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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를 휘덮고 있는 허무주의
존재는 생명의 강물
현대는 “존재하는 것[존재자]"에만 파묻혀 무(無)[없
음, 없는 것]를 망각한 현대인들이 #무의_망령에 의
해 시달리는 시대이다. 백 년 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현대의 이
와 같은 상황을 예언하였다. 그때 그는 앞으로 2백
년 동안 허무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그리고 세계를 덮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200년의 역사이다. 내가 서숙하는 것은 도래하는 건 더 이상 역사이다. 내가 서술하는 것은 도래하는 것, 더 이상 다르게 다가올 수 없는 것, 즉 허무주의의 도래다. 이 역사는 지금 미리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연성마저도 여기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래는 이미 100개의 징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명은 어디에서나 자신을 예고하고 있다.”(니체, 『유고』)
니체는 모든 것들의 창조자로서의 #신의_죽음을 선
포했다. 신의 죽음은 모든 것이 그 의미를 잃어 버렸
음을 뜻한다. 신이 죽음으로써 신에 의해 세워진 모
든 것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허무주의
이다. 니체는 이러한 #없음의_경험 을 견뎌내라고,
아니 극복하라고 촉구한다. 니체는 자신의 초인이 이러한 #없음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었다.
허무주의는 독일어 "니힐리스무스 Nihilismus"로 표기되는데 어떤 경우 번역을 않고 #니힐리즘 이라고도 부른다. #니힐 Nihil 은 라틴어로서 #아무것도_없음, #무(無)를 뜻한다. 허무주의는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다.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극단적인 #의미부재를 주장하는 철학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의미나 목적, 목표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 인간의 정신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진리, 도덕, 윤리,종교마저도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정신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이다.
그러면 이러한 주장이 얘기하는 것과 그 주장에서 귀결되어 나오는 것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이미 말했듯이 첫 번째는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이란 없다”라고 하는 주장이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다. 다음 진리와 관련하여 #진리도_없다고 얘기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 그것은 알고 보면 거짓이고, 속임수고 눈가리개일 뿐이다. 뭔가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획득하기 위해 진리라는 포장을 했을 뿐이다. 그 다음 #도덕도_윤리도_없다. 도덕, 윤리도 강한 자들이 약자들을 쉽게 지배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수준 높은 통치수단일 뿐이다. 그 다음 #종교도_없다. 종교라는 것도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민중들을 호리는 환각제일 뿐이다”. 그 귀결은 “신은 죽었다"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라는 것은 죽은 #신의_무덤 위에 지은 건축물일 뿐이다.
따라서 "정신적인 가치란 없다”. #정신적인_가치 라
는 것도 육체적인 욕망을 다스리고 인간의 노동력을
극대화시켜 이용하려고 만들어낸 허구이며 지배계층의 술수다. 곧 육체적인 욕망에 대한 왜곡된 시련이 다. #육체적인_욕망 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정신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으로 육체적인 욕망억제에 대한 보상감을 주는 대리만족 장치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현존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살고자 하는 “의욕”뿐이다. 그러니까 “육체적 욕망의 극대화”, 이것이 허무주의를 살아가는 삶의 요령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추구해야 할 것은 #최대의_쾌락이며, 그것이 곧 "최대의 행복"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등장되는 말들은 쾌락, 도취, 희열, 열광, 오르가즘,엑스타지, 니르바나, 트랑스, 광기, 폭력, 마약, 온갖 중독 등이다. 최대의 쾌락을 누리는 것, 그것이 최고로 행복한 상태이고, 몸을 중심으로 하여 얻을 수 있는 온갖 쾌락, 그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의미의 물음이나 이성적인 돌파구를
찾는다고 할 때 해결책은 딱 한 가지, 즉 #자살 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노력한다면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다.
합리적으로 의미 있게 모든 일을 처리하기를 바란다
면 길은 오직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의미 없는 모
든 것들로부터 “의미 있게”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죽음의_미학, #자살의_미학 이 태동되어 나온다. 유명한 실존철학자 #카뮈 도 이렇게 얘기했다.
부조리한 삶, 그것에 대한 철학적인 귀결은 자살이라고, 부조리한 삶에 이성적인 반성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해결 방식은 자살뿐이다.
<종교의 몰락>
한국 사회에 깊숙이 만연된 허무주의 얼마전[2014년 2월] 가난에 쪼들리고 병에 시달리
며 버텨오던 서울 송파의 세 모녀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미안하다”는 유서와 함께 집세를 남겨놓았다는 사실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퀭한 먹먹함에 빠지게 했다. 이를 본받기라도 하듯이 뒤이어 경기 광주에서 엄마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아파트에서 투신해서 모자가 죽고 딸이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서울 화곡동에서는 간암을 앓던 택시기사가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 동두천에서도 생활고를 못 견뎌 30대 엄마가 아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이 모든 사건들이 한 달도 안 되는 때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이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한다.
우리는 진작부터 #자살공화국 이라는 자조어린 자책을 해왔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수)은 지난 십년 동안 OECD 국가 중 세계 1위를 유지해오다가 올해 2위로 내려앉았다. 자살자 수가 줄어서가 아니라 우리보다 자살률이 더 높은 리투아니아가 지난 5월 OECD 국가에 합류했기 때문이란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자살률은 리투아니아가 26.7명으로 1위고, 한국은 25.6명으로 2위라고 한다. 우리의 경우 심각한 것은 청소년과 노인 자살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신병과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단위 동반자살까지 수치를 증가시키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켕(Emile Durkheim,
1858~1917)은 자살의 유형을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등 3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각각에 대해서 개인적인 자살동기보다는 자살이 일어나는 사회적 상황을 중요시했다. 뒤르켕은 자살의 한 요인으로 #아노미(anomie) 현상을 지적한다. 여기서 아노미는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를 말한다. 이런 사회병리가 노이로제, 비행, 범죄, 자살 같은 사회 부적응 현상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조선시대의 윤리규범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라는 이름의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다. 능률과 성과를 앞세워 경쟁시장에서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해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이념을 앞세운 경제이론이다.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나라에 속한다. 경쟁에 살아남는 사람은 잘 나가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장과 성과의 그늘 아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각자도생(各自圖生) 의 시대에 대학 입학과 취직 그리고 돈 많이 버는 것 정도를 삶의 이유로 삼고 자라온 이 땅의 젊은이들은 쉽게 좌절한다. 보이는 것, 남이 알아주는 것에 휘둘리며 나의 “실존”이나 “인격”, “자존감” 같은 보이지 않는 것,즉 “없이 있는 것[무·공·허]”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처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허무주의”의 그림자가 온 세상을 휘덮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갈지를 모르고 “#될_대로_되라!”며 쉽게 잡을 수 있
는 가까운 재미와 쾌락에 자기 자신을 맡긴다. 그 끝
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