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처럼 -
☆ 2016년 다해 4월1일 금요일 [(백)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수도회] 다가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4,1-12
† 복음 요한 21,1-14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추억을 뒤로하고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다시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갔으나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지요.
이윽고 날이 밝아 오자,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그물 던질 곳을 알려
주십니다. 그대로 그물을 던지니, 엄청난 고기가 잡히는 것이 아닙니까?
그제야 제자들은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더욱이 제자들이 기쁨에 넘쳐 뭍에 올라오자,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몸소 숯불을 피워, 물고기를 구워 놓으신 것입니다. 빵도 준비해 놓으셨지요.
이를 본 제자들은 목이 메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일상생활로 돌아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신들에게 먼저 다가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꾸중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배고픈 자신들을 위해 빵과 구운 물고기까지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의 그 넘치는 사랑을 깨닫고는
감격에 겨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해도 늘 먼저 다가오신다는 것을, 그뿐만 아니라 내가 필요한 것을 먼저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늘 그분께서
가리키는 방향을 잘 보고, 그 길을 향해 신앙의 여정을 걷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과 함께 했을 때에만 모든 것이 가능
2016년 다해 4월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제1독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1-12
복음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14
언젠가 전철을 타고서 서울을 가는데 몇몇 대학의 입학생 모집 광고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개교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대학인데, 광고의
내용 중에 가장 크게 쓰여 있는 것이 바로 회사 취업률입니다. 취업 잘 되는
대학이라는 것이지요. 솔직히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이 과연
취업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중간 단계에 불과한 것일까요? 학문이 아니라
취업을 가르치는 곳이 되어 버린 학교는 아닐까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전체가 단순히 취업을 위한 준비라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집니다.
학생 수를 늘리기 위해서 학생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취업 문제를 내
밀었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을 외면할 때 대학 본연의 의미를 가질 수가
있을까 라는 의문도 생기네요.
그런데 몇 개의 모집 광고를 보면서 느낀 것은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곳에서는 광고를 굳이 내지도 않고, 광고를 내더라도 취업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꿈의 완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좋은 대학,
명문 대학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것들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좋은 대학, 명문 대학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가장 본질적인 것들을 놓치지 않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외면하고 또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것들을 쫓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순간의 만족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절대 오래가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 곧바로 순종하며 따랐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다짐도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 이후 그들은 이제 따를
대상이 없어졌습니다. 주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어서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전의
생업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지요.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라고 하시지요.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따랐듯이,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물을 던졌고 그 결과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가
있었지요.
주님이 계실 때와 계시지 않을 때,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늘어나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즉, 주님과 함께 했을 때에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복음은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세상의 압력에 부딪혀도 부서지거나 갈라지지 않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주님 곁을 떠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순간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긴 세월은 저절로 흘러간다(마리아 에지워스).
신앙의 증거자 박순집 묘.
한 번에 한 사람(마더 데레사)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한 번에 한 사람씩이라는 복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글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이루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지요. 지금 그 시작이 필요합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꽃이 많은 요즘이라서 너무나 기분이 좋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2016년 다해 4월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 요한 21,1-14
수녀원에서 미사를 드리는 동창신부가 잠시 휴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며칠, 동창신부를 대신해서 수녀원 미사를 다녀왔습니다. 휴가를 간
동창신부가 제게 ‘부활선물’을 준 것 같습니다. 수녀원 미사를 가기 위해서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났습니다. 수녀님들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리라 생각하니 이 또한 ‘부활선물’입니다.
서품식 준비를 하면서 성소후원회 봉사자들과 ‘마니또’를 정했습니다.
서품식을 준비하면서 ‘짝’이 된 분을 위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서품식이
끝나고 평가회를 하면서 ‘마니또’를 위해서 작은 선물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저도 마니또를 위해서 기도를 하였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를 하였기 때문에
서품식 준비를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경쟁가치와 비경쟁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은 경쟁가치를
통해서 발전하고, 경쟁가치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경쟁가치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쟁가치는
많은 스트레스를 주기 마련입니다. 경쟁가치는 순위를 매기고, 실패한
것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노숙자가 쓸쓸하게 죽어도, 난민들이 갈 곳이 없어도 큰 뉴스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식의 가치가 떨어지면 뉴스가 되곤 합니다. 경쟁가치의
사회에서 ‘행복은 성적순’인 것 같습니다.
비경쟁가치는 누군가와 실력을 평가받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국밥을 무료로 주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헌혈증을 모아서 백혈병
어린이를 도왔습니다. 폐지를 모아 팔은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야!’ 아프리카 수단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가신 이 태석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그분이 남긴
따뜻한 사랑은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태석 신부님처럼
살고 싶어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식탁’을 마련하였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선물을 받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께 받은 선물을 또 다른 이웃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누어줄 선물은 ‘복음의 기쁨’입니다.
매년 주님의 부활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단순히 매년
왔다가 가는 행사와 전례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을 향해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내려야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활을 삶 속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얻으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제자들처럼 우리도 하라는 대로 합시다.
2016년 다해 4월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제자들처럼 우리도 하라는 대로 합시다.
부모가 자식을 늘 그리워하는 마음을 자식은 그거 못 느낄 겁니다.
그처럼 조물주님도 늘 우리를 생각하지만 우리가 관심 없는 겁니다.
아니 계신 곳 없이 곳곳에 다 계시다는 게 하느님의 속성 아닙니까.
이처럼 예수님은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 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누구냐 묻지 않고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하며 맞으셨군요.
성체 모시고 조용히 있으면 우리도 보채지말고 하라는 대로 합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 12,12)”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다가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4월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 요한 21,1-14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요한 21,13)
다가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체포되자 제자들은 스승을 버리고 부름 받기 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버립니다.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21,3) 하고 말하자
다른 제자들도 그를 따릅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소명을 받은 그들이 이제는
배를 채우기 위한 먹거리를 낚기 위해 자신들의 힘을 쏟으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의 그 전인적인 삶의 방향전환만큼이나 또 다시
그들은 예수님과 무관한 자신들의 세계로 떠나는 제2의 전환기를 맞은
것입니다. 예수님 가까이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표징과 가르침을
수없이 보고 들었고 그분이 바로 메시아임을 너무도 잘 아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배반하며 자기 세계로
돌아가버린 이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일곱 제자가 ‘함께’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21,3).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밤’, 곧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그렇게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이지요. 바로 그 허무함과 비참한 상황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지만 영(靈)의 눈길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21,4). 빛이신 예수님은 좌절과 실망감
속에 자신들의 힘만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제자들 곁에 그렇게 새벽처럼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하겠다고 하신
임마누엘의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밤새 애를 써보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21,3). 그들
자신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밤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21,6). 이 엄청난 결과는 곧 함께하시는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말해줍니다.
사랑받는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십니다.' 하자 베드로는 호수에
뛰어듭니다(21,7). 사랑만이 사랑을 알아보고, 사랑의 불꽃은 그렇게 다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사랑을 향해 달려갑니다. 사랑이 사랑을 부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보여주셨던 그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없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애쓰며 지친 그들을
위해 숯불 생선구이와 빵으로 아침을 준비해 놓으시고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십니다.”(21,13) 제자들은 그 사랑에 젖어 다시 ‘영의 세계’로
떠납니다.
나 역시 내 삶의 호수에서 예수님과 무관하게, 하느님을 잊은 채 내 힘에
의존하여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때가 많습니다. 제자들처럼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 수없이 듣고 많은 것을 알고 오랜 세월 영성생활을 하며,
‘신자’, ‘수도자’, ‘성직자’라는 명패를 걸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그 어떤 시련과 고통, 유혹이 다가와도 예수 그리스도만은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혹 잊더라도 지체없이 그 사랑을 기억해야겠지요.
그분이 아니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그분과의 관계단절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 삶의 호숫가에서
변함없이 사랑의 아침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나를
떠나는 부활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4월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요한 21,6)
시인 엘리어트는 일찍이 4월을 '잔인한 달'이라 노래했지요.
여러분에겐 '축복의 달'이 되길 축원합니다.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갈릴래아로 가서 기다리라는 여인들의 전갈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옛적에 했던 일, 고기잡는 일을 하러 갑니다.
그런데 어부였던 그들이 밤새 그물을 쳤지만 한마리도 못잡았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고기잡을 의지도 목표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잡히든 말든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낚는 어부가 되는 꿈들을 꾸었었는데
그 꿈이 다 사라져버려 아무 낙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가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라고 하십니다.
나 같았으면 던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는 사뭇 엄청났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잘한다고 하는 일이지만 결실이 별로 없을 때도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조용히 듣고있다 보면 어떤 메시지가 내 맘속에 떠오릅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 보십시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결실을 얻게 될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 해도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는 하늘이 말리는 겁니다.
그 때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도대체 잘 안 풀린다면 내 생각과 뜻을 접고
조용히 성당에 앉아 침묵해 보십시오.
그분이 음성이 들려 올 겁니다. "가서, 이렇게 해보아라~~"
그렇게 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시게 될 겁니다. 아멘.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4월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 12)
아침식사는 언제나 가장 따뜻한 부활의 인사가 됩니다.
행복이란 가장 좋은 사랑을 차려주시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또 하루를 부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부활의 선물인 이 하루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모든 것이 넉넉함으로 다가옵니다.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 애썼던 제자들에게 이만하면 충분하다
말씀하시듯 많은 물고기로 제자들의 내면을 가득 채워 주십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더 사랑받을 수 있다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게
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아침밥상이었습니다.
손수 아침상을 차려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 아침 다시 만납니다.
아침밥상을 받으니 우리 삶의 자리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아침상을 차려주시는 예수님 마음이 부활의 마음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우리를 위해 아침상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들은 늘 분주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미리 차려주십니다.
부활의 밥상은 믿음의 밥상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모든 시간을 이끌어가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아침을 차려주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또한
가장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부활의 가장 강력한 이름은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먹은 사랑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4월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 요한 21,1-14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 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며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미 빵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식사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물고기의 유무를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활 식사를 위해 너희가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이냐?’
그분의 나눔에 우리 역시 무엇인가를 준비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식사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애섰으나 그들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힘없이‘못잡았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이르셨고 이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나눔의 자리는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주님을 알아봤고, 베드로는 빠르게
행동으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깨달음과 행동의 조화로움이 어디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 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함께하십니다. 다만 문제에 집착해서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수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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