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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진혁은 풀문(fullmoon) 레스토랑에서 원성과 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감. 좀 말려 달라고~!”
“말리긴 뭘 말려~.”
“나도 찬성이야. 배배꼬는 거 질색이거든. 혜영이 그 쪽 사람일리도 없지만, 화살 쏘는 녀석은 어떻게 할 건데?”
미수가 팔짱을 끼우며 진혁에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형이 그 여자한테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걸 그냥 보고 있을 거라고?”
“응.”
“저녁 차려 놓고 자리를 비켜 줄 거야. 오늘 저녁은 손님은 안 받을 거니까. 1층 문은 닫아 놓을 거고, 안 쪽에 마련된 자리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잘 하겠지. 안 그래?”
“그 여자를.. 믿어?”
“도혁이를 믿어.”
“난 혜영이도 믿어.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너희들이 오버하는 거라고 생각해. 화살을
쏘는 사람이 혜영을 지켜주는 사람이라면서.. 혹시 혜영이 뭔가 엄청난 정보를 알고 있어서
보호받는 거 일수도 있잖아. 예를 들면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보호받는 목격자처럼.”
“형수~!”
“너희들만 사람들한테 당하며 산 거 아니야. 나도 사람 볼 눈 정도는 달고 있다고..”
“아 진짜~. 이러기야?”
“정 걱정 되면 저쪽 구석에서 지켜보던가!”
미수가 징징거리는 진혁을 흘겨보며 말했다.
“영감~. 이러지 마. 응? 도혁이 형이 마음에 들어 했다니까? 그 여자의 미인계에 홀딱 넘어가서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한 건데?”
미수의 눈이 반짝였다.
“도혁씨가 혜영이를 마음에 들어 했어? 어쩐지.. 도혁씨 타입 같더니만..”
“형수!”
진혁이 엄한 표정으로 미수를 바라보았지만 미수는 혀를 쏙 내밀었다.
“혜영씨가 미인계를 쓸 타입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도혁이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사람 읽을 줄 알아. 분명히 혜영씨는 지난 저녁.. 불안해하고 있었어.”
“하지만.. 난 걱정 된다고..”
“너만 걱정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도혁이를 믿고 기다려 주자.”
“진짜.. 구석 어디!”
진혁이 미수에게 따지듯 물었다. 미수가 콧방귀를 뀌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혜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무리의 그녀들 중 누군가 볼 가
능성이 있기 때문에 가발을 쓰고 가면 안 되지만 격식에 맞게 차려 입고 가야 하는 곳이라 선
택이 어려웠다. 그리고 정중하게 사과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가벼운 옷차림을 해서도 안 된다
고 생각했다.
“진중해 보여야 하는데.. 뭘 입고 가지?”
그녀는 몇 벌 안 들어 있는 옷장 문을 열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옷걸이에 걸린 원피스를 꺼내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데이트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냐.. 후우..”
그녀는 눈을 감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7시가 다 되어 가자 미수는 도혁에게 준비된 상황을 말해주었다.
“메인까지 테이블에 갖다 주고 나면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갈 거야. 진혁이가 아까 테이블 근처에 카메라 달아 놓는 것 같더라. 방해하지 않도록 진혁이도 데리고 올라갈 게.”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어딘가에서 화살 쏘는 녀석이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해.”
“문제가 생긴다면 오늘 밤 보고하고 여길 뜨면 됩니다.”
“혹시 모르니까 준비하고 있을 게.”
“죄송해요.”
“뭘..”
“와요. 온 다고.. 그리고 주위에 뭔가 보이진 않아요. 아직까지는. 아.. 지금 여자가 이어폰을 끼고 있어. 주파수 따 볼게.”
진혁이 2층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소리쳤다.
“꼭 데리고 올라갈게.”
“네.”
미수는 도혁의 팔을 토닥이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도혁은 몸을 돌려 원성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 쪽 사람이면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네 능력이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저도 동감입니다..”
도혁이 한 숨을 내쉬었다. 혜영의 구두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얼마 후 문이 열렸다. 아직 도혁을 보지 못한 혜영이 미소를 지으며 원성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어요?”
“잘 왔어요.”
“그런데 저녁 식사시간인데 조용하네요?”
“글세요..”
“후우.. 아저씨 저 오늘 어때요?”
원성이 혜영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귀여워요. 사랑스럽고..”
“혹시 회사 사람이 볼 지도 몰라서 오늘은 변신은 못했어요. 하지만 여기 분위기에는 맞추고 싶어서 신경 썼는데.. 아무도 없네요.”
“아무도 없지는 않아요.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세요.”
혜영이 긴장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들어가 봐요.”
“네.”
혜영이 몸을 돌려 한 걸음 걸었다가 멈추고는 작은 소리로 원성에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가까이 계셔주세요.”
원성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영은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낮은 조명과 색색의 촛불로 장식된 가게 안을 둘러보며 걷던 혜영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커다랗게 눈을 뜨고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눈앞에는 검은색 모직 재킷 안에 루즈 핏 먹색 티셔츠, 어두운 정장 바지에
정장구두까지 멋스럽게 있은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미용실에서 전문가의 손길을 적어도
30분 이상은 받았을 것 같은 멋진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고, 강렬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
고 있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 남자는 어제 마트에서 그녀를 쫓아오던 남자였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
섰다. 심장이 두근, 두근 뛰어대기 시작했다.
“누.. 누구세요?”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한 쪽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반가워요.”
그녀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목소리는..’
“하.. 한성씨..?”
그의 입가에 미소가 다시 어렸다.
“정말.. 박한성.. 씨.. 맞아요?”
“역시 대단하시네요.”
그녀는 그 말에서 가시를 느끼고 칭찬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다시 집으로 가야 한다고 생
각하고 몸을 돌려 두 걸음 걸어갔을 때 그가 몸을 가볍게 움직여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흠칫
놀란 그녀가 다시 뒤로 걸어갔다. 그가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코트 받아 줄게요.”
그와 조금도 몸이 닿지 않고 그저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을 뿐인데도 온 몸에 솜털이 일제히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 정체가.. 뭐에요?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배고프지 않아요? 식사부터 하죠.”
“모르는 사람과는 같이 밥 먹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일은 원하신다면 회사에 말하지 않겠지만..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그녀가 그의 왼쪽으로 비켜서서 지나치려고 하자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흠칫 놀란 그녀가 잡혀 있는 팔을 뿌리치려고 흔들었다.
“이거 놔요. 아저씨! 언니! 경찰 좀 불러주세요!”
그녀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두려움에 눈이 커지고 심장은 이제 귓전에서 뛰고 있었다.
“설마.. 여기 분들을.. 해..”
“해치겠다고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 친구.”
“그럼..”
“걱정하지 마. 그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니까. 아직은.. 오늘 당신 친구가 근처에 있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녀는 아랫입
술을 세게 물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게 속으로 삼켰다. 그 사람에 대해 모른 척
할까 했지만 아마도 이미 만난 것 같아 그 부분은 속이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나중에 온다고 했어요.”
“우리한테 시간이 얼마나 있는 거지? 더 이상의 거짓말은 곤란해.”
“하.. 한 시간.. 날.. 해칠 건가요?”
“아니라고 한다면 믿겠어?”
“아니요.”
“현명한 생각이야. 일단 식사부터 하자구. 그러려고 만난 거니까.”
그녀는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불가능 하다는 걸 알았다.
“좋아요. 팔부터 놔 주세요. 코트를 벗어야 하니까.”
“설마 도망갈 생각이라면..”
“불가능 하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식사나 하죠.”
그가 손을 살며시 불자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힘겹게 코트 단추를 풀었다. 그가 코트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잘 개어 손에 들고 의자에 걸쳐 놓고 그가 의자를 잡아주기
전에 바로 앉았다. 그가 그녀 맞은편에 앉자 미수가 음식을 들고 나왔다. 혜영이 미수를 보자
믿어 온 사람이 안전하다는 마음이 드는 동시에 배신당한 상처로 가슴 한 켠이 아려와 눈물이
다시 고였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세게 물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
을 때에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보이지 않았다.
“들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그녀는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기계적으로 씹었다. 하지만 눈물을 속으로 삼키느라
아픈 목으로 샐러드가 잘 넘어가지 않자 물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셔서 꿀꺽 삼켰다. 그
리고 포크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1년 전 우리 회사로 스카웃되어 오셨어요. 그렇죠?”
그가 샐러드를 먹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여기 풀문(Fullmoon) 레스토랑도.. 1년 전쯤에 생겼구요. 그 건 그 전부터..”
그가 고개를 다시 살짝 끄덕였다.
“회사 기밀을 훔치러 온 산업 스파이?”
그가 살짝 차가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 다음 질문을 기다려도 그녀가 하지 않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생각한 게 있을 텐데.. 왜 물어보지 않지?”
“그럴 리 없으니까요. 당신 같은 사람이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나쁜 사람들과 싸우는 히어로 일리가 없어요.”
“그런가?”
“그렇다면 한 가지 남았죠. 당신은..”
“범죄자?”
사색이 된 그녀는 그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쓰던 눈물 한 줄기를 놓치고 말았다.
2층에서 보고 있던 미수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안 되겠어. 혜영이의 반응을 봐. 저게 어떻게 그 쪽 사람이야? 나한테 상처 받아 제대로 보지도 못하던데.. 내려가서 사실대로 말해줘야겠어.”
진혁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손짓을 하자 원성이 미수의 손목을 잡았다.
“도혁이를 믿어 보자고 말한 건 당신이야. 난.. 믿어.”
“하지만.. 저렇게 겁을 먹고 있는데.. 안쓰러워서.. 미안해서 그렇지..”
“영감.. 안 들리거든?”
진혁의 말에 원성은 울먹이는 미수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혜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에요? 미안한데 난 부자가 아니라서 돈을 요구하셔도 드릴 게 얼마 없어요.”
“돈이라면 부족하지 않아. 당신 가난한 재정은 우습게 생각할 정도라고.”
“다른 직원들 보셨다시피 그녀들보다 뭐 하나 뛰어난 게 없어요. 저를 어디에 파신다고 하셔도.. 별로 많은 돈은 받지 못하실 거예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
그녀의 숨이 턱하고 멈추었다가 떨리는 호흡으로 살며시 내뿜었다.
“다른 여자직원들이 하는 말에 상처를 받아서 저에게 화풀이를 하시는 거라면.. 정말 죄송해요. 적극적으로 그녀들에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아서..”
“기분이 안 좋긴 했지만 상처 받을 정도는 아니었어.”
“하지만 지금의 한성씨라면 다진이는 구둣발로 뛰어서 당신 품에 뛰어 들 텐데.. 왜 그렇게 안 하셨어요?”
그가 뜨거운 눈길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턱이 두려움으로 떨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궁금한 건 한 가지 뿐이야.”
“물어보세요.”
“사실대로 말 해 줄 건가요?”
“생명이 달려 있는데.. 거짓말을 하겠어요?”
“꽃바구니.. 누가 준 거지? 당신을 지키는 자.. 그 자와 당신은 누구야.”
뜻밖의 질문에 혜영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저것 봐. 뭔가 있다니까?”
진혁이 조그맣게 말했다. 미수와 원성도 화면을 응시했다.
“말 해. 꽃바구니 누가 준 거냐고.”
“말.. 못 해요.”
“왜?”
“말 하면 안 되니까요.”
“내가 당신을 해쳐도?”
“그래요.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요. 그런다고 해도 난 당신한테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애인이 필요할 것 같아서 보냈어. 그리고 조심하게는 게 좋아.”
혜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그가 더 빨랐다.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 갇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혹시 그들이 보냈나? 내 능력이 돌아왔는지 궁금해서?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 목숨을 가져가려고? 그래?”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그녀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군지 말 해.”
“모.. 못해요..”
그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목을 감쌌다.
“당신보다 몸무게가 3배는 더 나가는 남자도 한 손으로 목을 부러뜨릴 수 있어. 실제로 그런 적도 있고. 내가 장난으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아니에요. 분명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난 말 할 수 없어요.”
“왜?”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하니까요.”
“애인이라는 거짓말이라면..”
문득 그의 눈이 빛났다.
“가족이군.”
그녀가 움찔했다.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그럼 서류에 없는 다른 자매나 남매?”
그녀가 눈을 감았다.
“차리리.. 죽여주세요. 말 못해요..”
그녀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그가 그녀의 목을 감쌌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당신이 그 쪽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지? 지난 1년 동안 보아오던 더 이상 여자가 아닌데.”
“그건 한성씨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이름이 박한성이 맞긴 한가요?”
“진짜 이름이 궁금해?”
“궁금하지 않아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한성씨가 말하는 그 쪽 사람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니까.”
“최근에 만난 적 있지. 마트에서..”
그녀는 차에 올라 뒤쫓아 와서 놓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를 떠올렸다.
“나를 왜 감시하고 있었어요?”
“부탁하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어요. 그러니까.. 당신 도움.. 필요 없어요.”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
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아 몸이 떨렸다. 천천히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났다. 의자로 비틀거리
며 걸어가 코트를 집었다.
“이야기는 다 끝난 것 같으니까.. 갈게요.”
“당신은 못 가.”
그녀가 붉어진 눈과 콧잔등을 들어 여유있게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 그를 바라보았다.
“곧 당신의 그녀들이 올 테니까.. 얼른 눈물 흔적부터 지우는 게 좋을 거야.”
미수가 위층에서 내려와 그녀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미수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언니..”
혜영이 미수의 품에서 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어요? 왜..”
“우리는 위험을 안고 살고 있거든.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해. 너에게 비밀이 있다는 걸 알고 다들.. 불안해했어.”
“하지만.. 내 비밀과 그 사람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걸요? 비밀을 갖고 있다고 나한테 이럴 권리가 없다고요.. 도대체 왜.. 왜 그런 거죠? 그 사람도.. 언니도. 아저씨도..”
미수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집행자야.”
혜영의 눈이 어리둥절해졌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들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사람들이라고.”
“그게 무슨 소린지..”
“시민들 모르게 하는 게 우리 일이야. 일종의 비밀 업무인 셈이지.”
혜영의 머리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연쇄 살인범이 심장마비로 죽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리고 강간 3범도.. 그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요?”
“나라에서 결정한 일이야.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우리 남편을 만나고 사랑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지. 정확히 말하자면 우린 보조자 역할이고, 원성씨나..”
“한성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고요.”
“원성씨는 나이가 있어서 은퇴했어. 사실 나이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있어서.. 스스로 은퇴를 하고 돕고 있는 중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혜영이네 회사에는 위장으로 근무하는 거야. 저런 모습으로 출근하면.. 너무 튀지 않겠어?”
“그렇겠죠. 다진이가 꿀을 찾은 꿀벌마냥 그 주위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에게 말 할 거야?”
진정이 된 혜영이 고개를 저었다.
“안 해요.”
“나는.. 용서가 안 되겠지?”
“지금은..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미수가 고개를 저었다.
“화장 고쳐줄게. 곧 회사 사람들이 올 건가봐. 소문이 이상하게 안 나려면.. 상상력을 좀 발휘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미수가 밖에 잠깐 나가더니 다시 돌아와서는 와인을 가득 담은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마셔.”
“술 못해요. 아무리 와인이라도 이걸 다 마시면 취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 정신으로 지금 볼 수 있겠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내일 출근하면 물어볼 거야.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하기 전에 데이트처럼 보이도록 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혜영이 손을 들어 와인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다 마셔.”
그녀는 미수의 말에 눈을 질끈 감고 와인잔을 비웠다.
<형.. 그 여자 말을 믿어?>
“응.”
<어떻게 알아?>
그는 알았다. 그녀의 심장소리가, 그녀의 떨리는 호흡이, 피가 맺혀 있는 아랫입술이 사실이라
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쪽 사람이 아니고 단지 위험에 처한 자신의 가족 중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는 중이고 그 가족은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왜 숨어 지내
야 하냐는 것이었다. 범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심각한 범죄자라면 지령이 내려왔을
터였다. 더 알아보면 알아 낼 수 있겠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는 걸 알았다.
“여기에서 접는다.”
<그래?>
“응. 범죄자도 아니고, 그 쪽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여기에서 멈춰야지.”
<알았어. 집으로 갈 거야?>
“응.”
<알았어~.>
도혁은 미수와 함께 나온 혜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호흡에서 와인 향기가 났다. 발그레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도혁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미수를 바라보았다. 미수가 어
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혜영이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
그녀가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그녀가 스테이크를 썰려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지만 긴장과 두려움, 술기운 등 복합적인 이
유로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려서 식기에 부딪쳐 시끄러운 소리를 내자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 그가 다 식은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리고 그녀 앞 접시와 자신의 접시를 바꾸었다.
“그녀들이 오고 있나요? 아니면.. 나를 보내지 않으려고 거짓말한 건가요?”
“글세..”
그가 고개를 약간 옆으로 숙이며 말했다. 혜영이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바라보았다.
“잠시만요.”
그녀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야? 엄청 근사한 남자랑 레스토랑을 전체로 빌려서 데이트 하고 있는 거야?>
솔희의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야?”
<방금 전에 너 화장실 간 사이에 도착했다가 괜찮은 것 같아서 지금 우리도 데이트 가는 중. 야.. 엄청 근사한 남잔데?>
혜영이 시선을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며 스테이크를 한 입 먹었다.
“내일.. 얘기 하자.”
<그래. 알았어. 참.. 아까 다진이네도 본 것 같았어..>
혜영이 놀란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어.. 언제?”
<우리 출발할 때 도착해서 보는 것 같던데? 너 내일 난리 났다. 제대로 된 이야기 준비하고 있어야 할 거야.>
“응. 고마워.”
<축하해~. 데이트 잘 하고.. 내일 보자.>
“응. 너도 데이트 잘 하고..”
<응..>
전화를 끊은 혜영이 긴장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웃지 마요..”
“그럼 화를 낼까? 사진 엄청 찍어대고 있는데?”
혜영이 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랬다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변신할 수 있어요?”
“변신의 귀재는 내가 아니던데?”
그가 그녀의 다른 모습도 봤다는 걸 떠올리자 얼굴이 붉어졌다.
“음.. 훌륭한 반응이야.”
그녀가 그를 째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건 별로 좋지 않고..”
“하아.. 결국 내가 내 발등을 찍었네요.”
“그래?”
“착하고 마음씨 좋은 사람인 줄 알고 음료수로 넘어가 줄줄 알았더니.. 공포에 떨며 저녁시간을 같이 보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 오해가.. 좀 있었어. 우리는 사람을 믿으면 안 돼. 아니.. 오랜 세월 속에서 몸소 체
험해서 얻은 결론이지.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당신을 지켜보면서 형, 형수님, 내 동생 말고
믿어도 좋은 사람이 단 한 사람 있다면.. 그 단 한 사람이 당신이라고 생각 했었어.”
혜영이 그의 눈을 바라보고 그 말이 진심이라고 느껴졌지만 아까와 같은 상황 후에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이제까지 저를 조사하고, 지켜보고 있었던 걸 용서해 드릴 마음은 없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어느새 반말이나 하고..”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녀는 그의 말처럼 그렇게 나이차이가 많이 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와인 때문인지 어지러웠다. 그녀가 오른 손으로 턱을 괴었다.
“얼마나 먹은 거야?”
“와인 한 잔 가득이요.”
“일어나. 집에 데려다 줄게.”
“혼자서 갈 수 있어요.”
“어련하시겠어.”
“갔어요?”
한성이 그녀 뒤쪽으로 보이는 다진과 몇 명의 여자들을 태운 차가 출발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 출발하네.. 사진이 괜찮게 나와야 할 텐데..”
그녀는 상황에 안 맞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쿡.. 뭐라고요?”
“지금 근사한 남자여야 내일 루저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것 아니겠어?”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집행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루저의 길을 선택한 남자를 물끄
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비틀거리지 않고 의자에서 코트
와 가방을 집어 들 수 있었다. 그가 그녀 뒤로 가서 코트를 입혀주려고 했다.
“꿈도 꾸지 마세요.”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조금 더디지만 코트 소매에 팔을 끼워 넣기를 성공하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언니.. 저 가요..”
미수와 원성이 주방에서 나왔다.
“데려다 줄게.”
“걸어서 금방인 걸요. 밖에 나가면 찬바람에 정신이 들 거예요.”
“또.. 올 거야?”
원성이 물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지금은 머리가 아파서..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정말 겨울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에 하고 있는 머리띠를 뺐다.
“이런 일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안하던 머리띠나 하고..”
그녀는 코티 깃을 세우고 걸음을 걸었다.
미수가 원성을 바라보았다.
“와 줄까?”
“안 온다고 해도 이해해줘야지..”
미수는 좋은 벗을 잃은 것에 가슴이 아팠다.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도혁씨.. 혜영이 집에 잘 들어가나 살펴 주세요.”
조용한 실내를 느끼고 고개를 들어 도혁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벌써 나갔어.”
원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힘겹게 계
단을 올라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고 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가방이나 코트를 벗지도 않고 창문으로 걸어가 커튼을 쳤다. 그리고 몸을 돌려 책상에
기댔다. 한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고개를 들어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갈아입을
옷을 꺼내던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집 옥상에 서서 도혁은 눈을 감고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화살을 피하려다 미처 피하지 못한 그의 어깨에 꽂혔다.
첫댓글 궁금해지네요..앞으로 어떻게 될지..
넹. . 기대해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