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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묵상글 ( 연중 제2주간 토요일. - 미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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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미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집으로 가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집이라!
그런데 바로 이어서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집은 고향 집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저기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셨으니
당신의 집이 따로 있을 리 없고
우리네 집을 당신 집으로 삼으셨을 겁니다.
즉시 프란치스코가 떠오릅니다.
그는 자신과 형제들의 가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은 집이나 거처 그 어떤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동냥하러 다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으니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인 것을
프란치스코는 굳이 집과 거처의 가난을 꼭 집어서 얘기하는데
그것은 집과 거처의 가난을 특히 더 강조하기 위함이겠습니다.
집도 없고 정처도 없는 것이 주님과 프란치스코의 공통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가난을 가난 중에서도 최고의 가난이라고 하고,
이 가난이야말로 물질 면에서도 가난하게 하고,
덕행 면에서도 가난하게 하며,
하늘나라의 왕과 상속자가 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행복 선언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가난할 때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소유하기 때문이지요.
가난이 이러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며
저세상 행복을 위해 소유를 포기하기 쉽지 않고,
저세상을 향해 떠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삶이 안정되면 될수록 더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안정은 우리 인간이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고,
반대로 안정이 깨질까 또는 잃을까 두려워하는 불안은
우리 인간이 두려움과 함께 제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정되면 될수록 안주하게 되고 떠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집과 거처를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집과 거처를 포기할 때 우리는 가장 확실하게 가난할 수 있고,
나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도 천국에 가자고 초대하는
복음 선포의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하기에 우리도 주님과 프라치스코처럼
집과 거처를 포기하는 복음적 불안정을 일부러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정된 집과 거처를 포기하고 여기저기 떠도는 주님과 프란치스코를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고 가족들은 그런 선택에 더더욱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미쳤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거나 정신이 나간 것을 의미하지요.
세속의 눈으로 보면 주님과 프란치스코의 선택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정신이 나간 것이 맞는데 그것은 세속의 정신이 나간 것이고,
세속의 정신이 나간 대신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린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주님과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 미친 분들입니다.
하느님께 미친 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개의치 않으시는 분들이 바로 주님과 프란치스코이고
우리는 그분들의 정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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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 짧은 본문입니다.
<첫 번째 절>(20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들어가고 섞여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배추벌레가 배추를 먹으면서 배추색깔로 변해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절>(21절)에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여기에서, “붙잡다”(krateo)라는 말은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친척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러 나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들의 손에 쥐고 조정하고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예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당신을 꼭 붙잡고 반박하였”(마르 8,32)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르 8,33)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려고 붙잡는 이는 그가 비록 제자라 하더라도, 혹은 친척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뿐, 붙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께 붙들린 사람’,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앙드레 루프) 일 뿐입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제지하시도록 승복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제지는 우리의 굴복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께 ‘붙들려’ 사로잡혀 따라가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붙드셨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매달려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사실,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붙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에 붙들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붙잡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느님이 아니라 한갓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미치신 분’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사로잡히신, ‘아버지께 미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내가 배신하고 무관심할 때마저도, 언제나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진정,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
주님!
당신께 사로잡힌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잡히게 하소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사로잡혀 살게 하소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조정에 승복하여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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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으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어디나 반대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 죄인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 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께 미쳐야 합니다. 올바른 일에 미쳐야 합니다. 미친다는 것은 전력투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 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혹 삶이 따분하고 무의미하게 여겨진다면 미쳐야 할 만한 일을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받으시고 모함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소신, 주관이 고집이 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줏대’ 있는 삶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 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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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상을 통해서 가슴이 찡한 ‘추도의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다 숨진 젊은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던 모습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해서 오열하던 모습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슬픈 영결식에서 바람에 날리던 노란리본을 보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떠나셨을 때입니다. 추운 겨울임에도 조문행렬이 명동 주변을 가득 매웠습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의 발차취가 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이 생에서의 마지막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안타까운 죽음이 있습니다. 피지 못한 꽃이 바람에 떨어지듯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죽음이 그렇습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삶을 살려고 했는데 세상을 떠난 죽음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야 하는 부모와 아내의 슬픔이 그렇습니다. 벌써 4년 전입니다. 저는 코로나 팬데믹의 한 가운데서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창 신부가 제 대신에 문상을 받았고, 장지까지 함께 했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시고 교구장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장례미사 잘 했으니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년 10월 저는 아버지와 함께 모셔진 어머니에게 갔습니다. 부모님이 있는 추모관에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오늘 다윗은 사랑하는 친구 요나탄과 사울 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탄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위령미사의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가엾이 여기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어, 저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되고, 죽은 이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신앙인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올 영원한 생명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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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제자들과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12사도를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12사도를 포함한 제자들이 주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길을 걸은 사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집 안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성전이 매 주일 가득 차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이 주님의 말씀으로 매일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사람들로 가득 차 식사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과 계셨을까요? 밀쳐 대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 섞인 표정을 하고 계셨을까요?
물어본 것을 또 물어보는 사람들 때문에 답답한 표정을 짓고 계셨을까요?
물론 둘 다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의 말을 듣고 기뻐하는 제자들을 보며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들으려는 제자들을 보며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가끔 외부 강연을 나갑니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다릅니다. 이본당 분위기 다르고 저 본당 분위기 다릅니다. 이 단체 다르고 저 단체 다릅니다.
돌아오는 길은 늘 기쁘면 가득합니다. 그리고 유독 더 기쁠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눈빛이 빛났던 교우분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면 더욱 기쁘면 가득합니다.
아마도 주님은 저의 기쁨과 비교되지 않을 기쁨 속에 계셨을 것입니다. 친척들은 미쳤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행복이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분과 함께 걷고 먹고 듣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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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리가 첫 자리라면….
신언회(SVD)의 사제였던 프랭크 미할릭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수학에서 배운 바로는 소수점에 붙은 0의 위치에 따라 수치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소수점 다음에 1이 왔을 때 그 사이에 0이 붙으면 붙을수록 수치는 1보다 작아집니다. (ex: 000,000,1)
하지만 1이 먼저 오고 뒤에 0이 붙고 마지막에 소수점이 오게 되면 수치는 정반대로 커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바로 1이 앞에 오기 때문입니다. (ex: 1,000,000)
우리의 행동에서 하느님이 첫째가 되는 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하면 할수록 그 가치는 더 커집니다. 우리의 행동에서 우리네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행동의 가치는 그만큼 작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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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30년 동안 심리 실험을 통해 공감 정확도를 연구해 온 사회심리학자 윌리엄 이케스에 따르면, 사람들의 평균적인 공감 정확도는 100점 만점에 22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즉, 잘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단 22%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친한 친구의 마음은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40점을 넘지 못했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50점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갈등과 분쟁이 생깁니다. 어떻게 내 마음을 몰라주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산 부부들도 공감 정확도는 그렇게 높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 읽기가 부정확하다는 인정해야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를 보고서는 인상을 씁니다. 이때 ‘내게 기분 나쁜 일이 있음이 분명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도 나를 보기 싫어서 피했기 때문일 거야.’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친구는 급하게 화장실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여러 가능성을 보지 않고 부정적인 마음에 갇히면 마음 읽기는 더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마음이 쌓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삐딱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이끄심도 이렇습니다. 주님과의 공감 정확도가 낮아질수록, 주님의 사랑보다 불평불만의 이유만 늘어놓게 됩니다. 주님과 더 멀어지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공감 정확도가 높은 사람은 힘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으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전교 여행 중이었습니다. 군중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글쎄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붙잡으러 나선 것입니다. 아마도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는 소문,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 마귀 두목 베엘제벨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는 소문 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예수님의 활약상에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닌, 미친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단정 지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공감 정확도는 얼마나 될까요? 주님의 뜻을 보지 않고,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봤기에 공감 정확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친척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가장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과의 공감 정확도를 높이는데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과의 마음에 함께하면 할수록 기쁨과 행복의 마음도 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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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중요한 건 일정표에 적힌 우선순위가 아니라 당신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스티븐 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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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
“주님,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ㄴ)
미치지 않고 살 수 없는 희망도 길도 보이지 않는 참 재미없는 어둡고 험한 광야같은 세상입니다. 제대로 미쳐야 하는데 중독등 잘못 미쳐 폐인이 괴물이 되니 문제입니다. 기상하면 맨먼저 열어보는 교황님 홈페이지입니다. 1936년생이니 우리나이로하면 저보다 13세 많은 89세 고령입니다만 정신력으로하면 60세라 합니다. 교황님의 어제 하루 일과도 정말 가득찬 하루였습니다. 개인이든 일행이든 만날 때 마다 꼭 메시지나 말씀이 뒤따르는데 어제 하루만도 네 번의 접견이 있었습니다.
1.일치주간을 맞아 핀란드의 교회일치그룹들(개신교, 가톨릭, 정교회)을 만나 “순례자 교회(a pilgrim Church)”로서 더불어 여정중인 이들에게 “성인들은 일치의 원천”임을 역설했습니다.
2.수백명의 가톨릭대학 당국자들을 만나 “계속하여 지혜와 인간성을 함양할 것”을 격려하셨습니다.
3.1963년 댐의 붕괴로 2000명 가량이 죽었던 이태리 북부 교구내 신자들 백여명의 방문객들에게는 “여러분은 부활을 증거해왔다”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4.카차흐스탄 대통령과의 만남.
5.콜롬비아 대통령과의 만남.
교황님의 하루 일상이 너무 경이로워 구체적으로 출력하여 열거해 봤고 후에 내용들은 읽을 계획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란 자주 언급한 말이 생각납니다. 교황님이야말로 불경스럽긴 하지만 제대로 미친 살아 있는 성인임이 분명합니다. 89세 고령의 나이에 미치지 않으면 이렇게 한결같은 열정으로 사시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 두절로 아마도 매일미사 복음중 가장 짧을 것입니다. 다음 구절에 집중한 강론 주제도 언제나 대동소이합니다. 앞절은 얼마나 분주한 예수님의 일상인지 군중이 계속 모여들어 예수님 일행은 음식을 들 수 조차 없었다 묘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려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정말 예수님의 행태는 정상인들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너무 많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른 “불광불급(不狂不及);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 이라는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저역시 한밤중 12시 넘어 기상하여 강론을 쓰는 지금은 01:40분 정상인들의 생각에는 미친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예전 약 50년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온 열정을 다 쏟을 때 선배교사의 충고(?)에 드린 답변도 생각이 납니다.
“이 선생,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좀 쉽게 살수 없어.”
“저에겐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한 생활인데요.”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저의 사랑 전부였다면 20대 후반의 청년교사시절의 저에겐 아이들이 저의 사랑 전부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에 미친 삶이지요. 이래서 저는 자주 되뇌이곤 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미치면 폐인이나 괴물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미칠 광자가 들어가는 말마디들, 광기狂氣, 광증狂症, 광분狂奔, 광신狂信, 광폭狂暴등 많습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을 제대로 살기위해선 정말 영적훈련이 필요합니다. 제대로 미쳐사는 것이 정신 건강, 영혼 건강에 필수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달인이나 장인, 대가 역시 제대로 미친 경우일 것입니다. 제대로 미친 경우에는 예수님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여기 사는 수도자들도 역시 제대로 미친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미쳐야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참 거칠고 험한 생존경쟁 치열한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보십시오, 광야여정 세상살이에 제대로 미친 사람들보다 잘못 미쳐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저는 자주 강조하는 바 세 유형의 인간 군상들입니다. 제대로 미친 성인들의 온전한 사람들과 희망을 잃고 온갖 중독으로 폐인이나 괴물이 된 사람들 셋으로 분류해보곤 합니다.
요즘 스마트톤중독 환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다들 알게모르게 이런저런 중독으로 미쳐가는 폐인이,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념에, 종교에 중독되어 광신이, 맹신이 되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앞으로 1인가구의 증가로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 아득한 예전 사막교부 성 안토니오 압바의 일화도 생각이 납니다. 그대로 오늘의 현실에 대한 예언같아 섬찟한 느낌도 듭니다.
-안토니오 압바는 말했다. ‘사람들이 미쳐갈 때가 오고 있다. 그때 사람들이 미치지 않은 어떤이를 볼 때 그들은 그를 공격하며 말할 것이다. “너는 미쳤다. 너는 우리와 같지 않다.”’-
문득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으로, 남을 속이려고 옳고 그름을 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 “벌거벗은 임금님”(사치와 허영에만 들떠 사는 사람들의 허망한 삶을 꼬집는 재밌는 안델센의 동화) 예화도 생각납니다. 모두가 정상적이 아닌 비정상적 미친 인간 현실을 빗대 예화들입니다. 정말 정상인이 비정상인처럼 생각되는 세상이라면 이것은 미쳐가는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새삼 온전한 인간으로 깨어 살기 위한 분투의 노력이 있어야 함을 절감합니다.
어제에 계속 이어지는 오늘 제1독서 다윗의 일화가 감동적입니다. 오늘부터는 사무엘 하권의 시작으로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에 슬퍼하는 다윗의 모습이 참 인간적이다 싶습니다. 주님의 전사로 치열히 살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사울과 요나단입니다. 다윗의 애가가, 조가가 심금을 울립니다.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세었지...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이런 극한의 슬픔속에서도 다윗이 내적으로 무너지거나 미치지 않을 수 있음은 그의 깊은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삶 덕분이요 요나탄과의 깊은 우정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사울 아버지에게는 효자였고, 다윗에게는 친구였으니 요나탄은 주님의 훌륭한 전사임을 물론 참된 인간의 전형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늘 되뇌이는 말도 생각이 나네요.
‘본의 아니게 치매나 노환으로 품위를 상실하고 요양원에서 세상 떠나는 노년인생들은 얼마나 많은가! 주님의 전사로서 객사가 사고사가 병사가 아니라 싸우다 죽어야 전사다, 일하다가 기도하다가 공부하다가 즉 영적전투중에 살다가 전사했으면 소원이겠다.’
주님의 전사답게 살다가 은총으로 깨끗한 전사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평상시 영혼 건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어제의 깨달음에 감사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영적 주식과도 같은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성무 공동전례기도의 규칙적 평생 수행이 영혼의 치유와 건강에 얼마나 고마운지 어제는 수도형제들과 힘차게 시편을 노래하면서 통감했습니다.
공동체 소속 욕구는 본능적이요 참으로 건강한 욕구입니다. 가톨릭교회야 말로 진정 힐링의 종교요 힐링의 센터요, 온갖 중독의 해독에, 영혼 치유와 건강에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노래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음을 어제 참 깊이 깨달았습니다. 최고의 법이요 희망이자 사랑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를 실현시켜주는 전례은총이 참으로 영혼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되시면, 176절까지 계속되는 가장 긴 시편 119장(주님의 법)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풍요하고 좋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요 정의요 말씀이요 계명이요 하느님의 법으로 계시됩니다. 온전한 치유에 건강의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뿐입니다. 공동체가 붕괴되어 가는 1인가구 시대에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가톨릭의 공동전례기도를 찾을 거란 예감도 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가톨릭교회의 미사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참으로 우리 모두 영적 건강의 온전한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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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님처럼 미치고 싶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우리 님처럼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미치고 싶다
우리 님처럼
움켜쥠이 아니라
사랑에 미치고 싶다
우리 님처럼
내리누름이 아니라
섬김에 미치고 싶다
우리 님처럼
업신여김이 아니라
살림에 미치고 싶다
우리 님처럼
홀로 누림이 아니라
더불어 삶에 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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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21)
예수님 이름의능력
그리스도인은 주문 같은 것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께서 하신 일을 기림으로써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특히 온전한 믿음과 바른 마음가짐을 지닌 이들이 그 이름을 부를 때, 사람들한테서 악령들이 쫓겨
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예수님 이름이 지닌 힘은 실로 대단해서, 사악한 자들이 그 이름을 불러도 위력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마음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치유하고, 어둠의 영들을 쫓아내며, 병든 이들에게는 언제나 유효한 치료약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말씀을 선포하시오(2티모 4,2).
어제 나는 한 특별한 자리에서 <주님의 기도> 한 구절을 말했습니다.
“너희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라." 이 말은 이렇게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너회의 뜻대로 되어라. 나의 뜻은 너희의 뜻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의 뜻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께서 뜻하신 바입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만물을 여의고 깊이 잠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피조물과 이미지를 여의라는 뜻입니다. 깊이 잠든 사람이 백 년 동안 잠올 잔다면, 그는 모든 피조물과 시간과 이미지를 여윌 것이라고 대가들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만 한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는 것올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가서에서 영혼이 “나는 자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깨어 있었다”(아가 5,2)고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여러분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105)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4. 이슬람교에서 나타나는 유일신 신앙
알라로부터 직접 영김을 받은 신의 참된 밀씀 <꾸란>
무하마드가 처음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 신의 직접 계시 말씀을 받았을 때는, 아랍의 민속 무당들이 신탁을 전하듯 힘찬 어조였을 것이다. 그 뒤 역사적 편집 과정을 통해서 처음의 박력은 사라지고, 어떤 문장은 긴 교훈이나 경고, 설화 등으로 꾸며져 <꾸란>의 문학적 표현 형태가 다소간 변모되어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란>에 나타나는 무하마드의 교훈은 엄격하고 긍정적이며 단호한 기풍을 나타낸다. 암송할 때는 느린 멜로디 형태로 읊조린다. 이슬람 신학교에서는 교과 과정에 통송법을 두어 충분한 자격을 갖춘 암송가들을 육성해 낸다.
이슬람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위에 서 있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가 성경을 강조하여 ‘말씀의 종교’ 라고 흔히 말하지만, 이 점에서 이슬람교는 더욱 철저하다. 이슬람교에서는 유일신 알라(하나님)와 인간이 만나기 위한 어떤 중간적 제사나 제물이나 성직자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오직 <꾸란>의 말씀만을 강조한다. ‘말씀의 종교’임 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는 신부나 목사와 같은 전문 성직자가 있어서 말씀을 선포하고 예배를 이끈다. 그러나 이슬람 성전이랄 수 있는 모스크에는 아무런 예배 재단이 없으며 ,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성직자도 없고 어떤 형태의 상징적 조형물도 없다.오직 알라의 계시 말씀 <꾸란>만이 독송되고 그 의미를 ‘오늘 여기' 에서 재선포할 뿐이다. 이슬람교 연구자들은 그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이슬람교에는 성직자 제도가 없다. 이 점은 이슬람이 그리스도교, 유대교, 불교 등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이다. 이슬람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영적 중간 매개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은 중간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 ‘이맘’은 예배할 때 맨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일컬으며, 모든 무슬림들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이 될 수 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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