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運命)의 꽹과리 갑자년(甲子年) 삼월 초여드렛날, 임금은 우선 신주를 먼저 보내고 대비를 가마에 태워 내보낸 후 한강을 건너 공주(公州)로 몽진하였다. 임금이 떠난지 이틀 뒤에는 이괄의 군대가 서울에 들어왔다. 이괄은 선조 (宣祖)의 열째 아들 흥안군을 모시고 개선장군처럼 나타났다. 길가에는 출 영나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누구의 입에선지 "새 임금이 들어오신다!" 한 마디 외치자 시민들도 모두 환성을 올렸다. 이괄은 그나로 흥안군을 세워 임금이라 칭하고, 명색 조정이란 것을 벌여 서인(西人)에게 내 쫓긴 대북(大北) 사람들까지 쓸 만한 사람이면 모조리 불러들여 각기 한 자리씩 맡겼다. 그리고 과거령(科擧令)까지 내려 선비들 을 뽑는다 했다. 전에 이이첨의 부하였던 사람들은 이제야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살기 좋은 새 세상이 왔으니, 모두들 안심하고 일하오." 하고 사람들을 충동이며 돌아다녔다. 이제는 내 세상이노라고 임금이다, 대신이다, 하고 서둘던 이괄의 귀에 정 충신(鄭忠信)이 관군을 거느리고 남하한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은 흥안군의 새 나라가 생긴지 불과 며칠이 안 되어서였다. 이괄은 몹시 당황하여 "도원수 장만이야 대수롭지 않은 인물이지만 정충신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 다." 하고 황황히 군사를 모으고, 군기를 정비하는데 한 장교가 달려와 정충신 의 군대가 이미 서대문 밖 안재(鞍峴)에 웅거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정충신은 전라도 광주 태생으로 임진왜란 때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광주목 사 권율(權慄)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육로 수천리 의주 행재소의 선조에 게 갖다 바친 뒤 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선조의 명으로 이항복에게 가르 침을 받았다. 선조가 서거하고 광해가 왕위에 오르자, 고결한 그의 성품이 간사한 신하들로 가득 찬 조정에 연합되지 않아 초야에 묻혀 있다가 인조 반정 후 비로소 안주(安州)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괄이 반란을 일 으킨 소식을 듣자 숙천부사(肅川府使) 정문익(鄭文翼)에게 그의 맡은 고을 을 부탁하고 단신 장만의 진중으로 뛰어갔다. 장만은 "이 난리 중에 어찌 맡은 고을을 함부로 떠났소?" 하고 정충신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이괄과 정의(情義)가 형제간 같아서 그가 민란을 일으킨 오늘 안주에 그냥 있다가는 의심을 받기가 쉽습니다. 장군께서는 이 사람에게 군사를 맡겨 이괄을 치게 해주십시오." 이에 장만은 정충신에게 여러 모로 전략 방법을 묻고 그의 전략이 비범함 에 감복하여 그에게 부원수란 직책을 맡기고 군사 이천명을 주어 중군대장 남이흥과 함께 적을 무찌르게 했던 것이다. 이괄은 정충신이 웅거한 안채를 바라보았다. 과연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나 그 수효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저편 군사는 얼마 되지 않으니, 일제히 공격하여 빼앗아버리자." 그의 명령 아래 이괄의 군사는 일제히 안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산 위에 는 정충신의 관군이요, 산 아래는 이괄의 군대이다. 마침 동풍이 불어 이 괄의 군은 크게 유리하여 총탄과 화살을 퍼부으며 산정을 향해 육박했다. 산 위에서도 지지않고 모든 병기를 동원하여 대항해 왔다. 싸움이 점차 치 열해 가던 중 풍세는 서북풍으로 변했다. 이제는 위에서부터 공격하기가 좋았다. 화살과 돌과 모래가 내려와 이괄의 진을 뒤덮었다. 군사들은 눈 을 뜨지 못해 크게 동요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정충신의 군은 돌격으로 옮겼다. 이괄의 군대는 그래도 얼맛동안은 잘 싸워 물러서지 않았는데 별안간 뒤에 서 징(錚) 소리가 일어나더니 [후퇴하라!] 소리가 산천이 진동하도록 울려 왔다. 이괄의 군대는 멋도 모르고 후퇴를 개시했다. 본래 군대는 북소리에 진군하고 징소리에 퇴각하는 것이었으므로 정충신은 계교를 써서 남이흥으 로 하여금 적진 후방으로 가서 징을 치며, 퇴각을 하라고 외치게 한 것이 었다. 이괄의 군은 여기서 산산히 패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장만(張晩)은 볼만이요, 이괄(李适)은 꽹과리} 하고 비웃었다. 이것은 그때 장만은 파주(坡州)에 머물러서 보고 있기만 하였고 이괄은 꽹 과리로 인해 크게 패하여 결국은 목숨까지 잃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정충신에게 산산히 분쇄된 이괄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여 성중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벌써 백성들의 태도는 표변해 있었다. "역적 이괄이 패했다. 저놈 쫓아라!" 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들이지 않았다. 이괄은 하는 수 없이 초라한 군사 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광주쪽으로 향해서 달아났다. 정충신의 관군은 성 안으로 들어와 그동안 이괄에게 협력한 사람들을 잡아 들이었다. 서울은 다시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 이괄의 군사들은 광주로 달아나 광주목사 임회(林檜)를 죽이고 다시 이천 (利川)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이미 이괄을 쫓던 군사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단 여섯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이괄은 한명련, 기익헌, 이수백 그 리고 군졸 서넛과 다시 남으로 내려가 재기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야박한 것은 인심이다. 그렇게까지 이괄을 섬겨오던 기익헌과 이수백은 비밀히 의논하기를 서로 살 도리를 강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쑥덕거렸다. 그들은 밤에 이괄과 한명련이 잠든 틈을 타서 그들 두 사람의 목을 잘랐 다. 그리고 그 머리를 군복에 싸가지고 공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임금 에게 바치었다. 이로써 한동안 매우 급하던 난리가 평정되었으므로 임금은 두 수급(首級) 을 검증한 다음 팔도 각 고을로 돌리고 과장(科場)을 설치하여 충청도 선 비들을 뽑은 다음 동가(動駕) 소리 높이 서울로 돌아왔다. 기익헌과 이수백은 얼마 후 죄를 용서 받고 풀려나왔다. 그러나 서흥(瑞 興)에서 이괄과 싸우다 죽은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이문웅(李文雄)이 아 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백주에 서울에서 이수백을 죽였다. 의리를 배반하 고 자기만 혼자 살고자 하던 역적의 잔당은 결국 좋은 최후를 보지 못하고 이렇게 죽어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