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와/정윤천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귀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오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서만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시 읽기> 천천히 와/정윤천
기다림, 사랑의 기본기
20년도 더 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연예가 소식을 다루는 어느 프로그램에서 이혼한 연예인 부부를 인터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지금 보면 참 너절한 방송 스타일인데 그 당시만 해도 별 문제의식 없이 횡행했다). 뭘 저런 걸 인터뷰 하나 싶어서 채널을 돌리려는 찰나, 출연한 아내의 말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식당에서 냉면을 먹는데, 남편이 매우 빠른 속도로 다 먹고는 아내가 먹는 걸 기다려주지도 않고, 볼 일이 있다며 먼저 횡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순간 이 남자와는 더 이상 살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순간 이혼을 결심한 그녀의 마음이 한 방에 이해되었다. 부부 사이의 일이야 부부 말고는 모른다 하지만 그 사건이 사실이라면, 남편은 한마디로 결혼할 자격, 더 나아가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림”이란 말도 있듯이 사랑은 신의라는 바늘과 기다림이라는 실로 만들어낸 옷이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기다림은 사랑의 능력이면서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기다리는 것이지만 기다림 속에서 사랑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연인이나 부부 사이의 사랑에 한정되지 않는다. 기다릴 줄 모르는 부모의 보살핌, 기다림이 귀찮은 선생의 가르침은 사랑이 아니라 때때로 폭력이 된다.
기다림은 지금 여기에 없는 상대를, 혹은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않은 상대를 무한 긍정하면서 자신만이 그 상대를 아끼고 배려한다는 사실을 만방에 드러내는 것이다. 언뜻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세상에 알리는 능동적인 행위다. 사랑은 “사랑해” 같은 말로 증명되지 않는다. 대신 누가 나에게 “천천히 와”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 있다. 기다림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마음이야 말로 진짜 사랑이니까.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포르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