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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예술 현상학 : 살, 집, 우주
1. 예술 현상학
인간은 세상과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고 감각하는가? 인간이 세계-내-존재로써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고 만나며 소통하는 방식은 어떻게 특별한가? 무엇보다도 인간이 예술 작품을 또는 미적 대상을 지각하는 것은 다른 존재와 사물들을 지각하는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관점인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또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위항 속에서 바라 본다면, 그들 중 한가지를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되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대위항들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 말하자면,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변증법적 지양에 대해 ― 프랑스의 현대 철학은 계승과 극복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한 시도들 중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현상학적 철학의 관점은 계승보다는 극복의 노력으로 읽어야겠는데, 그 노력들은 다양한 철학적 주장들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아마도 그것들은 메를로-뽕띠에서 출발해서 데리다나 푸코, 그리고 이 글에서 살펴볼 들뢰즈에 이르기까지도 끊이지 않고 내재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들일 것이다.
메를로-뽕띠의 시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헤겔(적 의미에서)의 '즉자'/'대자'와 같은 구분을 거부하며, 또한 그 양자의 종합이라는 것에서도 해결책을 구하지 않는, 그 '둘 사이'에서 '유한한' 말하자면 미완성되고 불안정한 종합 속에서 추구1)하는 것이다. 그런 유한하고 불안정한 종합, 사물과 의식 또는 자연과 의식 사이의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메를로-뽕띠는 그 양자 사이의 매개를 인간(의식적 존재)의 육체로 본다는 점에서 이전의 데카르트적 전통에 놓인 주체(객체 또는 타자의 반대항) 중심의, 영혼(육체의 반대항) 중심의 철학들과는 확고히 구별된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를 다시 어떤 우월항에 놓는 것이 아니라, '지각하는 자아'와 '사유하는 자아'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며, 나아가 "나는 지각한다"가 "나는 생각한다"의 토대로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2)
우리는 들뢰즈의 미학 이론에서 위와 같은 현상학적인 단초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들은 대체로 건축학적인 ―그러나 그 자체에서 어떤 개념으로의 환원으로 나아가지는 않는 ― 구성으로, 각기 독립적이면서 긴밀히 연결되고 중복되며, 포함하고 초월하는 유기체적인 구성으로 나타난다. 살, 집, 우주라는 그의 독특한 개념들은 앞서 살펴본 현상학적인 토대 위에서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구축되고 더불어 상호보완의 역할들을 떠맡게 된다. 들뢰즈는, "논리학이 과학을 필요로 하듯, 현상학은 예술을 필요로 한다."3)고 한다. 예술은 현상학에서의 원초적 견해들이 가변적인 경험(사적 체험)을 넘어서기 위한, 진리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이, 견해가 원초적인 한계 안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현상학은 "예술의 현상학"({철학}, 256)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감각
들뢰즈는 예술을 철학이나 과학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범주의 지위에 올려 놓고 그들 사이의 상호연관성, 독립적 역할과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철학이 개념의 존재들을 통한 변주들 variations이고, 과학이 기능(함수)의 존재들을 통한 변수들 variables이라면, 예술은 감각의 존재들을 통한 다양성들 varieties이 된다. 사용된 유사한 용어들(변주, 변수, 다양성)은 이전의 그것과 어떤 다른 것을 창조해내며,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예술에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감각의 존재이다. 그런 감각의 존재들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할 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으로서 열려있는, 사유와 존재의 바탕과 같은 것이다.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음이다. 나는 감각 속에서 되어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하여, 하나가 다른 것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은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 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이다.4)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감각한다는 것이다. 신체로서의 주체가 사유로서의 주체에 선행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그렇다. 세계의 감각은 나의 신체에 대한 감각이며, 나에게 주어지는 세계는 바로 나이다. 내가 세계의 주체이고 세계의 대상인 동시의 순간이 지각의 순간인 것이다. 주체도 대상도 구분되지 않는 신체들, 감각에 의해 서로 하나가 또는 다른 것이 되어지는 모순으로서의 신체들 : 차이나 동일성의 구분으로 환원되지 않을 존재들. 그 신체들은 어떻게 감각을 소유하는가? 들뢰즈가 보기에는 감각은 다른데 있지 않다.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롭거나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체 속에 있다. 비록 그 신체가 사과의 신체가 할지라도 상관없다. 색은 신체 속에 있고 감각은 신체 속에 있다.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려지는 것은 감각이다. 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되어진 신체이다.5)
세계가 저 홀로 감각은 될 수 없다. 감각은 신체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오로지 우리의 신체만이 아니라 세계의 신체, 사물의 신체와 동시에 가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은 세계/사물이 신체에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세계와 우리의 신체가 함께 ― 우리가 세계를 체험함으로써 ―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은 예술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에게서는 더욱 더 원초적인, 나아가 초월적(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닌)인 개념으로 나타난다. 들뢰즈는, "감각은 원초적 견해, 즉 세계의 기초 혹은 확고부동의 토대인 원적견해(Urdoxa)로 동화될 수 있는가?"({철학}, 256)라고 질문을 함으로써, 일종의 현상학적인 문제설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3. 살, 집, 우주
i) 살(la chair/the flesh) :
우리의 육체가 무언가(어떤 사물이나 세계)를 지각한다 또는 경험한다고 할 때, 우리의 육체가 느끼고 겪게 되는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 외부의 사물/세계의 존재를 느낀 것인가, 아니면 단지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한 감각의 존재를 느낀 것일 뿐인가? 우리의 경험과 지각이 있기 위해서는 분명 두 가지 모두가 존재해야 할 것이지만, 세계와 우리의 육체가 어떻게 작용하며 지탱해 나가고 있는지는 (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는 불충분하다. 데카르트에게서는, 주체가 이미 대상에 대한 코기토를 작동시키고 있기에 모든 공간 내부의 사물들은 주체를 중심으로 수없는 연장선들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세계는 나로부터...). 이것은 우연히도 르네상스 시기의 원근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외부의 공간은 원근법이 해결하는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메를로-뽕띠가 볼 때, 공간이라는 것이 그것을 "위로부터" 내려다 보려고 하는 우리의 기도를 회피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6)
그렇다면, 우리의 육체는 어떻게 세계를 지각 또는 감각하는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의 육체와 세계의 접촉을 통해서 지각이 이루어 진다면, 우리의 육체와 세계가 만나게 되는 장소는 어디인가? 이는 앞서 살펴본 '감각'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그러한 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각과 정서의 집적인 감각의 존재는 느끼고 느껴짐의 일체성 혹은 그 불가역성으로, 말하자면 꽉 마주잡은 두 손과 같이 그들 간의 긴밀한 얽혀짐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곧 체험된 육체로부터, 지각된 세계로부터, 여전히 경험에 지나치게 얽매어 있는 상호간의 지향성으로부터 동시에 자유로워지게 될 살이다.({철학}, 257)
우리의 (사실 우리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감각의 존재는,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의 하나됨이라는, 주체와 대상 양자를 동시에 벗어나면서 모두가 접촉되는 '살'이다. 육체의 살은 들뢰즈가 박피된 짐승이나 껍질이 벗겨진 과일의 표상을 예를 통해 살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같이, 내면이 없는 것이다. 곧 자아라고 하는 존재의 내면은 사실 없는 것이며, 인간의 신체가 존재하는 것은 위에서와 같은 살들(세계의 살과 육체의 살)의 겹쳐짐 또는 격렬한 포옹, 꽉 마주잡은 두 손과도 같은 상호교접의 상태를 통해서 일종의 섬광7)의 번쩍임으로 존재하게 된다.
ii) 집(house), 골조물(framework) :
그러나, 살은 예술에 있어서 그것만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의 형상(figure)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회화에서 하나의 형상과 그 형상의 장소가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에도 그것을 흘러내리지 않고 고정시키도록 하는 또 다른 힘이 필요하다. 살이 우리의 감각의 발현에 관여할지라도, 살은 감각이 아닌 것이다({철학}, 258).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인물(형상)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를 가두거나, 붙여놓는 어떤 장소로서의 원형경기장, 혹은 동그라미, 트랙, 유리나 거울로 만든 평행육면체, 이상한 모양들이 결합된 안락의자는 바로 그러한 또 다른 힘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들이 바로 장소이며, 이 장소들은 형상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놓지는 않으며, 오히려 형상이 장소나 자기 자신에 대해 하고 있는 일종의 모색과 탐험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8) 그렇게 해서 형상과 장소는 서로를 격리하고 고립시키면서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이미지 또는 이콘이 되는 것이다.
세잔이 인상주의자들의 색채의 광학적 혼합으로서 표현된 사물의 아른거림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그림에서 추구하고자한 사물의 견고함, 지속성, 영원성은 바로 들뢰즈가 '집' 또는 '골조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육체는 집 안에서 활짝 열린다(집과 등가인 샘 혹은 숲). 그런데 집을 정의[규정]하는 것은 '면들', 말하자면 앞면과 뒷면, 수평, 수직, 왼쪽과 오른쪽 면들, 수직과 경사면들, 직각면 혹은 곡면들……과 같이 살에다가 그의 골격을 부여하는, 여러 방향으로 향해진 면들의 조각들이다. […] 이는 정확하게 감각에다가 제 스스로 자율적인 틀들 안에서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들이다.({철학}, 258-9)
집을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그 틀 안에서 비로소 존재가 홀로 서며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이 예술이기 위해서 창조되고 존재하게 되는 바인 감각의 집적은 부단한 노력과 지속을 위한 질료의 형상화 작업이 동반된다. 질료는 아직 감각의 존재가 아니며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없다. 개인이 가진 그만의 체험(경험)과 무수한 기억, 아직 구조화되어지지 못한 우물거림은 예술이 아니다. 자전적 요소들이 그 자체만으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착각일 뿐인 것이다. 들뢰즈가 "예술은 살과 더불어가 아니라 집과 더불어 시작된다."({철학}, 270)라고 할 때에는 분명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화가들이 색채와 구도에 대해서 가지는 경외심과 존경심은 결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색의 체제와 구도의 구축이 바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집'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동양에서 말하듯이, 한 분야에서 대가(大家)가 되었다라든가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스타일(style) 또는 비젼(vision)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체험된 지각작용을 지각으로, 체험된 감정들을 정서로 고양시키기 위해 언제나 필요한 작가의 문장, 음악가의 음계들과 박자들, 화가의 필치와 색채들과 같은 스타일"({철학}, 244).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기호들의 유출과 시간의 생성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해 낸다. 그곳에서 들뢰즈는 예술의 기호가 다른 기호들에 비해 가진 우월함을 설명하면서 본질(혹은 이데아)이 어떻게 예술 작품에서 육화하는지를 스타일의 문제를 통해 보여준다:
예술은 질료의 진정한 변환이다. 본질, 다시 말해 근원적인 세계의 성질을 굴절시키기 위해, 예술 속에서 질료는 정신화spiritualiser되고 물리적 환경들은 비물질화d mat rialiser된다. 그리고 물질을 이렇게 다루는 일은 오로지 스타일을 통해 이루어진다.9)
예술이 아니었더라면 언제까지고 각자의 비밀로만 남아있게 되었을 '차이diff rence', 즉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속에 들어 있는 질적인 차이 ― 이것이 바로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가 허구화, 비물질화 또는 형상화라는 질료들의 변환을 통하여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타자의 영역, 즉 타자의 눈에 비친 풍경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장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즉,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10) 우리가 타자로 생성되어 가며 인간 이전의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오로지 예술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아직 살로 존재하는 것들은 마치 날 것의 고깃덩이와도 같은 알려지지 않은, 보여지지 않은 힘들이다. 살이라고 하는 원초적, 야생적(카오스적) 형상들을 일으켜 세우고 골격을 부여함으로써 그 자체로 무언가로 생성, 구축되도록 하는 '집'은 따라서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명명하고 겨우 존재하는 것들을 굳건히 존재하게 한다. 들뢰즈는, "예술은 살과 더불어가 아니라 집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래서 건축은 예술의 으뜸"({철학}, 270)이라고 한다.
iii) 세계(the universe), 우주(the cosmos) :
살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도록 집과 골조물로 지탱되지만, 집은 또한 우주를 향해 나아간다. 감각 존재는 살과도 같이 흐물거리는 인식 관계 속에서의 형상이 아니라 집의 거주자, 한 영토의 거주자로 생성되지만, 또한 그 집의 영토 내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다시 혼돈의 영역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더욱 아니다. 집은 우주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세계-우주는 살이 아니다. 모든 구도들이 무한으로 이어진다면 우주가 구축될 수도 있겠지만, 우주는 면들이 아니며, 서로 결합되어 다양하게 방향 지워진 구도들의 일부도 아니다. 우주는 단색조의 균일함, 위대한 하나의 구도, 채색된 공백, 단채색적 무한으로 표상된다.({철학}, 260)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의 집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우주를 창조해낸다. 카오스로부터 하나의 구도를 구축하여 내는데, 그 구도가 감각을 억누르거나 고립시키는 것에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한으로 확장시키고 연장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이며, 우주이다. 또한 그것이 예술이 나아갈 바, 또는 예술의 본성인 것이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단채색의 한결같은 색조(아플라aplat)는 어떠한 형상도 아니며, 단지 형상의 배경도 아니다. 마치 배경처럼 존재하지만 그것은 배경 이상의 것이며 형상을 초월하여 무한으로 나아가게 하는 순수한 색채의 긴장된 힘이다. 단채색의 비표상이 우리를 무한의 구도, 우주적 무한성으로 우리를 이끌고 나아가는 셈이다.
살은, 아니 차라리 형상은 이제 더는 한 장소나 집의 거주자가 아니라, 집(생성)을 떠받치는 우주의 거주자이다. 그것은 유한으로부터 무한으로의, 그리고 영토로부터 탈영토화로의 이행과 같다. 바로 그것이 실로 무한의 순간이며 끝없이 다양한 무한함들이다.({철학}, 260-1)
살이 또는 감각의 원초적 존재가 집의 거주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는 앞서 본 것처럼 집은 하나의 구도로서 무한, 또는 혼돈으로서의 살을 제한하고 속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리적 인과관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집과 함께 우주는 동시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예술은 본성상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뿌리치며 한 발 앞서 나가 있는 것이므로, 어느새 하나의 구축은 동시에 새로운 무한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이 예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4. 영토화와 탈영토화
들뢰즈는 차이의 철학자로서 해체론의 데리다와 유사한 점을 많이 가진 철학자이다. 그들은 헤겔의 변증법에서와 같이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동일성의 단순한 반대항으로 또는 동일성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차이와, 타자와, 육체와 같은 비변증법적 담론들로 자신의 철학을 구성해 나간다. 하지만, 데리다가 형이상학에 대항하여 바로 그 형이상학의 담론 내부에서 형이상학의 개념들로 집요한 투쟁들을 해나가고 있다면, 들뢰즈는 형이상학의 내부에서 텍스트들을 통해 죽지 않을 형이상학과 싸우기보다는 또 하나의 대안적인 세계를 창조해내는(창조적 허구로서의 집짓기?) 점이 다르다.
이와 같이 들뢰즈가 데리다의 해체론과 비교해서 낙관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비판이 차이의 긍정, 부정에 대한 진정한 긍정, 부정을 해방시키는 긍정을 배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데리다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들뢰즈는 푸코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론적 실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 "... 우리는 한 이론을 고치기보다는 새로운 이론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11) 이것은 들뢰즈에게 있어서 사유가 가지는 실천으로서의 창조적 성격을 보여주는 말이다. 들뢰즈의 이론적 실천은 한마디로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동시 작업이다. 이는 바로 예술의 영역에서 보이는 특성이기도 한 것이다.
지각과 정서들로 이루어진 구성적 감각은 자연적이고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어떤 환경 내에서의 지배적인 지각작용들과 감정들을 집결시키는 견해체계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구성된 감각은 구성의 구도상에서 재영토화한다. [……] 이와 동시에 구성의 구도는 감각들을 무한한 우주를 향해 열리고 트이게 하는 일종의 틀 벗어나기를 감행함으로써, 그것을 보다 높은 차원의 탈영토화로 이끈다.({철학}, 284-5)
우리가 앞서 살, 집, 우주라는 개념들을 지나쳐 오는 동안 이같은 작업들이 텍스트의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우리가 예술 현상학으로서 들뢰즈의 사유를 바라보고자 할 때 나타나는 것들이며, 들뢰즈가 그의 전 이론적 실천(철학) 속에서 추구하는 개념들의 구도와 분배의 방법인 일종의 사유의 이미지 또는 내재성의 구도와 같은 것들이다. 카오스의 블랙홀과도 같은 불안정성, 순간적 시/공간에 현실화하여 매몰되거나 와해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집을 지어야 할 것이고, 또 집의 견고함 내에서 안주하지 않으며 우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술의 현상학으로 볼 때 들뢰즈가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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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incent Descombes, {동일자와 타자}, 인간사랑, 1990, 74쪽.
2) 바로 이것이 현대 철학이 그토록 열망했던 (추상으로의 상승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으로의 귀환인 것이다. {동일자와 타자}, 82쪽 참고.
3) Gilles Deleuze․F lix Guattari,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213쪽.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철학}이라 약하고, 쪽수만 표기함.
4) Gilles Deleuze, {감각의 논리(Logique de la sensation)}, 민음사, 1995, 63쪽.
5) {감각의 논리}, 63-4쪽.
6) M. Merleau-Ponty, [눈과 마음], {현상학과 예술}, 서광사, 1983, 313쪽.
7) [눈과 마음], 293쪽.
8) {감각의 논리(Logique de la sensation)}, 3-6쪽.
9) Gilles Deleuze,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1997, 80쪽. 역자는 style을 문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들뢰즈는 문학에서의 style만을 말하고 있지0 않으므로 여기서는 그대로 스타일이라고 옮기기로 한다.
10) {프루스트와 기호들}, 73쪽 참고. 이 구절은 프루스트의 {되찾은 시간}에서 들뢰즈가 인용하는 부분이다.
11) Ronald Bogue, {들뢰즈와 가타리}, 새길, 1995, 255쪽, 들뢰즈와 푸코의 [지식인과 권력], {언어, 반-기억, 실천}에서 재인용.
역자 서문: 라이프니츠를 위한 변명
* The Fold: Leibniz and the Baroque/ Gilles Deleuze
: foreword and tr. by Tom Conley, Univ. of Minnesota Pr., 1993.
(ix-1) 중세 시대 절정기(High Middle Ages)의 미적 역사(esthetic history)인, {서구의 예술(The Art of the West)}이라는 제목을 갖게될 것이었던 것을 끝마친 직후에, 앙리 포시용(Henri Focillon)은 {형태들의 삶(Vie des formes)}에서 자신의 그 연구의 경험을 이론화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출현에 대해 숙고하는 가운데, 포시용은 중세 시대와 구체제(ancien regime)에 대한 모든 역사가들이 접하는 딜레마에 직면한다. 양식들은 어떻게 발전하며, 왜 그렇게 현저하게 다른가? 양식들은 서로서로 뒤를 잇는가 아니면 관련된 특질들(pertinent traits)을 공유하는가? 미적 양식들은, 넓은 의미로, 특수한 "사고 방식들"의 개념을 전달하는가? 양식들은 시기구분이 가능하며, 만일 그렇다면, 양식들을 또한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 역사적 도식들을 배반하는 이데올로기적 동기들은 무엇인가?
(ix-2)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의 문학적․미적 역사의 맥락에서, 포시용은 생뜨-뵈브(Sainte-Beuve)와 오귀스뜨 꽁뜨(Auguste Comte)로 소급하는 미적․문학적 식물학(botany)의 전통들로부터 벗어난다. 그들에게 있어서, 도표, 범주, 계보학적 수형도, 그리고 문(phyla)의 선들은 거대한 기억술(mnemonic) 체계들을 상세히 지도 위에 배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국가가 그것의 세습재산(patrimony)을 구축할 방법들을 조만간 프로그램할 것이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학생들은 영원히 격자(grid)들을 되부르며 그것들을 적합한 사실들과 특질들로 채우고, 그리하여 지식의 도식들에 의해 "견문을 넓히(informed)"려 했다. 이와는 반대로, 포시용은 두 가지 지배적이고 대조적인 양식인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종종 서로를 굴절시킨다는 점에 주목한다. 두 양식들은 교차하고, 때로는 아주 다른 감성들(sensibilities)을 서로에게 접어 넣는다. 역사가는 두 세계가 서로 어떻게 다른 속도로 작용을 미치며, 또한 그것들이 어떻게 유럽 대륙의 표면 위에서 다양한 궤도들을 그리는지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ix-3) {형태들의 삶}에서, 포시용은 20세기로 전해졌던 진화의 논리를 재고했다. 한편으로, 탐구, 관찰 그리고 역사화의 현저하게 굳건한 전통은 실증주의와 더불어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19세기의 진정으로 창의적인 실증주의자들 ― 발작, 위고, 프루스트 ― 은 [작품들의] 규모(mass), 단편적인 총체성, 변화 효과가 그들의 과학적 상응자들[과학실증주의자들]이 발명했던 도표화된 대칭들을 배격하는 작품들을 구축했다. 포시용에게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의 역사는 전면적인 효과에 있어서 19세기 문학의 대가들의 시나 소설들만큼이나 규모가 큰(massive) 것으로 보였다.
(x-1) 어떤 점에서, 포시용의 중세에 대한 개괄(overview)은 기술사(technical history)와 유기 화학의 혼합과 유사하다. 형태들은 물러섰다가 나아가며, 사라지고, 소생하며, 또는 중첩되거나 상호연결될 때에는 새로운 모양들을 낳는다. Vezelay에 있는 로마네스크적 농부들이 엄청나게 놀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충격을 응시하고 있었던 곳에서, 랭스(Reims)의 고딕적 처녀는 참으로 "미소짓는다". 두 양식들은 모두 바로크 단계를 겪는다. tympana와 capital 위의 로마네스크적 건물들과 조각들은, 그것들이 엄숙한 분위기와 더불어, 범주의 기술(descriptives)이 나중의 시기에 속하는 범주들에 의해 가장 잘 식별될 수 있는 자질들을 공유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15세기의 플랑부아양[화염](flamboyant) 문양에 있어서 "비현실성(irreality)"의 짜여진 효과들은 ogive를 감행한 전체 역사를 서술하며, 문화 일반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x-2) 관찰로부터 얻은 이론을 통해, {형태들의 삶}에서 포시용은 [역사의] 시대 구분(periodization)의 이론적 근거(rationale)를 문제 삼는다. 생물학으로부터 차용한 형상들(figures)로 그는 실증주의적 선조(forebears)의 많은 도식적 선들을 구부린다. 동시에, 중세 전체를 가로지르는 운동에 대한 의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뵈링거(Wilhelm Worringer)의 "고딕"적인 것의 개념을 채택하면서, 포시용은 1-2차 세계 대전 간에 프랑스와 독일 문화 사이에 존재한 격차를 공격한다. 그는 다른 속도로 가는(different paced) 그러나 혼합하는(intermingling) 국면들로 구성된 예술사에 대해 쓰고 있다. "실험적인" 시작은, "고전적인" 계기가 발견하고 개발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다. "발산하는(radiating)"(rayonnant) 시기는 전자의 해결책을 까다로움(preciosity)의 정도까지 세련화시킨다. 반면에, "바로크적" 국면은 동시에 다른 모든 국면들의 공식들을 총괄하고, 항변하고, 왜곡하며, 서술한다.
(x-3) 따라서 바로크는 우리가 베르니니(Bernini), 보로미니(Borromini), 또는 르 브륀(Le Brun)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로크적 상태[국가?](state)는 가장 분화된 환경들과 시기들 내에서 상수들(constants)로 존재하는 동일한 특질들을 드러낸다. 고전주의가 지중해 문화의 유일한 특권이 아니었던 것처럼, 바로크도 지난 3세기의 유럽을 위해 배타적으로 확보되지 않았다." "바로크"는 예술의 새로워진 기원들로부터 온 수사어구(trope)를 가리키며, 문화 일반 내에 만연한 양식적인 증거를 지니고 있다. 신비적인 경험의 확산, 소설의 탄생, 자라나고 움트는 삶에 대한 강렬한 취미, 그리고 운동(movement)의 무한하게 다양화된 패턴들의 허약함(fragility)이 그 항목["바로크"] 아래에 놓여 있다. 해안선의 확장을 따라 그려진 펼쳐내는(unfolding) 선을 따라 파도가 부서질 때; 대리석의 표면에서 그리고 무한한 깊이에서 움직이는 색채의 말림(curls)과 다발(wisps)을 따라서; 또는 프루스트가 묘사했듯이, 차 한잔의 깊이인 호박의 함몰부에 채워진 나뭇잎의 분기하고 넓혀진 가지들을 따를 때, 그것은 우리가 파도가 들어 올려지고 무너지며 분화되는 것을 보는 경험을 한 오래된(protracted) 매혹 속에 위치할지도 모른다.
(xi-1) 질 들뢰즈는 그의 현란한 라이프니츠 독해에서 이러한 것과 동일한 감각들(sensations)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름}은, 포시용에 의해 가장 넓고 영향력있는 방식으로 이해되었듯이, 다른 역사들, 문화들, 지식 세계들을 통해 방사하는 바로크를 통하여, 그 프랑스-독일 철학자의 부활을 간접적으로 말한다. 들뢰즈의 작업은 아마도, 주름이라는 특수한 형상 속에서, 예술사, 과학, 의상, 수학, 서정시, 그리고 철학을 통해 바로크를 이해하려고 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대담한 모험일 것이다. {주름}은 또한 들뢰즈의 모든 저작들 중 가장 개인적이고 감각적(sensuous)이며 독창적인 것으로 우뚝 설 것이다. 동시에 {주름}의 광범위한 폭은 또한 독자들을 어렵고 불명료하게 괴롭힐 것이다. 첫눈에는 그 책이 붙임성이 있다(disarming). 암묵적인 독자는, 저자가 원자 이론, 미분학, 고전 및 동시대 회화와 음악, 그리고 논리의 역사에 친밀한 것만큼 친밀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들뢰즈가 제공하는 즐거움은 그가 독자에게 투자하는 확신과 더불어 온다: 그 저작은 마치 대도시를 내려다보는 2층 내지 3층의 작은 아파트 창문 옆의 소파에 편안히 쉬면서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구성되었다. 들뢰즈는 미분학, 생물학적․프랙탈 모델에서의 놀랍도록 어려운 방적식, 삐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의 음악 공연, 미적 역사를 수수하게 말한다. 그 책의 어조는 동시에 그것이 우리의 육체적[물질적](physical) 세계의 짜임(texture)에 관해 물려받은 가장 낡아빠진 믿음들의 일부를 ― 젠체하거나 호언장담 없이 ― 벗겨낸다고 우쭐댄다. 이 서문의 나머지에서, 나는 들뢰즈가 라이프니츠를 통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 그리고 그 철학자[라이프니츠]에 대한 그의 우호가 우리가 동시대의 쟁점들에 관해 분별하는 것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건드려 볼 것이다.
(xi-2) 파인 아츠(fine arts), 미적 역사, 그리고 음악 내에서 바로크가 거부된 용어가 되어온 동안, 바로크는 그것의 원리들을 구체화하고 이론화하기에 충분히 적합하거나 복잡한 철학이나 철학자와 관련되지 않았었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들뢰즈에게, 라이프니츠는 바로크의 바로 그 철학자로 나타난다. 라이프니츠는 과학과 수학에 관한 그의 연구의 총체(ensemble), 또는 모순, 믿음, 음악, 그리고 신학에 관한 그의 논문들이 20세기말에 우리가 세계에 관해 아는 것을 설명하는 것을 ― 또는 펼쳐내는 것을 ― 도울 정도로 동시대적이다.
(xi-3) 바로크의 경험은 접힘(fold)의 경험을 초래한다. 라이프니츠는 가장 최초의 위대한 주름(pleat)의, 곡선과 뒤틀린 면(twisting surface)의 철학자․수학자이다. 그는 "관점(point of view)"의, 원근법(perspective)의, 원뿔 기하학의, 도시 계획의 현상들을 재고한다. 접혀진 사물들의 범주에는 주름진 휘장(draperies), 치렁치렁 땋은 머리(tresses), 무늬를 맞춰 짠 직물(tesselated fabrics), 잘 꾸민 의상들; 태아[배아] 내에서 펼쳐지고 죽을 때 그들 자신을 주름지게 하는 신체의 피부 표면; 질서 속에 떠있는 동안, 보다 높고 낮은 수준들을 함께 구부리는 가내 건축; 그들의 내러티브를 함입하거나(invaginate) 연속적인(serial) 형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는 소설들; 광범하게 다른 리듬과 템포를 조화롭게 편성하는(orchestrate) 화성들?(harmonics); 겹침들?(foldings)로 파악된 육체적 수단을 통해 ― 우인론(偶因論, occasionalism)이나 병행론(parallelism)에 의지하지 않고 ― 정신과 신체의 데카르트적 구분을 해소하는 철학들; 직물의 잔물결(ruffles)과 큰물결(billows) 속에 형상들을 날카롭게 숨기는, 또는 눈으로 하여금 공간과 표면의 다른 질서를 혼동하게 하는 회화의 양식과 도상들이 포함된다.
(xii-1) 이제 {서구의 예술}에서 포시용은 "바로크 고딕"의 시대는 신비적인 경험의 탄생을 목격했음을 주목한다. 다른 사상가들이 보다 상세하게 보여주었듯이,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보편적인 사건(event) ― 신체를 황홀경에 빠지게 하고, 개인(individual)의 여행 이야기(tale of passage)를 확실히 하는 표시, 상처, 또는 다른 육체적 증거를 남긴 사건 ― 에로 그리고 [사건]으로부터 그 또는 그녀의 여행에 대한 개인의 고려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신비적인 모험은, 어떠한 언어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표상하도록 말해질 수 없기 때문에, 납득되어진다(convinces??). 그것은 부분적으로, 라이프니츠, 앙리 미쇼(Henri Michaux), 가에또 끌레르빠(Gaetau Clerpart)에 의하여, 들뢰즈가 사건이라고 부름직한 것에 상응한다: 그것은 경험적 혹은 역사적 바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총체화와 분산의 육체의(somatic) 순간의 가상의(virtual) 감각이 되는 일이 생긴다. 소설이나 시에 있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현(epiphany)의 연속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것의 과학적 유비는, 모든 가시적 대상들이 무한한 수의 원자들과 분자들의 움직이는 집적물이 되는 세계관에 부속되는 무한성의 사고(thoughts of infinity)를 포함할지도 모른다. 라이프니츠에 의해 영감을 받은 철학자인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비젼에서, 사건은 피라미드의 장소, 눈사태, 또는 얼음 덩어리에서 갈라진 틈새의 들쭉날쭉한 끝날을 만들어내는 지속(duration)에서 보여질 수 있다. 들뢰즈에게서, 사건은 부채(fan)가 대기를 휘저을 때 단어(사건event)와 대상(부채eventail)을 통일시키고 분산시키는 ― 말라르메(Mallarme)가 그의 기념 시구(occasional verse)에서 묘사하는 종류의 ― 부채의 지속과 우리의 지각의 통일(union)로부터 펼쳐진다.
(xii-2) 이러한 감각의 순화된(rarefied) 영역은 바로크의 신비적이고 수학적인 차원을 구성한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가 사건들의 경험과 원자 동역학의 세계를 다룰 수 있는 최초의 철학자로 우뚝 선다고 선언한다. 들뢰즈 그 자신은, {주름}의 많은 부분이 ― 특히 충분한 이성, incompossibility, 지각, 공간의 배분에서부터 발전하는 논증에서 (4장에서 8장까지에서) ― 라이프니츠와의 절대적 동일성(identity)을 통해 발전하는 한에 있어서는 신비적으로 보인다. 독자는 {인간 오성에 관한 새로운 연구(New Essays on Human Understanding)}의 운동이나 아르노(Arnauld)와의 서신교환과 섞이는 간접적인 담론을 자주 주목한다. 동시대의 어떤 경험보다 더 잘 번역하는 목소리를 지닌 들뢰즈는 계몽 시대의 문턱에 있는 프랑스-독일 철학자의 목소리와 조화된다. {주름}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크 가정집(1장의 그림1)의 친밀함 속에서 들뢰즈의 말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삶의 지평에서 철학적․윤리적 딜레마를 지각한다.
(xii-3) 라이프니츠의 환생(reincarnation)은 힘(force)의 패턴을 따른다. 들뢰즈는 현재의 정치적․윤리적 쟁점들에 직면하기 위해 ― 항상 가장 유명하지는 않은 ― 과거의 철학자들과 자주 동일시 해왔다. 그가 1960년대 초에 니체에 관해 글을 썼을 때, 들뢰즈는 니체였다: 그는 실존주의와 혼합하여, 문화의 식민적 역사의 효과와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는 문화의 가치전도(transvaluation)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나서, 지식인들이 집단적으로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장했을 때, 그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이 동시에 되었다. 철학적 글쓰기의 규범을 확장하고 변형시키기 위해서, 그는 카프카, 멜빌(Melvile), 그리고 후에는 프란시스 베이컨에 관하여 글을 썼다. 그럼에도 라이프니츠는 들뢰즈의 모든 저작에서 항상 강력한 힘이 되어왔고, 이 철학자[들뢰즈?]의 이력의 그 단계에서 {주름}은 전혀 놀라움 없다. 초기 저작들(특히 {의미의 논리})은 라이프니츠을 존경하는 언급들을 자주 하거나, 구체제의 과학적 이론의 복합성을 떠올리기 위해 단자론(Monadolgie)을 사용하지만, 그것들은 라이프니츠의 용법(signature)과 동일한 것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xiii-1) 프랑스 지성사의 진부한 문구[자명한 이치](truism)는 국가적․철학적 이유로 모든 전후 사상가들 ― 쟝 이뽈리트에서 쟈끄 데리다까지 ― 은 헤겔과 싸워야만 한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그 자신을 데카르트적 그리고 좌익 정치적 전통과 동시에 제휴함으로써, 변증법의 총체화하는 효과(totalizing effects)에 저항해왔었다. 그는 스피노자의 방법으로, 더욱 복합적이고(complex) 파편화되며(fragmented) 다채로운(prismatic) 철학이 어떻게 헤겔에 앞섰으며(antedated) 체계적인 변증법에 의해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조처들을 취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라이프니츠에 관한 연구는, 과도하게 정교한 개념의 섬세한 세공(filigree)이 유기적․비유기적인 세계를 통해 구부러지면서(winding) 만회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또한 거주(habitat)와 생태학(ecology)의 철학자이다. 그의 무수한 연결(connection)들과 개념들의 연쇄(series)는 규정된 질서나 통일시키는 체계 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굴절(inflection)의 다수성(multiplicity)과 다양성(variety)은 "화성[조화]들(harmonics)이나 약수들(submultiples)의 무한함으로", "사건들(events)" 또는 진동들(vibrations)을 산출한다. 물질적[육체적]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인상에 관계하는 개념의 운동은, 철학에 속하는 나선상의 평면[구도](plan)에 따라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이나 소리의 운동 모두를 감돌며 너울거리는 공기같은(ethereal) 질료의 접힘(folds)으로 상상할 수 있듯이, 경험의 지형 내의 모든 곳에서 발산하고 분기한다.
(xiii-2) 세계에 대한 절묘하게 감각적인(sensuous) 관점은 라이프니츠가 미적분학으로 창조한 구부러진 모양들(curved shapes)을 통해, 그리고 현대 예술과 시에서 우리가 따르는 접힘의 표명들로부터 획득된다. 들뢰즈는, 만일 철학사의 연대기가 고딕 시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발전된 일종의 진동들과 사건들 위에 배치된다면, 뭔가 잘못되는(go awry) 것임을 암시한다. 라이프니츠는 수학, 인지, 또는 논리의 역사에 있어서 단순히 한 장(chapter)에 불과하지는 않다. 유목민적 사고(nomadic thinking)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sense)의 관계는 가치 절하될 수 없다; 그의 추론(reasoning)의 운동은 과학 이론가들, 음악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지금 거주지(habitat)로 삼는 것과 많은 공통의 특질들을 공유한다.
(xiii-3) 들뢰즈는, 라이프니츠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네오-아인시타인적 사상가들 사이를 다리놓는 철학을 발전시킨다고 암시한다. 초기 저작({프루스트와 기호들})과 가장 최근의 저작(가따리와의 공저,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견지에서 보면, {주름}은 철학을 가설적(hypothetical) 경험의 생태학에 결합시킨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연구에서, 들뢰즈는 프푸스트의 사명(mission)이 플라톤적 라벨을 낳는다고 언급한다. 탐구(quest)는 예술을 복원하고(restore), 지속적(enduring)이며 되찾는(redemptive) 이념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가 되찾으려하는(seeks to redeem) 것은, "전체(whole)" 또는 "통일[성](unity)"을 구성하려는 모든 것을 흩뜨리는(scatter) 문체의 활동(stylistic practice)에 의해 내부로부터(from within) 의문투성이가 된다(riddled). 그럼에도 그 작업이 미완성으로 끝났기 때문에, "이런 다자(multiple piece)의 통일(the unity)인 전체성(a unity), 이런 다수성의 통일인 전체성, 이런 조각들의 총체로서의 전체성이 존재해야 한다." 부분을 나타내는 말(partitive)에 대한 들뢰즈의 강조는, 프루스트의 완전한[절대적인] 소설(total novel)의 거대한 기획이 어떻게 "원리로서 주어지지는 않겠지만, [텍스트적textual] 기계들과 그 분리된(detached) 부품들(pieces)의 작동, 기계들의 소통하지 않은 부분들(parts)의 작동으로부터 기인할 소통"(196)을 누설하는지(betray)를 보여준다. 이러한 관찰을 불러일으킨 이가 라이프니츠인데, 왜냐하면 "막힌 단위들 또는 소통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소통의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196) 17세기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소통의 한계에 주목하는 라이프니츠의 혁신 덕분에, 프루스트의 의도가 그의 효과 속에 접혀진(folded) 것처럼 주어는 술어 속에 봉인되었다(enveloped). 주어의 술어 속으로의 포함(inclusion)은 세계가 혼돈의 질서(chaotic cosmos) 혹은 카오스모스(chaosmos)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암시한다. 라이프니츠의 논리[학]를 통해, 들뢰즈는 논리적이지도 유기적(organic)이지도 않은 단위들(units)로 구성된 예술작품, "즉, 긴 통일성이나 조각난 전체성(totality)으로서의 부품들에 기반하지도 않으며; 논리적 전개나 유기적 진화의 과정 중에 있는 그 단위들에 의해 형성되거나 미리 형상화되지 않는"(191) 예술작품을 생각할 수 있다. 바로크적 국면에 대한 기술에서 생물학적이고 연속적인 형상들을 혼합하는 포시용의 "형태들의 삶"의 비전에서처럼, 혹은 프루스트의 의도를 누설하는 소설에서 부분적 사물들(partial things)의 현기증 나는 효과들에서처럼, 유기적․비유기적인 사물들의 위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생명(life)"은 그것이 또한 영속적으로 움직이거나, 변형하거나 한 조건에서 다른 조건으로 이주하고 있는 한, 무생물(brute matter)에로 투여된다.
(xiv-1) 불현듯, 원자 이론과 모나드[단자]의 이론의 관계를 통해, 생명의 위계들의 이데올로기가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그 때, 유기적․비유기적인 재료(materials)가 벽(wall)이 아니라 벡터의 방식으로 [미]분화된다(1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파악할(apprehend) 수 있는가에 관한 윤리적 문제가 계속해서 일어난다. 생기 없는(inert) 대상들 사이에서 승리의 주체로 우뚝 선 그 인간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인간이 그들이 "살아있는(living)" 또는 "생기 없는" 것이라 부르는 것을 선택하고 지칭할 수 있는지가 질문되어야 한다. 라이프니츠는 생태 과학을 덧붙인 윤리학을 향한다. 그의 선회에서, 들뢰즈는 질료(matter)의 추상적이고 동시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감각(sense)이 어떠한 사회적 실천의 난점(crux)에서도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xiv-2) {주름}의 함의를 따르는 보다 최근의 저작에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지리철학(geophilosophy)"의 방향으로 이동하려는 개념적 활동을 증진시킨다. 그것은 "절대적(absolute) 탈영토화"의 혁명을 초래한다. 저자들은, 철학이 국가 경계의 붕괴나 경제적 혹은 윤리적 세계의 다양성들로의 회귀를 옹호한다고 말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과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전망에 의해 박차가 가해진) 자유 민주주의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적어도 한 단계(stage)에서는 개념적 사고의 노동에 의해 원자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철학이 거주와 사고의 쟁점들을 언급할 때, 모나드적 감성의 사용에 의해 동인(agency)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xv-1)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탈영토화의 지리정치학(geopolitics)이 진전된다. 저자들은 사례(example)를 통해, 그리스 철학은 에게(Aegean) 반도에 도달하여 내재성(immanence)의 집합적 감각을 창시한 이주자들에게서 발생한 어떤 것이라는 점을 숙고한다. 율리시스 ―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 는 책략적인(ruseful) 평민, 도시적 공간에서 거주하며 그 자신의 소멸의 씨앗을 심는 개념적 과정을 일으킨 보통사람(everyman)이다. 그것[개념적 과정?]이 개념들을 commodify할 때, 마케팅은 철학을 흡수[접수](co-opt)하려고 한다. 탈영토화와 그것의 역인 재영토화는 단자론적 사고를 변위[치환](displacement)와 변형(transformation)의 예술로 함축적으로 묶는다. "이번에는, 막대기(stick)는 탈영토화된 나무 가지(branch)이다"(p. 66). 이런 관점으로부터 유기적․비유기적인 물질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리철학자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행위는 파도(wave) 위에서처럼, 세계의 표면 위에서 "미끄러진다". "파도타기 하는 사람(surfer)", 즉 지리철학자는 사나운 파도(turbulence)의 꼭대기를 따라, 마음과 정력과 물질을 포위하고 그것들을 대기 속으로 흩뜨리는 파도의 어깨 위에서 움직인다.
(xv-2) 지리철학의 정치학이 암시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가장 명확한 표명의 일부는 {주름}의 마지막에서 발견된다. 마지막 장에서,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새로운 조화[화성?](new harmony)"라는 개념을 바로크와 현대 음악(contemporary music)에 접목시킨다. 그러나, 그는 1장과 3장에서 공들였던 바로크 가정(Baroque home)에 대한 논의의 가닥을 끄집어낸다. 단자들의 안과 주위를 움직이는 음악적 파동들(waves)의 방사(radiation)로 인해, 세계는 "발산하는 계열들(divergent series)"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뭉치고 흩어진 물질의 주름들(pleats)과 주름들(creases)의 무한성을 닮았다. 갑자기, 라이프니츠의 공간 ― 그 속에서 단자는 우선, (실내 합주의 무대가 되곤 했던) 위쪽의 사적이고 친밀한 공간과, 그리고 나서 대중들이 순환하는 낮은 쪽의 공공의(public) 수준을 포함하는 두 "층(floors)"으로 구성되었다 ― 에 대한 비전을 정교하게 만들곤 하던 그 구분들(distinctions)이 더 이상 지지되지 않는다. 그 문장들(sentences)은 단자적인 조화[화성?]와 장식(decor)의 음악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그것들은 거주의 문제로 돌아선다.
(xv-3) 들뢰즈가 제시하는 마지막 질문은 세계에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포함한다. 시간과 공간의 압축(compression)이 "내부와 외부의 차이, 공공과 사적인 것의 차이"(p. 137)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수축하는 지구(shrinking globe)의 경험은 단자의 비전을 굴곡시킨다(inflect).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선상에 있는 현대(contemporary) 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은 단자론(monadology)을 유목론(nomadology)으로 변형시킨다. 그들은 통용되는 공간의 개념을 탈영토화시키는 이주(emigrant) 사상가들이다. 유기적이고 비유기적인 질료로부터 음조적 흐름과 유출(tonal flow and flux)로의 위치의 이동처럼, 천상의(ethereal) 그리고 사적인 공간의 질서로부터 우글거리는(teeming) 공적인 세계(또는 "어항(fishbowl)")에 걸친 운동은 지리철학이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를 가리킨다. 두 세계는 서로 접어 넣어야(fold into) 한다. 정치적인 함의는, (a) 유기적 형태들과 비유기적 형태들의 차이를 재고하고 (b) "낮은(lower)" 세계의 속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첫 번째 세계의 운동의 속도를 줄임으로써, 첫 번째 세계의 "위층(upper floor)"은 두 번째,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세계들과의 구분을 거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xvi-1) 라이프니츠는 역사가들이 구체제의 사회적 모순의 용어로 연구한 것과, 재료, 공간 그리고 시간을 "접고(folds) 펼치며(unfolds) 다시 접는(refolds)" 행위를 중재하였다. 동시대 예술가들, 또한 지리철학자들과 혁명 연구가들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도록 내몰린다. 그들의 행위는 세계의 수축, 세계의 증대된 유기적 집단(mass) 그리고 생물학적 변종(variety)의 결과적 황폐(impoverishment)를 설명한다. 접힘(folding)의 방식들(modes)과 마찬가지로, 형태들은 사라진다. {주름}의 정치적 전략은, 계속해서 우리의 딜레마들을 무한하고 곡선(curvilinear) 형태들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매혹으로 구부려 넣는다. 라이프니츠는 우리의 세계로 창문을 열어 젖힌다: 들뢰즈는 우리 거주의 제한된 한계 내에서 사고되어야 할 무한성의 가능성을 옹호하기 위해 라이프니츠의 조화(harmonics) 개념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간적 발전(spatial development) 없는 과정은 그 책[{주름}]에서 마지막 절(clause)의 비-헤겔적 어조에 의해 암시된다: plier, deplier, replier. 따라서 들뢰즈는 삶의 공간을 접는 다른 방식들(styles; manieres)의 재발견을 요청한다. 만일 철학이 우리가 사는 수축하는 한계들을 이론화할 수 있다면, 라이프니츠는 자연을 개념 또는 세계-그림(world-picture)으로 단조롭게 하지는 않는 체계를 예시한다(exemplify). 마비시키는[시들게 하는](searing) 아이러니는, 라이프니츠가 그의 저작이 자본주의의 기술이 어떻게 발전될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바로 그 때의 그런 단순화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반례로서, 주름의 무한성은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세계가 그 이후로 압축되어왔는지를 결정한다(locate). 이제 만일 주름이 모든 재료(matter)를 횡단한다면, 그것[주름?]의 움직임은 우리로 하여금 책략적인 풍부한 능력(resourcefulness)을 가지고 세계에 거주하는 방식을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것의 바로 그 추상(abstraction) ― 주름은 실로 무엇인가에 대한 ― 은 감성들의 동화(elaboration)가 자유 민주주의의 속박 아래에 있지 않도록 해준다.
(xvi-2) 그것은 아마도 들뢰즈의 주름에 대한 상상이 우리 시․공간의 가속화된 압축의 역사 속에서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비실천적이며 토대없는 낙관주의에 정박한다는 점일 것이다. 들뢰즈와 가따리를 두 "정신적 자동기계(spiritual automata)", 즉 인간 생활과 사회적 모순이 지구상에 부과한 압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철학적 공간의 내면적(intimate) 무한성 속에서 모험한 돈키호테와 산초에 견줄 수 있어서, 주름의 정치학은 아주 터무니없는(chimerical)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만일 그 저작이 학제적인(interdisciplinary) 모나드로 후퇴한다면,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xvi-3) 이런 식으로 보면, {주름}과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급박하고 실천적인 책무(commitment)를 요구하는 문제들 ― 인구, 거주, 이동(displacement), geocide ― 에 대한 가설적 접근들일 것이다. 거주 ― 그것은 거슬러야만 하는데 ― 는 개념적인 효력(virtue)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반작용(reaction)을 구하기 때문에, 그 저작들은 또한 실용적인(pragmatic) 수단이 아직 개념화해야하는 점에 있어서 철학을 지구의 미래에로 위치 짓는다고(orient) 할 수 있다. 사실, {주름}은 유토피아적 사고 ― 그리고 유토피아에 의해 모나드라는 라이프니츠의 기발하게 명확한 발명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 가 철학의 노동들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그것의 정치학의 가장 명확한 표현을 발견한다.
(xvii-1) 라이프니츠는 유토피아주의자이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뒤틀림[곡률](curvature), 운동 그리고 관점에 관한 그의 이론들은 지역화(localize) 될 수 없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유토피아는 무한한 운동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절대적 탈영토화를, 그러나 항상 후자가 상대적으로 현재의 환경에 부착되는 비판적 관점에서, 그리고 특히 이 환경의 짜임(fabric)인 힘들(forces)과 더불어서."라고 적는다. 이상적인 바로크 가정의 주름들(pleats)과 가장자리들(hems)은 따라서 마치 버틀러(Samuel Butler)의 {Erewhon}의 거울-독해(mirror-reading)를 유발시키는 것처럼, "nowhere"에 관련할 뿐 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그것의 공간의 개념이 취해지는 현재인 "now-here"에도 관련한다.
(xvii-2) 이러한 의미에서, 라이프니츠의 이론들은 특별하게 "대상들(objects)"이 아니라, 들뢰즈의 렉시콘에 의하면 바로크적 영토들이다. 그것들은 무한한 접힘들(folds)의 운동을 추적함으로써 또는 돌, 화석들, 변성암들의 뒤틀림에서 열려진 다공성 모양의 공동들(caverns)과 틈새들(crannies)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라이프니츠가 서술한 힘들이 부여된 자연에 속한다. 이러한 것들은 마음에 대한 관조의 영토들이지만, 그것들은 그것이 "자기 충족적인(self-contained) 반성의 상태에서 살고 생각하는"(p. 99)동안 남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사한 정치학이 연장(extension)에 관한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관점에 대한 들뢰즈의 비교에서 나타난다. 전자에 있어서, 물질적 세계는 사고하는 주체의 축으로부터 직선으로 둘러싸인(rectilinear)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으며, 분리된 단위들로 나뉘어질 수 있다. 결과적인 지리학(geography)은 quincunx의 질서와 과정, 즉 중심(자아the ego)을 그를 둘러싼 사각형의 대각선들의 교차점에 위치시키는 격자 및 사각형 그리기의 이차원적 체계와 닮았다. 자아(the self)가 공간 속으로 움직일 때, 그것은[process?] 그 바깥둘레의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모서리들 중 하나를, 공간이 정복되어질 때까지 그 주위에 새로운 극한들(extremities)이 확립되는 등등 새로운 중심의 위치(site)로 변환시킨다. 후자에 있어서는, 자아도 세계도 그렇게 도식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주체가 힘들의 한가운데서 소용돌이치는 어디서든, 힘들은 개별적 신체, 그것의 탄력성 그리고 연장 내에서의 운동과 연장의 운동을 산출하는 부피(volumes) 내에서의 구부러지는(bending) 움직임들을 한정짓는 긴장(stress)을 행사한다. 주체는 자아와 세계를 맞붙게 하는 전장(battlefield)으로서보다는 주름들(endo-, meso-, 그리고 ectoderm)의 유희로서 그 자신의 배아적(embryonic) 발달을 실행하며(live) reinact[??]. 데카르트적 공간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비판을 경유하여, 저자는 신체와 환경의 재치[접촉??](tact)에 대한 변론을 한다.
(xvii-3) {주름}은 그것의 감[수]성을 양식의 전환(turn)을 통해 표명하도록 한다. 문장들은 단순하며, 문장들의 표현의 투명성은 때로 매혹적이다. 문장들은 동사나 주어․술어의 긴장으로부터 구축(built)되기보다는, 가장자리에 있는 그것의 논리적 "접합선들(seams)"의 경로나 각 문장의 주름들(pleats)을 따라 구축된다. 많은 문장들이 대화법(conversational modes)처럼 보이는 것, 즉 c'est, c'est bien, ce n'est plus, c'est que, 또는 c'est qu'il y a. . . .로 시작한다. 이러한 시작들은, 작가와 읽고 듣는 이들을 판단하고 조절하는 권능을 부여받은 숨은 권위를 동일화하려는 철학적으로 부과된 첫마디(incipit), es gibt 또는 불어의 il y a, "there is", "what is . . . is the fact that" 등등보다는 덜 약속한다(promise). 들뢰즈는 c'est를 연결자(connector)로, 개념들을 얼마든지 다른 문장들에 부착되는 연속적 연쇄(serial chain)로 연결(link)시킬 수 있는 단위로 채택한다. 구축(construction)은 ― 라이프니츠에게도 귀중한 ― 주어와 술어를 융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stage). 이처럼 던지면, 들뢰즈의 문장들은 포괄(inclusion)의 문제와 다른 어휘적 구축들의 연결을 분절시킨다(articulate). 단어들(vocables)과 구절 단위들은 분기하는(ramify) 경향이 있다. 개념 자체는 문법적 부분들과 전체들의 각 수준과 부합되면서 "주어가 된다".라이프니츠의 논리는 합리적인 존재로서 주체의 고전적 개념과의 단절을 지적한다고 들뢰즈는 (4장, "충분한 이유"에서) 주장한다. to be와 같은 계사(copula)에 의해 연결된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리고 c'est에 변화를 주는 것으로, 들뢰즈는 논쟁의 고상함이나 문체적 명료성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는다: 라이프니츠를 따라서, 들뢰즈는 데카르트적 이성의 토대가 되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소환한다(summon). {주름}에서의 문체의 연속성은 하나가 ― 주어 또는 술어 ― 다른 하나의 속사[속성](attribute)가 되는 것을 막는다.
(xviii-1) 동시에, 투명성이 문장의 명백한 단순함 속에서 얻어진다. 논리와 문체의 다르면서 동시적인 운동들은 각 phrastic unit의 구문(syntax) 내에서 발전한다. 중세 예술에서 바로크적 "구문"에 대한 포시용의 기술(description)이 라이프니츠나 들뢰즈의 문체에 견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예술사가[포시용]는, 바로크적 형태들은 "열정적인 강도(intensity)로 완전히 그들 자신의 것인 삶을 산다. . . . 그것들은 자라나면서 조차 산산이 부서지고; 공간에 침투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들로 공간의 일부가 되기 위해 모든 방향으로 공간을 침략(invade)하려 한다."고 적는다. 들뢰즈의 문체는 형태와 기호의 혼란(confusion)을 장려하지만, 역설적으로 전면적인(overall) 효과가 그 자신에게 주목을 끌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이다. 문장은 그것의 내용을 의미하지만(signify), 내용은 논점(argument)의 리듬에 조응하기 위해 연속 배열된다(seriate).
(xviii-2)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들뢰즈의 문장들은 짧고 단순하며 명료한 경향이 있다. 문장들의 연결(concatenation)에 있어서, 문장들은 독자들이 주어진 절들(clauses)을 고립시키고 재연결시키도록 요구하면서, 말의 그룹들(verbal groups)이 다른 절들로 뛰어 오르거나 되돌아오는 mobile effects를 산출하기 위해, 강제로 부수어 열고 재조합한다. 함축된(implied) 운동은, 저자가 동시적인 이동성(mobility)과 개념들의 폐쇄(closure)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취미(taste) 내의 고정물(fixity)과 이행(passage)의 역할 속에서 발견하는 것을 흉내낸다. 다시 한 번, 그 방식(manner)은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적 이성(reason)의 충분함(sufficiency)에 관해 관찰한 것을 확증한다: "두 축이 있는데, 하나는 그것을 향해 모든 원리들(principles)이 그들 모두를 접고 있으며(folding), 다른 하나는 그것을 향해 모든 원리들이 반대의 방식으로 펼쳐내고 있는(unfolding), 원리들의 기준을 구성하는 이상한 철학적 행위." 그 이중의 운동은, 구획들(compartments) 속으로의 분할(division)을 지지하기는커녕, 들뢰즈가 "모든 종류의 움직이는 부분들 아래에서 존재들의, 사물들의 그리고 개념들의 이행을 관장하는, 원리들에 대한 극단적 취미"(p. 58)라고 부르는 것을 져버린다.
(xviii-3) 들뢰즈의 문장들의 기하학적 형태들은 그가 글쓰는 연속들[순차들](serialities)을 재생산한다. 라이프니츠는 철학과 산업 기술의 시작의 상관을 넘어서는 결과로 세계에 대한 비전을 표명한다. 18세기 초반에는, 각인stamp(또는 개별적 문체의 효과를 증진시키는 인상impression)의 관념이 "대상의 산출에 불변성(constancy)의 법칙을 부과했다. 대상이 그것의 장소를 변화(variation)의 연속[체](continuum) 내부로 간주할 때, 주름과 더불어 규준(norm)으로부터의 동요(fluctuation)나 일탈(deviation)은 법칙의 영속성(permanence)을 대체한다." 대상들이 더 이상 틀짓기(molding)라는 공간적 개념작용이 아니라, "시간적(temporal) 변조(modulation)" 또는 "질료의 연속적인 변화"(2장)를 지시할(refer to) 때, 대상은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다. 대상은 그것을 형태짓는 틀(mold)로부터 물러나게 되지는 않는다. 연쇄화된 대상들의 "계속적인 시간적 틀짓기"는 공간성(spatiality)의 패러다임을 다른 것, 즉 시간적 질서의 패러다임으로 대체한다. 들뢰즈의 문체의 행로[취지](tenor)도 또한 그러하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연속성과 변조의 수학이 대상과 사건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 그러나 그 관념들이 전성(前成, preformation)의 질서에 순응하는 동안 내내 ― 완전히 변화시킨다고 지적한다.
(xix-1) 들뢰즈의 어법(diction)은 이 변형(transformation)을 위한 규범을 본뜬다. 문장들은 법칙을 반영하지 않으며, 그들의 함축적 규준에 있어서 달라진다. 문장들은 선언적(declarative)이다; 흔히 콜론이나 접속사들로 연결된 둘 또는 세 개의 독립적인 절들로 구성되었다; 고전적인 개념과는 달리, 문장들은 조인한(signatory) 각인의 기원을 소환하려하지 않는다. 문장의 구성(composition)으로부터 문장의 결합(linkage)이 관념들과 형태들의 펼침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논리적 과정으로 주목이 돌려진다. 따라서 변조는 문체의 기준(criterion)이 된다.
내재성: 삶. . .
- Gilles Deleuze
* 'L'immanence: une vie. . .', Philosophie 47(sept. 1995), pp. 3-7.
* 'Immanence: A Life', Theory, Culture & Society, 1997, vol. 14(2), pp. 3-7.(tr. by Nick Millett)
선험적 장 transcendental field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을 지시[참조]refer하지도, 주체(경험적 표상)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experience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그것은 의식consciousness의 순수한 비-주체적a-subjective 흐름current, 비인칭적인impersonal 전-반성적pre-reflexive 의식, 자아self 없는 의식의 질적인 지속으로 보인다. 만일, 선험적인 것the transcendental이, 주체와 대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립하여, 선험적 경험론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렇게 직접적인[무매개적인]immediate 데이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한 선험적 경험론에는 무언가 거칠고 강력한 것이 있다. 이것은 감각sensation의 요소(단순한 경험론)가 분명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은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 단지 단절break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두 감각들이 서로 밀접할 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생성becoming으로서, 역량(puissance)의 증가 혹은 감소(잠재적 양virtual quantity)로서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의 전이passage이다. 그러한 경우라면, 선험적 장은 주체도 자아도 가지지 않은, 시작하지도 끝나지도 않는 운동으로서, 이 순수한 무매개적 의식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는가?(스피노자주의적인 전이 혹은 역량의 양의 개념마저도 의식을 떠올린다).
그럼에도, 의식에 대한 선험적 장의 관계는 단지 권리상으로(de jure)만이다. 의식은 오로지 주체가 그것의 대상과 동시에 산출될 때에만, 그들 세 가지 모두가 장의 바깥(hors champ)에 존재하고 '초월transcendents'로 나타나면서, 사실fact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의식이 어디에서나 발산하는 무한한 속도로 선험적 장을 횡단하는cross한, 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의식은 그 자신을, 의식을 대상들에 참조케 하는 주체에 반사함으로써만 사실로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것이 왜 선험적 장이 그것의 의식―그것은 그럼에도 초월적 장에 동연한다coextensive―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지, 그러나 왜 모든 revelation으로부터 후퇴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은 선험적인 것the transcendental이 아니다. 의식이 없다면, 선험적 장은 주체 뿐 만 아니라 대상의 모든 초월성transcendence을 탈주escape하기 때문에, 선험적 장은 순수한 내재성의 평면(pure plane of immanence)으로 규정될 것이다. 절대적 내재성은 그 자신 안에(in itself) 있다: 그것은 어떤 것 안에 있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해to 있지 않다; 그것은 대상에 의존하지 않으며 주체에 속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내재성은 실체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다. 실체와 양태들은 내재성 안에 있다. 내재성의 평면 바깥에 존재하는 주체와 대상이, 내재성이 스스로 기인하는(attributed) 일반적인 보편적 주체 혹은 대상으로 취해진다면, 그때에는 내재성이 왜곡되고(deformed) 초월적인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 끝나면서 선험적인 것은 완전히 변성되고 단지 경험적인 것the empirical을 되풀이한다(칸트에게서처럼). 내재성은 모든 것에 대해 우월한 전체(unity)인 어떤 것Something에 연관되지도, 사물들의 종합을 작동시키는 행위인 어떤 주체Subject에 연관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내재성의 평면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내재성이 그 자신 이외에는 어떤 것에 대한 내재성이 더 이상 아닐 때이다. 내재성의 평면이 더 이상 그것을 포함할 수 있는 주체Subject나 대상Object에 의해 규정된다기보다는, 선험적 장이 의식에 의해 규정된다.
순수한 내재성은 삶A LIFE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라, 어떤 것 안에도 있지 않은 내재성이 그 자체로 삶이다.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 내재성이다: 그것은 순전한sheer 역량, 극도의 지복beatitude이다. 피히테Fichte가 주체와 대상의 아포리아들을 극복하는 한, 그의 후기 철학에서 그는 존재Being에 의존하지 않고 행위Act에 종속되지 않은 삶으로서 선험적 장을 제시한다: 그것의 바로 그 활동이 더 이상 존재를 되 지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자신을 삶 속에 위치시키는 절대적으로 무매개적인 의식. 선험적 장은 따라서 스피노자주의를 철학적 작동operantion의 중심에 재소개하는 genuine 내재성의 평면이 된다. 스피노자가[?] effort의 초월성 아래에서 절대적이고 내재적인 삶을 발견했을 때, 그의 '후기 철학'에서 유사한 모험을 감행한 것은 멘느 드 비랑이 아닌가?(너무 지쳐서 끝까지 보아 내지 못한 사람) 선험적 장은 내재성의 평면, 그리고 삶에 의한 내재성의 평면에 의해 규정된다.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삶이다. . . 디킨즈Dickens만큼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사유의 이미지
(169)철학에서 시작의 문제는 항상 정당하게도 매우 미묘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왜냐하면 시작한다는 것은 모든 전제들(presupposes)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엄격한 공리계(axiomatique)에 의해 제거되어질 수 있는 객관적 전제들 앞에 있게 되는 반면, 철학적인 전제들은 객관적인 만큼 주관적이다. 우리는 주어진 개념에 의해 명시적으로(explicitement) 가정된 개념들을 객관적 전제들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두 번째 『성찰』에서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정의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한 정의는 이성적임과 동물의 개념들을 명시적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 정의로서 코기토를 제시하면서, 따라서 그는 종․차(genre et difference)로 작동하는 방식들을 강요하는 모든 객관적 전제들을 피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가 다른 종류의 전제들, 즉 주관적 혹은 암묵적인(implicites) 전제들 ― 말하자면 개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견해[감정](sentiment) 속에 감싸여진 전제들 ― 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 누구나 개념 없이 자아, 사유함, 존재함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고 가정된다. 따라서 '나는 사유한다'에서의 순수한 자아는 오로지 경험적인 자아 내로 모든 전제들을 되돌려보냈기(renvoye) 때문에 시작의 모습을 띤다. 그리고 헤겔이 실제로 이미 데카르트를 그런 이유로 비난한다면, 헤겔은 그의 차례에서도 다르게 전개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 그에게 있어 순수한 자아는 경험적이고 감각적이며 구체적인 존재 내로 그의 모든 전제들을 되돌려보냄으로써만 시작이 된다. 객관적 전제들을 거부하는 데 있는 그런 태도 ― 그러나 그 정도의 주관적 전제들(그것들은 아마도 다른 곳에서 다른 형태로 동일한 것들일 것이다)이 주어지는 조건에서 ― 는 존재의 선존재론적(preontologique) 이해를 떠오르게 하는 여전히 하이데거의 태도이다. 그것에서 우리는 철학에서 진정한 시작은 없다고, 혹은 오히려 진정한 철학적 시작, 즉 차이(Difference)는 이미 그 자체로 반복(Repetition)이라고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공식, 그리고 순환(Cercle)으로서의 철학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신중해도 나타낼 줄 모를 만큼의 많은 가능한 해석들에 빠지기 쉽다. 왜냐하면 만일 시초에 있었던 것을 끝에 가서 재발견하는 것이 문제라면, 만일 인식하는 것, 즉 개념 없이 그리고 암묵적인 방식으로 단순히 알려진 것이었던 것을 빛으로, 명시적인 것으로 혹은 개념으로 도출해내는 것이 문제라면 ― 그 도출의 복잡함이 무엇이건, 이런 저런 작가들의 과정들 사이에 차이들이 무엇이건 ― 이 모든 것은 여전히 너무 단순하며 그 순환은 진정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 적절한 말이기 때문이다. 순환의 이미지는 오히려 철학이 정말로 시작하기에는 무력하며 진정으로 반복하기에도 무력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170-1)주관적 혹은 암시적 전제가 무언지를 찾는 것이 더 낫겠다 : 그것은 "모든 사람은 [...을] 안다"의 형태를 띤다. 개념 이전에 그리고 선철학적 방식으로, 모든 사람은 [...을] 안다. 모든 사람은 사유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 그 결과, 철학자가 '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는 그의 전제조건들(premisses)의 보편성 즉, 존재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이 뜻하는 바가 암묵적으로 이해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으며, 누구도 회의하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며 사유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가정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표상[재현](representation)의 형식이며 표상하는 자(representant)의 담론이다. 철학이 그것의 시작을 암시적 혹은 주관적 가정들에 의지할 때, 철학은 결백한 척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정 본질적인 것, 즉 그 담론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철학이 아무 것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철학은 "백치"(l'idiot)를 현학자에 대립시키고, 에우도수스(Eudoxe)를 에피스테몬(Epistemon)에, 선한 의지(bonne volonte)를 매우 충만한 지성[오성]에, 그의 천부의(naturelle) 사유만을 부여받은 특수한 인간을 그의 시대의 일반성들에 의해 왜곡된 인간에 대립시킨다.1) 철학은 전제 없는 인간의 편에 서듯이 백치의 편에 선다. 그러나 실은 에우도수스는 에피스테몬 못지 않은 전제들을 가지고 있으며, 단지 다른 형태로 ― 암묵적이거나 주관적인, "사적"이며 "공적"이지 않은 형태로 ― , 철학으로 하여금 시작의 기운을 부여받도록, 전제들 없이 시작하도록 허락하는 천부적 사유라는 형태로 가지고 있다.
(170-2)그래서 고립되며 격앙된 외침들이 솟아오른다. 그 외침들이 "모든 사람들은 [...을] 알 것이다"는 것을 부정하니 어찌 고립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고들 하는 것을 부정하니 어찌 격앙되지 않겠는가? 그런 항의는 귀족적인 선입관들(prejuges)의 이름으로 제기되지 않는다 : 거의 아무도 사유하지 않으며 사유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역으로, 어쩔 수 없는 겸손함으로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을 알게 되지 못하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인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겸손하게 부정하는 ―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 어떤 사람이 있다. 자신을 표상하도록 두지 않는, 어떤 것도 더 이상 표상하려고 하지 않는 어떤 사람. 선한 의지와 천부의 사유를 부여받은 특수자(un particulier)가 아니라, 자연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사유하려고 하지 않는, 악한 의지(mauvaise volonte)로 가득 찬 개별자(un singulier). 오직 그만이 전제들이 없다. 오직 그만이 실질적으로 시작하고 실질적으로 반복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주관적인 전제들은 객관적 전제들 못지 않은 선입관들이며, 에우도수스와 에피스테몬은 경계해야 할 하나이자 동일한 기만적인 사람이다. 백치를 만들 것을 무릅쓰고 러시아 식으로 해보자 : 그 시대의 문화의 객관적인 전제들 내에서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천부적 사유의 주관적인 전제들 내에서도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는, 그리고 순환[원]을 만들기 위해 컴퍼스를 준비하지 않는 땅 아래의 사람. 그는 일시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은, 때아닌 자*(l'Intempestif)이다. Ah Chestov, 그리고 그가 제기할 줄 아는 문제들, 그가 제시할 줄 아는 악한 의지, 그가 사유 속에 두는 사유하기의 무력함, 그가 가장 근본적인 시작과 가장 완고한 반복에 동시에 관여하면서 그 까다로운 문제들 내에서 전개하는 이중의 차원.
(171)많은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이것"(ceci)을 안다고, 모든 사람이 이것을 인정한다고,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이롭다. (그들은, 무뚝뚝한 발화자가 자신은 그렇게 표상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부정하며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기를 찬성하지 않는 한, 손쉽게 이긴다.) 진실로, 철학자는 보다 더 무관심하게 진행한다 : 그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제기하는 것, 그것은 단지 사유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그리고 자아가 의미하는 것, 말하자면 이것(ceci) 아니라 표상의 혹은 일반적인(en general) 재인식(recognition)의 형식이다. 그럼에도 그 형식은 하나의 질료(matiere), 그러나 순수한 질료, 하나의 요소(element)를 가진다. 그 요소는 단지 한 능력(faculte)의 천부적 행사로서 사유의 지위에 있으며, 사유자의 선한 의지와 사유의 올바른 본성이라는 이중적 양상 아래에서 진리에 재능이 있는, 진리와 친화적인 천부적 사유의 전제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사람이 사유하는 것이 뜻하는 바를 암묵적으로 안다고 여겨지는 것은, 모든 사람이 천부적으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상의 보다 일반적인 형식은 올바른 본성과 선한 의지(에우도수스와 정통성)로서의 공통감(sens commun)의 요소 내에 있다. 철학의 암묵적인 전제는 자연으로부터의 보편적인 인식*(cogitatio natura universalis) ― 이것으로부터 철학은 자신의 출발을 시작할 수 있다 ― 로서의 공통감 속에서 찾아진다. "모든 사람은 천부적으로 인식하려는 욕망이 있다"에서 "양식(bon sens)은 세상에서 가장 잘 분배되어진 것이다"까지, 전제가 실존함을 증명하기 위해 철학자들의 선언들을 계속 늘어놓는 것은 무익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것이 고취시키는 명시적인 명제들(propositions)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바로 그림자 속에 놓아두는 철학자들에게 있어 그들의 집요함에 의해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의 가정들(postulats)은 철학자들이 그들에게 일치하도록 요구하는 명제들이 아니라, 역으로 암묵적으로 남은, 선철학적 방식으로 이해되는 명제들의 테마들이다. 그 의미에서, 철학적인 개념적 사유는 암묵적인 전제를 위해, 선철학적이고 천부적인, 공통감의 순수 요소에서 유래한 하나의 사유의 이미지(Image de la pensee)를 가진다. 이 이미지에 따르면, 사유는 진리와 친화적이고 형식적으로는(formellement) 진리를 소유하며 실질적으로는(materiellement) 진리를 원한다. 그리고 누구나 사유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누구나 그것을 아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 이미지 위에서이다. 따라서 사유가 이미 모든 것을 그리고 주관과 객관의 분배를, 존재와 존재자의 분배를 미리 판단하는 이 이미지에 종속되어 있는 한, 철학이 객관으로 시작하든 주관으로 시작하든, 존재로 시작하든 존재자로 시작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172)이 사유의 이미지를 우리는 독단적인 혹은 정통적인 이미지, 도덕적(morale)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사유의 이미지는 분명 변이형들을 가지고 있다 : 따라서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은 그것을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구축된 것으로 가정한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보겠지만, 철학자들은 수많은 후회들(repentirs)을 겪으며, 그 암묵적 이미지에다가 개념의 명시적 반영[성]으로부터 온 수많은 특질들(traits) - 그것들은 암묵적 이미지에 저항[반작용]하며 그것을 전복시키는 경향이 있다 - 을 또한 결합시키지 않고서는 그 암묵적 이미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암묵적 이미지는, 가령 철학자가 진리는 요컨대 "도달하기 쉬운 것이며 모든 사람들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더라도, 암묵적인 것 속에서 꿋꿋이 버틴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학에 따라 다양한 이런 저런 사유의 이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철학의 주관적 전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유일한 이미지(Image) 일반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철학의 가장 일반적인 전제들에 대해 자문할 때, 그는 그 전제들이 본질적으로 도덕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도덕(Morale)만이 사유는 선한 본성을 가지며 사유자는 선한 의지를 지닌다고 우리를 설득할 수 있으며, 오로지 선(Bien)만이 사유와 참(Vrai)의 가정된 친화성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도덕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참에 사유를 부여하고 사유에 그 참을 부여하는 그 선...[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그때부터, 어떤 종류의 전제도 없을 철학의 조건들이 더 잘 나타난다: 사유의 도덕적 이미지에 의지하는 대신에, 철학은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함축하는 "가정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속에서 그 출발점을 취할 것이다. 철학은 선철학적 이미지와의 우호[협조]에서가 아니라 비철학(nonphilosophie)으로 알려진 이미지에 대항한 엄격한 전투에서 자신의 차이 혹은 참된 시작을 발견할 것이다.2) 그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철학은 이미지 없는 사유 내에서 자신의 진정한 반복을 발견할 것이다. 비록 가장 커다란 파괴들과 가장 커다란 퇴폐들(demoralisations), 그리고 역설(paradoxe)과 동맹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공통감의 요소같은 표상의 형식을 포기하게 될 철학의 완고함(entetement)을 대가로 하더라도. 마치 사유는 이미지와 가정들로부터 자유로워야만 사유하기 시작할 수 있고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우선 사유로부터 그 왜곡시키는 이미지를 투사하는 가정들을 조사하지(recenser) 않는다면, 진리의 독트린을 개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헛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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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사유하는 것이 능력의 천부적 행사든, 그 능력이 선한 본성과 선한 의지를 지니든, 그것은 사실상(en fait) 이해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사실상 사람들이 좀처럼 사유하지 않으며 취미의 도약(l'elan d'un gout)에서 보다는 충격의 영향하에서(sous le coup d'un choc) 사유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양식(bon sens; 사유할 수 있는 역량la puissance de penser)은 세상에서 가장 잘 분배된 것이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구절은 단지 오래된 농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사람들이 부득이한 경우에는 기억력, 상상력 혹은 청각마저 부족하다고 불평하지만, 지성과 사유의 관점에서는 언제나 충분히 잘 분배되었다고 느끼는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철학자라면, 그것은 그가 그 사유가 권리상(en droit) 존재하는 그런 사유의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그 농담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권리를 사실들로 번역하는 어려움이 있건 혹은 권리를 사실들 너머에서 재발견하는 어려움이 있건, 선한 본성과 참과의 친화성은 권리상 사유에 속한다. 따라서, 천부의 양식이나 공통감은 순수 사유의 한정(determination)으로 간주된다. 그것의 고유한 보편성을 미리 판단 내리는 것은 sens에 달려있다; 그리고 권리상 보편적인 것으로, 즉 권리상 소통가능한 것으로 가정되는 것도 sens에 달려있다.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권리를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즉 잘 타고난 정신을 적용하기(appliquer) 위해서는 명시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아마도 사유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difficile). 그러나, 사실상 가장 어려운 것은 권리상으로는 여전히 가장 쉬운(facile) 것으로 통한다; 왜냐하면, 방법 그 자체는 사유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쉬운 것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그 '쉬운'이라는 개념이 데카르트주의 전체를 중독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철학이 권리상 가치있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사유의 이미지 내에서 자신의 전제들을 발견할 때, 그때부터 우리는 그것을 상반된 사실들에 대립시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권리의 평면 자체(plan meme du droit)에 대한 논의를 가져야 하며, 그 이미지가 순수 사유로서의 사유의 본질 자체를 드러내는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권리상 가치있는 한, 그 이미지는 경험적인 것(l'emprique)과 초월적인 것(le transcendental)의 어떤 분할(repartition)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판단해야 하는 것은 그 분할, 말하자면 이미지 내에 함축된 그 선험적 모델이다.
(174)실제로 정말 하나의 모델이 있는데, 그것은 재인식의 모델이다. 재인식은 동일한 것으로 가정된 한 대상(objet)에 대한 모든 능력들의 일치된 행사라고 정의된다: 그것은 보여지고, 만져지고, 떠올려지고, 상상되고, 생각되어질 수 있는 동일한 대상이다. 혹은 데카르트가 밀납 덩어리에 대해 말한 것처럼, "내가 보고, 내가 만지고, 내가 상상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며, 결국 내가 항상 처음부터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동일한 것이다". 확실히 각각의 능력은 그것의 특수한 소여들(donnees particulieres) 즉, 감각가능한 것, 기억할 수 있는 것, 상상할 수 있는 것, 지성적인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의 특수한 스타일, 소여를 투여하는(investissant) 그것의 특수한 작용들(actes)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대상은, 능력이 그것을 다른 능력의 대상과 동일한 것으로 여길 때, 아니 모든 능력들 전체가 그들의 소여를 가져다 주고 그 능력들 자체가 대상의 동일성(l'identite)의 형식에 관련될 때, 재인식된다. 그러므로, 동시에 재인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능력들의 협력(collaboration)에 관한 주관적 원리, 즉 능력의 일치(concordia facultatum)로서의 공통감을 요청한다; 그리고 대상의 동일성의 형식은 철학자에게 있어서 사유하는 주체 ― 그의 모든 능력들은 [그의] 양태들(modes)이어야 한다 ― 의 통일성 내의 토대를 요청한다. 그런 것이 시작으로서의 코기토(Cogito)의 의미이다: 그것은 주체 내에서 모든 능력들의 통일성을 표현하며, 따라서 그것은 모든 능력들에 있어서 주관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대상의 형식에 관계될 가능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공통감의 전제에 철학적 개념을 부여하며, 철학적으로 된 공통감이다. 데카르트에게서처럼 칸트에게서, 모든 능력들의 일치(concordance)와 동일함(le Meme)이 가정된 대상의 형식에 대한 능력들의 조화(accord)를 근거짓는 것은 '나는 사유한다' 내의 자아(Moi)의 동일성이다. 우리가 형식적 대상, 그 어떤 보편적인 대상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능력들의 한정된 기여[이바지](apport) 내에서 재단되고 특정화된 이런 저런 대상 앞에 있다고 반박될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부가적인 심급인 공통감과 양식의 정확한 차이가 개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왜냐하면, 공통감이 순수한 자아와 그것에 일치하는 어떤 대상의 형식의 관점에서 보아 동일함의 규범이라면, 양식은 경험적 자아들(des moi)과 이런 저런 것으로 규정된(qualifies) 대상들의 관점에서 보아 분배(partage)의 규범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양식이 보편적으로 분배되었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공통감이 동일함의 형식에 기여할 때, 각각의 경우에 능력들의 기여를 한정하는 것은 양식이다. 그리고 만일 그 어떤 대상이 규정된 것으로만 존재한다면, 규정화는 역으로 그 어떤 대상을 가정하면서만 작동한다. 우리는 양식과 공통감이 어떻게 사유의 이미지 내에서 완전히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서로 보충하는지를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그 둘은 doxa의 두 절반을 구성한다. 지금으로서는, 가정들 그 자체의 추락[침전, 재촉](precipitation)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거기에서] "권리상"(en droite)이 유래하는 공통감의 순수 요소; 재인식의 모델, 혹은 오히려 이어서 [거기에서] 유래하는 재현의 형식. 사유는 본성적으로 올바르다고 가정된다. 왜냐하면, 사유는 다른 것들과 같은 능력이 아니며, 주체 즉, 단지 그것의 양태들이고 사유가 재인식의 모델 내에서 동일자의 형식 위로 정향시키는(oriente sur) 다른 모든 능력들의 통일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재인식의 모델은 필연적으로 사유의 이미지 내에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데카르트의 『성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존경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의] 제왕(roi)이며 사유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정향시키는 것은 여전히 그 [재인식의] 모델이다.
(175)그러한 정향(orientation)은 철학에 있어 유감스런 일이다. 왜냐하면, 가정된 세 층위, 즉 본성적으로 올바른 사유의 층위, 권리상 천부적인[자연적인] 공통감의 층위, 선험적 모델로서의 재인식의 층위는 독단[교조]의 이상(ideal d'orthodoxie)만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doxa와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었던 자신의 기획을 실현할 어떤 수단도 더 이상 없다. 확실히 철학은 모든 특수한 doxa를 거부한다; 확실히 철학은 양식이나 공통감의 어떤 특수한 명제도 취하지 않는다. 확실히 철학은 절대 특수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은 doxa로부터 본질적인 것, 즉 형식을 보존하고; 공통감으로부터 본질적인 것, 즉 요소를 보존하며; 재인식으로부터 본질적인 것, 즉 모델을 보존한다(보편자로서 사유하는 주체 내에 기반을 두며, 어떤 대상에 대해 행사되는 능력들의 일치). 사유의 이미지는 단지 그 아래서 doxa를 합리적 층위로 끌어 올리면서 보편화시키는 형상(figure)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의 경험적인 내용(contenu)으로부터 오로지 추상(abstraction)만을 만들어 낼 때, 그에 상응하며 내용의 본질적인 것을 암묵적으로 취하는 능력들의 사용을 보장하면서, 우리는 doxa의 포로로 남는다. 아무리 우리가 초-시간적(supra-temporelle), 아니 시간-아래의(sous-temporelle), 땅-아래의(sous-sol) 최초의 질료 혹은 Urdoxa를 발견한다 해도, 철학의 기호로부터 그것들을 찬양하면서 "재발견했다"(retrouver)고 단지 아양을 떠는 바로 그 [지하]동굴(caverne) 혹은 시간의 관념들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재인식의 형식은 결국 재인식 가능한 것과 재인식된 것과 같은 것만을 신성화했을 뿐이며, 그 형식은 합치[순응](conformites)와 같은 것만을 고취시키게 될 뿐이다. 그리고 만일 철학이 암묵적인 전제를 가리키는 것처럼 공통감을 가리킨다면[참조한다면], 철학에게 항상 - 불행히도- 공통감이 철학을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통감이 철학에서 무슨 필요가 있는가? 철학에 있어 파멸을 초래하는 이중의 위험. 한편으로, 재인식의 행위들이 우리의 일상적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탁자다, 이것은 사과다, 이것은 밀납 덩어리다, 테아이테토스 안녕하세요. 그러나 사유의 운명이 여기서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가 재인식할 때 우리는 사유한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우리가 베르그송의 방식으로 재인식의 두 유형 - 목초를 앞에 둔 암소의 재인식과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의 재인식 - 을 구분한다 해도, 전자와 마찬가지로 후자도 사유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모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사실의 거부들 이후가 아니라 권리의 요구들 위에서 사유의 이미지를 판단해야 했다. 그러나 정당하게도, 사유의 이미지에게 비난해야 하는 것, 그것은 어떤 사실들의, 특수하게 하찮은 사실들의 외삽[확대적용](extrapolation), 개인적인 일상적 평범함(banalite), 재인식 위에서 자신의 가정된 권리를 정초했던 것이다. 마치 사유가 보다 이상하거나 보다 위험한 모험들 속에서 자신의 모델을 찾지 않아야 했던 것처럼. 칸트의 예를 들어보자: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초월적인 것의 경이로운 영역을 발견한 이가 바로 칸트다. 그는 위대한 탐험가와 유사하다;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의 산 혹은 지하[를 탐험하는]. 그럼에도 어쩔 것인가? 『순수이성비판』의 첫 번째 판에서, 그는 모든 능력들이 그것에 관련되는 '나는 사유한다'의 상관물(correlat)로서의 어떤 대상의 형식 내에서 표현되는 세 번째 능력, 즉 재인식의 능력 내에서 절정에 달하면서, 사유하는 능력들의 상호관계를 추정하는 세가지 종합(syntheses)을 상세히 기술한다. 칸트가 초월적이라 일컬어지는 구조들을 심리적 의식의 경험적 작용들 위에 그렇게 전사[복사]하는(decalque)하는 것은 분명하다: 파악[이해](apprehesion)의 초월적 종합은 경험적 파악 등으로부터 직접 유도된다. 칸트가 두 번째 판에서 그 구절을 제거한 것은 그토록 선지적인 과정을 숨기기 위해서이다. 더욱 숨겨졌음에도, 전사의 방법은 그의 모든 "심리주의"(psychologisme)와 더불어 그래도 역시 존속한다.
(역: 김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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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카르트,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를 참고(ed. Alquie , Garnier, t. II).
2) 포이에르바흐는 시작의 문제에 있어 가장 멀리 나아간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는 철학 일반에서의, 특히 헤겔의 철학에 있어서의 암묵적 전제들을 고발한다. 그는 철학은 선-철학적이미지와의 우호로부터가 아니라 비-철학과의 "차이"로부터 출발해야 함을 보여준다. (오로지 그는 참된 시작의 그 요구는 경험적이고 감각적이며 구체적인 존재로부터 출발할 때 충분히 현실화된다고 생각한다.) ― 『헤겔 철학 비판에의 기여』(알튀세 역, 『철학 선언』, PUF, 특히 33쪽) 참조.
유목적 사유(Nomad Thought)
- Gilles Deleuze
* "Nomad Thought", in The New Nietzsche : Contemporary Styles of Interpretation, ed. & intro. by David B. Allison, MIT Press, 1985, pp.142-149.
** First published as "Pens e nomade" in Nietzsche aujourd'hui, 1973 (Union G n rale d'Editions, Paris).
*** 영역본은 불어 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주로 영역본을 따르고 (영역자의 오역 및 삭제가 많기 때문에) 불어본을 참고함.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근대 문화의 여명을 니체-프로이트-맑스라는 세 사람으로 새겨두고 있다. 그리고, 세계가 그들에 대해 미리 준비되지 못했던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아마도 맑스와 프로이트는 우리 문화의 여명을 제시하지만, 니체는 뭔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서 대항문화counterculture의 여명을 제시한다.
근대 사회는 분명히 코드들codes의 기반 위에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맑스와 프로이트를 글자 그대로 채택하기보다는) 맑스주의나 프로이트주의가 전개되어 온 것을 고려해보면, 그것들이 역설적이게도 재코드화recodification의 시도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맑스주의의 경우에는 국가에 의한 재코드화("당신은 국가에 의해 병들었으며, 국가에 의해 치료받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동일한 국가는 아니다), 프로이트주의의 경우에는 가족에 의한 재코드화("당신은 가족에 의해 병들었으며, 가족에 의해 치료받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동일한 가족은 아니다).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은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적인 관료주의bureaucracies ― 전자는 공적인, 후자는 사적인 ― 를 구성하는데, 그 관료주의의 목표는 그런 대로 우리 문화의 지평에서 끊임없이 탈코드화decodified되는 모든 것을 재코드화하는 것이다. 반면에, 니체의 관심사는 전혀 이런 것이 아니다. 그의 과업은 다른 곳에 놓여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코드들을 넘어서, 그 자신이 코드화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코드화되는 것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어떤 것을 전달하는 것. 그것을 새로운 신체에 전달하는 것, 그것을 받고 퍼뜨려 낼 수 있는 신체를 발명하는 것; 우리 자신의 것이 될, 대지의 것이 될, 심지어 씌어진written 어떤 것이 될 신체. . .
우리는 코드화의 거대한 장치들에 매우 친숙하다. 결국 사회들은 많이 다르지 않으며, 그리 많은 코드화의 수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세 가지 주요한 수단들은 법률law, 계약들contracts 그리고 제도들institutions이며, 이것들은 예를 들어 우리가 맺거나 맺어왔던 서적들과의 관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법전들codes로 불리는 어떤 법률서들이나 심지어 종교적 텍스트들과 독자의 관계는 그 자체로 법률에 의해 지배된다. 또 다른 종류의 서적은 부르주아 계약 관계를 반영하는데, 그것은 상업적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세속적 문학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서 구입하고, 당신은 나에게 읽을 거리를 준다." 이러한 계약 관계는 모든 관계를 포괄한다: 작가, 출판업자, 독자. 현존하는 또는 미래의 제도들에 관한 책으로 제시된 정치적 책(경향에 있어 혁명적인) 또한 있다. 다양한 종류의 코드화가 온통 퍼져있고, 자주 겹쳐서 하나가 다른 것에 파묻혀 있는 것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들 사이에서 모든 종류의 혼합들이 발생한다(예를 들어, 계약적 또는 제도적 서적들은 종교적 텍스트들로 취급될지도 모른다).
또 하나 매우 다른 종류의 예를 들어보자: 광기madness의 코드화. 무엇보다도, 합법적인 형태가 있었다: 병원, 수용시설. 이것은 미래에 건강의 마지막 희망으로 불리게 될 억압적인 코드화, 감금, 낡은 방식의 투옥이다(그때에는 광인the insane이, "그들이 우리를 가두었을 때는 좋은 시절이었다; 오늘날에는 훨씬 나쁜 일조차 일어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사건, 즉 정신분석이 생겨났다. 의학에서 나타난 것처럼, 부르주아 계약 관계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해되어 왔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약 당사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신이상인insane 것으로 판정되었다; 그들은 법률적으로 "무능한incapable" 자들로 여겨졌다. 프로이트의 천재적 업적은 일종의 정신이상insanity(넓은 의미에서의 신경증neurosis)을 계약 관계 하에 가져 놓은 점, 그리고 이 경우에는 정신이상자가 특수한 계약이 가능하다고 설명한 점이다 ― 그것에서 최면의 "포기abandon"가 나온다.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의 새로움은 부르주아 계약 관계를 그때까지 배제되어 왔던 요소인 정신 치료psychiatry에로 도입한 것에 있다. 보다 최근의 해결책들, 흔히 정치적 함의와 혁명적 야심을 동반한 해결책들을 우리는 제도적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다시, 코드화의 삼중의미가 있다: 법률적인 것이 아니라면, 계약 관계; 계약적인 것이 아니라면, 제도적인 것. 이러한 코드들 위에서 우리의 관료적 조직의 모든 형태가 번성한다.
우리 사회들이 점진적으로 탈코드화되고 비규정화unregulated되는, 우리의 코드들이 모든 지점에서 분해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니체는 재코드화의 시도를 하지 않은 유일한 사상가이다. 그가 말하기를: 여전히 그 과정은 충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어린아이들일 뿐이다("유럽인의 평등은 오늘날의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과정이다; 그리고 그 경향은 오히려 가속되어야 한다."). 니체는 그의 글쓰기와 사상에서, 탈코드화의 시도에 참가한다 ―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코드들을 탈암호화deciphering에 의한 상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코드들을 혼란시키며 코드화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함으로써 절대적 의미에서의 탈코드화. 그러나, 모든 코드들을 혼란시키는 것은 글쓰기와 사상의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조차도 쉽지 않다. 내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하게 대등한 것은 카프카가 프라하 유태인의 언어 상황과의 관련하에서 독일어에서 행한 것이다: 그는 독일어에서 전쟁 기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독일어를 향해 돌렸다. 어떤 불확정성과 엄숙으로 인해, 그는 그전에는 전혀 전달되어 본 적이 없는 독일 언어의 코드화된 한계 내에서 무언가를 표현한다. 유사하게, 니체는 그 자신이 독일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폴란드인이 되기를 유지하거나 가정하였다. 대가다운 언어의 공략siege을 통해 그는 코드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전달하게 되었다: 정치로서의 문체style의 개념.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법률들의 범위 내에서(그것들을 거부하는 동시에), 계약 관계들의 범위 내에서(그것들을 부인하는 동시에), 그리고 제도들의 범위 내에서(그것들을 조롱하는 동시에), 그것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사상의 목적은 무엇인가? 간단히 정신분석의 예로 되돌아가서,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과 같은 독창적인 사상가가 어째서 정신분석적 체계 내에 머무르는지 질문해보자. 그녀는 그것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들의 [감정의] 분출, 그들의 [의식의] 흐름과 함께, 그녀가 논의하는 부분 대상들partobjects은 환상들fantasies이다: 환자들은 그들의 생생하고 강렬한 경험들을 끄집어내고, 멜라니 클라인은 그 경험들을 환상들로 번역해낸다. 따라서, 어떤 계약, 즉 특수한 계약이 성립된다: 당신 경험의 상태를 나에게 주면, 나는 당신에게 환상들을 되돌려 줄 것이다. 계약은 어떤 교환, 즉 돈의 교환 그리고 말words의 교환을 나타낸다. 이제, 위니코트Winnicott와 같은 정신분석학자는, 어떤 점에서 이 계약적 과정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한계에서 작업을 한다. 환상들을 번역하고 기표signifier나 기의signified를 해석하는 것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은 때가 온다. 즉 공유되어야 할 시점이 오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환자의 상황에 두어야 한다, 당신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공감sympathy, 또는 감정이입empathy, 또는 동일시identification를 공유하는 것인가? 틀림없이 그것은 이러한 것보다 더욱 복잡하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법적이지도 계약적이지도 제도적이지도 않은 관계에 대한 암시적 필요성이다 ― 그리고 이것은 니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짜라투스트라에 의한 아포리즘이나 시를 읽지만, 이와 같은 텍스트들은 물질적이고 형식적으로 법률의 정초나 적용에 의해서도, 계약 관계의 제공에 의해서도, 제도의 설립을 통해서도 이해될 수 없다. 아마도 유일하게 있을 법한 해결책은 "승선embarkation"이라는 개념에 있을 것이다. 여기, 파스칼에게 되돌려진 파스칼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일종의 "메두사"의 뗏목에 승선한다; 뗏목이 얼음같은 지하수를 향해 ― 또는 아마존 오리노코의 작열하는 강을 향해 ― 표류할 때, 폭탄이 뗏목의 주위에 떨어진다; 탑승자들은 함께 노를 젓고, 그들은 서로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그들은 서로 싸우고, 그들은 서로를 먹는다. 함께 노를 젓는 것은 공유하는 것, 즉 법률, 계약 또는 제도 너머의 어떤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표류의,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의 시기이다. 이것은 하나의 가정, 즉 새로운 종류의 책인 니체의 텍스트들의 독창성에 관련한 모호한 인상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매우 느슨하고 혼란스런 방법으로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인상을 주는 니체의 아포리즘의 특성은 무엇인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그의 저작 {끝없는 대담L'Entretien infini}에서 눈부신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깥the outside, 외부the exterior와의 관계이다. 니체의 책들 중 하나를 임의로 펼치면, 당신은 그것이 의식의 내적인 영혼이라 불리든 개념의 내적인 본질 ― 즉, 항상 철학의 지도적인 원리로서 복무해온 것 ― 이라 불리든, 내부성interiority의 방법에 의해 계속 나아가지 않는 거의 기발한 경험을 한다. 외부와의 관계가 항상 내부에 의해 중재되고 용해되는 것은 바로 철학적인 글쓰기의 특성이며, 이 과정은 언제나 어떤 주어진 내부성 내에서 일어난다. 반면에, 니체는 그의 사상과 글쓰기를 바깥, 외부와의 즉각적인 관련 위에 토대를 둔다. 어떠한 아름다운 그림이나 도안처럼, 아포리즘은 틀 지워져 있다framed. ― 그러나 어떤 점에서 그것은 아름답게 되는가? 운동movement, 틀 지워진 선이 다른 곳에서 오며, 그것이 틀의 한계 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느끼는 순간에서부터. 그것은 틀의 아래 혹은 옆에서 시작되었고, 틀을 가로지른다traverse. 고다르의 영화에서처럼, 어떤 이는 벽으로with wall 그림을 그린다. 회화적 화면의 한계 설정이 되는 것을 너머서, 그 틀은 즉시 이 화면을 바깥에 관련시킨다. 그래서, 사고를 바깥에 붙들어 매는 것은, 철학자들이 예를 들어 정치에 관해 말할 때조차도 사실상 전혀 수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산책이나 신선한 공기와 같은 주제를 다룰 때조차도. 사고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바깥에 붙들어 매기 위해서 신선한 공기나 외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들은 운명처럼, 원인 없이, 이유 없이, 고려 없이 또는 구실 없이 온다; 그것들은 번개가 치는 것처럼, 아주 무섭고, 아주 갑작스럽고, 아주 설득력 있고, 싫어하는 것이 되기에는 너무 다른 것으로 거기에 있다." 따라서 니체의 축복 받은 텍스트는 국가의 정초자들, "동상bronze의 모습을 띤 저 예술가들" 위에 있다.
불가피하게 카프카의 {중국의 만리장성Great Wall of China}이 떠올려진다: "그들이 어떻게 국경으로부터 아주 먼 수도capital를 향한 모든 길을 통과해왔는지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어쨌건 그들은 여기에 있으며 그들의 숫자는 매일 아침 늘어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 . 그들과 대화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우리의 언어를 모른다. . . 그들의 말들horses 조차도 육식성이다." 어떤 경우에든, 우리는 그러한 텍스트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그 페이지에서(그전의 페이지들에서도) 시작하지 않는, 그 책의 틀에 의해 경계지워지지 않는 운동에 의해 횡단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표상representation의 상상적 운동이나, 단어들 사이에서 그리고 독자의 마음속에서 습관적으로 발생하는 개념들의 추상적 운동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떤 것이 책으로부터 뛰쳐나오고 책에 대해 순수한 바깥과의 접촉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니체의 전 저작에 대한 오독의 정당성이다. 아포리즘은 항상 서로 따로따로 유지되는 힘들forces의 혼합물이다.
아포리즘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으며, 기의가 아닌 것처럼 기표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텍스트의 내부성은 혼란 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아포리즘은 가장 근래의 힘 ― 가장 최근의, 가장 새로운 그리고 잠정적으로 가장 최후의 힘 ― 이 항상 가장 외부적인, 힘들의 유희이다. 니체는 이것을 매우 명확하게 한다: 만약 당신이 내가 의미하는 것을 알고 싶다면, 내가 말하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힘을 발견하라, 그리고 텍스트를 힘에 따라 결정되게 하라. 이러한 접근을 따른다면, 니체를 해석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단지 그의 텍스트를 구획하고, 외부적인 힘이 실제로 텍스트를 통과하도록 해주는 것, 말하자면 에너지의 흐름을 찾는 것과 같은 기계적인 문제가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파시스트나 반-셈족과의 공유점을 지진 니체의 어떤 텍스트에 의해 부과되는 문제들에 직면한다. 우리는 우선 여기서 니체가 다수의 젊은 파시스트들에게 자양분을 주었고 여전히 자양분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니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잘못 전취되고 완전히 변형되어왔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던 때가 있었다. 쟝 발Jean Wahl, 바따이유Bataille 그리고 클로소프스키Klossowski가 Ac phale 리뷰에서 이것을 행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니체를 원문 분석의 수준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 ― 우리가 그 수준에서 논쟁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논쟁이 더 이상 가치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제 문제는 해방의 의미, 즉 각기 다양한 문구들에 대한 외부성의 의미를 주는 외부적 힘들을 찾고 평가하고 조합하는 형태를 띤다.
니체 사상의 혁명적 특성은 방법의 수준에서 명백하게 된다: 니체의 텍스트를 그 자체로 "파쇼적인", "부르주아적인" 또는 "혁명적인" 것으로 성격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파쇼적, 부르주아적 그리고 혁명적 힘들이 격돌하는 외부적 장field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방법이다. 만약 우리가 그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제기한다면, 니체의 방법에 적합한 반응은 혁명적인 힘을 발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외부로부터 오고 니체적인 텍스트를 아포리즘의 뼈대 내에서 횡단하고 절단하는 새로운 힘들을 간파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정당한 오역이 있는데, 그것은 아포리즘을 현상phenomenon으로, 다가와서 그것을 "정복할", 또는 그것을 작동하도록 만들, 또는 심지어 그것을 폭발하도록 만들 새로운 힘을 기다리는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외부에 대한 그것의 관계에 덧붙여, 아포리즘은 강렬한 것과의 관계를 가진다. 클로소프스키와 리오따르가 보여주었듯이, 두 가지 특성은 동일하다. 어떤 지점에서 표상이나 환상으로 번역되어서는 안되는, 법률적, 계약적 또는 제도적 코드들에 의해 통과되어서는 안되는, 교환되거나 돈으로 바뀌어서는 안되는, 그러나 반면에, 우리를 보다 더 바깥으로 데려가는 역동적인 유출flux로 보이는 것이 분명한 그러한 체험된 상태들로 잠시 동안 되돌아 가보자. 이것은 정확히 강도intensity, 집중들이다. 체험된 상태는 기원에 있어 주관적이지 않거나 불가피하지 않다. 더욱이 그것은 개별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속적인 유출이고 유출의 파열이며, 각각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다른 강도와의 관계 즉, 접속contact과 전송transmission의 지점을 낳는다. 이것이 모든 코드들의 근저에 있는 것이고 모든 코드들을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코드들 자신이 번역하고 전환하고 돈으로 바꾸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니체는, 그 자신의 강도의 글쓰기에서, 우리에게 단순한 표상을 위해 강도를 바꾸지 말라고 말한다. 강도는 기표(표상된 단어)에도 기의(표상된 사물)에도 관련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만약 강도가 탈코드화의 작인agent과 대상object 양자 모두로서 복무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니체의 사상에 부과된 가장 불가해한 미스테리이다.
또한 고유의 이름들이 여기에서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것들은 사물들(또는 인물들) 또는 단어들의 표상들이 되도록 의도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Presocratics, 로마인들, 유태인들, 그리스도, 반그리스도, 줄리어스 시저, 보르기아Borgia, 짜라투스트라 ― 니체의 텍스트들에서 오가는 집단적 또는 개별적인 이 고유의 이름들은 기표들도 기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대지나 책이 될, 그러나 또한 니체 자신의 고통을 겪는 신체가 될 신체 위에 각인된inscribed 강도의 명칭이다: 역사의 모든 이름들, 그것이 나다. . . 일종의 유목주의nomadism 즉, 고유의 이름에 의해 명명된 강도들 내에서의 끊임없는 변위displacement, 단일한 신체에 의해 살아오고 경험된 동일한 시간에 상호 침투하는 강도들이 있다. 따라서, 강도는 신체 내에서 그리고 고유의 이름의 변화하는 외관 아래에서 유동적인 각인과 연관되어 있을 때에만 경험될 수 있으며, 따라서 고유의 이름은 항상 가면mask, 즉 그것의 작인을 가면 씌우는 가면이다.
아포리즘은 또한 세 번째 중요한 관계 ― 이 경우에는, 유머와 아이러니에 ― 가 있다. 웃지 않고 ― 자주, 풍부하게, 쾌활하게도 웃지 않고 ― 니체를 읽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니체를 전혀 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니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저항문화의 동일한 지평에 속한 다른 모든 작가들에게도 해당된다. 우리의 퇴폐decadence, 우리의 퇴보degeneration를 반영하는 것들 중 하나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그들의 고통, 고독, 죄악을 표현하며 만남들을 드라마화할 필요를 느끼는 방식이다. 막스 브로트Max Brod는 카프카가 {심판The Trial}을 읽을 때, 관객들이 어떻게 미친 듯이 웃었는지를 자세히 이야기한다. 사실, 베케트Beckett 조차도 웃지 않고, 환희의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가지 않고 읽기는 어렵다. 정신분열적 웃음 또는 혁명적 쾌, 이것은 위대한 책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소한 나르시시즘의 고통, 죄악의 공포가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초인의 희극, 신성한 익살이라 부를 수 있겠다. 위대한 책들이 추하고 절망적이거나 두려운 것들을 나타내 보일 때조차도, 말할 수 없는 환희가 항상 거기에서 튀어나온다. 그러하듯이, 모든 위대한 책들은 변이를 일으킨다; 그것들은 내일의 건강을 준다. 코드들이 혼란될 때, 사람들은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사유를 외부와의 접촉 하에 두게 되면, 사유는 자유의 공기를 띠고 디오니소스적 웃음을 자아낸다. 자주 일어나듯이, 니체는 자신이 느끼기에 메스껍고, 비천하며 비열한 어떤 것에 대면했음을 발견했을 때, 웃는다. ― 그리고 그는 어쨌든 가능하다면 그것을 과장하고 싶어한다. 그는 말하기를: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여라, 그것은 충분히 역겹지 않다; 또는 한편: 그것이 역겹기 때문에 놀랍고, 그것은 경이로운 것, 걸작, 독성 있는 꽃이다; 결국, "인간은 재미있게 되어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니체가 예를 들어, 나쁜 양심[죄의식]bad conscience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려하는 방법 ― 다루는 방법 ― 이다. 그러나 웃음의 의미를 가져본 적이 없는 헤겔주의적 주석가들, 내부성의 항존하는 주석가들은 말한다: 당신이 보듯이, 니체는 나쁜 양심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신spirit의 전개에서의 한 계기로 만든다. 물론 그들은 위험을 감지하기 때문에, 니체가 이 정신성을 이해한 것을 서둘러 무시한다.
만일 니체가 정당한 오역을 허락한다면, 완전히 부당한 오역도 있는데 ― 진지성의 정신, 위엄의 정신, 짜라투스트라의 원숭이로부터 기원한 모든 오역들 ― 그것은 내부성의 숭배cult이다. 클로소프스키와 리오따르가 지적했듯이, 니체에게 있어서, 웃음은 항상 아이러니와 유머의 외부적 운동, 강도들의, 강렬한 양들quantities의 운동을 지시한다. 낮은 강도와 높은 강도 사이의 자유로운 유희가 있다; 낮은 강도는 가장 높은 강도를 침식할 수 있고, 심지어 가장 높은 강도만큼 높은 것이 될 수 있다. 강도의 규모에 따른 이러한 유희는, 니체에게 있어서 아이러니와 유머의 오르내림에 영향을 미칠 뿐 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경험을 구성하거나 자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아포리즘은 웃음과 쾌의 순수한 질료이다. 만일 우리가 아포리즘에서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유머와 아이러니의 분배가 무엇인지, 강도들의 분할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의 최종적인 지점이 남았다. 국가 그리고 제국의 정초자들에 관한 {도덕의 계보학}에서의 훌륭한 구절로 되돌아 가보자. 거기에서 우리는 소위 아시아적 생산의 인간들을 만난다. 원시적 농촌 공동체의 기반 위에, 거대한 사업들을 조직하고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통치관료주의와 더불어, 이 전제 군주들despots은 모든 것을 과잉코드화하는 그들의 황제 기계들imperial machines을 구축한다("그들이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 곧 뭔가 새로운 것이 일어난다, 활기찬 지배 기구, 그 안에서 각 부분들과 기능들이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경계 지워지고 결정된다. . ."). 그럼에도, 이 텍스트가 다른 점들에서 구분되었을 두 힘들 ― 카프카가 {중국의 만리장성}에서 구분하였던, 맞서기조차 하였던 두 힘들 ― 을 함께 묶지 않는지가 또한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시적인 분할segmented 공동체가 어떻게 다른 형태의 통치권을 부여하는지 ― 니체가 {계보학}의 제 2부에서 제기하였던 문제 ― 를 발견하려 할 때, 우리는 두 가지의 엄밀하게 관련된 현상이지만 완전히 다른 사실이 생기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중앙에서는, 농촌 공동체들이 문필가들, 사제들, 공무원들과 더불어 전제 군주의 관료적 기계에 의해 흡수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변방에서는, 이러한 공동체들은 다른 종류의 모험을 감행한다. 그들은 또 다른 종류의, 이번은 유목적 집단, 유목적 전쟁 기계로 들어가며, 그들은 그들 자신을 과잉코드화overcodify되기를 승인하는 대신에 탈코드화하기 시작한다. 모든 그룹들이 떠난다; 그들은 유목민이 된다. 고고학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유목주의를 최초의 상태가 아니라, 바깥과 이동에 대한 유혹으로 강제된 정주 그룹들에 의해 갑자기 발생된 모험으로 생각하도록 이끌어 왔었다. 전쟁 기계를 가진 유목민은 통치 기계를 지닌 전제 군주에 대항한다: 외재적인extrinsic 유목 집단은 내재적인intrinsic 독재자 집단에 대항한다. 그러면서도, 독재자의 목적은 유목 전쟁 기계를 통합하고, 내부화internalize하는 것이 될 것이고 유목민의 목적이 새로이 정복된 제국에 대한 통치를 발명하는 것이 될 것인데, 이것은 상관적이고 상호침투적인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혼동스럽게 되는 지점까지 끊임없이 서로 대항한다.
철학적 담론은 제정imperial 집단으로부터 생기며, 무수한 변형들, 즉 우리를 제국의 설립에서 그리스의 도시로 이끌어 온 것과 동일한 변형들을 통과한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내에서도, 철학적 담론은 전제 군주와의(또는 적어도 전제 군주의 그림자 내에서), 제국주의와의, 사물들과 사람들의 통치와의 면밀한 관련 속에 남아 있었다(레오 스트로쓰L o Strauss와 코제브Koj ve는 이것의 다양한 증거들을 그들의 저작 {폭정에 관하여On Tyranny}에서 보여준다). 철학적 담론은 항상 본질적으로 법률, 제도들 그리고 계약들과 관련되어 왔다 ― 종합하면, 그것들은 통치권의 문제를 구성하며, 최초의 전제 국가들에서 근대의 민주주의들에 이르기까지 정주 민족들의 역사의 일부가 되어왔었다. "기표"는 진정 전제 군주의 마지막 철학적 변형이다. 그러나, 만일 니체가 철학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가 저항-철학counter-philosophy으로서의 또 다른 종류의 담론을 생각해낸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담론은 무엇보다도 유목적이다; 그것의 진술들statements은 이동 전쟁 기계에 의한 산물들로 생각될 수 있으며, 합리적․통치적 기계, 순수 이성의 관료들로서의 철학자들에 의한 산물로 생각될 수는 없다. 니체가 그와 더불어 시작하는 새로운 정치(클로소프스키는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계급에 대한 책략이라 부른다.)의 도래를 알리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일 것이다.
유목민들이 우리의 정치권력 하에서 비참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는 그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어떠한 먼 거리도 갈 것이고, 그들은 쉽게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니체는 그림자로 환원되고, 갖추어진 공간furnished room에서 갖추어진 공간으로 이동하는, 그런 유목민처럼 살았다. 그러나 유목민은 반드시 이동하는 자는 아니다: 어떤 여행들은 원래의 장소에서in situ 일어나며, 강도에서의 여행들이다. 역사적으로도, 유목민들은 반드시 이주민들처럼 이동해 다니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동하지 않는다; 유목민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장소에 머무르며, 정착한 사람들의 코드들을 지속적으로 벗어나는 이들이다. 오늘날의 혁명에 있어서의 문제는, 당 또는 국가 장치의 전제적이고 관료적인 조직으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개별적인 투쟁의 통일체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있다. 우리는 국가 장치를 재생산하지 않을 전쟁 기계, 내부적인 전제적 통일체를 부활시키지 않으며 바깥과의 관계를 가진 유목적 통일체를 찾는다. 아마도, 이것은 니체의 사상에서 가장 심오한 것이며, 적어도 그것이 아포리즘에서 나타나는 한에는 철학과의 단절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는 사고에서 전쟁 기계를, 유목적 힘을 만든다. 그리고, 비록 여행이 움직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비록 그것이 지각불가능한, 예기치 않은 그리고 은밀한 지점에서 일어날지라도, 우리는 자신에게 "오늘날 우리의 유목민, 우리의 진정한 니체주의자는 누구인가?"를 물어야만 한다.
해체론에서 생성의 철학으로
- 들뢰즈와 데리다 -
1. 고(苦) ; 고(考)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스러움의 양상 중에서도,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육체의 상태 ― 알리바이 없는 과거의 경험과 가물거리는 기억, 어떤 사물이나 사건 앞에서 무한한 쾌나 고통을 느꼈을 때의 기분 등등 ― 와 같은 자신에게 분명한 하나의 증상 또는 징후를 도무지 언어라는 것으로 표현해내지 못할 때 가지는 고통이 있다. 이것은 언어라는 무의식적 기제 속에 살고있는 우리에게는 분명 메타-징후 또는 메타-감정이다(메타-언어라고 해야할까?).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 시키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감정, 자신의 징후를 언어화 시키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징후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단지 고통으로 인한 비명소리만 있을 뿐... 일그러진 웃음과 함께? 또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지 못한다면 더욱 힘든 상황이 연출되리라. 의사에게 나의 징후는 전달되어져야만 하는 것이기에 나의 언어는 주관적인 징후를 객관적인 진술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이 자신의 문제를 언어화 시켜내지 못할 때 철학은 고통스럽다. 철학은 자신의 전지전능함omnipotence을 과시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언어를 그 안으로 끌어들여서, 바깥의 다른 모든 것을 끌어당겨서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할 수 있는 한 철학은 그러므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해서는 안되는 고통도 있는 것이다.
해체론 시대에 철학이 다다랐을 때에도 여전히 철학은 웃을 수 있다. 전통적 철학에서 형이상학의 여백들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추스르며 자신을 해체하는 것마저도 겸허하고 자신 있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해체론은 결국 미학으로 자기입장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학은 원래 형이상학의 극복으로 출현하였으며 형이상학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기 위해 애써왔다. 해체론은 역사의 의미와 의미의 역사를 동시에 탈구성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해체론적 단절 한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1) 해체론적 철학은 예술이라는 철학 바깥의, 단지 철학 안으로 포섭되기에는 줄곧 앞서가는 예술의 철학, 그리하여 미학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자신이 해체하려는 것이 미학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해체론은 결국 미학이 될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철학이 자신의 정체성 회복과 변형을 위하여 만나는 비철학은 신학이나 과학이 아니라 무엇보다 예술이다. 해체론적 형태의 철학들은 이 예술 안에서 다시 태어난 철학이다. [……] 그렇게 소외를 겪고 자기 상실의 위기감에 빠져 있는 예술에서 해체론은 어떤 야수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랑한다. 고전적 형태의 철학을 거부하는 예술의 특이 체질 안에서 시대를 바꾸는 전복적 부정성을 알게 되고 그것을 숭배한다. 새로운 형태의 철학은 이러한 숭배 속에서 소생하고 있다.2)
해체론이 이와 같이 예술을 숭배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것은 해체론과 더불어 조금 더 넓은 의미인 포스트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 전반의 경향들과 일치한다. 전통 철학의 여백을 공히 예술의 영역에서 발견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예술은 진정으로 이 시대의 철학이 사랑하고 숭배할만한 것일까? 소외와 자기 상실에 빠져있는 예술에서 '특이 체질'3)과도 같은 어떤 전복적인 부정성을 발견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베르슈타인이 {예술의 운명}4)에서 따랐던 길들을 다만 편승하는 방법으로 칸트와 하이데거(이들은 깊이 다루지 않을 것이다.)로부터 데리다에 이르는 데까지 추적할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의 극복으로서 데리다의 해체론의 의의를 살펴보고 해체론이 비껴나고 놓치는 부분을 발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아가서 데리다 또는 해체론이 극복해내지 못하는 점을 들뢰즈가 극복할 수 있는지 찾아 볼 것이다.
2. 자율적 예술
베른슈타인은 {예술의 운명}에서 미적 소외aesthetic alienation를 이야기한다. 미적 소외란 무엇인가? 소외된 것은 무엇이며, 무엇으로부터 소외되었는가? 그는 예술이 진리로부터 소외되었으며 이를 미적 소외라고 한다. 하지만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예술과 진리 사이의 불협화음이 왜 현재에 와서 문제란 말인가? 예술과 진리 사이의 헤게모니는 언제나 진리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예술이 진리로부터 소외되었는데, 그것은 예술의 자율성이 심화되고 그럼으로써 근대적 구성체 속에서 다른 영역들로부터 범주적으로 분리되고 추방되었다고 한다.
칸트는 이러한 시기에 예술이 자율성을 획득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의 분석과 숭고의 분석을 포함하는 미감적 판단력 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을 통하여 철학 일반의 영역에서 미학의 자율적 근거를 확고히 하였다. 감성적인 것의 자율성과 인간적인 것의 신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 나아가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서의 주체의 인정을 칸트는 이루어 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칸트가 모더니즘의 시대와 함께 시작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반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주관성과 더불어서 말이다.
모더니즘의 시기는 모든 체계의 파편화와 분화 또는 개별화를 그 특성으로 한다. 근대와 더불어 생성되는 주체, 천재, 취미, 비판과 같은 개념은 그러한 개별화에 대한 표상이기도 하며, 그러한 표상들과 더불어 근대의 미학과 미적 담론들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의 분화는 결국 미학의 생성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예술이 진리와 도덕에 대한 종속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기 시작하는 시기가 미학이 학문으로서 자립하여 자신의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미학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즉 미학은 스스로 자율화를 쟁취하기 위해서, 진․선․미의 통일적인 체계로부터 미, 예술의 영역을 파편화시키고 영역화시키며 순수화시키는 (결국 자율성을 부여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불가피한 일이었다. 진․선․미가 통일된 체계라는 것이 결코 그 완결된 체계 안에서 그 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체계라고 볼만한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체계의 완결성에 이바지하던 모종의 전체주의적 독재(신학과 철학에 의한?)가 근대에 와서 자신들의 권위를 점점 상실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성)의 시기에 이르러서 미의 영역에서 미학은 노선을 급선회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며 스스로의 헤게모니를 구축하려한 것이다(이것이 근대 미학이 성립하게 되는 유력한 근거이다). 또한 예술은 해방적, 탈구조적인 그 본성상 어떠한 철학적 담론과도 대화를 중단하고 오로지 자신의 내부로만 침잠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붙잡으려는 철학(미학)과 도망치려는 예술; 그 사이에 묘한 공생 관계. 예술은 자유를 쟁취할 것인가, 다시 노예로 전락할 것인가?
3. 예술의 종언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의 본질을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das Sich-ins-Werk-Setzen-der Wahrheit des Seienden)"5)이라고 정의한다. 이 말에서 하이데거는 그때까지 예술이 수공적 기술과 구분되며 미적 기술로서 진리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된 적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미 또는 예술을 진리와 연관을 가진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것에서 전통적인 모방론, 즉 예술은 현실적인 것의 모방이나 묘사라고 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며, 자신의 이론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혹시 그때그때마다 눈앞에 실재하는 개별적 존재자의 재현이 아니라, 그들 사물들의 보편적 본질의 재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6)인데, 그 보편적 본질은 또 실체가 주어지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미학이 예술 작품을 존재자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의 지배 아래에서 고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에 관해 사색"함으로써, "비로소 작품의 작품다움, 도구의 도구다움, 사물의 사물다움에 더욱 가까워짐"을 깨닫는다고 한다.7) 하이데거는 지나치게 예술의 작품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한다. 나아가서 예술을 진리가 되어가고 일어나는 하나의 방식으로까지 진리와의 근원적 연관성을 부각시킨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근원]의 후기에서 헤겔의 {미학 강의}를 인용8)하면서, 헤겔의 주장의 배후에 숨겨진 그리스로부터 내려온 서구의 전통적 사유가 깔려 있고 그 사유가 존재자의 진리에 따라 말해왔을 뿐이기 때문에, 헤겔의 주장에 대한 진위 결정을 유보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관점, 즉 헤겔의 주장에서 언급되는 진리가 어떤 진리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결국,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 사유라 할 수 있을 주장들을 따라가는 과정에서는 그의 끊임없는 미와 진리의 동행Zusammengehen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칸트로부터 획득되었던 예술 또는 미의 자율성의 영역이 헤겔과 하이데거에 의해 다시 진리 또는 이념이라고 하는 것으로 되돌려지려는 징후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무엇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들의 지나치게 역사 철학적인 사유가 그들로 하여금 과거에 대한 숭배와 현재에 대한 불신과 무력화를 낳게 하고, 근대에 이르러 점차 자율적으로 되어 가는 예술에 대해 회의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에게 '예술의 종언' 혹은 '예술의 죽음'을 말하는 헤겔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명제가 말하는 것은 예술의 현실적 소멸이나 전적인 무용성이 아니다. 다만 예술이 진리 사유의 최종적 심급이 되던 시기가 지났다는 것을 말하며, 그래서 문화 일반에 대한 최종적 입법의 권리가 예술로부터 다른 영역으로 이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헤겔에게나 하이데거에게 진리를 사유하는 최고의 형식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철학에 있다.9)
이런 대목에 이르르면 예술과 철학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이 보이게 된다. 예술은 제갈길을 가야하고 (헤겔과 하이데거의, 거슬러 올라가 플라톤의) 철학은 쉬지 않고 자신의 영향력 안으로 예술을 포섭하고, 지배하려 한다. 베른슈타인은 이쯤에서 하이데거의 이론을 독해하는 데리다에게로 눈을 돌린다. 데리다에게로 집중하게 되는 것은, 하이데거에게서 부족한 근대 예술의 역할에 대한 설명과 하이데거에게서 보이던 존재와 존재의 역사라는 추상적 개념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이중적인 목적으로 가진 것이다.
4. 해체론 ; 차이의 철학
데리다의 해체론은 넓게 보아서 프랑스 현대 철학의 조류에서 커다란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그 사상적 기원은 아무래도 3H(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비롯한 포스트 구조주의와 같은 현대 철학은 그 3H의 시대를 사로잡았던 헤겔의 변증법과 동일성의 철학에 도전하는, 그럼으로써 "차이를 동일성의 단순한 반대로 여기거나 동일성과 변증법적으로 동일하다고 간주하지 않는, 즉 차이에 대한 비모순적, 비변증법적 사고의 길을 닦는 것"10)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 비단 데리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닐지라도, 데리다의 해체론은 그러므로 차이diff rence를 인정하고 사유하는 철학적 담론의 글읽기와 (다시)글쓰기 작업이라고 되는 것이다.
데리다 자신이 생각하는 해체d construction란 무엇일까? 우리는 해체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데리다는 해체라는 용어의 부각을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 여러 단어들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그에게 그것은 다른 많은 단어들(예컨대 흔적trace이나 차연diff rance처럼)과의 연쇄망 속에 위치한 한 단어에 불과하며, 그가 정확히 어디에 썼는지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한두 번 썼던 이 단어가 갑자기 텍스트 밖으로 튀어나가서 그들 마음대로 그 단어에 대한 운명을 결정했던 사람들에 의해 포착되었다11)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그만큼 데리다는 자신의 사유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술어나 용어를 '현존'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해체들은 시작되지도 어느 지점에서 끝나지도 않으며, 해체가 역사 인식의 지표들(시대, 시기, 혁명, 변화, 단절, 출몰, 급변, 에피스테메, 패러다임, 주제)과 더불어 선회하는 역사의 내부에서 발생하지 않음을 주장한다.12) 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현전도 역사 철학적인 관점도 자신의 철학을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사유의 방법은 데리다가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방법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그 형이상학에 대항하고 상처내기 위한 방법이다. 아니, 하나의 전략이고 전술이다. 데꽁브는 이것을 "이중의 게임"이라고 부른다.
데리다는 '이중의 게임'("이중스파이"가 양쪽에 봉사한다는 의미에서)을 치룰 것을 선택한다 : 전제적 규칙에 복종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딱 잘라 해결할 수 없는 경우들을 제기함으로써 그것에 덫을 놓는 것. '해체'의 전략은 절대적 담론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결국" 아무런 할 말도 없는 그 순간에 말하도록 하는 술책이다. 이상이 철학에 의해 제기된 딜레마를 궁지에 몰아넣는 전략이다.13)
진리가 옳다는 것을 이성이 언제나 정당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의의 제기와 부정이 그것의 외관에만 작동할 뿐이라는 것을 데리다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이중의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체, 즉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하는 방법은 텍스트가 그 자신의 모순된 논리로 붕괴하도록, 말하자면 그 내부에서, 스스로 해체하게 하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 방법은 모든 사유의 방법을 배태하며 흡수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최상의 전술이다.
그러나, "지배자를 '살해하기' 위하여 지배자의 언어로 말하는 척하는"14) 데리다의 음모는 데리다의 독자에게 가끔씩(자주) 혼란스럽다. 분명 살인 사건은 발생했으나, 누가 왜 살해했는지 밝혀지지 않는 추리 소설과도 같이, 때론 정신 병동을 무대로 벌어지는 살인 사건에서 결국 정신과 의사가 미치광이이고 범인이라는, 그래서 나중엔 정신병자인 관객마저도 그 광기의 살풀이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싸이코드라마처럼 독자와 관객을 사유와 광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그의 글쓰기는 읽혀지고 다시 쓰여져야 하지만, 또 그래서는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읽혀야 하나 읽혀지지 않는, 읽어야 하나 읽지 못하는, 읽었어도 말하지 못하는 중얼거림과 우물거림, 고개의 끄덕임만이 남는다. 해체 수행자로서의 데리다는 저자author이면서 권위authority이지 않은가? 비록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데리다의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글쓰기이면서도 또한 철학소들을 ― 따라서 우리의 문화에 속하는 모든 텍스트들을 ― 철학의 역사에서 제시될 수 없으며, 어디에도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의 징후(sympt me)로서 읽게 하는 글쓰기"15)이면서, 저자 자신은 그의 텍스트에서 자신의 어떠한 흔적도 남기려 하지 않는(또는 남기지 않는 척한)다는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자신의 목적은 글쓰기로서 정당하게 달성되지만,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점에서 스스로는 모든 이후의 비판의 가능성을 회피하려는 듯한 의심을 사게 한다. 한 발짝 더 나아간다면, 데리다의 글쓰기 이후에는 어떠한 글쓰기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단지 해체된 텍스트만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데리다는 자신의 글쓰기가 '예술'이 되기를(하나의 '예술 작품'과도 같이) 혹은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출몰하는 "유령선", 끊임없이 떠도는 "유목민"의 삶과 같은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가 "텍스트-바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와 같은 우리의 의심(해체주의의 함정?)에 어떤 힌트를 주는 것이다. 로널드 보그의 말을 빌리면, "데리다의 '텍스트'는 전(前)-존재론적이며 전(前)-논리적이다. 그것은 이성적인 것도 감각적인 것도 아니며, "의미와 무의미의 대립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원(原)-글쓰기'의 영역"16)인 것이다. 데리다의 텍스트는 그가 해체하려고 하는 형이상학의 다른 얼굴이고, 전통 철학적 이원론의 가능성이기도 하면서 전복의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외디푸스적인 자기 대면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를 죽이지만 자신도 (아들에 의해 죽음을 당할 운명에 처한) 아버지가 된다. 이제 이런 데리다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인가? 아니면 그와 함께 숨쉬고 그의 텍스트 안에 집을 짓고 벽들과 창문을 만들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
5. 해체 이후 ; 생성의 철학
데리다가 초토화시킨 현전의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의 영역을 넉놓고 보고 있을 수 없다면,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마주한다. 눈과 귀를 막고 형이상학의 도구를 사용하여 다시 한 번 차이들을 통일할 신전의 건립을 시도할 것인지, 아니면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하는 유목민들의 집을 지을 것인지... 이런 갈림길에서 또 다른 차이의 철학자, 들뢰즈는 나름의 길을 간다.
철학은 항상 개념을 창출해내는 데 있습니다. 나는 형이상학의 지양 혹은 철학의 죽음에 관하여 근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철학은 늘 완전히 현시적인 기능, 개념들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 대신 아무도 그것을 해줄 수가 없습니다. […] 정보 과학, 전달 매체, 상업적 선전 등 […] 이같은 세력들 앞에서 철학은 왜소하고 외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철학이 만일 죽게 된다면, 그것은 웃다가 죽은 것입니다.17)
철학에 있어서 데리다의 실천이 '이중적 글쓰기'라면, 들뢰즈의 실천은 '개념들의 창조'이다. 데리다가 "철학을 기본적으로 텍스트 주석 내지 해석으로 보는 해석학적 전통 속에서 작업한다"18)면, 대조적으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예를 따르고 있으며, 패러독스들의 일관된 논리(또는 반논리)에 따라 조직화된 개념들의 복잡한 체계를 창조하고 있다."19) 두 사람은 모두 역설적인 개념들(차연, 파르마콘; 집, 우주, 비인간적 생성 등)을 만들어 내어 사용하고 있지만, "들뢰즈는 이들을 전통적인 텍스트들 내에 다시 집어넣기보다는 대안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한 벽돌들로 사용한다"20)는 점이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들뢰즈가 "데리다처럼 철학을 주석의 형태로 다루지 않으며, 나아가 그는 사유가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 안에 머무르면서 영원히 형이상학과 투쟁해야 한다고 보지도 않는다"21)는 점이 들뢰즈가 데리다를 넘어서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데리다를 한갓 주석가로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가 철학적 사유를 텍스트 내부에만 한정하고 무한한 우주적 사유, 힘의 사유, 생동의 사유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사유는, 무한 속에서 모든 일관성을 혼란시키고 해쳐놓는 '카오스'와 내재성을 무언가에 내재한 것으로, 관조의 대상, 반성의 주체, 소통에서의 다른 주체로 해석하는 '초월성' 양자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것으로 본다. 말하자면, "철학의 문제는, 사유가 뛰어드는 무한을 놓치지 않으면서 어떤 일관성을 획득하는 것이다."22) 사유는 '내재성의 구도plan d'immanence'23)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사유의 이미지. 들뢰즈는 푸코와의 대담에서 이론적 실천에 관하여, "... 우리는 한 이론을 고치기보다는 새로운 이론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24)고 말한다. 사유가 가지는 실천으로서의 창조적 성격을 보여주는 말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철학(또는 사유)은 형이상학의 무한궤도 안에서 지속적으로 흠집내기/투쟁하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혼돈으로서의 야생적 살chair에 집과 골조물을 세워내고 무한성의 우주로 나아가는 부정에 대한 진정한 긍정, 부정을 해방시키는 긍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 무한한 사랑이 깃든 긍정에서 앞으로의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푸코의 예언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저자에 대해 글을 쓸 때, 내가 지니는 이상은 그에게 슬픔을 야기시킬 어떤 것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이미 죽은 저자라면, 그로 하여금 그의 무덤 속에서 울게 만드는 어떤 것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저자에 관해서 생각한다는 것. 그의 최상을 생각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대상이기를 그만두게 하는 것. 박학과 친숙함의 이중적인 불명예를 피하는 것. 그가 줄 수 있었고 발명할 수 있었던 이러한 즐거움, 힘을, 사랑하는 삶과 정치적 삶을 약간이나마 되돌려주는 것."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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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예술],{문학과 사회}(1996, 겨울), 1794쪽 참고.
2) 위의 글, 1799쪽.
3) idiosyncrasy는 자기만의 언어를 말하는, 그래서 백치idiot라고 불리는 것처럼 내적으로 아주 강한(주관성이 강조된) 특성을 보여주는 용어이다.
4) J. M. Bernstein, The Fate of Art : Aesthetic Alienation from Kant to Derrida and Adorno, Polity Press(UK), 1992. 이하 {예술의 운명}은 본 책을 말하는 것임.
5) M. Heidegger, [예술 작품의 근원], 예전사, 1996, 41쪽.
6) 앞의 책, 42쪽.
7) 앞의 책, 45쪽.
8) "이제 우리에게 있어 예술은 더 이상 진리가 존재를 창조해 가는 최고의 방식은 아니다. [……] 예술의 형식은 더 이상 정신이 필요로 하는 최고의 것이 아니다. [……] 예술은 그 최고의 규정적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우리에게 과거의 것이 되었고, 또 그런 것으로 남아 있다.", {예술 작품의 근원}, 101쪽.
9)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예술], {문학과 사회}(1996, 겨울), 1820-1쪽.
10) Vincent Descombes, {동일자와 타자}, 인간사랑, 1990, 169쪽.
11) Jacques Derrida, {입장들}, 솔, 1992, 11쪽(편역자 서문). 데리다의 {오늘의 프랑스 철학}(1983)에서 편역자가 인용한 말을 재인용함.
12) Jacques Derrida, ['광기'가 사유를 감시해야 한다], {입장들}, 솔, 1992, 153쪽 참고.
13) {동일자와 타자}, 172쪽.
14) 앞의 책, 173쪽.
15) Jacques Derrida, [함의(含意)], {입장들}, 솔, 1992, 29쪽.
16) Ronald Bogue, {들뢰즈와 가타리}, 새길, 1995, 249쪽 참고.
17) Gilles Deleuze, [철학에 관하여], {대담}, 솔, 1993, 144쪽.
18) {들뢰즈와 가타리}, 250쪽.
19) 앞의 책, 251쪽.
20) 앞의 책, 251-2쪽.
21) 앞의 책, 252쪽.
22) Gilles Deleuze,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66쪽.
23) 들뢰즈는 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념들의 창조와 그 개념들이 배치되는 '내재성의 구도'의 구축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24) {들뢰즈와 가타리}, 255쪽, 들뢰즈와 푸코의 [지식인과 권력], {언어, 반-기억, 실천}에서 재인용.
25) {들뢰즈와 가타리}, 258쪽, 들뢰즈의 Dialogues, avec C. Parnet에서 재인용.
긍정과 기쁨의 철학; 스피노자와 니체
1. 표현으로서의 속성들
들뢰즈의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자기 원인(causa sui), 실체(substance), 속성(attribut)과 양태(mode), 그리고 무엇보다 신에 대한 정의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인간의 예속과 자유라는 실천적․윤리적 문제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표현"이라는 개념의 놀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가로지르면서 그 원리들을 독해하는 가운데 줄곧 그 중심을 차지할 "표현"의 역할과 중요성이 친절하게도 서문에서 서술된다. 신에 대한 최초의 정의인 {에티카} I부 정의6, "신에 의해,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무한한 속성―각각의 속성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으로 구성된 실체를 이해한다."1)에서, 들뢰즈는 표현 개념이 지닌 중요성을 모색할 수 있게 해주는 최초의 싹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그 정의를 이처럼 이해한다:
i)각각의 속성은 어떤 무한하며, 영원한 본질, 즉 특정한 종류의 속성에 상응하는 하나의 본질을 표현한다; ii)각각의 속성은 실체의 본질, 그것의 존재 혹은 실재(realite)를 표현한다; iii)각각의 속성은 실체적 실존(l'existence)의 무한성과 필연성을, 즉 영원성을 표현한다. 2)
이러한 속성들의 표현적 본성에 대한 이해는 1차적 수준의 표현이고, 나아가 2차적 수준의 표현은 양태들에서도 나타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성을, 달리 말해 신의 본질을 어떤 그리고 한정된 방식으로(즉, 어떤 양태 아래서―들뢰즈) 표현한다"({에티카} I부 정리36의 증명).3) 따라서, 속성들은 자신들을 자신들에 종속된 양태들 내에서 표현하고, 그러한 각각의 양태들은 속성들의 변양(modification)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표현의 두 차원은 스피노자의 자연에 대한 구분에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신은 자신 안에서 natura naturata를 산출함(produisant)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 이전에, 신은 자신 속에서 natura naturans를 구성함(constituant)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4) 들뢰즈의 이러한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존재론적 차원에 대한 논의는 속성들을 매개항으로하여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일자(l'Un) 혹은 무한자와 다자(le multiple)혹은 개별자라는 두 축 사이에서 존재의 단성성(univocite)을, 또한 내재성(immanence)을 주장할 수 있게되는 단초가 된다: 무한자는 개별자를 통해서만 스스로가 펼쳐지고(unfold) 표현되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 속에 함축되어(involved)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이 무한자와 개별자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속성들은 곧바로 표현들이 된다.
표현은 triade로 제시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실체, 속성들, 그리고 본질을 구별해야 한다. 실체는 스스로를 표현하고, 속성들은 표현들이며, 본질은 표현되어진다(강조-인용자). [...] 스스로를 표현하는 실체, 실체를 표현하는 속성, 표현되어지는 본질.5)
이처럼 (그 자체로) 표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속성들이 지닌 어떤 전복적 가치는, 신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있어서 부정 신학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대립을 보여주는 점이기도 하다. "내재성은 탁월성(eminence)에 대립되고, 범신론은 초월성에 대립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부정적이고 유비적인 일체의 이원론에 반대"6)하는 것이 된다.
{에티카}의 I부 정의6을 뒤따르는 들뢰즈의 해석은 신의 정의에서 실체의 단성성, 속성들(표현)을 통한 존재의 긍정에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사변적 원리만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속성들은 긍정들이다. 그러나 긍정은 그 본질에 있어서 언제나 형식적(formel)이고 현실적(actuel)이며 단성적이다: 긍정이 표현적인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순수한 긍정의 철학이다. 긍정은 {에티카} 전체가 매달리고 있는 사변적(speculatif) 원리이다.7)
마이클 하트는 "사변은 세계를 구성하거나 존재를 건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존재가 구성되는 근본적인 원리들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뿐이"8)라고 하면서, 스피노자의 존재의 단수성, 단성성, 내재성을 긍정하는 존재론적 사색으로부터 스피노자적 실천의 생산적․구성적인 본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인 매개로서 또 하나의 존재론적 원리를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스피노자적인 "역량(puissance)"의 원리이다.
2. 스피노자적인 역량의 원리
스피노자의 역량의 원리는 신의 현존에 대한 후험적(a posteriori) 증명들에서 그 싹을 발견 할 수 있다. {에티카} I부 정리11의 증명3을 하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i)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역량을 갖는다는 것이다; ii)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가 현존하지 않는데, 유한한 존재들이 현존한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존재들이 보다 많은 역량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iii)그러므로,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거나 아니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역시 현존한다; iv)우리가 현존하므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현존한다.9)
이것은 단순한 신의 현존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역량을 곧 존재가 실존하는데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들뢰즈는, 역량은 사실 본질과 동일하다고 하면서, 모든 "역량은 언제나 작용[활동](acte)이거나 적어도 현동적(en acte)"10)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량 개념은 존재가 지닌 생산적 본성과 관련하여 본질적으로 하나의 능동작용(action)의 원리를 제시함과 동시에, 같은 정도로 변용(affection)의 원리도 제시한다: potentia와 potestas. 들뢰즈가 보기에, "스피노자주의에서 모든 역량은 그에 상응하고 그와 분리 불가능한 변용되는 능력(pouvoir d'etre affecte)을 지니고 있다".11) 그러므로, 역량은 언제나 동등하며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작용하는 역량(puissance d'agir)과 겪는 역량(puissance de patir) 혹은 생산과 감성(sensibilite). 이것은 앞으로 니체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을 역량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다.
스피노자에게서 다시 역량에 관한 테마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양태들의 수준에서, 신체와 정신 사이의 서로 규정하지 않는 관계를 증명할 때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III부 정리 2의 주석에서,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지금까지 아직 아무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도 모든 신체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신체 구조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기존의 신체가 정신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들뢰즈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신체의 구조는 어떠한가?"라는 두 질문이 동등한 것이라고 본다; 신체의 구조, 그것은 신체의 관계의 구성(composition)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신체의 변용되는 능력의 본성과 한계이다.12) 스피노자는 신체가 정신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신체의) 변용은 능동적(active)일 수도 있고 수동적(passive)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 변용의 원인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에 따라, 혹은 그 변용의 관념이 어떠하냐에 따라 나뉘어진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affect(affectus)"라고 부른다: "나는 affect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의 어떤 적합한(adequate)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나는 affect를 능동작용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작용으로 이해한다."13) 이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은 우리의 변용되는 역량을 가득 채우며, 서로 반비례하여 전체의 동일한 역량을 구성한다. 이는 곧장 우리에게 하나의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어떻게 능동적 변용들을 선호할 수 있는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변용되는 역량이 수동작용들이 아닌 능동작용들로써 대부분 채워질 수 있는가?
역량의 문제, 신체의 문제가 곧 실천의 문제, 윤리의 문제와 직결된다. 어떻게 나의 신체가 능동작용으로 가득 차도록 운용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대한 대답을 구하는 과정으로 들뢰즈의 니체를 참조할 것이다. 비록 스피노자의 출발점과 니체의 출발점이 전혀 다를 수는 있지만, 니체가 오른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구름 위로 솟아 있는 이웃의 봉우리에서 스피노자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혹은 역으로도), 두 철학자의 깊은 유사성은 거장들의 유사성으로서 궁극적으로 철학의 근본적인 지점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도도한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14)
우선 스피노자적 윤리학의 실천적인 질문들을 니체의 힘 혹은 역량, 그리고 권력의지(volonte de puissance)와 권력감정(sentiment de puissance)의 이론에 적용시키며, 니체에게서 작동하는 힘과 역량의 테제들을 독자적으로 밀고 나가서, 종국에 이르러서는 다시 스피노자에게로 돌아오는 우회로를 가보자.
3. 니체의 힘과 역량의 이론; 권력의지, 권력감정
우리는 이제 "니체에게서 신체(물체)를 구성하는 힘들(forces)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를 쓰기 6년 전, {니체와 철학}에서 이미 니체의 "능동적인 것/반동적인 것(actif/reactif)"15)것의 구별을 통해 스피노자적인 신체의 힘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나의 신체 속에서 우월하거나 지배하는 힘들은 소위 능동적이고, 열등하거나 지배받는 힘들은 소위 반동적이다. 분명히 힘과 힘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원초적인 질(qualite)들은 능동적이거나 반동적이다.16)
들뢰즈는 니체의 사유에서, "정신의 발전에 있어 신체만이 문제이며, 의식이 겸손하게 되는" 어떤 징후를 발견한다. 니체는 의식을, 항상 우월한 것(존재 혹은 신체)과 관련한 열등한 것의 의식으로 바라보며, 거기에서 의식의 노예성을 지적한다. 니체에게서, 의식은 본질적으로 반동적[반응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체가 무엇일 수 있는지,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스피노자와의 유사성!). 그렇다면, 신체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힘의 장(場, champ), 다수의 힘들이 투쟁하는, 영양을 제공하는 환경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것은 '환경'도, 힘이나 전투의 장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니체를 따라, 신체를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간의 관계"로 정의하고, 나아가 "힘의 모든 관계가 하나의 (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적) 신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17)
이러한 신체에 대한 우위 주장, 힘들의 관계에 의한 신체의 정의에서,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들뢰즈는 말하기를:
참된 문제는 그것들 없이는 반작용들(reactions) 자체가 힘이 될 수 없는 능동적 힘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인 힘들의 능동활동(activite)은 신체를 모든 반작용들보다 우월한 어떤 것 그리고 특히 의식이라고 불리는 자아의 반작용보다 우월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18)
그러나, 니체가 "승리의 개념"이라고 부른 "힘"은 어떤 보완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권력의지"라고 하는 하나의 내적인 의욕(vouloir)이다. 들뢰즈는 권력의지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권력의지는] i)힘과 힘의 관계를 규정하고 힘의 성질을 생산하는 미분적 요소, 계보학적 요소이다. ii)권력의지는 힘 자체 속에서 표명된다. iii)힘들의 관계는 어떤 힘이 열등하거나 우월한 다른 힘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변용되는](affecte) 한에서 규정된다. vi)권력의지는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변용되는 능력]으로 표명된다."19) (여기서 다시 한 번 니체와 스피노자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물체가 그만큼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보다 더 많은 방식으로 영향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권력의지가 형성되어지고 완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어진다. 이 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란 바로 감수성(affectivite), 감성(sensibilite), 감각(sensation)이며, "권력감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권력의지는 "힘의 감성으로 표명된다"20)고 한다.
그러면, 니체에게서 힘의 작용과 반작용은 권력의지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작용과 반작용은 오로지 물리적 원리로서 힘들의 구분을 나타내지만, 그것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목적 달성을 위한 권력의지로서의 긍정과 부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은 작용과 반작용을 넘쳐나게 된다. "긍정은 작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되는 역량, 능동적 생성(devenir actif)의 화신이며, 부정은 단순한 반작용이 아니라 반동적 생성(devenir reactif)이다."21)
우리가 힘들의 생성과 힘들의 성질을 탐구하는 이 같은 역동론(dynamique)을 구체적인 차원으로 고찰하면, 우리는 결코 반갑지 않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니체가 그토록 혐오했던 반동적 힘들의 승리, 삶에 대한 적대감, 니힐리즘. 반동적 힘들은 능동적 힘들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며, 능동적 힘들을 반동적으로 만든다. 즉 힘들의 생성을 반동적 생성으로 만든다.
우리는 반동적 생성 이외의 다른 생성은 느끼지도, 경험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들의 존재 이외는 아무 것도 확인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처에서 우리는 그것들의 승리를 확인한다.22)
원한(ressentiment), 양심의 가책, 니힐리즘과 같은 반동적 힘들은 순수 생성(pur devenir)으로서의 영원회귀(l'eternel retour) 속에서 반동적 힘들을 재생산하고 생성들 자체를 반동적으로 영구히 회귀하도록 한다. 변증법의 사유가 가진 부정과 모순의 논리, 차이를 환원시키는 동일성의 논리가 또한 그와 같은 반동적 힘들의 논리이다. 힘들의 반동적 생성, 니힐리즘의 생성은 힘들 사이의 관계에서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되는데, 들뢰즈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반동적이지 않은지, 그리고 반동적 생성이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만약 인간의 조건이 반동적 생성 자체라면, 그것은 "너무도 심각하게 영원회귀를 위태롭게 만들고 그것을 감염시켜서 그것 자체가 불안, 불쾌,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23) 그러므로, 허무주의적 생성을 스스로 긍정할 수 있는 순수 생성으로서의 영원회귀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하나의 다른 생성, 다른 감성은 바로 초인(le surhomme)이다."24)
4. 다시 스피노자에게로; devenir joie, devenir actif
니체가 삶을 긍정하고, 능동적으로 되라고 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서 역시 거의 동일한 요구처럼 나타난다: 즐겁게 되기(devenir joie). "우리는 어떻게 긍정적으로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즐겁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동등한 윤리학적 질문이다: 허무주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니체) 인간은 예속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를 획득할 것인가?(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세계에 대한 윤리적 통찰을 통해 윤리학은 언제나 능력과 역량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여기에서 감정들과 행위, 의도는 초월적 가치에 관계함으로써가 아니라, 실존하는 (내재적) 양태들에 관계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매 경우에, "이러한 느낌은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를 그러한 역량의 완전한 소유가 가능하도록 돕는 것인가?"25)라고 묻게 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의 실천적 의미를 모든 신비화, 모든 미신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미신의 폭정, 종교라는 베일로 감싼―자신들을 예속하는 그것을 위해 싸우도록 하는―공포에 대항하는 비판적 관점을 강조한다.
슬픈 수동들(passions tristes)에 대한 평가절하와 슬픈 수동들을 키우고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는 철학의 실천적 목적을 형성한다. [...] 슬픔을 포함하는 모든 것은 폭정을 표현한다.26)
스피노자는 억압적 권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슬픈 수동을 타인들에게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을 지배하게 되는 원리에 대해 따지고 있는 것이다. {에티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쁨(joie)과 기쁜 수동들(passions joyeuses)을 환기시키고 인간의 예속에서 자유로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모든 슬픈 수동들은 어떤 경우에라도(사회적으로 유용할지라도) 나쁘다. 오로지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유일한 수동적 변용인 기쁨만이 능동적일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순수한 긍정의 철학, {에티카}는 그러한 긍정에 상응하는 진정한 기쁨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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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eme de l'expression, Les Editions de Minuit, 1968, p. 9. "Par Dieu j'entends un tre absolument infini, c'est-a-dire une substance consistant en une infinit d'attributs, dont chacun exprime une essence eternelle et infinie."
2) 앞의 책, p. 9.
3) 앞의 책, pp. 9-10. "Tout ce qui existe exprime la nature de Dieu, autrement dit son essence, d'une fa on certaine et d termin e"(c'est-a-dire sous un mode d fini).
4) 앞의 책, p. 10.
5) 앞의 책, p. 21.
6) Michael Hardt,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Univ. of Minnesota, 1993, p. 64.
7) Spinoza et le probleme de l'expression, p. 51.
8)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p. 70.
9) 앞의 책, p. 71.
10) Spinoza et le probleme de l'expression, p. 82.
11) 같은 곳.
12) 앞의 책, p. 198.
13) {에티카}, III부 정의3. affect(affectus)와 affection(affectio)의 차이에 관해서는, Gilles Deleuze,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 by Robert Hurley, City Lights Books, 1988의 "{에티카}의 주요 개념 색인"을 참조: "affectio는 변용된 신체의 상태(state)에 관련되며 변용하는 신체의 현존을 함축한다. 반면에, affectus는 변용하는 신체들의 상관적인 변이(variation)를 고려하면서,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전이(passage)에 관련된다."
14)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p. 17. 들뢰즈는 "{에티카}와 도덕(morality) 사이의 차이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스피노자가 어떤 철학자보다 높이 평가되고 또한 그만큼 비난받아온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주의의 실천적 테제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평가가, 이론적 테제(무한한 속성들을 가진 유일한 실체, 오로지 이러한 속성들의 양태들이거나 이 실체의 변양들(modifications)인 모든 "피조물들"에서 찾아지는 것)로는 부족하며, 범신론과 무신론이 어떻게 그 테제로 조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들뢰즈가 보는 스피노자의 실천적 테제들은 삼중의 탄핵(denunciation) 혹은 평가절하(devaluation)를 암시한다: 첫째는 의식(consciousness)의 탄핵, 둘째로 가치들(values)의 탄핵, 셋째는 슬픈 수동작용들(sad passions)의 탄핵. 들뢰즈가 보기에, 이러한 삼중의 탄핵은 스피노자가 니체와 가지는 중요한 유사성들이다.
15) "actif/r actif"의 역어를 "능동적/반동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actif/passif"에 대한 역어인 "능동적/수동적"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파악할 수 있지만) 혼동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적극적/반응적"이라는 역어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능동적/반동적"이라는 역어를 일단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16)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UF, 1962, p. 45.
17) 같은 곳.
18) 앞의 책, p. 47.
19) 앞의 책, pp. 69-70. 힘의 원초적 성질을 가리키는 용어들이 능동적/반동적이라면, 권력의지의 원초적 성질들을 가리키는 용어들은 긍정적/부정적(affirmatif/negatif)이다.
20) 앞의 책, p. 71.
21) 앞의 책, p. 61.
22) 앞의 책, p. 72.
23) 앞의 책, p. 73.
24) 앞의 책, p. 74.
25) Spinoza et le probleme de l'expression, p. 247.
26) 앞의 책, p. 250.
첫댓글 오랫동안 읽어도 이해가 안되지만 천천히 차분히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