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해 저질렀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였던 마산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로 촉발되었다. 시위는 곧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이에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과 학생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발포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시위, 교수님들의 시국선언 등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되고 결국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4. 19혁명을 바라보는 관점 중에 4. 19혁명을 당시의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학생들의 ‘의거’였다고 규정하는 관점이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이승만 정권의 정책적 오류나 3.15부정선거 자체에서 4. 19혁명의 원인을 찾고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대적 박탈감이 대중의 폭발적이고 비일상적인 행동을 촉발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학생들이 4. 19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한 학생들만의 데모로 정권이 붕괴될 수 있었던가, 대규모의 민중이 순진한(?) 학생들의 시위에 왜 목숨걸고 동참하였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4. 19혁명이 발발하게 된 원인에는 민중들이 이승만 정권에 대해 등을 돌리게 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원인들을 분석하기 위해 1950년대의 사회경제학적인 토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1950년대 말의 사회경제학적 토대
미국의 경제원조
45년 8월 15일 해방이후, 특히 한국전쟁이후 남한 경제를 규정하였던 것은 미국의 경제원조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크게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체제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체제로 양분되게 되었다. 소련과 동구권에서의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은 미국에게 있어서는 자국의 시장권의 축소를 의미하였고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세계자본주의진영의 재건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미국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자본주의국가의 부흥과 제 3세계의 자본주의로의 편입을 꾀하게 되고 이를 위해 2차대전에서 광대하게 성장한 자국의 거대자본을 이들 지역에 원조하는 명목으로 수출하게 된다. 우리 나라 역시 이러한 미국의 전략 즉 한국을 자본주의체제내로 확고하게 끌어들이고 대공산권 방어기지를 구축하려는 의도에 따라 미국의 원조가 진행되게 된다.
미국은 미 군정기부터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총 31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경제 원조를 우리 나라에 제공하였다. 이 원조는 8. 15직후와 한국전쟁이후 한국경제를 급속히 복구시키는데 일정정도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경제 물자는 실상 경제 개발에 필요한 기계재나 시설재와 같은 생산재보다는 식료품, 농업용품, 의약품과 같은 소비재가 주축을 이루었다. 소비재 중심의 원조는 한국경제가 원조 원자재의 가공 및 유통을 중심으로 형성되게 만들었으며 원조경제에 종속되는 경제구조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승만 정권은 원조판매대금으로 적립한 대충 자금을 한국산업은행을 통해 사적 대자본에게 재정투융자라는 이름으로 융자하게 된다. 대충 자금의 69.1%(53년-60년)가 재정투융자로 융자되었고 이 규모는 전체 세출의 약 31.6%를 차지할 정도로 대규모의 것이었다. 이외에도 직접적인 원조자금 융자, 원조물자의 판매 또는 할당 과정을 통해 사적 대자본에게 많은 특혜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특혜의 가장 큰 배경이 되었던 것은 저환율 정책과 저금리 정책이었다. 저환율정책으로 인해 원조자금 불하자체가 커다란 이득을 남기는 것이 될 수 있었고 낮은 금리로 은행으로부터 융자받아 원조물자를 시중가격보다 훨씬 싸게 자본가들이 불하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남한에서는 원조경제에 종속되고 관료적인 성격을 띤 사적대자본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원조경제의 파탄
1950년대 말에 이르면 미국의 경기는 자본의 과다한 대외지출로 말미암아 불황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에서 발생한 경기 불황은 더 이상의 원조를 불가능하게 했고 이것은 한국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50년대의 한국사회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1957년 이후의 원조의 감축은 정부 재정의 압박을 가져왔고 그것을 기축으로 운영되던 국내 독점자본의 축적 조건을 크게 악화시켰다. 따라서 원조에 바탕을 둔 국내 삼백산업의 가동률 저하, 조세부담 증가 등으로 민중들의 생활 조건은 악화되었고 국내 자본은 기존의 방식대로 자본의 이윤 실현을 도모하기가 어려워졌다. 일례로 GNP성장률을 들면 57년 8.1%성장이후 계속 하락하여 58년에는 7.8%, 59년에는 5.2% 그리고 60년에는 2.5%성장에 그치게 된다. 그리고 미국원조의 감소와 성장률 둔화는 물자의 공급을 감소시켰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1955년부터 1960년까지 5년동안 서울의 소비자 물가는 연평균 10.4%씩 상승하였다. 이러한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조세부담률은 53년 6.7%에서 매년 증가하여 60년에는 16.5%로 상승함으로써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으면 이에 대한 저항감도 커져갔다. 이러한 위기의 궁극적 원인은 미국의 원조감축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직접적인 요인은 이러한 위기를 감당 할만한 장치를 갖추지 못한 국내 정치권력과 경제 구조였다.
보수 정치권의 동향
이승만 정권은 권위적인 통치체제로 사회부문영역을 권력유지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국가와 정부에 의한 동원과 강제 이외에는 대중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떠한 제도적 장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연줄과 ‘빽’, 이승만 개인과의 친분관계, 반공정신의 철저성 여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조건은 주로 도시의 인텔리나 중간층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불만은 투표때 반이승만, 반자유당정서로 표출되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대중들의 반이승만 분위기는 이승만 정권에게는 하나의 위기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당은 58년 2월, 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진보당이 주장했던 평화통일안이 북한의 것과 같다는 억지를 내세워 진보당을 붕괴시키고 조봉암을 ‘북괴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켰다. 이어 11월에 이승만 정권은 ‘공산당의 흉계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을 강화해야 한다며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고 12월 무장경찰이 국회를 포위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채 자유당 의원만으로 개정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즉, 민중들의 반이승만 반자유당 분위기에 긴장한 이승만 정권은 모든 관료기구들을 이승만의 사유물로 만들어 갔으며 자유당은 내부의 더욱 강경한 분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한편 제도정치의 장에서 가장 강력한 이승만 정권의 반대세력이었던 야당 정치세력인 민주당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자유당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과 별 다름이 없었으나 단지 권력에서 자신들이 소외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은 컸다. 이들이 주장하는 자주민주주의라는 것은 정권쟁탈을 위한 명분일 뿐 실천적인 이념은 아니었으며 권력의 배분을 원하였지, 민중적 힘에 의한 민주화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들의 성향은 이승만 정권의 하야 이후 그들의 보수세력의 본색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민중운동의 동향
노동운동
소비재위주의 공업발달에 따라 노동자계급도 일정정도 성장하였으나 그 속도는 아직 미미하였다. 1960년 현재 노동자계급은 10.3%로 나타나지만 산업노동자는 5%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적대자본의 지배로 노동분배율은 매우 낮은 수준에 있었으며 1960년대 초에는 실질임금까지 하락하는 등 노동자의 삶은 날로 황폐해져 갔다. 극도의 궁핍한 삶을 탈피하기 위한 노동 쟁의가 1953년 7월부터 12월에 이르는 기간에 20건이 발생하였고 1954년에는 54건이 발생하는 등 1950년대 중후반에 빈발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노동자계급은 과거 해방정국에서 정치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용노조인 대한 노총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가운데 민주적인 조직결성을 봉쇄 당하고 있었다. 1956년 대구 대한 방직 노동쟁의에서 쫓겨난 100여명의 노동자들은 어용적 태도를 취한 대한 노총 경북지부 연맹에 반발하여 1957년 김말룡을 중심으로 1959년 10월에는 전국노협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후 노동운동은 양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질적인 측면에서 임금인상, 식량배급, 밀린 임금 지불 등의 요구에서 단체협약 체결, 노조활동의 자유 등 민주주의적 권리보장 문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극도로 열악해진 생존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였으며 전국적 규모를 가진 총파업이나 정치권력의 변혁을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농민운동
50년대 인구의 약 60%를 차지했던 농민의 경우 농지개혁의 실패,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저곡가 정책, 미국 잉여농산물의 무차별적인 도입 등으로 인해 날로 궁핍화되어 갔다. 1957년 현재 절량(絶糧)농가가 약 50%에 달했고 1960년 현재 농촌의 평균 가계지출은 도시봉급생활자의 36.9%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이 속에서 농민은 점차로 소작농 또는 농업노동자로 전락해갔다. 1950년대 전반기까지는 농지개혁과 관련한 지주계급의 토지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반대하여 개별적 지주를 상대한 농민들의 노동쟁의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951-1955년 농민들이 정식으로 법적 소송을 제기한 토지 쟁의의 건수만도 7983건에 달했다. 그러나 전후 1959년까지의 농민투쟁은 250명 미만의 분산적인 투쟁이 주류를 이루었고(70%) 적극적 형태의 투쟁이 차지하는 비중도 청년학생운동(81%), 노동운동(31%)에 비하여 훨씬 낮은 20%미만에 머물렀다. 이러한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농민이 대부분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농민들이 사실상의 극빈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전반의 위기로 확산되어 나갔다.
학생운동
학생들의 경우 이후 4.19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세력이 되면서 정치전선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강력한 국가권력이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국가권력의 힘이 미치기 어려운 곳이 학원이었고 당장의 생계문제로 인해 국가에 굴복하지 않아도 되는 학생들은 사회를 보다 객관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민중들이 그들의 계급적 요구를 전면적으로 발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이들의 정치적 욕구를 의식적으로 대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민족의 양심을 자처하면서 하나의 운동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4월 혁명의 과정
2·28에서 4·26까지
4·19는 대체로 세단계를 거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는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학생의 주도와 도시빈민 및 노동자의 가세로 4월 19일에 이르는 과정과, 둘째로는 4월 19일 이후 학생 및 비판적 정치인의 퇴조와 기층 민중운동역량의 성장 및 일부 학생과 지식인의 이념적 성장과정이며, 세 번째는 군부의 등장에 의한 5·16 쿠데타에로의 귀결과정이다.
2.28 대구 학생 시위
1960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쪽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민주당 쪽에서는 조세옥과 장면이 각각 정, 부대통령후보로 나섰다. 이미 민중의 강력한 반이승만·반자유당정서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금권과 정치깡패를 이용한 협박으로 대대적인 선거부정을 감행하였다. 대구에서의 2·28시위는 구체적으로는 자유당정권이 민주당의 후보인 장면의 유세가 있을 예정인 일요일에 유세자리에 사람들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내 대부분의 고등학생을 시험,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의 이유로 강제로 등교시킨 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들 학생들은 “일요일에 학생을 등교시키는 부정당한 처사를 우리는 사회에 널리 알리자”고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제 1,2차 마산 봉기
3월 15일 선거당일 이승만 정권은 계획대로 투표소 습격, 무더기 사전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야당참관인 매수 및 폭행 등 엄청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개표결과는 보나마나였다. 군대의 개표결과는 유권자수의 120%의 이승만 득표율이 나왔다. 정부는 80%로 ‘내리 깎으라.’는 지령을 내렸고 이기붕 부통령 득표는 70∼75%선으로 줄이라는 경찰지령을 전국 개표소에 하달해야 했을 정도이다.
선거당일 민주당 마산시당은 사전 투표행위를 발견하고 선거부인 공고를 내건 뒤 시위를 시작하였다. 일단 해산했던 시위대는 저녁에 다시 1만 여명이 집결하여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청 쪽으로 행진하였다. 데모대열이 시청 쪽으로 다가오자 시정정문앞에 대기중인던 소방차 1대가 소방호스로 물을 내뿜으며 데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데모대에서 돌팔매가 말아오자 소방차 운전사는 뛰어내려 달아나고 소방차만 달려오다가 무학국고 정문 앞 전주를 들이받았다. 마산 시내 일원에 전기를 공급하는 송전선을 떠받치고 있던 전주가 충격에 으스러지면서 고압선이 합선된 듯 폭음고 함께 시내 일원은 암흑 천지로 바뀌었다. 정전되는 순간 요란한 충성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경찰의 총구가 데모대를 향해 불을 뿜은 것이다. 이날 마산에서는 9명의 사망자와 8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였으며 경찰은 그를 마산 세관 부두 앞의 바다에 던져버렸다.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숨져있는 고교생 김주열군의 시신은 4월 11일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에서 이양되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2차 마산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4월 11일의 마산봉기에서는 학생을 주동으로 한 약 3만 명의 시민이 참가하였다. 이날의 시위대는 전 마산시를 뒤덮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또다시 발포와 연행을 자행하게 된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배후에 공산당이 개입한 흔적이 있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마산에서의 시위를 공산당 지하조직에 의한 좌익 폭동으로 매도했다.
2월 28일의 대구시위 이후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8일에는 대전에서, 10일에는 수원에서 각각 시위가 발생했다. 그리고 3월 7, 8일에는 부산에서도 시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2일에는 영도에 있는 해동고등학교에서 드디어 시위의 횃불이 타올랐다. 그리고 투표일 하루 전인 14일에는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가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어 3월 25일, 4월 11일, 19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점차로 가두의 시민이 시위에 합세해갔다.
4월 19일이 되면 대구, 광주, 전주, 부산 등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시위가 격화되기에 이른다.
고대생 습격사건
서울에서는 4월 18일 4000여명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첫째,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둘째,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셋째,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넷째, 경찰의 학원 출입을 엄금하라. 다섯째,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 말라.’는 5개 항의구호를 외치면서 스크럼을 자고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플랭카드를 선두로 교문을 뛰쳐나와 태평로에 있는 국회의사당으로 달려나갔다. 학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4개항의 대정부건의문을 결의하면 연좌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고대생들은 유진오 총장과 같은 고대생 출신인 이철승 의원의 설득을 받아들여 오후 6시 40분경 학교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7시 20분경 청계천 4가에 이르러 쇠사슬로 무장한 1000여명의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2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과 시위대를 뒤따르던 시민들마저 부상을 입음으로써 고대 시위 피습사건은 4. 19를 폭발시킨 마지막 뇌관이 되었다.
4·19- 피의 화요일
4월 19일 시내 각 대학과 고등학교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여러 날 전부터 은밀히 시위를 준비해 오던 서울대, 경희대, 중앙대, 건국대, 동국대, 성균관대 등 10여개 대학에서는 고대 시위 피습 사건을 계기로 4월 19일을 총궐기의 날로 잡았다. 학생들은 저지하는 경찰들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시내 도처에서 집결하기 시작한 학생 시위대는 정오를 전후하여 국회 앞과 세종로을 중심으로 ‘역적을 몰아내자.’, ‘3.15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진군하였다. 서울에서만 약 20여만 명의 군정이 가담한 가운데 시위대의 집결지인 중앙청 앞, 시청 앞, 광화문, 내무부 앞, 서대문 등에서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개시했다. 그러나, 이미 시위군중은 무차별사격에 의해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았고, 파출소, 서울신문사, 반공청년단 등을 습격· 파괴해나갔다. 수일동안의 시위 과정에서 전국에서 총 183명의 학생과 시민이 사망하였고 62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4월 20일 이승만 정권은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였다. 4월 20일 서울에서 2000여명이 세종로로 집결하여 시위를 하려다 계엄군에 의해 해산되였다. 또한 대구, 광주, 전주, 인천, 이리, 수원에서 시위가 발생하였다. 4월 21일 국무위원, 자유당 당무위원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였다. 4월 22일 송요찬 게엄사령관이 학생대포 12명과 면담하였다. 4월 23일 자신의 총재직 사퇴와 이기붕의 공직 사퇴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앞으로의 모든 정당관계에서 벗어나 대통령직에 전념할 것을 밝히고 사태의 모든 책임을 자유당에게 돌렸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으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위를 막을 수 없었다.
교수단의 시국선언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4월 19일 학생들의 희생에 자책감을 느낀 교수들이 4월 25일 이승만의 하야를 골자로 하는 선언문을 채택한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플랭카드 아래 교수단은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선언문을 낭독했고 교수단의 시위에 다수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결합하였다.
이승만의 하야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던 미국도 방향을 선회하여 4월 19일 주한 미국대사인 매카나기가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에게 시위군중들의 정당한 불만을 해결하도록 요청한 후 미국 대사관으로 돌아가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3.15선거에 대한 재선거를 실시하며 내각책임제를 단행하고 이기붕의 모든 관직을 박탈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날 오후 국회본회의에서 이승만의 성명서의 내용이 의결되면서 이승만대통령은 하야하게 된다.
4월 19일에서 26일에 이르는 기간의 운동의 특징은 그것이 의식적인 조직적 지도부에 의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선거부정에 대한 자연 발생적인 항의로 시종 했다는 점이다. 이슈의 발전을 보면 학원의 자율성 보장, 부정선거 규탄, 책임자 처벌 요구에서 점차 정권 전반의 부정부패 규탄. 자유민주주의 수호로 발전되어 나갔고 4월 29일 이후에는 이승만 퇴진 구호가 등장하였다. 물론 4.19 학생 시위를 모의하는 과정에서 학생세력들의 준비과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광범위한 불만에 의해 추동된 대중 시위는 이들이 애초에 의도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에 이 기간의 운동을 자연 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인 운동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
4월 혁명 일지
4.19에서 4.26까지
4월 19일
오전 9시 20분 서울대학생 3천여 명이 “민주주의 바로잡자. 국민은 통곡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이화동, 원남동을 거쳐 종로4가로 시위를 감행.
오전 9시 50분 종로4가 전매청 앞에 친 피켓라인에서 경찰과 충돌, 경찰의 무자비한 난타로 일시 전매청 공장과 법원 관사 쪽으로 후퇴.
오전 10시 이 시위대는 종로2가 파고다공원 앞에 쳐놓은 제2피켓라인과 대치, 뒤따라온 약 500명의 시위대와 합류, 경찰은 최루탄발사.
오전 10시 30분 시위대의 주류는 화신앞, 광화문을 거쳐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 연좌시위를 전개. 경찰은 시위대와 군중을 격리시켜 시위대는 고립.
오전 10시 30분 광주에서 광주고등학교 학생 1,800여명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감행.
오전 10시 40분 건국대학교 학생 1,500여명이 국회의사당 앞의 서울대학생 시위대와 합류. 동국대학교 학생 천여 명이 붉은 플래카드를 들고 합류. 이어 서울의대, 약대의 ‘가운 시위대’와 동성고등학교의 시위대도 합류.
오전 11시 15분 성균관대 학생 천여 명이 이기붕 국회의장집 앞에서 연좌데모. 한편 서울대학생의 일부는 법원에 쇄도, 대법원의 공정성을 요구.
오전 11시 50분 동국대·서울대의 혼성 시위대는 중앙청을 돌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함. 경찰은 해무청 앞에서 최루탄 투척, 처음으로 공포 1발 발사. 한편 남대문에는 중앙대생 2천여명, 서대문에는 연대생 2천여 명이 속속 도심부로 육박.
오후 12시 50분 분노한 시위대는 드디어 효자동 저지선 돌파. 경찰은 무차별 실탄발사를 감행.
오후 1시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경비 계엄령’을 선포. 계엄사령관에 송요찬 중장을 임명.
오후 3시 부산 시내의 각 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감행. 경찰은 실탄발사로 응수. 대구에서도 경북대학생 2천5백여 명이 시위를 감행. 광주, 청주에서도 총궐기. 서울신문사, 반공회관이 각 오후 3시와 3시 30분에 불타기 시작.
오후 5시 정부는 ‘비상계엄령’ 선포. 사령관에 송요찬 중장 임명. 계엄사령부는 곧 보도관제와 통금시각 연장(저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을 포고. 파출소 파괴 22개소, 차량피해 22대. 이날의 사상자는 전국적으로 6,259명, 이중 사망자가 186명.
오후 8시 40분 육군 제15사단 및 탱크부대 서울시내 진입. 주한 미대사 매카나기는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는 성명 발표. 미 국무장관 허터가 주미대사 양유찬을 부름.
4월 20일
오전 10시 대구, 광주, 전주, 이리, 수원 등에서 학생시위 속행.
오후 5시 이승만, “불만의 주요 원인을 시정하겠다”고 담화발표, 전 국무원 인책 사직 발표.
4월 21일
계엄사령부는 버스 운행을 비롯한 차량운행에 대한 완화 발표. 정치깡패 유지광 체포령.
오전 매카나기 미대사 다시 경무대 방문.
4월 22일
비상사태의 긴급수습을 목적으로 민의원에서 본회의 개최.
오전 9시 계엄사령부에서 4·19사건 희생자 308명 명단 발표.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에서 3천여 학생의 시위 감행.
오후 이승만은 변영태, 허정 등을 불러 시국수습책 강구.
4월 23일
오전 10시 50분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 사퇴고려 성명 발표.
오전 11시 5분 장면 부통령직 사임.
오후 2시 이승만 자유당 총재직 사퇴를 시사. 정치깡패 임화수, 유지광 정식 구속. 인천에서 남녀 고등학생 3백여명이 횃불시위 감행.
4월 24일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다고 발표. 오후에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와 사회단체의 장에서 일체 손을 떼겠다고 특별담화를 발표. 계엄사령부는 신문검열 철폐, 통금시간의 정상화를 발표.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완화.
오후 2시 ‘4·19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용산에서 거행. 계엄사령부는 4·19 사망자는 130명이라고 발표.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독립과 선거소송의 속결을 약속하고 대법원장직 사퇴 표명.
4월 25일
오전 10시 춘천고교생 5백여 명이 시위를 감행. 민주당은 ‘대통령 하야’와 정·부통령 재선거 및 개헌을 요구하는 성명 발표. 임흥순 서울시장 사퇴.
오후 5시 40분 전국 27개 대학교수 3백여 명이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4·19에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감행.
오후 6시 30분 대학교수단의 시위에 이어 자연발생적인 시위군중 약 1만 명이 이기붕집 앞에 쇄도, 경호원은 공포를 발사. 또다른 시위군중이 임화수 집과 평화극장을 습격, 파괴.
오후 8시 이승만은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전승열을 임명.
오후 9시 계엄사령부는 이승만의 특명으로 구속학생 전원을 석방.
4월 26일
오전 2시 30분 정부는 국무원 공고 817호로 서울지구에 다시 비상계엄령을 선포. 통금시간 연장. 전 학교에 임시휴교를 발표.
오전 9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철야시위한 약 30여명의 학생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10만 여명의 군중이 운집. 오전 11시까지 시위감행. 한편 시위대는 이기붕 집을 습격, 가구 일체를 소각.
오전 10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담화를 발표.
오전 10시 30분 매카나기 대사 경무대 방문. 시위대는 장충동에 있는 최인규집에 방화. 동대문경찰서에 시위대중 쇄도. 경찰의 실탄 발사로 10여명 사망. 분노한 시위대는 동대문경찰서에 방화.
정오 부산에서 30만 군중이 시위 감행.
오후 2시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 선포. 오후 11시에는 마산에도 선포.
오후 3시 25분 국회는 긴급 본회의를 열고 ‘대통령 즉시 하야’ 등 4개 항목의 시국수습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 경향신문 복간.
오후 6시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전국에 녹음으로 방송. 대학생들 질서회복에 손수 참가. 계엄사령부는 대학별로 각 경찰서에 경비도 배치. )
4·26에서 7·27 총선까지
사회변혁의 측면에서 볼 때 이승만의 하야는 더욱 철저한 변혁을 위한 출발단계에 불과하였다. 여기서 이승만, 자유당, 관료, 독점자본 대 모든 반이승만 세력간에 형성되었던 기존의 전선이 이승만의 하야로 와해되면서 더욱 철저한 민주변혁과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과 그것을 원하지 않는 보수 지배세력 사이에 새로운 전선의 축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다수의 중간층과 학생들은 철저한 변혁과 민족 통일을 통해서만 애초의 봉기의 의도를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였다.
과도정부의 수립과 민주당의 이탈
정치권은 4월 27일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서가 국회에서 수리되자 그 직권을 이승만에 의해 임명된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에게 승계하였다. 민주당은 굴러 떨어진 권력을 독식하기 위해 신구파간의 갈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에 이르고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유당 의원과 협력하여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일부 운동 세력의 요구를 묵살하고 자유당 의원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국회를 유지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공공연하게 ‘혁명과업은 완수되었으니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라.’로 외치면서 변혁운동이 더 이상 진전되는 것을 가로막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4. 19혁명의 동기를 단순히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대한 반대로 연결시키거나 심지어는 내각제 개헌을 민주화와 동일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도시의 중간층과 쁘띠부르주아는 일단 이승만이 하야함으로써 애초의 요구는 어느 정도 실현된 것으로 자족하면서 질서유지를 부르짖는 과도정부의 정책을 지켜보자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학생 대중의 상당수가 막연한 분노와 정의감에 의해 행동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학원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에 일단 동조하였다. 한편 허정의 과도정부는 반민주행위자 처벌과 부정축재자의 재산환수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거부함으로서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부를 누렸던 자들의 법적 처벌을 막는 반민중적인 성격을 보인다.
7.29총선
4. 19를 통해 엄청난 정치적 경험을 하게 된 학생세력은 새롭게 등장하는 혁신정치 세력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자신의 죄과를 뉘우치기는커녕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옥중에서도 출마한 부패한 자유당 국회의원 후보자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며 선거계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혁신계의 참패로 마무리되었고 민주당은 전체의석의 3분의 2가 넘는 의석을 장악하였다. 과거와 다름없는 엄청난 선거부정이 자행되었으며 민주당은 여타의 혁신계 인사들에게 은근히 ‘좌익’의 딱지를 찍어 이들을 패배시켰다.
새로운 모색을 위한 시기
이 시기는 사회 각 영역에서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각 영역의 조직 상층부의 보수세력에 의해 대부분 거부되던 시기이다.
노동계에서는 어용대한 노총을 탈퇴하여 자주적인 노조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국가 기구 내부에서는 경찰의 중립화, 사법부의 정치로부터의 예속탈피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군대에서는 부패한 군 지도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었고 학생들은 학원의 자주화, 학원의 정치예속 방지를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과도 정부는 ‘비혁명적 방법에 의한 혁명과업의 완수’를 내세웠으나 과도 정부 자체가 이승만, 자유당과 탯줄을 끓을 수 없었듯이 경찰 관료기구, 사법기구, 의회, 교육 기구 등 사회의 모든 영역이 이승만 시대의 그것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시대의 것이었다. 7. 27 총선에서 많은 민주인사를 당선시켜 정치 사회 변혁을 달성한다는 이른바 선거 혁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세력은 총선에서의 혁신당의 패배와 민주당의 행보를 보면서 보수 정치권의 한계를 조금씩 감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실제적인 물리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부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군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모든 현상은 사회의 혼란으로 비쳤고,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7·29총선에서 5·16쿠데타까지 - 군부의 등장
운동노선의 전환
7. 29총선 이후 학생운동세력은 4. 19이후 그들이 추구한 ‘계몽적 방법’의 한계를 자각하기 시작하였고 선거를 통해서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이들은 원조를 단절시키고 자립적인 재생산 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반공정권의 유지비용으로 지불되는 자본주의 제국으로부터의 차관과 원조를 차단하고 남북한이 경제적으로 통합되어 경제의 외부 종속을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통일운동을 사고하게 된다. 또한 반민주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고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민족 통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통일운동으로의 전반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혁신정당, 사회단체들이 민족 자주 통일 중앙 협의회(민자통)를 발족하고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민족 통일 연맹을 결성한다.
61년 3월 장면 정권이 2대 악법(반공임시 특례법, 데모 규제법)을 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각 운동 단체들이 전개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그 동안 분열되었던 혁신정치세력이 단일 대오를 형성하였고 대중을 운동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군부의 움직임
해방 이후 국군의 창설과정에 참여한 부분은 주로 광복군제, 중국군계, 학병계, 일본군 계였다. 또한 소장 장교들은 당시의 청년층을 모집하였다. 그런데 미군정은 그들의 통치의 편의상 노쇠한 광복군 계나 중국군계보다는 훨씬 젊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일본군 계를 선호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도 보다 손쉬운 군부장악을 위해 미군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한편 해방 이후 군에 투신한 청년층들은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그대로 반영하여 상당수가 좌익에 가담하고 있었다. 아직 군부에 대한 전체적인 통수권이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여순 반란, 제주도 4·3항쟁 등을 통해 남로당의 전략을 위한 투쟁단위가 되었다. 이들은 그 결과에 따른 숙군과정에서 군에서 완전히 축출되어 버렸다.
결국 6·25가 끝났을 당시 군에 남아있던 고급장교는 대부분이 일본군 출신이었다. 그 중요한 인물들을 보면 이종찬(李鐘贊), 김정열(金貞烈), 정래혁(丁來赫), 김석원(金錫源), 장도영(張都渶), 송요찬(宋堯贊), 김창룡(金昌龍) ) 등이다.
그런데 1960년 4월혁명이 발발하자 군부내에서는 부패한 고위장성과 소장청년 장교들 사이에 정군(整軍)이란 명목으로 대립과 갈등의 폭이 넓어져갔다.
사회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와 마찬가지로 군부에서도 하극상의 불만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동적인 상황에서 박정희(朴正熙), 김동하(金東河), 김종필(金鐘泌) 등 일본군 출신 소장파 장교들은 쿠데타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출신배경은 일본군이었지만 자유당 정권과 밀착하여 부정부패로 얼룩져있던 당시의 고급장성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혁명’을 꿈꾸게 된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주체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고 해도 그것은 한반도에 안정된 친미정권을 구축하려고 했던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미국은 그에 대한 즉각적인 태도표명을 보류했고 결국은 인정하는 쪽으로 귀착되게 된 것이다. 한국은 이제 더이상 원조경제에 의존해서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자본수출의 다음 단계인 차관 및 직접투자의 단계로 나아가야 했다. 차관이나 직접투자의 전제조건은 정치정세가 안정되어 투자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를 없애는 일이다. 따라서 5·16 직후 그 주체세력이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이라고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켜질 수 없었다.
5·16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1950년대의 원조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그 축적된 모순이 사회 각 계층에서 객관화되어 표출되었고, 한편 원조경제에 기생하여 성장한 국내 독점재벌과 경제잉여의 계속적인 유출 및 시장권 보호를 위한 냉전체제의 구축을 원하고 있던 미국은 보다 강력한 정부를 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5·16이 사회 각 부분에서의 운동역량을 일정하게 후퇴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
4.19를 어떻게 볼 것인가
4·19의 의의- 운동의 모델로서의 4·19
4월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구조적 모순의 반영이지만 동시에 분단 이후 한국 사회의 총체적 집약체이며 그 귀결이었다. 4월 혁명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그것이 이후 남한 사회변혁 운동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중운동
4월 혁명은 한국전쟁의 종결로 분단이 고착된 이후의 최초의 대규모 민중운동이었다. 해방 직후의 격렬했던 민중운동이 한국전쟁으로 고착화된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그 기반을 거의 상실한 이후 학생들의 주도로 대규모의 민중 시위를 이끌어냄으로써 민중운동의 기반을 다시금 획득할 수 있었다. 민중운동의 전통을 복원하는 데 일조한 4월 혁명은 이후 남한 변혁운동의 모델이 된다.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가두투쟁과 대중투쟁을 통한 정치권력과의 대결로 전개되는 양상은 이후 79년의 부마 민중 항쟁, 광주 민중항쟁, 6월 투쟁에서 재현된다. 또한 이 모든 투쟁은 제도권 정치의 장에서의 보수 야당과 집권 정당의 갈등과정에서 대중들이 정치의 장에 견인됨으로써 이루어진 것들이다.
남한 변혁 운동의 과제 제시
4월 혁명 당시 제기된 민주 변혁과 민족 통일의 요구는 남한 변혁 운동의 과제를 표현해 주는 것으로서 이후 현재까지 변함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민주 변혁을 수행하고 민족통일을 성취하려는 지향을 분단 이후 최초로 문제 제기한 점에서 현재까지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4월 혁명 후반기에 일부 학생세력과 혁신세력이 추진한 통일 운동은 그러한 문제제기의 일환이었다. 물론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구체적 조건은 변화했고 그것의 다망주체도 과거와 동일한 차원에서는 논의될 수 없다. 이러한 변화는 1960년 대 이후 급속하게 추진된 자본주의적 공업화와 대규모 노동자계급의 형성에서 기인하고 있다.
학생운동의 역할 제시 - 선도적 정치투쟁 집단
4월 혁명이후 한국사회는 학생세력에게 선도적 정치변혁의 주체자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게 되었다. 4월 혁명 이후 80년대 까지 학생세력은 변혁운동에서 선도적 정치투쟁 집단으로 계속해서 기능해 왔다. 물론 학생운동은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대중운동 세력이었지만 지금은 노동자, 농민, 중간층의 대중운동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조건과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4.19혁명의 한계점
4월 혁명은 기본적으로 사회 전반의 지배체제의 본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 투쟁이었다. 이러한 점은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민주당 정권의 반민중적 성격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학생은 학원으로’, 시민은 직장으로’ 복귀하고 변혁 과제는 자유당과 그 본질에 있어 다르지 않는 민주당에게 넘기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7.29총선 당시에 이른바 ‘선거 혁명’을 기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학생들의 의식 수준 역시 체제 내적인 개혁운동의 수준을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으며 지배 권력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인식에서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4월 혁명은 학생세력이 주된 역할을 담당하면서 각 사회세력들의 불만과 요구를 ‘부정부패 정권으로서의 이승만 정권의 퇴진’과 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개선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자주적 자립경제의 실현’이라는 슬로건으로 수렴시켰다. 우선 정치적 요구로서 중요한 것은 이승만 정권의 퇴진이었고 경제적 요구는 일부 ‘매판독점자본’의 척결, 중소자본과 민족산업의 육성을 골자로 하는 민족자본의 회복, 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한 기업자유주의의 실현, 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의 개선이었는데 이것은 ‘자립적’인 자본주의적 발전과 민중생활 수준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본적으로 서구 자본주의가 걸어온 자립적 자본주의의 발전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4월 혁명에서의 주도세력이었던 학생세력은 그들의 계급적인 한계로 인해 사회전체 모순의 본질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였으며 ‘부르주아 민족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에 그쳤다.
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세력이 재배 집단의 반민족적 성격, 반민중적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변혁운동의 경로를 대중들에게 제시하고 사회 제 조직의 이념을 정립하는 데까지는 못했지만 7. 29총선을 경과하면서 민주당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본질을 깨달아가면서 변혁운동의 새로운 노선 전환을 꾀하게 된다. □
자료로 보는 4 19
민주당이 3월 3일 폭로한 3 15 부정선거 지시 비밀지령
1. 4할 사전투표: 투표 당일의 자연기권표와 선거인명부에 허위 기재한 요령요권자표,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기권표 등을 그 지역 유권자의 4할 정도씩 만들어, 투표 시작 전에 자유당후보에게 기표하여 투표함에 미리 넣도록 할 것.
2.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 자유당후보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한 유권자로 하여금 3인조 또는 5인조의 팀을 편성시켜,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각 조원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자유당측 선거운동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넣도록 할 것.
3. 완장부대 활용 : 자유당측 유권자에게 ‘자유당’이란 완장을 착용시켜 투표소 부근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으로 만들어 야당성향의 유권자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 자유당에게 투표케 할 것.
4. 야당참관인 축출 : 민주당측 참관인을 매수하여 투표참관을 포기시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투표소 밖으로 축출할 것.
마산시위에 대한 이승만의 성명서(1960.4.13)
(전략) 우리 나라의 소위 정당 싸움은 얼마 전부터 이렇게 되어서 이것을 이렇게 피하고 저렇게 피해서 왔는데 지금 법을 다 폐지하고 난당의 행위로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의 생명을 살해하여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선동하여 끌어내다가 위험한 자리를 이루게 된 이것을 그냥 두고는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내가 대통령의 명의를 가지고 민심을 안정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안도가 되도록 하여야 하므로 불법행위를 일체 중지하고 법으로 조치할 것이니 만일 누구든지 불만한 일이나 억울한 일이 있으면 다 각각 그 지방의 법을 맡아보는 사람들에게 호소해서 법리적으로 행하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각각 법률을 내놓고 자행 자의로 혼란을 만드는 자는 어디서든지 법대로 처리해서 시국을 정돈해야 될 것이며, 우선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 해나갈 것은 다시 지휘를 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법령을 각각 중히 시행하되 일반민중은 각별히 조심해서 난민들과 사귀지 말고 양민의 태도를 준행해서 이대로 지켜 행하여야 정돈이 되어서 위험한 자리에 들어가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또 지방경찰은 각각 그 지방의 정돈을 지켜서 혼란이 없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
이번 4 19 참사는 우리 학생운동사상 최대의 비극이요, 이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사태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규정이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우리 전국대학교 교수들은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양심의 호소로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정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왜곡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적인 학생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녀는 일부 정치집단의 사병이었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써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현정부와 집권당은 그 책임을 지고 속히 물러가라.
(5) 3 15 선거는 불법선거이다. 공명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 선거를 재선거하라.
(6) 3 15부정선거를 조작한 자는 중형에 처하여야 한다.
(7) 학생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한 자는 즉시 체포 처단하라.
(8) 깡패를 철저히 색출 처단하고 그 전국적 조직을 분쇄하라
(9) 모든 구금된 학생은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 설령 파괴 또는 폭행이 있었더라도 이는 동료의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파괴와 폭행이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10) 공적 지위를 이용해서나 관청과 결탁하여 부정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록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부패와 부정을 방지하라.
(11) 경찰의 중립화를 확고히 하고 학원의 자유를 절대 보장하라.
(12)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를 배격한다.
(13) 정치 도구화한 소위 문화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여 이성을 지키고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15) 학생제군은 38이북에서 호시탐탐하는 공산괴뢰들이 제군들의 의거를 백퍼센트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라. 또 이남에서도 반공명의를 도용하는 방식으로 제군들의 흘린 피의 대가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분자가 있음을 조심하라.
구호
‘이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 ‘부정선거 다시 하라’ / ‘살인귀 처단하라’
이승만 하야 담화문 (1960. 4. 26)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 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4 19에 대해 미국무성 공보관 화이트가 발표한 성명
국무장관은 금일 하오 한국에서 더욱더 퍼지고 있는 국민의 심각한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서 미국정부가 더욱더 심각한 우려를 품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한민국 대사를 초치했었다.
비록 이러한 문제들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책임에 속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미국정부의 입장이 되어왔다. 왜냐하면 미국은 대한민국의 유엔 가입신청에 있어서 중요한 지지자로서 세계의 눈에 항상 한국의 우방이며 지지자이며 또한 동맹국으로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양유찬 대사는 미국정부가 한국에 있어서의 시위운동이 최근 실시된 선거와 자유민주주의에 합당치 않은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서 품고 있는 국민의 불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통고 받았다.
국무장관은 양대사에게 한국정부의 그와 같은 처사가 해외에서 중대한 반향을 일으켜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와 명성을 크게 약화시키게 될 가능성이 있음에 대해서 본국 정부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도록 요구하였다.
국무장관은 한국정부가 그 자신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국민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서 투표의 비밀을 보장하고 집권당의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공정치 못한 차별조치를 방지함과 아울러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적인 제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필요하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승만의 사임을 환영하는 미국대사의 성명 (1960. 4. 26)
오늘은 한국 및 해외 우방들이 길이 기념할 날이다. 본인은 한국 당국이 국민의 정당한 불만을 시정하는 방향에서 진지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한국민들은 법과 권위를 존중하여 이 위대한 국가의 번영, 안정, 치안을 향상시키도록 그들의 유의한 사업과 일상생활에 조속히 돌아갈 것을 믿는 바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 날을 기념하는 길이다.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계속한다.
Part II. 우리에게 4.19는 무엇인가?
4.19의 현재적 의의
각 단위의 구체적 상황에 맞게 작성해 주십시오
<읽을꺼리> 죽음에 관한 짧은 고찰
장귀연(회원,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프롤로그
인간이란, 태어날 때는 모두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죽어간다. 어느 작가가 말했듯이, 죽음은 한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같이할 수도 대신할 수도 없는 것, 오직 혼자서 마주해야 하는 것이므로,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므로.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한 인간에게 홀로 귀속되는 것일지라도,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이 죽음도 세상과 그리고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모든 죽음은 아픈 별 위의 분화구처럼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여기, 최근의 몇몇 죽음과 남겨진 이야기들이 있다.
◆쥐에 뜯어먹힌 시체
7일 아침 7시. 노숙자 김종식(48)씨는 거리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침운동을 하던 한 시민이 서울 동대문야구장 공중전화부스 옆에서 김씨를 발견했을 때, 그는 주변상가가 내다버린 쓰레기더미에 덮여 있었다. 사망원인은 영양실조와 추위였다. 얇은 이불과 스티로폼만으로는 술에 찌들고 허기진 몸을 꽃샘추위로부터 막아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발견 당시 김씨는 얼굴과 손의 살점이 대부분 뜯겨나간 상태였다. 경찰은 "최소한 보름 전에 숨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동안 주변 쥐들이 주검을 갉아먹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화려한 동대문 패션상가와 온갖 상점들이 밀집해 있어, 하루 유동인구만 수십만명에 이르는 도심 한복판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여러날 동안 그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난 한달간 1400여명이 김씨 주검이 발견된 공중전화부스를 이용했다고 한국통신은 밝혔다. 이들도 바로 옆 쓰레기더미에 묻힌 김씨를 신경쓰지 않았다.
이날 오후 서울 을지병원 영안실에서 만난 김씨의 동생 김종수(44)씨는 차라리 체념한 듯 담담했다. "가난했어요. 그 기억밖에 없습니다. 전북 익산의 빈농에서 4남3녀가 태어나 누구도 중학교를 가지 못했어요. 형도 초등학교를 미처 마치지 못하고 농사를 거들어야 했죠. 가진 땅이 없어 언제나 남의 논에서 일을 했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었습니다."
김씨가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치려 새로 시작한 것은 1990년. 대전에서 조경업을 했고, 1995년에는 결혼도 하려 했다. 그러나 결혼을 미끼로 접근한 유부녀에게 속아 5천만원을 빼앗겼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구제금융 사태까지 닥쳐 사업도 접어야 했다. 술을 입에도 대지 않던 그가 술병을 끼고 서울거리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고 한다. 동생 김씨는 "최근 몇년 동안엔 아예 가족들과 연락도 끊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보름전 쯤으로 추정되는 어느 날, 김씨는 힘겨웠던 이승의 삶을 끝냈다. 빈농의 아들을 참담하게 했던 이 세상은 그의 죽음 앞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를 덮고있던 쓰레기더미는 말끔히 치워졌고, 무심한 인파는 이날도 동대문 패션가에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출처 : 3월 8일 한겨레 사회면>
◆자살 사이트
지난 4일 전남 목포시내 한 여관에서 동반자살한 남녀 3명은 인터넷 자살사이트 회원인 것으로 12일 확인됐다. 이들은 이 사이트대화방에 `죽고 싶다'는 글을 자주 올린 뒤 구체적인 자살방법 등을 논의한 끝에 동반자살의 길을 택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목포경찰서에 따르면 동반자살한 곽모(31.경기도 수원시), 이모(20.서울시 강서구)씨와 박모(19.광주광역시 서구)양은 인터넷 ㈜다음사카페에 개설된 자살 사이트 '이리로 22'의 회원이었다. 경찰은 이들이 자살한 후 삭제된 대화방 토론내용을 복구하는데 성공, 이 자료를 토대로 이들이 어떻게 만나 자살했는지 등에 대한 정밀조사를 벌이고 있다. 수사관들은 "대화방 자료에는 이들이 회원들과 나눴던 자살에 관한 충격적인 내용은 물론 자살을 충동질하는 내용 등이 담겨져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특히 '죽는 방법을 연구하자'는 제목에는 술먹고 동사하기, 수산화나트륨 정맥주사법 등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경찰은 서로 사는 곳과 나이, 직업, 성별이 다른 이들이 어떻게 만나 목포까지 와서 자살했는지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하려 했으나 지난 9일 같은 사이트의 한 회원이 이들이 자살 사이트 회원이었다는 내용을 제보함에 따라 수사가 급진전됐다. 목포경찰서는 이 자살 사이트 개설자와 다음사 등을 상대로 자살방조 혐의에 대해 조사중이다.
너희들이 '충격 그 자체'를 받으면 수사대상이니?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내용들을 상상하고 또 실행하면 수사대상이니? 이 훌륭한 세상 살 이유 못찾는 사람들끼리 허심탄회 모여 고통없이 떠날 얘기 나누는 게, 수사대상이니? 그저 '충동질'하고 방조한 것만 수사대상이니? 왜 자살하려 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을 꿈꾸는지, 고통없는 예쁜 자살을 꿈꾸는지, 그건 수사대상 아니니?<출처 : 3월 13일 한 개인 홈페이지>
◆어느 노동자의 죽음
사상 최대규모 정리해고로 노동자 가정이 잇따라 파탄나고 있는 대우자동차에서 40대 후반의 노동자가 구조조정 압박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2월 23일 오전 9시쯤 부산시 연제구 거제2동 모아파트 103동 20층 계단에서 대우자동차 금사공장 부품과 조장으로 22년간 근무하던 47살 박모씨가, 1층 바닥으로 뛰어내려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합니다. 경찰은, 박씨가 최근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퇴직금 지급마저 불투명하자 이를 고민해 왔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구조조정 등 회사문제를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22년 청춘을 다 바친 직장에서 생산직 조장이 되었다면 어지간히 뼈골 빠지게 일했겠지요. 자신을 돌보지 않는 '대우가족'이 돼 얼마나 분골쇄신 일해왔겠습니까? 하지만 어느 날부터 월급도 안나오고 퇴직금도 나올지 안나올지 모르는 암울한 상황에다, 부평에서는 1,750명의 가정을 파탄내는 사상 최대의 정리해고가 자행됐습니다.
박씨가 자살한 23일엔 대우자동차를 오늘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수십조원을 해외로 빼돌려 호화생활하고 있는 김우중을 잡기 위해 '김우중 체포결사대'가 프랑스로 출발한 날입니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고생하다 못해 자살하는데 김우중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정부는 왜 그를 잡아들이지 못하나요? 김우중이 빼돌린 20조대의 돈만 회수해도 노동자 1만명이 70년을 먹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김우중을 잡아들이고 빼돌린 돈을 회수해 회사를 제대로 돌리면 안됩니까? 정 안되면 최소한 노동자들 밀린 임금이며 퇴직금이라도 주면 안됩니까? 그도저도 안되면 제발 가정파탄 내는 정리해고만은 피하는 수단으로 쓰면 안되겠습니까? 김우중 잡아오면 '검은 리스트'가 까여 정치권이 줄줄이 엮이는 핵폭탄이 터질까봐 못 잡아옵니까?
민주노총은 고(故) 박 조합원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면서 정부와 가진 자들이 진심으로 이 참혹한 노동자 현실을 바로 보고 대책을 세울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민주노총은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투쟁하고 노력하겠습니다.<출처 : 2월 23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성명서>
◆왕회장의 영결식 중계
신화를 만들어낸 거인, 강원도 시골소년에서 세계적 기업가로 성장했던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모든 이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평화 속에 잠들었다.
고(故) 정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영결식이 25일 오전 10시 서울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대운동장에서 7천여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 약력보고, 고인의 육성녹음 청취, 추모사, 헌시, 헌화, 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고인은 대형 멀티비전으로 중계된 생전 육성녹음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긍정적인 생각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유창순 전경련 명예회장은 추모사를 통해 "인명은 재천이며 인수는 유한하다 하지만 유명을 달리 해야 하는 자연의 섭리가 못내 안타깝고 서러울 따름"이라며 "이승에서의 모든 번뇌와 슬픔을 털어버리고 안심왕생하라"고 애통해 했다. 김상하 전 대한상의 회장은 "경륜과 지혜를 모두 갖춘 경제인이 드문 요즘, 고인은 기업인 뿐 아니라 일반인의 존경과 추앙을 한몸에 받던 재계의 거목이요 선구자였다"고 강조했다. 고인과 오랜 교분이 있는 원로시인 구상씨는 탤런트 최불암씨가 대신 읽은 추모시에서 "하늘의 부르심을 어느 누가 피하랴만/ 천하를 경륜하신 그 웅지 떠올리니/ 겨레의 모든 가슴이 허전하기 그지없네"라고 추모했다.
영결식에는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 신국환 산업자원부장관, 김각중 전경련 회장,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 김학준 사장, 이홍구 전 총리, 한승주 전 외무장관, 서영훈 대한적십자 총재, 손학규 의원, 박홍 전 서강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
영결식이 끝난 뒤 고인의 유해는 이날 낮 1시께 경기 하남시 창우동 선영으로 운구돼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땅에 묻혔다. 장지에는 휴일을 맞아 고인이 안장된 검단산으로 등산을 온 시민 200여명이 찾아 분향하며 고인의 별세를 함께 애도하기도 했다.
한편 영결식 하루전인 24일에는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조문단 4명이 직항편으로 서울에 와 청운동 빈소를 방문, 조문했다. 북한이 조문단을 보낸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다. 현대측은 이날까지 서울 청운동 빈소와 북한을 포함, 국내외에 설치된 110개의 분향소에 모두 33만여명이 조문했다고 밝혔다.<출처 : 3월 25일 연합뉴스>
◆에필로그
한 노숙자가 죽었다. 보름 동안 쥐들이 그의 시체를 뜯어먹었다. 그러나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의 삶은 수많은 쥐들에게 뜯어먹히고 있었다. 빈곤, 무학, 사기, 다시 빈곤의 악순환…. 세상이 바로 그의 삶을 뜯어먹는 쥐들이었다. 그의 존재는 그렇게 조금씩 갉아먹히면서 서서히 없어져갔다. 도심 한가운데 놓인 시체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는 뜯어먹혀 없어진 존재였다.
꽃다운 젊은이들이 동반자살했다. 그들은 자살 사이트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살을 하기 위해 자살 사이트를 찾았을 뿐이다. 자살 사이트가 없었더라면 차마 용기가 없어 죽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그러니까 문제는 자살 사이트에 있다는 논리는 앞뒤가 전도된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도 죽을 만큼의 괴로움과 슬픔이 있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내밀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삶과 사회의 고리를 따라 우리에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괴로움과 슬픔들. 그러나 사회는 중세의 마녀재판처럼 자살 사이트에 모든 불행의 책임을 덮어씌운다.
한 노동자가 까마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삶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게 되었다. 그 자신의 잘못도 아니요, 그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어떠한 이유도 제시되지 않은 채. 당황한 그에게 돌아올 대답이라면, '자본주의는 원래 그런 거요, 몰랐소?'일 뿐.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만 삶을 유지하라는 정언명령을 내려놓고, 그 명령을 따라 충실하게 살던 노동자에게 일별도 없이 또 제멋대로 노동력을 팔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노동력을 판매하지 못하게 된, 따라서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그는, 죽을 수밖에.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뉴스 속보에서부터 영결식 때까지 언론은 그의 장례식을 중계하다시피 했다. 그의 생애가 신문에 연재되고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으며, 울산의 '현대가족'이라는 한 아주머니는 뉴스 카메라 앞에서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서울로 달려올라가고 싶지요"라며 울먹였다. 그러나 그 뒷편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의 찬란한 업적으로 가득찬 생애의 뒷면은 곧 한국 현대사의 모순이며, 현대가족의 다른 얼굴은 무자비한 탄압에 짓밟혀온 노동자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서는 입을 떼지 않는다. 고인에 대한 '예의'.
죽은 사람은 저 홀로 자박자박 하늘길을 떠난다. 그는 삶의 고리를 풀어놓고 오직 자신만의 오롯한 죽음 속으로 간다.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우리, 삶의 고리들 속에 매여 있다. 죽은 자가 남기고 간 고리들,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고리들, 그리고 산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고리들, 그것들을 풀고 또 새롭게 묶고, 그렇게 발버둥치며 애쓰는 것이, 바로 살아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