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주어진 이 하루도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편협하고, 옹졸한 마음을 덮어 주옵시고
낮은 곳의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본문 주해)
32절 : 감람산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예수님과 열한 제자들이 간다.
감람나무 곧 올리브 나무가 많은 산이기에 감람산이라고 하는데 그런 곳에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곳에 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이다.
감람산과 겟세마네라는 지명조차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자신이 으깨어지듯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곳에 이르러서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으라’고 하신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에 여덟 명에게 기도하라고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라고 하는 것은 휴식을 취하라는 말이다.
33~41절 :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시면서 주님의 번민과 슬픔을 이야기하며 깨어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본 자들이며,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는 하늘의 음성도 들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이 세 명은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들었어도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만 잤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죽음 앞에서 놀라고 슬퍼하시며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가?
죄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창세전부터 단 한 번도 아버지로부터 분리된 적이 없으신 아들이 인간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죽으셔야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지는 아들의 고통을 표현하신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부터 분리된 죄인인 인간은 이 고통을 알 수 없다.
이는, 산 자는 죽음을 알지만 죽은 자는 죽음을 모르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것도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자이므로 예수님의 이 고민과 고통에는 함께 하지 못하고 잠만 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 잔’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그 영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고통이다. 이 고통은 유일하게 예수님만 아는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원대로 예수님은 그 잔을 마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42절 : 왜 예수님은 자는 제자들을 함께 가자고 하시는가?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어도 한 시간도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 못했고, 또 주님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베드로가 잠시 칼을 들고 설쳤지만(요18:10) 결국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고만 연약한 육신의 사람일 뿐이었다.
육신의 힘으로는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는 자가 없음을 보여 주신다. 주님만이 연약한 이들을 이끌어 주신다.
(나의 묵상)
역사 속에 나오는 영웅들은 물론이고, 무명의 사람들조차 자기가 가진 종교나 신념 때문에 죽음 앞에서 참으로 의연한 모습이었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인간이 이 정도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더 당당해야지.....죽음 앞에서 쩔쩔매시니 참 실망하고 당황스러웠다. 사도 바울을 위시한 대부분의 사도들도 믿음의 순교를 하였는데 예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시나 생각했었다. ‘기름을 짜듯이 기도하셨다는 것은 매우 모범적이지만 너무 떠시잖아?’ 생각했었다.
그런데 주님의 고통과 슬픔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머리에 밝은 빛의 전구가 켜지고, 가슴은 넘치는 은혜로 떨렸다.
애초부터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고아와 갑자기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의 상실감은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애초부터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태어난 자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주님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였다. 아무리 깨워도 계속 잠만 자는 자들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시니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된 그 영원한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여신 하나님 나라, 만물 위의 세계를 누리며 사는 자가 되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아버지 품속에 안기는 자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그 하나님을 나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육체로 이 땅을 사는 동안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과 슬픔이 두렵고 괴로운 것은 사실이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나를 압박하여 누르는 것들이 많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생을 생각하고, 현재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생각한다.
그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는 증거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아버지를 누리지 못하는 것임을 삶 가운데서 점점 알아가고 있다.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도 문제가 없다.
죽음.....한 번도 직접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니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을 사실이지만, ‘죽으면 주님을 만나는데....’ 생각하면 오히려 기대가 된다. (나의 이 고백이 베드로의 호언장담이 아니길 기도한다.)
살아서는 주님께 연합됨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그 영원한 세계를 누리고, 죽어서는 직접 주님을 뵈오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제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를 안다.
이 땅에서의 무엇을 얻고 이루기 위해 깨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께 붙어 있기 위해서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고난의 잔, 십자가의 잔 앞에서 기도하는 주님을 봅니다.
아버지와의 분리를 가장 두려워하신 주님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 알 듯합니다.
그렇게 잠만 자던 자를 깨우시고 또 깨우셔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하시며 세상 속으로 이끄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큰 문제도 주님 주신 영생을 빼앗을 수 없고,
세상의 그 어떤 위협과 위험도 제가 누리는 아버지 품속의 평강을 해치지 못합니다.
날마다 말씀 속으로 들어가 깨어 기도하는 자로 살게 하시니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주님께 연합되는 그 은혜에 감격합니다.
성령님, 언제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