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뒤, 우리는 노래가 된다
비가 그친 숲길에는 두 개의 세상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걷는 길 위에 있고, 다른 하나는 물 위에 거꾸로 놓여 있다. 나무도 두 그루가 되고 하늘도 둘이 된다. 길 위에 선 사람마저 물속에서 또 하나의 모습으로 살아난다. 비가 남기고 간 물웅덩이는 세상을 잠시 두 배로 만드는 거울이다.
그 길에 새들이 앉아 있다. 초록빛 새, 희고 작은 새, 붉은 얼굴을 가진 새, 노란 뺨을 가진 새들. 가느다란 줄 하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음표다. 어느 새도 같은 빛깔이 아니고 어느 새도 같은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런데도 함께 있으니 묘하게 어울린다.
나는 그 뒤에 서서 우산을 든다. 보랏빛 우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숲은 아직 비의 냄새를 품고 있다. 젖은 흙 냄새가 올라오고 나뭇잎에서는 늦은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진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두드리던 빗소리는 사라졌지만 숲은 완전히 조용하지 않다. 바람이 잎을 스치고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짧게 운다. 이상하다. 비가 그친 뒤의 고요에는 언제나 소리가 숨어 있다. 새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 태연하다. 한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고, 한 녀석은 옆 친구를 바라본다. 서로 붙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채 저마다 알맞은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
사람 사이에도 저런 거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가까워 서로를 아프게 하지 않고, 너무 멀어 외롭게 하지 않는 거리. 각자의 자리를 인정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같은 줄 위에 앉아 줄 수 있는 관계. 살아갈수록 사람 사이에서 어려운 것은 사랑의 크기보다 거리인지도 모른다. 새들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새들보다 한참 뒤에 서 있다. 그래서 오히려 좋다. 앞에 서서 풍경의 중심이 되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젊은 날에는 늘 앞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보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멀리 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여겼다. 사람들 앞에 서야 했고 무언가를 보여 주어야 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니 꼭 앞자리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뒤에 서야 온전히 보이는 풍경도 있었다. 내 앞을 걸어간 사람들의 뒷모습, 곁을 지켜 준 사람들의 마음, 한때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하루의 평온함. 삶의 자리에서 조금 물러서자 오히려 많은 것이 선명해졌다.
비가 그친 길도 그렇다. 맑은 날이었다면 그저 걸어갔을 길이다. 그러나 비가 내려 길이 젖자 나무가 물 위에 한 번 더 자랐다. 보랏빛 옷을 입은 사람도 물속에 또 한 사람으로 서 있다. 새들까지 물 위에 거꾸로 내려앉았다. 나는 한동안 그 반영을 바라본다. 실제의 새들은 줄 위에 앉아 있는데 물속의 새들은 마치 아래쪽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현실과 그림자가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이다. 문득 사람에게도 반영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나.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숨겨 둔 마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흔들리는 속내. 우리는 대부분 물 위의 모습만 보여 주며 살아간다. 반듯하게 서 있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한다.
하지만 마음에도 물웅덩이가 생기는 날이 있다. 그날에는 감추어 두었던 것이 비친다. 외로움도 비치고 그리움도 비친다. 오래전 놓쳐 버린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것을 굳이 지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 위에 비친 나무가 조금 흔들린다고 실제 나무까지 쓰러지는 것은 아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면 일그러졌다가 물결이 잦아들면 다시 제 모습을 찾는다.
마음도 그렇다. 흔들린다는 것은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다. 새 한 마리가 날개를 살짝 펼친다. 순간 나머지 새들의 몸에도 작은 긴장이 흐르는 듯하다. 금방이라도 모두 날아오를 것 같다. 그러나 날지 않는다. 다시 고요다. 그 짧은 움직임을 바라보다 생각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서둘러 다음으로 넘기며 살았을까. 꽃이 피면 벌써 질 것을 생각했고, 사람을 만나면서 헤어질 날을 걱정했다. 좋은 순간에도 다음 일을 준비하느라 정작 그 순간을 충분히 바라보지 못했다. 새들은 떠날 수 있으면서도 지금은 머문다. 그것이 아름답다. 머물 줄 아는 것도 삶의 능력이다.
나는 우산을 조금 기울인다. 이제 비는 오지 않지만 굳이 접고 싶지 않다. 보랏빛 우산은 비를 피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늘의 풍경을 완성하는 작은 지붕처럼 느껴진다. 우산을 들고 서 있으니 삶에서 만났던 수많은 우산이 떠오른다. 내가 힘들 때 말없이 곁을 내어 준 사람, 실패했을 때 이유를 묻지 않고 밥부터 먹으라던 사람, 마음에 비가 내리던 날 조용히 전화를 걸어 주던 사람.
사람도 누군가의 우산이 될 수 있다. 비를 멈추게 해 줄 수는 없지만 함께 젖지 않을 만큼 작은 자리를 내어 줄 수는 있다. 인생의 폭우를 대신 맞아 줄 수는 없어도 잠시 그 사람의 어깨 위로 우산을 기울일 수는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날들이 있었다. 햇빛이 나무 사이로 조금씩 들어온다. 젖은 길 위에 밝은 조각들이 생겨난다. 물 위의 나무가 흔들리고, 내 보랏빛 그림자도 흔들린다.
새들의 그림자 역시 함께 흔들린다. 실제의 새와 물속의 새. 어느 것이 더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나는 선명하고 하나는 흔들린다. 그러나 흔들리는 쪽에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인생도 그럴 것이다. 완벽하게 살아낸 날보다 조금 흔들렸던 날들이 더 오래 기억된다. 넘어졌다 일어난 날,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밤, 마음대로 되지 않아 한참을 돌아갔던 길. 그런 시간들이 모여 한 사람의 깊이를 만든다. 나는 이제 반듯한 삶보다 흔들릴 줄 아는 삶이 조금 더 좋다. 비가 오면 젖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웃고, 떠나는 사람 앞에서는 아쉬워할 줄 아는 삶.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새들이 여전히 줄 위에 앉아 있다. 가느다란 줄은 오선지가 되고 다섯 마리의 새는 다섯 개의 음표가 된다. 물 위에는 또 하나의 악보가 펼쳐진다. 위의 음표와 아래의 음표가 서로 마주 본다. 그리고 그 뒤에 내가 있다. 나는 오늘 이 음악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저 조금 떨어져 서서 듣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좋다. 세상의 모든 장면에서 주인공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한 걸음 뒤에 서서 누군가의 노래를 들어 주는 사람이어도 좋다. 꽃을 바라보고, 새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비가 남긴 물웅덩이 하나에 오래 눈길을 주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잠시 후 새들은 날아갈 것이다. 물 위에 있던 새들의 모습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햇살이 높아지면 물웅덩이도 마르고 오늘의 거울도 없어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아름다운 것은 오래 남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잠시 우리 앞에 머물러 주기 때문에 아름답다. 나는 우산을 들고 천천히 길을 바라본다. 숲은 다시 초록으로 환하고, 비가 씻어 놓은 길에서는 작은 빛들이 반짝인다. 새들이 앉은 줄과 물속에 비친 새들 사이로 한 편의 음악이 흐르는 것 같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는 분명 노래가 들린다. 비가 한바탕 세상을 두드리고 지나간 뒤에야 들을 수 있는 노래다. 흔들린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 젖었던 마음이 천천히 마르는 소리, 떠날 수 있는 새들이 잠시 함께 머무는 소리.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삶에는 비를 피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비가 그친 뒤 우산을 접지 않고 가만히 서서 세상이 다시 노래하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편다. 물속의 새도 함께 날아오른다. 하늘과 물 사이, 삶의 다음 소절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