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무릅쓰고 세상과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작가의 고뇌,
관용과 사랑에 대한 염원을 담은 필사의 마지막 한숨
“인도의 무슬림 문화는 루슈디에게 비자 발급을 거부하여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지만 그는 아직도 그 문화를 사랑했다. 인도 무슬림의 역사가 곧 루슈디 자신의 역사였다. 인도가 준 상처가 제일 깊었다. 루슈디는 이를 악물고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무대로 삼은 나라에서는 작가가 공연한 분열을 부추긴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이런 괴로움쯤은 오기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래도 글은 쓸 수 있으니까, 상상력은 발휘할 수 있으니까. 고작 거부반응 따위에 예술이 무너져서야 되겠는가.” __살만 루슈디(『조지프 앤턴』에서)
『악마의 시』는 루슈디의 모국 인도에서 가장 먼저 금서로 지정되었다. 작가 살만 루슈디와 그의 작품을 비판하는 인도 무슬림의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후에 루슈디는 “인도가 준 상처가 제일 깊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상처를 딛고 이를 악물고 작업에 몰두해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집필했다. 출간된 지 삼십 년이 다 되어감에도 이 책에는 생사를 넘나들던 당시의 절박한 상황은 물론 그 어떤 위협에도 꺾이지 않겠다는 작가로서의 사명과 의지가 여전히 생생하다. 출간 당시 도리스 레싱, 이언 매큐언, 네이딘 고디머가 ‘올해의 책’으로 꼽았고 1995년 휫브레드 최우수 소설상, 1996년 아리스테이온상을 수상했다. 2019년에는 BBC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영어소설 100’에 선정되었다.
1998년 9월, 이란 대통령이 루슈디에게 내려진 파트와를 철회하지만 이슬람 과격파 단체는 오히려 그에게 거액의 살해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루슈디는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종교적 관용을 주장했다. 하지만 2022년 8월, 루슈디가 뉴욕주 셔터쿼연구소에서 강연을 위해 무대에 오르다 이슬람 극단주의자 청년의 습격을 받아 크게 다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사람들은 작가 살만 루슈디와 연대해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과 작가들은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 #StandWithSalman를 내걸며 루슈디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때로는 무자비하고, 변화무쌍한 모국 인도……
지나치게 화려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국 인도, 자식들을 사랑하고 배반하고 잡아먹고 파멸시키고 다시 사랑하는 모국 인도, 자식들의 뜨거운 결속과 끝없는 싸움이 사후까지 이어지는 나라, 거대한 산맥이 영혼의 절규처럼 펼쳐지고 드넓은 강줄기마다 자비와 질병이 넘치는 나라, 바다와 야자수와 논이 있고 샘터에는 소떼가 모여드는 나라, 수천 명이 죽어가도 아랑곳없이 도끼눈을 뜨고 혀를 날름거리며 한바탕 춤을 추는 여신 칼리처럼 때로는 무자비하고, 그렇게 변화무쌍한 모국 인도. _본문 98쪽
『무어의 마지막 한숨』은 가장 ‘인도’다운 도시이자 모든 것이 충돌하며 서로를 지워가는 곳, 인도 봄베이 명문가의 일대기를 통해 독립 이후 인도의 현대사를 담아냈다. 루슈디의 또다른 대표작 『한밤의 아이들』이 독립 당시의 인도를 담아냈다면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무대는 그 이후의 역사다. 살만 루슈디는 1947년 인도 봄베이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루슈디의 가족은 1971년 시작된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힌두-이슬람 갈등의 심화로 인도를 떠나야 했다. 그들은 종교 갈등의 희생자였다. 루슈디가 평생 종교 극단주의자들의 독단에 날선 비판을 퍼부은 것도 인도 독립 후 종교 갈등이 사람들의 삶과 터전을 황폐화하는 과정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어의 마지막 한숨』에서 루슈디는 줄곧 배타적인 정체성의 불가능성, 그리고 혼종화와 잡종화의 아름다움과 경계선의 투과가 가져오는 삶의 풍요로움을 이야기한다. 또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자식을 버리는 매정한 어머니, 버림받은 자식의 고통, 단죄 감금 같은 악몽 같은 장면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세상을 향해 알려야 할 일을 알리려 필사적으로 글을 쓰는 모습은 루슈디 자신의 삶을 연상시킨다.
무어의 비극-즉 다양성이 통일성 때문에 파멸하는 비극,
‘여럿’이 ‘하나’에게 패배하는 비극
잃어버린 세계를 아쉬워하는 마지막 한숨, 사라져버린 세계를 슬퍼하는 눈물 한 방울.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환호성이기도 하다. 최후의, 추잡스러운, 시끌벅적한 이야기 한마당, 그리고 밤샘 조객들을 위한 떠들썩한 노래 몇 자락. 소음과 분노가 가득한 무어의 이야기. 들어보시려는가? 뭐, 듣기 싫어도 상관없지만. _본문 13쪽
인도 독립 후의 혼란기, 주인공 무어는 넉 달 반 만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다. 조산이 아니었다. 열 달을 꽉 채우고 나온 아기보다 더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오른손은 조막손이었다. 게다가 남들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열 살에는 스무 살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노화도 두 배 빨리 찾아왔다. 스무 살에는 이미 마흔 살 중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정상적이지 않았다. 뒤죽박죽 얼크러진 시대에 어울리는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남들보다 두 배 빠른 시간을 살아가는 주인공과 그의 집안의 흥망성쇠에는 다원적이고 다채로운 인도문화가 깊이 묻어난다. 마치 작두를 탄 듯 쉴새없이 쏟아지는 루슈디의 수다는 김진준 번역가의 유려한 번역으로 한층 더 맛이 살았다. 이 작품에서 무어는, 루슈디는 꿈꾼다. ‘여럿’이 ‘하나’에게 패배하지 않는 세상, 다양한 모든 것과 잡종과 혼종이 공존하는 세상을, 그리고 “실패와 소멸과 절망 뒤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사랑, 비록 패배로 끝났으나 그것을 패배시킨 것보다 위대한 사랑”을, 언젠가 “서로의 영토를 넘나들며 한줄기 강물처럼 흐르”게 될 그날을.
나는 이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움켜쥐고 저승사자에게 쫓기며 여기저기 대문이나 울타리나 올리브나무에 못을 박는다. 내가 마지막 여행길에 띄엄띄엄 펼쳐놓은 이 이야기는 내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도주 과정에서 이 세상을 해적의 보물지도로 바꿔놓은 셈인데, 이런저런 실마리를 따라가다보면 결국 X자로 표시한 위치에서 보물을 발견하듯 나를 만나게 되리라. 내 흔적을 추적하는 자들이 나를 찾아낼 때쯤이면 난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숨을 몰아쉬며 묵묵히 그들을 기다리리라. 제가 여기 섰나이다. 이럴 수밖에 없었나이다. _본문 12쪽
“네 운명을 받아들여. 너를 괴롭히는 것을 즐겨봐.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그쪽으로 열심히 달려가란 말이야. 불행과 하나가 되어야만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_본문 257쪽
아마도 나라 전체가 그랬겠지만 봄베이도 영락없이 덧칠그림 같은 도시였으니, 지상세계 밑에는 지하세계가 있고 합법 시장 밑에는 암시장이 있었다. 세상만사가 그러하거늘, 눈에 보이는 허구 밑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유령처럼 움직이며 모든 의미를 뒤엎어버리는 세상이거늘, 아브라함의 생애라고 어찌 달랐으랴?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이 지독한 겹겹의 덫을 벗어날 수 있었으랴? 우리가 참다운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까? 괴물이 되어버리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_본문 292쪽
나는 사랑 없는 인생이야말로 교만과 다름없다고 여겼다. 사랑을 모르는 자가 아니면 그 누가 스스로 완벽하고 전지전능하다고 믿을 수 있으랴?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지혜와 능력을 잃기 마련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사랑에 빠진다. 사랑도 일종의 추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착륙을 기대하며 질끈 두 눈을 감고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린다. 물론 매번 사뿐히 내려앉을 수는 없다. 그래도, 그래도 뛰어내리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도약이 바로 탄생의 순간이다. _본문 455쪽
우리 중에도-외계인이 아니라 인간 중에도-파멸을 먹이로 삼는 자들이 있다. 규칙적으로 불행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자들. _본문 505쪽
그때까지 내가 알던 모든 사실의 이면에 필연적으로 존재했던 비밀의 세계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온갖 신비와 환상이 가득한 마야의 베일 너머 온갖 진실이 숨어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의 현실이라면 천국과 지옥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느님과 악마도, 그 밖에 온갖 거룩하고 사악한 것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게 뜻밖의 일이 많은 세상이라면 묵시록도 진실이 아닐까? _본문 525쪽
돈도 종교도 제 욕망을 억압하던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는 시대, 지치고 허탈한 패배자가 아니라 원기왕성하고 야심만만하고 탐욕스럽게 삶을 갈망하는 자의 시대. _본문 538쪽
봄베이는 이야기 바다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꾼이었고 모두가 한꺼번에 지껄였다. _본문 547쪽
봄베이를 미화하는 이들이여, 봄베이가 아름다운 까닭은 이 도시가 누구의 것도 아니며 또한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는가? 저 혼잡한 길거리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공존의 기적을 정녕 못 보셨는가? _본문 548쪽
폭력은 폭력, 살인은 살인, 두 가지 불의를 합쳐봤자 정의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진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적의 수준으로 떨어진 사람은 정당성을 잃기 마련이다. _본문 571쪽
우리는 폭파범인 동시에 폭탄이었다. 폭발한 것은 우리가 지닌 악이었으니-물론 예나 지금이나 우리 내부뿐 아니라 경계선 너머에도 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굳이 바깥에서 원인을 찾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 두 다리를 잘라버렸다. 몰락을 자초했다. 그리하여 이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너무 나약해서, 너무 부패해서, 너무 하찮아서, 너무 한심해서-지키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다. _본문 584쪽
우리의 마음속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렇듯 두 양면은 늘 티격태격 싸운다. 악이 승리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선을 더 사랑했다고-진심으로-말할 수 있다. _본문 589쪽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과거나 미래 속에서 보내거든요. _본문 594쪽
실패한 사랑도 소중하니까,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작은 승리조차 맛보지 못하니까. _본문 659쪽
우리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일말의 빛, 일말의 가능성은 있으니까. 그 빛, 그리고 상반되는 어둠. 누구나 그렇게 시작한다. 두 세력은 우리의 삶을 소모하며 맹렬히 싸우고, 운이 좋으면 무승부로 끝난다. _본문 6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