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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서머나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위드
그러면, 이런 질문 하실 분 있을 거에요.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 할 수 있습니까?
예전에 세상교회 다닐 때 그런 말 많이 들어보셨지요? 성령충만의 비결,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고 말씀의 생활화 교회일에 열심하고 말씀지켜 착하게 살아라...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성령충만을 위해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입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주어지는 거에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러셨잖아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바람을 손으로 잡을 수 없듯이 성령도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마치 무슨 게이지로 측정하듯이 충만한 성령, 덜 충만한 성령 그런 거 없어요. 성령의 나타나심 자체가 충만인 거에요 그리고 그 성령충만은 세상교회서 말하는 그런 인간의 필요나 목적과는 전혀 다른 충만이란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집사의 성령 충만의 결과가 이를 갈고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는 거니까...(행7:55-60)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목적은 세상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세상사람들의 뜻이나 어떤 협조 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자기 일을 홀로 하고 계신 거에요. 그래야 창조주 하나님이잖아요. 우리 인간과 의논해서 자기 일을 이루시는 것도 아니고 오늘날 개혁주의처럼 우리 인간(교회)이 아니면 하나님도 하나님의 일을 못하시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그분의 뜻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력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낫팅.
이런 문제 때문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 모든 자들이 합심해서 죽이고 세상 밖으로 추방해버렸다니까요. 왜 당신의 선택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왜 당신이 거저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 보편적 인간입니다. 당신 없이도 우리끼리 잘 할 수 있으니까 다시는 이땅에 오지 마세요 그래서 세상밖으로 추방해버린 거에요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까지도 세상을 다녀가신 그 예수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가 십자가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지 않은 모든 인간들은 평생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일만 하다가 갑니다. 십자가 은혜를 모르고 인간의 종교행위에 열심하는 것이 다 이루심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거에요. 초대교회에 나타난 다른복음이 그거잖아요. 십자가 더하기 할례, 십자가 더하기 안식일 지키기 절기지키기 오죽하면 바울사도가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겠습니까?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했단 말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그 믿음에 율법행위가 더해져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 교회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한 유대교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러겠죠? 나는 아닌데요.. 나는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 다녔고, 집사도 했고, 장로도 했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도 했고, 선교도 하고 다했다고... 그게 예수믿는 거 아니냐고...그런데 그런 것들이 방금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 지신 예수의 주되심을, 그분과 나와의 관계를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종교 행위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그 믿음 안의 세계로 인도될 수가 없어요 그들은 그런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입니다. 자체발광의 종교성에 취해서 자기라는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두고 마르크스는 ‘아편’이라 했고 헤겔은 ‘자기 투사’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재미있는 두 가지의 오락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 하나는 종교입니다. 이 둘은 중독되면 스스로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늪과 같은 거에요 허우적 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 말이죠 거시서 벗어나는 길은 외부의 누군가가 건져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 종교인들은 어떤 고난의 길을 가도, 어떤 핍박을 당해도 그들이 가는 길은 넓은 길, 넓은 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인간이 찾을 수 없는 길이고 찾을 수 없는 문이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래 세상에는 없는 길이에요.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이고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길을 인간들은 찾을 수 없는데도 어떻게 해서든 찾아보겠다는 게 종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명나무로의 그길은 오직 그 길에 의해 찾아진 자들에게만 보이는 길이에요 내가 선택한 적도 찾은 적도 없는데, 어느 날 보니 내가 그 길 위에 있더라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죠? 나는 양의 문이라고... 사람들이 아무리 고생하고 아무리 핍박을 받고 설사 죽임까지 당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찾는 것은 모두 자기를 위한 넓은 문이고 넓은 길입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단 말이에요. 오직 성령에 의해서 찾아진 자들이 성령의 인도로 부득불 끌려가게 되는 모든 삶이 좁은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지요. 성도에게 맺히는 열매는 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도 자신이 그 열매에요. 성령의 열매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붙어있는 가지가 반드시 결실하게 되는 열매니까요. 그래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반드시 맺힐 수밖에 없는 열매인데, 그 열매는 최종적으로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되고 그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만을 자랑하는 그런 열매입니다.
성도가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고 봉사하고 교회 충성하고 전도를 많이 해서 맺는 열매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누구나 열심만 내면 다 할 수 있어요. 본래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열매, 그래서 예수 안에서만 맺히는 성령의 선물로서의 열매.. 그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에게로부터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래 열매 없는 어둠이었는데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그대로 온전한 선물로 받아서 빛의 아들들이 된 거고, 그 빛은 반드시 세상의 어둠을 배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개역개정)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너희가 빛에 의해서 빛이 되었으면 그 빛 안에서 반드시 빛의 행사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착함이고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착함이라고 하면 우선 윤리도덕적인 착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착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착함, 빌립보서의 기록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이 다 이루시는 그 착함은 예수 안에서만 나타나는 착함입니다. 그리고 의로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 예수를 받음입니다. 그리고 진실함 역시 진리이신 예수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안, 성령안, 믿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 하나님의 의와 선과 진리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삼ㄹ 전체를 하나님께서 착함으로 의로움으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본래의 진의대로 진리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신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고 하셨잖아요 성령의 조명과 인도가 아니면 성경은 오해할 수밖에 없는 책인 거에요. 세상교회들이 지들 맘대로 가공한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만 광분하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그들의 어두움을 볼 수 있고 그들의 부정을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성도입니다. 스데반처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다..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이런 거 참 하기 싫죠? 매일 남의 잘못을 책망하고 틀렸다고 말하고... 제가 욕을 먹는 것이 이 때문인데요. 강장로는 사랑이 없고 사람이 부정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있으면, 진리의 영이 있으면 부득불 입을 열어서 아닌 것에 대해서 “아니오”를 하게 됩니다. 누군들 인간관계가 틀어지는 걸 알면서 그러고 싶겠어요? 그런데도 급준이 나보다 크시기 때문에 부득불 한다고 하잖아요 구약의 선지자들도...그래서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성령의 은사로 기능하는 직분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투표해서 얻는 집사, 장로 그런 직분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직분은 성령의 은사로 말씀으로 섬기는 직분입니다. 비 진리에 대해서 사람들 눈치 보지않고 “아니오”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에 로마 감옥에서 뭐라고 말을 했는지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들에게 주시는 전투 장비들이 다 나옵니다.
(에베소서 6장)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투구, 전신갑주, 호심경, 허리띠, 신발,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이 모두가 전투 장비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냥 입혀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게 불려나온 여러분이 모두 복음의 군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미 주님께서 이기신 전쟁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로 확정이 되었는데, 그 십자가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체휼토록 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악한 영들과의 전투에 밀어 넣으시는 겁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붙이시매의 전쟁이지요. 그렇게 밀어 넣으셔서 그 전투에서 장렬하게 죽게 하십니다. 우리더러 악한 영들을 폼나게 쫓아내고 승전고를 울리고 개선행진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여 개선행렬의 맨 끝에 패잔병처럼 끌려 다니는 게 성도의 실존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이게 패잔병으로 끌려가는 거에요)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성령께서 그길로 끌고 가시더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 성령의 인도와 돌보심이 없는 자들은 자기 목적이나 자기 필요에 따라 성령을 부려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임파테이션이니 뭐니 해서 결국 그건 귀신의 능력을 받는 거에요. 사람들이 맘대로 불러내고 지들 맘대로 부어주는 그런 성령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 있는 복음의 군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쟁에 나선 자들입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장렬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 악한 영과의 전투에서 열심히 싸웠던 바울이 뭐라고 하는지를 보세요.
(에베소서 6장)(개역개정)
19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니 복음의 군사로 내보내셨으면 하나님이 좀 도와주시던지 해야지 그 결국이 로마 감옥에 집어 넣으신 것이 뭐냐고요. 주위 사람들까지 다 떠나고 너무 춥다 외투 좀 가져 와라 성경책도 좀 가져오고...이게 성경을 열세권이나 쓴 사도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쇠사슬에 매인 것은 나로 하여금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힘을 다 빼앗고 참혹한 환경에서 그가 구술한 복음이 그의 옥중서신이란 말입니다. 성령충만의 능력, 곧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싸움을 마치고 로마 감옥에서 장렬하게 참수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현실이고 구원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이 빛의 아들들을 위해서 세상은 세상 끝날까지 어둠으로 있어야 합니다. 세상 속성은 변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 땅을 다녀가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고 세상에서 추방을 당했듯이 그분의 운명에 연합된 성도들도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은 참 쉽지요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with Christ)..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은 이 땅을 다녀가셨던 예수님의 운명에도 같이 연합이 되는 겁니다. 우리도 예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아담으로부터 오늘 여러분까지 그 십자가의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행렬 밖에는 어떤 구원도 어떤 영생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인 합일의 노림수와 유니언 크라이스트는 전혀 다른 거에요.
그래서 빛 안에 있고 빛을 받은 성도들은 그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되는데, 이것을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길에 나가서 밥 퍼주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이런 것을 착한 행실이라 하지 않습니다. 착한 행실은 우리에게 비추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참 빛을 받아 그 빛을 어둠에 비추이는 일을 일컫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어둠을 어둠으로 드러나게 하는 그 일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고 계십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으로 ” 라는 말 뒤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아벨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이 모두 여러분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러잖아요. 너희가 아니면 그들도 온전치 못하다고... 그들과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의 집으로 온전하게 지어져야 한다니까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들과 똑같이 믿음으로 최종목적지에 이르는 자들입니다. 믿음을 따라 잘 죽는 자들이에요. 믿음이 끌고 가는 마지막 자리는 그렇게 진리의 죽음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죽었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게 믿음의 역할이에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 그분이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고 그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 믿음입니다. 성령충만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 고치고 거품 물고 자빠지고 금이빨 만들어 주고 그거 성령의 역사 아니에요.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의 믿음으로 인해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창세기의 사건들이 여러분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 진리와 비 진리,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내시는 일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지금도 일하고 계신 겁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이렇게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지 자기 성도들을 시험하고 책망하시는 성령입니다.(고린도후서 13장)
우리의 몸은 율법의 몸이고 선악의 몸이기 때문에 성령을 거스르고 또 성령은 우리의 육체를 거스른다고 하지요. 은혜의 복음 보다는 율법행위로 나를 증명하고 내 구원을 소유하려고 하는 육체의 소욕들을 꾸짖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하심이 성령의 돌보심입니다. 나로부터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를 바라보게 하심입니다. 이게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내내 계속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살아내게 하시는 거에요 고후 4장의 바울이 살았던 그 십자가입니다.
구약의 성신은 왔다 갔다 하시는 성신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목적대로 필요에 의해서 성신을 주시기도 하고 떠나가게도 하시는 성신입니다. 사울이 그랬죠? 그도 성신을 받았을 때 예언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성신이 떠나고 악신이 사울을 덮치니까 창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요
그런데 지금은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내신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이 성령을 내주하시는 성령이라고 합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이에요.
이렇게 성령께서는 날마다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육체의 소욕과 정욕과 탐심을 들추고 드러내십니다. 정욕과 탐심을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막아놓으신 생명나무 열매를 향해서 손을 뻗치는 우리의 본능이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종교인입니다. 나는 무교입니다.. 이런 거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영생을 탐하는 것이 여러 가지 종교의 형태로 나타날 뿐입니다. 무교도 종교예요. 그럼 그들은 누구를 믿습니까? 자기 자신, 자기가 투사된 자기라는 신을 믿는 거죠.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인간교 신자입니다.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알라를 믿든 그들은 다 인간교 신자에요.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하나님,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 자아실현이라는 탐심을 위해 자기 몸에 신나도 뿌립니다. 스님들 선방에는 소지 공양도 합니다. 중세 수도원에서도 새벽부터 종무일과표에 따라서 생활하다가 잡생각이 나면 날카로운 채찍으로 자기 등을 때렸습니다. 루터도 돌계단을 하도 오르내려서 무릎이 다 까졌다고 하지요. 이 모든 것들이 영생을 향한 탐심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깨끗이 하고 다듬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까지 이르려는 탐심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한거에요 (골3:5)
갈라디아서에는 그런 탐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절대 할 수 없는 그 일을 주께서 하셨단 말이에요.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영단번의 제사로 우리를 안고 한꺼번에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부인이란 이렇게 주님의 자기부인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자기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것이 성령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서 세뇌가 되고 ‘믿습니다’라고 자기최면을 걸어서 믿어지는 게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선물로서 믿음, 그분의 돌보심, 끝까지 지켜주심이 구원입니다. 믿음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주심입니다. 그것을 견인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서정에 나오는 그 견인입니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끝없이 부어지는 긍휼 그것이 아니면 구원에 이를 자가 없단 말입니다. 찬송가에도 있죠?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워 말아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 너 가는 길을 모두 가기 전에 네 손에 든 검을 꽂지 말아라...“성령의 지켜주심과 인도하심이 없으면 그 길을 스스로 갈 수 있는 자는 1도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후에 하늘에서 뒷짐을 지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교회서 가르치는대로 너희들의 원죄는 십자가로 해결했으니까 이제부터는 너희가 열심을 내어서 누가 누가 더 큰 상급을 받나 경주에 경주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 사단의 신학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개혁주의가 되어버렸습니다. 성화론, 차등 상급론 신인협력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께서는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진리의 영으로 진리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약함과 우리의 믿음 없음과 우리 사망의 몸에서 자유하게 하는 그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는 거에요. 십자가, 언약의 피뿌림이라는 현실을 재생시켜 주심으로 나와 세상에 고정된 우리의 눈을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향하게 하시고 그 소망이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시는 것, 쉽게 말하면 이 세상은 내가 살 집이 아님을 반복해서 고백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더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십자가의 영으로 오신 그분은 우릴 따라다니면서 세상에 뿌리를 내릴 때마다 밑동을 자르십니다. 그런 열심히 없으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어요 우린 세상에서 태어난 세상밖에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피를 뿌린 자기 자식들은 그 세상으로부터 별세시키시는 일을 쉬지 않고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는 그들을 피 뿌림을 얻은 나그네들이라고 합니다. 그 피 뿌림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자꾸 땅으로부터 분리시키십니다. 그런 사건이 있어야 아브라함 3대처럼 땅에서 텐트를 치고 산단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살았겠어요? 그 부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4절에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합니다.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시는 최종 목적지가 그 소망이 현실이 된 그 자리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본향을 찾는 그 자리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고 성령 충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눈만 뜨면 이 세상에서 더 잘 살아볼 궁리만 하지요 만만찮은 세상, 맹수들이 들끓는 정글에서 어떻게 하면 나와 내 가정을 지켜낼까 고민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뒤로는 비상구 하나씩 만들어놓잖아요. 그러면서 또 자기 합리화는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하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나를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내가 예수 믿는 거 맞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 하면서 또 씻고 다듬고 반성하고, 잘못한 만큼 착한 일을 더해서 감추려고 하고, 그런 게 종교행위로 나타나서 기도시간도 늘리고 성경 더 열심히 읽고. 교회봉사 더하고.. 옛날에 그런 거 많이 하셨죠? 교회에 헌금 액수가 갑자기 늘어나면 교인들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런 종교행위, 다르게 표현하면 화장 고치기는 성령의 일하심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성경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나쁜 일 많이 한다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잘해보려고 하는 것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의 행위 자체를 카운트하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일일이 따지시면 천국 갈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누구시며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알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인도로 진리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끝없이 우리 인생을 용서와 긍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하나님의 열심히 있어서 우리가 면목 없이 빈손으로 그 하나님의 의를 그 사랑을 덥석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미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깨끗한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고 깨끗하다 하신 것을 왜 네가 판단하느냐? 주께서 다 이루신 일을 믿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자꾸 너희들이 더러운 손때를 묻히려고 하느냐?.. 성령의 책망은 그런 것입니다.
본래 우리에게는 착함도 의로움도 깨끗함도 없었어요. 모태죄인이라니까요. 죄인에게서는 무엇을 해도 죄만 나옵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러운 죄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 안 받으신다니까요. 그런 죄인들에게 아예 기대를 안하세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은 자기 일만 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린 착한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기껏 해봐야 나 중심의 선악 행위 밖에 하지 못하는 죄인인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신 그 처음 자리로 데려다 놓으신 분이 언약의 피를 흘리신 주님이십니다. 그 자리가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분이 십자가로 다 이루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우리의 영원한 처소입니다. 그래서 이젠 여러분이 아무리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발버둥을 쳐도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셔야 해요 그게 그리스도 안입니다. 이미 홍해를 건너버렸다니까요.
주님께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주시고, 성령은 그 영원한 현실을 우리에게 계속 반복적으로 일깨워주십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그것만 사랑이에요. 아들의 죽음 안에서 다 이루신 그것을 하나님은 선하다 하시고, 아들 안에 있는 우리를 깨끗하다고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오직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것이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강입니다.
(빌립보서 1장)(개역개정)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찬송이고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영, 그 새 창조의 영, 그 은혜의 복음이 우리 안에 진리로, 우리 마음으로, 우리 심장으로 가지게 되는 그 일을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사랑, 이미 자기 사람들을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그 약속의 성취를 온전한 선물로 담아서 우리를 찾아오신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서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 안에서 잘 살아계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많이 되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고아와 과부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발걸음 하나하나까지, 또 우리의 숨 쉬는 모든 순간을 아들의 영으로 돌보시며 지키시며 인도하심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풀 한 포기 없고 물 한 방울 없는 이 간조한 땅, 독사와 전갈이 끓는 이 광야를 우리가 살고 있지만, 우리를 따르시는 반석에서 솟아나는 그 생수로, 그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위로하여 주시고, 새 힘을 주셔서 이 광야교회의 삶 전체가 은혜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성령 하나님 에게는 관심없고 성령충만 에만 관심있는 어리석은자 들이여.
조심스럽게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성부 하나님의 충만성, 성자 하나님의 충만성 성령 하나님의 충만성, 성령 충만을 성령 하나님의 충만성 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다른영 으로 충만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