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날씨 운이 없다. 길을 나서면 흐리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고 춥다. 서울은 쨍쨍하고 더웠다는데 제천은 폭우가 쏟아졌다. 제천에서 일을 마치고 덕동계곡이 생각나서 찾아갔다. 흐린 날 늦은 시간이라 이미 빛을 잃었지만 갔다. 보고 싶었으니까. 오래전에 별 생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덕동계곡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차를 꺾어 들어갔다. 계곡은 생각보다 깊었고 길은 한적했다. 길에 차가 없는 이유를 나중에 알았는데 계곡 상류 원덕동에서 끝나기 때문이었다. 막다른 길이니 주민들 말고 따로 오갈 이가 없었다. 그래서였나. 길가에 지저분한 간판도 없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때도 날이 흐렸던 것 같다.
따져보니 십년쯤 된 이야기다. 꽤 깊은 계곡 따라 들어가며 그만 갈까 고민할 때 쯤 왼쪽으로 펜션이 나타났다. 산속에서 예쁜 집을 만나니 호기심이 일어 무턱대고 들어갔다. 주인은 키가 훤칠하고 시원시원한 남자였다. 펜션을 지은 이유를 듣고 차도 얻어 마시며 사진도 찍었다. 한쪽 구석에 있는 손때 묻은 기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기타란 외로운 악기다. 혼자 산다는 주인에게 그런 걸 묻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런 인연으로 그달 잡지에 소개 했다.
몇 년쯤 지나 손님으로 펜션을 찾았다. 스치듯 지난 인연이니 주인도 가물가물 한듯 아는 척 하기는 하는데 정말 기억은 하는지 애매한 눈치였다. 주인은 펜션 옆에 통나무로 맥주하우스를 지었다. 브룩클린? 이었나. 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산속에 맥주집이라니. 그 사이 동반자도 생긴 듯 했는데 묻지 않았다. 기타에 대해서 묻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였다.
어쨌거나 하룻밤 묵으며 계곡에서 놀았다.
이번에 다시 찾은 펜션은 규모가 좀 더 늘었다. 인기척이 있는 듯 했는데 굳이 들여다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이라 했는데 이미 확인을 했으면 됐지 또 확인을 할 게 뭔가. 지나간 인연인지 아닌지는 남은 생이 알아서 하겠지.
덕동계곡 상류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이 길만 지나면 좁은 계곡이 갑자기 확 트이며 널따란 평지가 나타난다. 그곳에 마을이 있다. 이런 지형이 몇 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좁은 계곡 따라 나가야만 세상으로 나가는 곳. 부연동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이곳이 참 마음에 든다. 처음 찾았을 때도 두 번째도 그리고 이번에도.
계곡에는 덕동생태숲이라는 자연휴양림 비슷한 시설도 있다. 사실 덕동계곡은 꽤 알려진 곳이다. 여름날 이만한 곳이 없다.
평상에 누워 책을 읽다 가뭇가뭇 졸고
무릎 내어준 사람 얼굴을 가만 올려다보다 볼 부비고
계곡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지켜보다 가만 웃기도 하고
꿈결 같은 시간, 물 따라 흘러가는 곳이다.
이번에 다시 찾아가니 계곡 따라 드문드문 펜션이 꽤 늘었다. 오토캠핑장도 두 군데나 생기고 마을도 사람 발길이 탄 느낌이 역력했다. 그래도 계절이 계절인지라 한적한 느낌은 여전했다. 봄비가 내린 후 저녁.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한참 지켜보았다. 저 집 너머로 계곡물이 지나간다. 한 남자가 패인 마당을 다듬고 있었는데 주인인지 일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을 붙여 보려다 그도 부질없을 것 같아 그냥 보기만 했다. 나도 말없이 흘러 다닐 때가 됐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