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구 간에 무심코 주고받는 마음의 상처
문선희 선생님은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많은 작품으로 어린이 여러분과 만난 동화 작가입니다. 이번에는 친구 간의 참된 우정을 다룬 장편 동화 <나의 분홍 삼순이>를 내놓습니다. 이 책은 여느 동화와 달리 ‘일기’라는 특별한 이야기 형식으로 선보입니다. 사실 그날그날 경험한 일을 기록하는 일기는 하나의 주제를 인과성 있게 엮어 나가는 이야기 방식에서는 그다지 적합한 양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문선희 선생님은 동화 구성에 있어서 부자연스러운 일기 형식을 굳이 빌려 쓴 것일까요? 그 이유를 <작가의 말>에서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겨울 방학 특강으로 맡은 어느 독서 토론에서 “거친 욕설과 행동을 주고받으며 마음속에 상처가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털어놓는” 아이들의 짠한 이야기를 듣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친구 간에 무심코 주고받은 마음의 상처는 성장기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친구 간의 우정을 별 탈 없이 참되게 지속시켜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뜻하지 않은 소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고 삐치기도 하게 되니까요. 그런 과정에서 친구 간의 우정에 금이 가기도 하고 혹은 더욱 돈독한 관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바로 이 <나의 분홍 삼순이>는 친구 간의 참된 우정을 다져 나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 동화입니다. 문선희 선생님은 우리 어린이들이 친구 간에 무심코 주고받은 말을 통해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대처하고 치유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동화로 일깨워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때 이야기를 보다 현실감 있게 들려주기 위해서 어린이 여러분에게 가장 친숙한 글쓰기 방식인 일기를 빌려 온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에게 일기 쓰기는 학교 숙제로, 누군가의 권유에 따라 해야만 하는 최초의 글쓰기일 것입니다. <나의 분홍 삼순이>도 주인공이 ‘일기장 검사’를 맡기 위해 쓴 일기입니다. 일기는 자신이 겪은 하루하루의 생활과 그에 대한 생각・느낌을 그날그날 적는 진실한 내 삶의 기록이자 솔직한 고백입니다. 일기를 쓰면 하루 생활을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습니다. 잘한 일을 쓸 때는 더 잘해야겠다는 즐거운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잘못한 일에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지 하고 스스로 반성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합니다. 반성과 각오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는 자기와의 약속이지요.
이 동화는 그처럼 일기글의 속성을 활용하여 어린이 여러분이 안고 있는 고민거리나 친구 간의 갈등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아갑니다. 곧 문선희 선생님은 일기라는 이야기 방식을 통해 어린이 여러분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가고 싶었고 또 여러분 마음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동화책 <나의 분홍 삼순이>는 여러분에게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쏠쏠한 재미까지 선사합니다.
2. 갈등을 부추기는 검정나방
<나의 분홍 삼순이>의 일기 주인은 ‘나’ 박금동입니다. 별명이 ‘금똥’인데, 이름을 경음화시킨 발음 탓에 생겨났습니다. 박금동의 일기는 3학년 새 학기가 시작하는 첫날 3월 4일 월요일부터 시작하여 4월 18일까지 13일간의 생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박금동 자신의 사생활과 함께, 반 친구인 이상아와 그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3일간을 끝으로 마치고 만 것은, 일기 내용 가운데 이상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학급 전체로 퍼져 나간 누설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담임 선생님은 “우리 반은 앞으로 일기 검사를 하지 않는다.” “일기는 집에서만 쓴다.”는 특별 선언을 합니다. 그 대신 게시판 환경 정리를 “너희들이 스스로 하도록 해라. 너희들의 작품은 너희들이 직접 걸어 놓도록 한다!”고 아이들에게 맡기면서 스스로 자신 있는 분야를 소개하고 서로 도전받을 수 있는 ‘전문가 코너’를 만들어 줍니다.
이런 <나의 분홍 삼순이>에는 두 가지의 큰 갈등 양상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교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급우들끼리의 갈등, 다른 하나는 금동과 상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그것입니다. 전자가 이 동화 전체의 전경(前景)이라면 후자는 주제를 드러내는 중심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긴 크고 작은 갈등 양상에 따라 서로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지만, 일기라는 글쓰기가 그 상처를 치유해 주는 매개체가 됩니다. 일기 쓰기는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며 본래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인 까닭입니다.
어린이들이 배우고 성장하는 교실 공간에서 담임 선생님의 역할은 무척 중요합니다. 새 학기 3학년 담임을 맡은 이옥봉 선생님은 합리적이며 민주적으로 지도합니다. 남학생과 여학생을 구별하지 않고 가나다순으로 번호를 정할 뿐 아니라 반장은 첫 번호부터 1일 반장을, 당번은 끝 번호부터 1일 당번을 맡겨 학급 전체 학생들에게 균일하게 책임과 기회를 부여합니다. 또 화분 가꾸기로 정서 교육을 심화하고, 급우 간의 ‘구린 말하기’와 ‘급소 공격하기’ 같은 나쁜 습관과 행동을 고쳐 주기 위한 공부도 하면서 지혜롭게 학급을 운영해 나갑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일기 내용 누설 사건이 발생하자, 곧바로 일기장 검사를 중단하고 대신 환경 정리 게시판에 ‘전문가 코너’를 신설하여 학생들의 자발적인 학습 참여를 유도합니다.
그런 선생님의 노력에도 ‘구린 말하기’와 ‘급소 공격하기’에 대한 묘책의 효능은 3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거기에다 급우 간의 친밀도 역시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식목일 날, 교장 선생님에게 받은 단체 토끼뜀 뛰기 벌 사건은 그 한 사례가 됩니다. 그것은 한 아이가 아파서 양호실에 간 사실을 아는 학급 아이가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받은 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새 학기 초에는 담임 선생님의 민주적 교육 방침과 지혜로운 학급 운영에도 아이들의 갈등 관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박금동은 그 갈등의 부추김을 ‘검정나방의 마법’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그런 검정나방을 향해 “다신 우리들 앞에 나타나지 마랏!” “얍! 사라져 버렷!”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퇴치하려고 합니다. 금동이가 검정나방의 장난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일기 쓰기의 힘이었습니다. 일기가 자기반성을 불러일으키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다준 까닭입니다.
3. 감추고 싶은 비밀, 들키고 싶은 비밀
<나의 분홍 삼순이>의 이야기 주제는 박금동과 이상아 사이의 갈등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상아는 이 동화의 제목인 <나의 분홍 삼순이>의 실제 이름입니다. 상아는 학급에서 가장 작은 아이이며 박금동과 닮은 점도 많은 친구입니다. 박금동은 2학년 때 상아와 두 달간 짝꿍을 해서, 그녀의 유별난 세 가지 버릇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삼순이는 ‘혀 쏙 내밀기’ ‘툭하면 울기’ ‘적당히 얼버무리기’ 그 세 가지 버릇으로 말미암아 금동이가 부르는 별명입니다. 이들에게 공통점은 남모를 일급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곧 금동은 “과학의 힘으로 태어난 시험관 아기”이고 상아는 세 살 때 입양된 입양아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소소한 갈등은 새 학기 첫날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 우리 사이가 괜찮았을 때는 서로의 집에도 놀러 다녔어.”라는 금동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은 금동이가 상아네 집에 놀러 간 뒤부터입니다. 상아 아버지가 “아픈 사람이라서 늘 누워 계시고,” “엄마는 직장에 다니니까 쟤네 집은 어쩐지 썰렁해.”서 그 집에 놀러 가고 싶지 않았던 게 발단이 되었지요. 하지만 금동이는 “지금 우리 사이가 멀어지긴 했어도 내 마음도 저 아이와 멀어진 건 아니야. 그런데도 참 이상해. 내 행동은 내 마음과는 딴판으로 나타나고 말거든.” 하면서 일기를 통해 스스로 반성합니다.
이처럼 박금동은 ‘내 마음과 딴판으로’ 상아에게 자꾸 실수를 하고 맙니다. 상아의 행복나무 화분을 깨뜨려 울리기도 하고, 급기야는 일기장에 상아가 감추고 싶은 자기 아버지 비밀을 적음으로써 소문이 돌게 하는 장본인이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상아와의 갈등이 최고조로 심화됩니다. 상아 입장에서 보면, 금동이가 자기 “집 비밀을 죄다 일기장에다 일러바”친 꼴이 되고, 자기 “아버지가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누워만 지내는 병신”으로 놀림받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상아는 “박금똥, 넌! 배신자야!” “너하고는 절대! 절대! 절대! 놀지 않을 거야!” 하며 절교 선언까지 할 만큼 큰 충격을 받습니다. 박금동은 “어떻게 해서 내 일기가 반 전체 아이들한테 읽혀졌을까? 내 머릿속이 새하얘”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상아 아버지 소문 사건은 도리어 아이들의 귀를 의심할 만한 상황적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일기장 검사가 없어져, 반 아이들의 숙제 부담을 덜게 함으로써 전화위복이 되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금동에게 상아와의 갈등의 앙금은 가시지 않고 뽀로통 남아 있었습니다. 박금동은 ‘상아 구출 작전’으로 상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대담한 계획을 세웁니다. 결국, 금동이는 상아 아버지가 주인공인 인물화를 그리고, <일등병과 외동딸>이란 제목을 붙여 ‘자랑스러운 상이군인 가족’으로 전문가 코너에 게시함으로써 비로소 상아와 진정한 화해를 이룹니다. 금동이가 상아의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들키고 싶은 비밀로 자랑스럽게 바꾸어 놓은 까닭입니다.
그 아름다운 화해는 금동이와 상아가 일기를 공유하며 출생에 대한 일급비밀까지 털어놓을 수 있게 발전합니다. 이 사실은 서로가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었다는 뜻이지요. 이번에는 박금동이 “상아의 비밀을 꼭 지켜 줄 테야.”라며 다짐까지 합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화해함으로써, 금동이는 상아를 ‘나의 분홍 삼순이’로 자리매김합니다. 여기서 분홍이란 핑크pink로, 빨강에 기초한 엷고 부드러운 적색 계통의 색채 이름입니다. 분홍은 부드러움과 행복, 귀여움의 대명사이며 공격적인 성격을 진정시키고 정서를 안정시키는 색이기도 합니다. 여성스럽고 온화한 느낌이어서, 엄격해 보이는 모습을 완화해 줍니다. 금동이가 상아를 ‘나의 분홍’이라 한 데에는 ‘나의 수호천사’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곧 세 가지 버릇을 가진 입양아라는 상아의 아픈 삶을 지켜 주고 싶은 참된 우정의 발현인 것입니다.
그만큼 이 동화의 주제나 흥미성은 상아와의 갈등과 화해라는 사건에 놓여 있습니다. 그 갈등과 화해의 중심 매체가 바로 일기였던 것이지요. 일기는 갈등을 부각하면서 화해의 장으로 이끌어 가는 주된 요소입니다. 이처럼 이 동화에서 일기 쓰기는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내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마음속 생각들을 진실하게 털어놓으며 마음을 스스로 정화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이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 놓는, 은근히 들키고 싶은 마음의 비밀인 것이지요. 이처럼 <나의 분홍 삼순이>는 일기의 두 가지 속성을 내밀히 담아 동화적 의미와 흥미를 이끌어 냅니다. 이렇듯 이 동화는 일기를 통한 감추고 싶으면서도 들키고 싶은 비밀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 나의 분홍 삼순이>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제재가 있습니다. ‘태극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그날그날 적어 놓은 각기 다른 사건들을 하나로 이어 주는 통일적 요소이기도 합니다. 또 박금동과 주변 인물들, 상아와의 갈등 관계도 연결하고 엮어 주는 매체입니다. 곧 태극기는 그날그날 파편화된 일들을 엮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재이지요. 이 동화는 일기 형식으로 그날그날의 사건을 아무런 질서 없이 기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밀한 구성에 따라 쓴 동화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동화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일기란 사소한 일들을 늘어놓는 글쓰기가 아니라 어떤 주제를 향해 사건을 엮어 나가는 의미 있는 이야기 양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나의 분홍 삼순이>는 일기라는 고백 형식으로 친구끼리의 갈등을 아름답게 극복하고 참된 우정을 꽃 피우는 과정을 그린 동화입니다. 일기가 반성과 각오를 내면화한 글쓰기이므로 공감할 수 있는 일이지요. 바로 문선희 선생님은 어린이 여러분에게 친구 간에 뜻하지 않은 일로 입는 마음의 상처에 대처하고 치유하는 방법을 일기 형식으로 이야기해 준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 동화는 어린이 여러분에게 일기 쓰는 일의 소중함도 함께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지요.
첫댓글 문선희 선생님, 고맙습니다. 신간 발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