 따른 양측의 강화내용을 송에 설명하고 거란의 침략으로 불가피하게 굴했으므로 지금이라도 고려는 송과 연합해 거란을 협공할 것임을 제안했다.
그러나 송은 더 이상 거란과 군사적 충돌을 희망하지 않았고 고려의 제안에 동의할 형편도 아니었다. 송은 서하를 무마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세폐(歲幣)가 크게 증가되고 있었고 거란과의 전쟁으로 국고가 피폐해진 상태였다.
송의 반응은 당연히 예상된 것이었다. 고려는 밀사를 통해 대송 외교단절의 명분과 격식을 갖추면서 대거란 사대에 따른 외교적 절차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이로써 고려의 대외관계는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으며, 역사상 없었던 중원 왕조 이외의 북방 유목 왕조에 복속하는 첫 사례가 되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
서-소 협정의 내용을 요약하면 ①양국이 국경을 접하게 되었으니 고려가 거란에 복속, 즉 사대의 예를 갖춘다. ②거란은 압록강 서편에 5성을 쌓고 고려는 압록강 동편 280리에 성을 쌓는다. 축성은 양측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거란도 압록강 서편에 5성을 쌓고 고려는 동편 280리에 성을 쌓는다고 해 양측이 여진의 땅에 성을 쌓을 것임을 합의하고 그것도 ‘동시에’ 성을 쌓기로 한 것이다. 즉 거란과 고려가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여진의 땅을 압록강을 경계로 분할해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손녕의 서한에서도 서두에 ‘양국이 국경을 접하게 되었으므로’라고 명기하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거란은 이미 여진을 정벌하고 복속시킨 바 있고 이곳에 3개의 성을 쌓아 사실상의 군사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거란이 수차의 군사적 공략을 통해 점령한 여진은 거란의 기득권으로서 이곳에 성을 쌓는데 왜 고려의 동의를 필요로 하며 양측이 합의를 해야 했던 것인가.
이것은 서희가 여진의 땅이 고구려의 땅이었으므로 이를 계승한 고려에 돌려주어야 거란에 복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해 소손녕이 영향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소손녕은 서희의 주장에 설득되어 이미 거란이 군사보호화한 여진의 압록강 북쪽이 거란의 영토임을 고려로부터 인정받고 아직 점령하지 못한 남쪽은 고려에 떼어 주기로 합의한 후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거란도 여진에 5개성을 축성키로 명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진에 대해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군사대국으로서 이미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진군한 거란으로서는 강동 6주를 차지해도 고려가 불응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거란은 옛 고구려 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떼어 주어야 할 강동 280리를 거란이 양보한 것이다.
이 부분이 서희의 ‘세 치 혀’가 작용해 고구려 영토를 획득한 대목이다. 서희의 세 치 혀, 서희외교는 할지 또는 항복이 강요된 상황하에서 오히려 영토의 획득이라는 전화위복을 창출해 낸 것이다. 서-소 협정은 고려-거란 간에 여진의 영토를 나눈 ‘영토분할협정’임과 동시에 양국이 국경을 접하게 됨에 따른 ‘국경협정’이었던 것이다.
서-소 협정의 결과는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다. 이 협정은 거란과 고려의 정치관계를 규정함으로써 양국 간의 평화·안전을 보장하는 포괄적 협정으로서의 역할도 하게 된다. 고려는 서희가 타계한 후 송과의 관계를 추진하는 등 입장변화를 보이게 되어 다시 거란과 전쟁을 치르게 되나, 양국은 결국 서-소 협정의 틀로 다시 돌아와 평화를 유지했던 것이다.
또한 서-소 협정은 1004년 거란-송 간에 체결된 ‘전연(澶淵)의 맹(盟)’과 함께 거란이 금에 의해 멸망하는 1125년까지 120년 동안 동아시아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는 양대 축으로 작용했다. 이 평화의 백년 기간 중에 고려는 역사상 가장 부강한 국가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서-소 협정은 중견국가인 고려가 거란이라는 초강대국과 이해가 충돌한 상황에서 얻어낼 수 있었던 최대치로 평가할 수 있다. 서희의 외교는 국가 간의 갈등관계에서 가장 바람직스러운 협상을 통한 승리의 대표적 사례일 뿐 아니라 국난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승화시킨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성공 사례인 것이다.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차선책이며 최선책은 부전이굴(不戰而屈) 즉,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명분과 실리
고려는 강동 6주의 요충지를 얻었으나 모화배번(慕華排蕃)의 전통을 버리고 ‘오랑캐’인 거란에 사대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송이 경찰국가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거란이 동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이러한 정치적 부담은 항복이나 할지보다는 훨씬 좋은 결과임에 틀림없다. 항복이나 할지도 모두 거란에 대한 복속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는 할지 대신 강동 6주를 영토로 편입하는 추가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강동 지역은 여진, 거란, 송 모두에 중요한 조공로의 입구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양측이 교환한 사대와 영토 문제에 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사대는 외교적·형식적 관계로서 명분(名分)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거란과의 사대는 ‘사대교린체제’라고 하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따른 것으로 중국과의 사대인가, 거란과의 사대인가의 선택 문제이지 사대제도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시대였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영토의 안보, 경제 등 국익 차원의 실리(實利)에 해당한다. 국가적으로는 명분과 실리가 모두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실리보다 명분이 중요해 보일 때가 있다. 특히 국내적으로 정치쟁점화하게 되면 명분이 더욱 중요해지고 실리는 적게 보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서-소 협정은 사대와 영토의 교환이자 명분과 실리의 교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결과는 향후 고려-거란 간에 전쟁을 치르면서 거란이 얻은 사대의 명분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와 고려가 얻은 영토의 실리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성종과 서희의 사후 고려가 정경분리 정책으로 다시 송과 교류했을 때, 거란의 기마군단이 수차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으나 거란이 양보한 강동 6주의 험준한 지세를 활용한 고려군에 의해 참패당했다. 전사에 길이 남는 강감찬의 귀주대첩(龜州大捷)도 바로 강동 6주의 하나인 귀주에서의 대승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대라는 정치적 명분의 무상함과 영토라는 안보적 실리의 영원함을 일깨워 준다.
고구려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
서-소 협정은 우리 역사에 있어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소 협정은 고려가 신라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것임을 거란이 공식 인정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가 ‘고구려의 적자(嫡子)’라는 역사적 사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통일신라가 민족의 정통 왕조가 된 이래 고구려를 이은 발해가 거란에 멸망함으로써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서 실종될 뻔했다. 당 제국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었던 7~8세기 동안 당은 신라와 옛 백제 영토(오늘날의 한강 이남)만을 통일신라의 영토로 인정했고 당이 한강 이북의 청천강 지역을 신라에 공식 인정한 것은 당군이 축출된 지 60년이 지난 735년이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고 서-소 협정을 통해 고구려의 옛 땅인 강동 지역을 영토화함으로써 고구려가 우리 역사에 명백히 편입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런 배경하에서 고려는 고구려 계승을 정당화할 수 있었고 정사인 《삼국사기》를 기술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편찬자인 김부식이 신라계라는 출신 배경과 그의 ‘사대주의적’ 태도 그리고 고조선을 포함하지 않은 데 대해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학계의 역사 논쟁에 불과할 뿐이다. 《삼국사기》는 고려가 계승한 고구려의 역사를 정사로서 기술한 것이다. 《삼국사기》가 고조선을 포함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삼국의 역사서이지 한민족의 고대 전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고려야말로 우리의 현주소를 잉태한 역사의 대들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희는 왕건과 더불어 고구려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위인으로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조선에 세종과 이순신이 있다면, 고려에 왕건과 서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희 외교를 他山之石으로 삼아야
작은 나라 고려가 동아시아 제일의 군사대국인 거란을 상대로 서-소 협정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서희의 출중한 상황 판단과 협상 능력이다. 서희는 거란이 중국대륙의 송과 고려의 관계를 단절시켜 중립화시킨 후, 송을 제압해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겠다는 것이지 고려를 점령해 속국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아님을 간파했다. 서희는 지피지기의 자세로 상대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한 후 ‘사대의 명분’은 주고 ‘영토의 실리’를 얻는 협상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는 논리적 사고로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는 협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그는 신념과 용기를 가진 담대한 인물이었다. 성종과 조정 대신들을 납득시킴은 물론 적장인 소손녕도 납득시켰다. 서희는 세 치 혀뿐 아니라 지·덕·용(智德勇)을 겸비한 탁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서희는 사대를 거란에 내주었으나 사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사대를 이용해 고구려 구지를 수복한 위대한 외교전략가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최고 정책결정자인 성종의 역할이다. 성종은 서희의 선항전 후협상 건의가 옳다고 판단하여 조정의 대신회의에서 결정한 할지론을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성종이 서희의 건의를 수용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다면 고려의 운명은 바뀌고 말았을 것이다. 서희의 대안 제시와 이를 수용한 성종의 결단이 없었다면 거란과의 외교담판도 없었을 것이고, 훗날 한민족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17세기에 근대외교의 기초를 창출한 프랑스의 칼리에르는 그의 저서 《어느 원로대신의 협상에 관한 충고》에서 “진실은 두 명의 담당자를 필요로 한다. 한 명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진실을 듣는 사람”이라고 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데 귀담아 들어야 할 진실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고려의 국가비전과 탄탄한 국방력이다. 왕건은 고려를 국호로 정하고 고구려를 계승해 북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했으며, 고려는 이러한 국가비전에 따라 상당한 군사력을 유지해 왔다. 안융진(安戎鎭)에서의 고려군의 일격은 거란군의 예봉을 꺾었으며 이 일전에서의 승리가 서-소 회담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서희는 보다 자신감을 갖고 회담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소손녕도 고려의 군사력을 재평가했을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국가비전과 국가안보 태세는 오늘날 ‘국가이익’이라는 근대적 개념으로 재정의되었다. 4강에 둘러싸여 남북분단의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고려의 북방정책과 군사대비 태세는 오늘의 한국 국가이익이 무엇인가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천년이 지난 이 시점에 서희를 돌아보면서 서희와 같은 위대한 외교관이 다시 등장해 주기를 소망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21세기에는 주변 강대국에 의해 전쟁터가 되었던 한반도의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평화통일을 이루어 한민족이 웅비하는 비전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희와 같이 외교 안목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뛰어난 외교관을 많이 배출하여 외교력을 신장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전 지구적 상호의존도가 심화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분단의 현실과 시대적 상황이 서희와 같은 외교관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