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무엇으로 회향하는가
지난 가을, 절 살림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하는 동안 겨울 손님도 바람처럼 스쳐가고 어느 새 봄기운이 콧전에 맴돌았다. 세월은 무상하다. 만남이 그리운 날에도 빠르지 않고 이별이 아쉬운 순간도 느리지 않다. 빠르고 느림은 마음의 분별일 뿐 세월은 다만 무상할 뿐이다. 그렇게 흘러가는 날들이 음력 이월 초하루로 다가왔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여 보통 날과는 달랐지만 막상 법회를 시작하니 썰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법회에 참석한 신도들이 보름 전에 도량을 꽉 메우고 정진하던 때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적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한 현상이지만 채워준 고마움보다 빈자리의 허전함을 크게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큰 스님의 법문을 마친 뒤에 나는 대중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 보름법회를 열기로 하였다. 염불법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마련되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점심 공양 후에는 법회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신도회 간부들과 모임을 가졌다. 지난 몇 달 동안 참석을 꺼려하던 신도들까지 모두 참석했다. 아마 사찰 운영방식을 보고 희망을 가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몇 가지 의논할 사항도 쉽게 마무리 되었다. 절에 다닌 지 3, 40년 정도된 신도들은 절살림 돌아가는 것을 주지스님 못지않게 잘 파악하고 있었다. 창고의 양식으로부터 갖가지 불구, 연중행사의 먹을거리, 물품비용 등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여러 불사에 큰손으로 보시한 시주자들을 소위 대보살이라 부르며 서로를 추켜세우고 지난 날의 신심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보살이라는 이름은 많은데 정작 어려울 때 돕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사연이야 다 그럴듯하다.
옛날 잘 살던 시절에는 이절 저절 다니면서 불사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형편이 여의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옛날의 대보살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소리없는 말을 던진다.
"옛날의 그대와 지금의 그대는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
이런 저런 화젯거리로 떠들던 수다도 그치고, 노보살님의 조언이 이어졌다.
"스님, 다음 달 삼월은 윤달이 있어서 예수재 지내야 합니더, 거 비용이 꽤 들겁니더, 잘 하이소…"
모임이 끝났다.
예수재(預修齋), 미리 닦는 재라! 죽은 후에 행할 불사를 생전에 미리 닦는 재이다. 『관정수원왕생십력정토경』에는, "사부대중들이 이 몸이 무상한 줄 알고, 부지런히 닦아 보리도를 행하려거든 죽기 전에 미리 삼칠일을 닦되, 등을 켜고 번을 달고, 스님들을 청하여 경전을 읽고 복업을 지으면 한량없는 복을 얻으며, 소원대로 과보를 얻는다"고 하였다. 예수재, 그것은 수행이란 끝이 없는 길인데 공덕 닦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이 많으니 방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 죽을 무렵에 '나무아미타불' 열 번만 부르면 정토에 태어나 영원히 윤회를 벗어난다고 하니, 마음 놓고 닦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겠다. 부처님은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하셨다고 하였으니, 임종염불에 믿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예수재에 발심할 수도 있다.
나는 출가 이후 예수재 봉행하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의식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사람마다 전생에 지은 업보를 짊어지고 태어나는데, 태어난 해에 따라 다른 업보들을 돈으로 환산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그 금액에 상당하는 『금강경』을 독송한다. 빚돈은 액수만큼 화폐 단위별로 종이로 만들어 회향하는 날 태워 보낸다. 의식도 복잡하기 그지없다. 불보살님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전에 예배공양하며 아뢰고, 끝으로 달리는 말에 업보를 실어 보내버린다.
방편법이라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불교답지 않은 면이 많다. 예배ㆍ공양ㆍ독경ㆍ참회ㆍ염불 등 미리 닦는 수행은 권할 일이지만, 사람마다 탑다라니 『금강경』 종이지폐를 만들어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태우는 의식은 한 생각 바꾸면 고쳐도 좋을 법이었다. 나는 예수재라는 명분으로 더욱 정진하여 믿음을 일으키고 발심하는 계기를 삼는 뜻은 훌륭하지만 형식은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수재에 대한 연구 자료를 보면 중국에서 예수재가 성행하던 시절에 종이산업이 부흥했다고 하는데, 예수재와 중국의 종이산업이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나라는 종이의 9할 이상을 수입하는데 윤달이 든 해마다 불교계에서 어마어마한 분량을 소각해버리면 낭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인지시키며 법답지 못한 관습을 고치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생각했다. '각자가 짊어진 빚의 액수대로 수표 한 장씩만을 발행한다. 절약한 비용은 자녀들을 위한 장학기금 조성의 기초를 마련한다.『금강경』 독송은 법사를 초청하여 법문을 경청한다… ' 나는 이런 생각을 정리하여 큰스님께 말씀드렸다. 큰스님께서는 "수표 한 장만을 발행하는 등 파격적인 변화를 보이면 신도들이 동참하기 어렵다. 말로만 장학기금 조성이지 누가 얼마나 동참하겠는가, 암자에서 법사를 초청하여 큰 법회를 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등의 이유를 들어 부정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해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물러났다.
며칠 후 본사인 큰절 주지스님을 찾아뵙고 법회계획을 말씀드리면서 앞으로 이런 법회와 더불어 발전적인 방향이 모색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청하였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주지스님은 생각보다 쉽게 허락해 주시고 법사로 동참하기로 하셨다. 물론 큰스님의 후광을 힘입은 바가 컸고, 강원생활부터 잘 모신 인연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법사스님 초청문제는 수월하게 해결되었다. 본사 주지스님, 선원장스님, 강원의 강주스님, 대강백 세 분 스님, 은사스님, 이렇게 일곱 분을 법사로 모셨으니 근래에 이 만한 금강경 법회도 드문 일이었다. 법사스님들께는 미리 『금강경』 32장을 몇 장씩 분담하여 설법하시도록 청하였는데 매우 흡족해 하셨다.
나는 새로 개설한 보름법회, 이월 관음재일, 삼월 초하루 법회 때도 역시 구체적인 법회일정을 알리며 예수재에 대한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시대상황에 맞는 발전적인 방법을 실천하는데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향의 의미와 방법을 설명하면서 능력껏 실천하되 '무엇으로 회향하는가?' 라는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불자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삼월 초에 열린 예수재 입재일은 초하루 법회의 영향인지 그리 많지 않은 신도들이 모였다. 입재법문을 하시는 큰스님의 음성도 힘없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일의 성사여부를 아미타 부처님께 맡기고 낮에는 대중과 함께, 저녁에는 혼자서 염불정진에만 힘썼다.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과 행동을 다 살펴보시고 헤아리신다 하셨으니, 믿음으로 행할 뿐 별다른 재주를 부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매일 사시불공 때면 명호는 관세음보살이지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마음과 다름없이 신심나는 염불을 계속했다. 5개월이 지나도록 바쁘게 움직이면서 염불을 등한히 했으나 주변 정리가 되고 다시 염불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들이 주어져 환희에 찬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어느 덧 일주일이 지나고 초청법사의 『금강경』 법회 첫날이 왔다. 나는 법사스님께 예를 드리고, "저의 뜻을 큰스님께서 잘 전해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은 호탕한 성격에 유머 감각이 뛰어나신 달변의 대강백이셨다. 법회는 매우 만족하게 이루어졌고 나의 뜻도 잘 전달되어 신도들의 감응을 일으킬 만 하였다. 그 후 매일 사시불공에 참여하는 신도가 늘어나고, 두 번째 법회부터는 새로 오신 신도들을 포함해서 초하루 법회를 능가하는 신도가 모였다. 신도들은 내가 사시불공 때마다 함께 염불하고 공양의식을 집전하는데서 환희심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나도 그야말로 환희심으로 염불하였다.
아미타 부처님께서 나의 염불하는 마음과 행동을 살피신 것인가, 아니면 신도들의 마음에 믿음을 불어넣으신 것인가? 시간이 흐르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다. 매일 사시불공이 끝나면 신도들이 한 두 명씩 약간의 금액이지만 장학기금 조성에 보태라며 보시를 하였다. 어떤 신도는 절에 오지 못한 신도의 부탁이라면서 이름을 적은 쪽지와 함께 보시금을 보내왔다. 또 다른 신도는 아예 권선문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장학기금 조성은 회향날까지 30여권의 권선문이 보급되었다. 그 후 신심과 환희심으로 모은 보시금은 모든 경비를 제외하고 4천만원이 모아졌다. 나는 큰스님께 법회과정을 말씀드리고 장학기금 조성의 씨앗임을 강조하면서 통장을 맡겨 두었다. 훗날 이 기금의 인연은 커다란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 불법을 자기화 함으로써 지혜를 성취하여 자비를 실천하고자 한다. 그러나 온전한 자비는 일심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일심의 지혜를 닦는 과정에서의 베푸는 행위는 자비와 구별하여 회향이라 부른다. 회향이란 자신이 닦은 공덕을 안으로 돌려 지혜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고, 밖으로 남을 향해 돌려준다는 뜻이다. 돌려주는 방법은 재물을 베풀거나, 법을 설하거나, 두려움 없음을 전하는 일 등이다.
그런데 대개 회향일에는 지금까지 닦은 예배 공양ㆍ독경ㆍ염불ㆍ참회 등의 대가로 저마다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니, 회향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회향의 의미를 생각할 때, 이번 예수재는 참다운 회향을 실천한 것이었다. 발전적인 방법을 시도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예수재는 지금까지의 고정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초청법사의 다양한 법문을 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과 인연을 맺게 하고, 장학기금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니 가히 성공적인 회향이었다.
예수재에 동참한 모든 인연은 '무엇으로 회향하는가?' 라는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불법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은 스님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또한 머리로 헤아리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정진한 그 위력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순간처럼 지나가버린 법회과정을 회상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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