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4일(수)
* 시작 기도
주님...
바울은 주께서 자기를 파송하신 목적이 세례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17).
그런데 이 죄인은 목회를 하면서 가시적 세례 베푸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는 숫자로 확인이 되며 사람들에게 자랑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자랑하기 위함이며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자기주장의지로 목회를 한 자임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세례도 선하고 율법도 선하지만 그 선한 것들을 가지고 나의 의를 드러내는 일에 사용한 나는 죽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주께서는 공의로 나를 심판하셨고 그 심판 아래 들어간 나는 죽은 자 되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으로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늘에 앉히운 자 되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생명으로 인도하시고 날마다 생명의 교제로 이끄신 주님께 오늘도 새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소서.
내 생각에 내가 아무리 정결해 보여도 나는 여전히 추하고 비참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하여 주님의 보혈을 덧입고 나아가지 않으면 단 하루도 설 수 없사오니 나를 주의 보혈로 씻어 주의 정결한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주의 종이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4:32-42
제목 :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나의 묵상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노라고 한다.
이에 예수께서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더 힘을 주어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하였고 이에 다른 제자들도 다 그같이 답하였다.
한편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네에 도착하였다.
겟세마네는 ‘짠다’는 뜻의 ‘게트’와 기름이라는 뜻의 ‘쉐마네’의 합성어로 ‘기름은 짜냄’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겟세마네가 감람산에서 많이 나는 감람 곧 올리브 열매를 이용하여 기름을 짜내는 것과 관련된 장소임을 암시한다.
예수님도 평소에 습관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곤 하셨다.
이번에는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비장한 기도를 하기 위하여 그곳에 오르셨다.
거기서 마치 감람틀에서 기름을 짜내듯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33-34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면서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세 명의 제자들에게 여기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심히 놀라시며’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담베이스다이’의 원형 ‘에크담베오’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매우 놀라며 공포에 떠는 상태를 뜻한다.
또한 ‘슬퍼하사’는 매우 슬퍼하며 근심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이 문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마술을 써서 인간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신으로써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님을 잘 묘사한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써 인간적 고뇌를 가장 깊이 느끼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은 모든 인류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과 불안을 대변하는 자세라 할 것이다.
34절의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역시 ‘슬픔과 고통으로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심각하게 갈등하는 마음의 상태’를 묘사한 상태이다.
그 심적 상태가 오죽했으면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겠는가?
35-36절,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는데, 이를 마태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고(마 26:39)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눅 22:41)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주님은 무릎을 꿇고 가슴과 얼굴 그리고 두 손바닥을 모두 땅에 댄 자세로 기도하신 것 같다.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심령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셨다.
‘될 수 있는 대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자신의 운명을 눈앞에 둔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애원의 표현이다.
‘이 때’는 군병들에게 당하는 체포와 그 이후의 고난 그리고 십자가 고통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일련의 고통스런 사건들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신 것이다.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이 피하고 싶은 고통일 것이다.
이런 고통을 피하기 원하셨던 예수님의 지극히 인간적 심리상태를 있는 사실 그대로 묘사하였다.
아버지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도 하실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능력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능력을 빌어쓰시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기도를 바꾸신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써의 신적인 능력이나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행동하지 않으셨다.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첫 사람 아담이 가져온 죄의 결과를 아들을 통하여 씻기 원하셨다.
그렇기에 아들이 받는 십자가의 잔을 그냥 지나가게 할 수 없으셨다.
그것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자신의 기도를 바꾸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전형이다.
기도로 하나님을 바꾸어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깊이가 더하면 더할수록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게 바꾸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기도 중에 기도요 기도의 완전한 응답이다.
주님이 받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크고 힘든 것인지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고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한편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지은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으로 분투하시는데 제자들은 육신의 고단함과 무거운 눈꺼풀과 싸우고 있다.
첫 번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은 졸음에 지쳐 쓰러져 자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37b-38“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런 일이 세 번에 걸쳐 일어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낯을 뵐 면목이 없었을 터이나 깨우고 가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또 깨우자 그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당황하고 당혹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디 제자들뿐이겠는가?
오늘 이 시대, 나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이 바빠지고 지치며 눈꺼풀의 무게를 이겨내기가 힘든 시대이다.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냥 쉽게 포기하거나 잠에 취하여 곯아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고선 내가 너무나 피곤해서 그랬노라고 합리화나 변명은 어찌 그리 잘 하는지...
누구랄 것도 없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그 정도면 애교쯤으로 봐줄 수 있다.
아예 도를 넘어 내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나님을 바꾸려는 내가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 당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는데 말이다.
그분은 절대로 신적 능력을 갖다 사용하지 않으셨다.
얼마든지 인간적 그리고 육신적 고통을 절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빌어쓰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으며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나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깊은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정말이지 물에 던진 돌과 같이 물속 깊이 가라앉으며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욥 6:3).
내가 무엇으로 그 무거운 죄짐을 벗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어떻게 돌과 모래보다 더 무거운 죄짐을 벗는단 말인가?
그동안 주님이 대신 지신 그 십자가의 은혜를 나는 너무 쉽게 생각했음을 고백한다.
그저 지식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고 생각하였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나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나를 아들로 삼아주셨다.
그 은혜 앞에 나는 오늘도 오열한다.
나의 심령을 찢으며 십자가를 붙들고 아버지 품으로 나아간다.
원수가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하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한다.
이제 내 영이 온전히 살아 주님과 연합하기를 원한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나의 주인은 오직 나의 생명이신 주님이심을 다시 한 번 고백한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주의 이름을 높이며 살기 원하며 작은 입술과 영으로 주님을 찬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중에 죄를 먹고 마셨습니다.
나아가 죄임을 알면서도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아주 진멸하지 않으시고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 앞에 그저 면목없음으로 설 뿐입니다.
지금도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어 두 손으로 입을 가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님의 긍휼만 허락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원하오니 그 안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주신 새 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나의 모든 것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