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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특히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강화되면서 철저한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었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차단되었고 남녀칠세부동석은 상식이 되었으며, 칠거지악, 내외법, 재혼 금지 등 여성의 활동을 규제하는 법적 도덕적인 장치가 마련되었다. 때문에 반가의 여성은 가정에서 출산과 양육,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존재로만 인식되었다.
민회빈 강씨는 이런 폐쇄된 사회 환경 속에서 자라났지만 생소한 타국 땅에서 조선 여인의 우수한 생활 능력을 발휘한 여장부였다. 그녀는 인조의 무능으로 초래된 병자호란의 뒤안길에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이 되어 심양에 끌려간 뒤 병치레 잦은 남편을 돌보며 수심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심양 관소에 대한 조선 조정의 물적 지원이 한계에 다다르자 세자빈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집어 던지고 과감히 경제 전선에 뛰어들었다.
강빈이 현지에서 농업과 무역을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소현세자는 청나라 왕족들과 교류했고, 심양 관소는 조청 외교창구로서의 기능할 수 있었다. 아울러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속환되어 그리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행보는 소현세자의 입지를 강화시킴으로써 장차 자신의 권좌를 찬탈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시아버지 인조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금의환향했던 소현세자는 갑작스레 병석에 누워 목숨을 잃었고, 강빈은 인조로부터 저주와 독살 기도라는 허무맹랑한 너울을 뒤집어쓴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1637년(인조 15년) 2월 8일, 강빈은 소현세자와 함께 폐허가 된 한양을 떠나 천리 먼 길 청나라의 도읍인 심양으로 향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 삭풍이 몰아치는 북행길에서 청나라 병사들은 조선인 포로들을 잡아가기 위해 자꾸만 곁길로 돌았다. 인질로 겪어야 할 앞날에 대한 공포, 노예가 된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한데 어우러진 무간지옥의 시간이었다.
그 동안 사가와 궁궐의 따뜻한 온돌방에서 지냈던 강빈은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놀란 듯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소현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종의관 정남수가 청나라 장수에게 하소연하여 탕약을 달여 먹였지만 좀처럼 낫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런 두 달여가 지나고, 4월 10일에야 강빈과 소현세자 일행은 심양에 도착했다.
다행히 강빈의 증세는 심양 관소에 들어서면서 회복되었지만 소현세자는 계속 일어서지 못했다. 의관의 진단으로는 한기가 뭉쳐서 생기는 산증(疝症)이었다. 4월 18일부터 침을 맞기 시작했는데 차도가 없자 뜸까지 떠야 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세자의 병세는 인질이 되어 한양을 떠날 때 했던 인조의 당부가 원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인조가 소현세자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내지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였다. 조선의 세자로서 당당하게 처신하되 함부로 속내를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겠다. 그 말에 소심한 세자가 스트레스를 받아 몸이 상했다는 것이었다. 곁에 있던 강빈은 이런 용골대의 비아냥거림에 새삼 몸이 시렸다. 망국의 포로로서 하루 빨리 이런 참담한 신세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소현세자는 이후 8년 동안의 심양 생활 동안 매년 병석에 누워 강빈을 애타게 했다. 아버지 인조의 심리적 압박이 누그러지지 않은 데다, 청나라 관리들의 과도한 요구 때문에 마음이 한 치도 편할 날이 없었던 탓이다. 강빈은 그런 남편을 돌보면서 타향살이 설움에 눈물짓기보다는 역경을 헤쳐 나가는 억척스런 조선 여인으로 탈바꿈했다.
심양 남탑 인근에 있는 관소에서의 나날은 한양의 동궁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이웅과 박황, 박로 등 시강원의 관리들은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어 경서를 강의했고, 이기축이 지휘하는 익위사 관리들은 삼엄한 기색으로 세자를 호위했다. 함께 거처하던 봉림대군 부부 역시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서책을 읽으며 무심한 나날을 보냈다.
당시 심양 관소의 인원은 세자와 왕자의 수행원, 하급 관리와 일꾼들을 포함하여 5백여 명이 넘었으므로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초기에는 청나라 조정에서도 생활비를 대주었고 본국에서 식량과 물자를 보내 주었지만 차츰 보급이 뜸해지자 씀씀이를 대폭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소현세자는 조선의 대표로서 청나라 왕실에서 벌이는 행사에 일정 규모의 돈을 내야 했다. 게다가 용골대와 역관 정명수 등 청나라 관리들이 무시로 드나들면서 뇌물까지 요구했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세자는 수시로 본국에 자금과 물자를 요구하는 장계를 보냈다. 심양 생활 4년째인 1640년(인조 18년) 5월 22일의 〈심양장계〉에는 이런 세자의 처지가 눈물겹게 묘사되어 있다.
‘황제께서 돌아오시면 벌여야 할 잔치에 물자가 부족해 큰일입니다. 이곳의 금전 가치는 매우 적습니다. 소, 양, 밀가루 등을 사려면 대략 687냥이 들고, 그 외 잡물을 마련하는 데 수백 냥이 드니 1천 냥 이상이 필요합니다. 현재 돈을 꾸어 충당하는 형편이니 해당부서나 각 지방에 저축해둔 돈을 급히 보내주십시오. 황해도와 평안도 감사에게 꿀 25말과 과일을 보내게 하십시오. 또 용골대와 정명수가 공금으로 자신들의 노비를 사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무렵 강빈은 시종으로부터 심양 시내의 노예시장에서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노예로 매매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라가 망하니 수십 만 명의 조선 남녀들이 노예로 끌려와 일꾼으로 혹은 노리갯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애가 닳은 본국의 인척들이 각처에 수소문하여 그들을 데려오려 해도 엄청난 속환 비용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바로 그때부터 강빈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현세자를 설득하여 얼마 남지 않는 관소의 자금을 풀어 노예 시장에 나온 조선인들을 사들였다. 때마침 청나라 조정에서 심양 관소에 식량을 자급자족하라는 뜻으로 논밭을 지급해 주었다. 강빈은 그곳에서 구해낸 백성들을 일하게 했다.
농장 경영은 전적으로 강빈의 몫이었다. 그녀는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백성들과 함께 재배한 곡식과 채소를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모았다. 고귀한 세자빈 마마께서 천한 농사일을 하다니 조선 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소현세자나 수행원들은 경악했지만 얼마 후 그녀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연명하는 처지가 되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1641년(인조 19년)부터 강빈은 심양 인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확장했다. 그 결과 이듬해에는 무려 3,319석의 곡식을 거두었다. 바야흐로 경제에 눈을 뜬 강빈은 조선에서 면포·종이·모피·괴화 등을 들여와 청나라 각처의 시장에 공급했고,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과 약재까지 가져다 팔아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강빈은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강빈은 소현세자의 외교활동을 지원했고, 남탑 거리에서 매매되던 수많은 조선인 노예들을 사들여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강빈의 활약으로 심양 관소 앞마당은 청나라와 조선 상인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심양 관소에서는 이전처럼 조선 조정에 물자 지원을 요구했다. 1641년(인조19년) 6월 25일의 〈심양장계〉에서는 관소의 일꾼들에게 급료를 지급하기도 힘들고 생활비도 한 달 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소연한다. 1642년(인조 20년) 윤11월 2일의 〈심양장계〉에서는 급기야 관소에 모아 둔 은자와 식량이 바닥났으니 조선의 해당 부서에서 잘 헤아려 조치해달라고 읍소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심양에 가까운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에서 재물을 마련해 보내주었지만 이후에도 같은 내용의 장계는 계속되었다.
그것은 강빈의 경제활동이 알려지면 임금이나 조정 중신들이 경계할 것이라고 생각한 심양 관소의 이중플레이였다. 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현지 사정을 입수한 인조는 세자와 며느리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1643년(인조 21년) 강빈의 아버지 강석기가 사망하자 소현세자 부부는 청나라 조정의 허락을 얻어 잠시 귀국했다. 한데 이들을 경계한 인조는 성묘조차 못하게 했고,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자와 사이가 나빴던 환관 김언겸을 감시역으로 붙여 보내기까지 했다. 이런 졸렬한 조치는 이듬해 심기원의 역모사건으로 비화했다.
1644년(인조 22년) 3월, 반정공신 심기원이 회은군 이덕인을 앞세우고 역모를 도모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이전에 그가 먼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소현세자를 옹립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뜩이나 심사가 비틀려 있던 인조는 병적인 의심에 상상력까지 더해 소현세자의 배후에 있는 강빈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인조는 증세를 알 수 없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을 음해하려는 무리들의 저주 탓으로 여겼다. 인조는 그 원흉으로 선조의 딸 정명공주를 지목했지만 그녀는 인목대비 사후 인조반정의 유일한 명분이었으므로 반정공신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다. 그 다음에 인조의 타깃으로 꼽힌 인물이 바로 강빈이었다. 인조에게 있어 강빈은 은밀히 자금을 모아 청나라 조정을 끌어들여 소현세자를 옹립하려는 역당의 수괴였다. 이런 인조의 의심은 소현세자의 귀국이 확정되면서 더욱 깊어진다.
1644년(인조 22년) 3월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중원 정복의 숙원을 달성한 황제는 그해 11월 11일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허락했다. 이에 따라 강빈은 33세의 장년이 된 세자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오랜 인질 생활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남편은 귀국 도중 중병을 앓아 조선에서 어의가 급파되는 소동을 겪었다. 그러다 잠시 회복되었지만 중도에 병세가 다시 도저 평양에서 요양하는 우여곡절 끝에 2월 18일 드디어 한양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세자 일행이 한양에 들어서자 백성들은 너도나도 뛰쳐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8년 만에 돌아온 세자야말로 조선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을 목도한 인조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수시로 자금과 물자를 요구하면서 가난을 호소하던 세자가 수많은 수행원들과 산더미 같은 물품을 바리바리 싣고 오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갈등의 이면에는 세자의 귀국 직전에 터진 심기원의 역모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 세자의 곁에 눈엣가시 같은 며느리 강빈이 있었다. 심사가 고까워진 인조는 세자 부부에게 하례하려는 군신들을 손을 휘저어 제지했다.
이런 부왕의 태도에 질렸는지 소현세자는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병석에 누웠다. 어의들은 여독 때문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증세는 악화되었다. 결국 인조의 주치의였던 이형익의 침을 맞고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4월 21일부터 세자는 오한으로 부들부들 떨다가 고열에 신음하는 증세로 고통을 겪었다. 23일 또 다시 같은 증세로 신음했는데 기침에 가래까지 끓었다. 그러자 어의 박군은 학질로 진단했다.
이튿날인 24일부터 다시 이형익이 침을 놓았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다. 26일에는 상한증 전문이라는 최득룡이 처방한 시호탕을 마셨는데, 갑자기 증세가 악화되었다. 이형익이 다급하게 침을 놓아 회복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645년(인조 23) 4월 26일 정오, 소현세자는 34세의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기록상으로 보면 소현세자의 죽음은 병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인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소현세자의 염습을 지켜보았던 진원군 이세완의 말을 인용하여 독살의 징후를 보여준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얼굴의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세자의 죽음이 알려지자 인조는 즉시 대신들을 소집한 다음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선언했다. 김자점을 제외한 모든 대신들이 전례에 따라 세자가 없으면 원손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주청했지만 인조는 눈도 꿈쩍이지 않았다.
일찍이 소현세자의 귀국이 확정되었을 때 김육은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하자고 하자 인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죽고 나서 원손이 즉위하면 강빈이 수렴청정할 것이니 결코 그런 꼴은 못 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에 강빈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내외가 엄격한 조선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아비 잃은 자식들과 함께 주저앉아 마른 통곡으로 억울한 심정을 표현할 수밖에……. 이런 그녀의 등 뒤에서 시아버지 인조가 서슬 퍼렇게 칼날을 갈고 있었다.
갑작스런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강빈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인조와 조숙원, 김자점 등이 궁인으로 하여금 궐내에서의 행동거지는 물론 사가의 식구들을 엄중 감시하면서 모종의 빌미를 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자의 장례를 치르던 도중 강빈의 오빠 강문명이 장지가 길지가 아니고 장례일이 원손에게 좋지 않다고 불평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말을 전해들은 인조가 두 주먹을 그러쥐었다. 《인조실록》의 사관은 강빈의 화가 여기에서 싹텄다고 논평하고 있다.
그해 6월 1일 대사헌 김광현이 의관 이형익의 죄를 거론하자 인조는 그가 강빈 집안의 사주를 받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며 매우 분개했다. 강문명은 김광현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그해 7월 일어난 궁인 애란의 옥사는 당시 강빈 주변에 대한 감시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준다. 궁인 애란은 꾀가 많고 조숙원과 친했으므로 인조는 그녀에게 세자궁을 감시하게 했다. 그런데 애란이 거꾸로 강빈과 가까워져 버리자 조숙원은 이를 갈았다. 소현세자 사후 애란은 한 무당으로부터 세자의 흉변은 북경에서 가져온 비단 때문이니 빨리 물에 띄워 버리거나 불에 태워 신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강빈에게 전했다.
퍼뜩 놀란 강빈이 비단을 찾아 애란에게 건네주었다. 애란이 제 방에서 그것들을 점검하고 있는데 감시하던 시녀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조숙원이 안으로 들어와 구경하는 체하다가 일부러 미끄러져 넘어졌다. 궁인들이 놀라 약을 구하느라 분주히 오가며 소란을 떨었다. 그 서슬에 궐 안이 시끄러워지면서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인조는 애란을 잡아 가두고 국문한 다음 섬으로 귀양보냈다.
1645년(인조 23년) 인조는 소현세자의 노비 신생을 사주해 저주사건을 일으킨 다음 두 명의 궁녀를 체포했다. 그중 한 사람은 소현세자의 맏아들 이석철의 보모 최상궁이었다. 인조는 그녀들의 혐의를 강빈과 연루시키려 했지만 실패하자 또 다시 저주사건을 조작해 강빈의 궁녀들을 잡아들였다. 하지만 심양 관소 시절부터 강빈의 은혜를 입은 궁녀들은 극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죽어갔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강빈도 참지 못하고 대전 가까운 곳에서 큰 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통곡했다. 그날 저녁부터 그녀는 인조에 대한 문안을 끊어버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년) 1월 3일, 인조는 수라상에 오른 전복구이에 독이 섞여 있다는 핑계로 강빈의 시녀인 정렬, 계일, 애향, 난옥, 향이 등 다섯 명과 소주방 나인 천이, 일녀, 계미 등 세 명을 내옥에 가둔 다음 국왕 시해음모를 자백하라며 고문을 가했다.
그와 함께 인조는 강빈을 후원 별당에 가두고 구멍을 뚫어 음식을 넣어주게 한 다음 시녀들의 접근을 차단했으며, 강빈과 말을 나누는 사람은 벌하겠다고 궁중 사람들을 협박했다. 며칠 뒤 인조는 신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가져와 연못에 넣어 기른 빨간 물고기에 독이 있었다며, 강빈이 그 물고기를 이용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강빈은 지난 해 가을 귀국한 이후 분해하고 불평하며 이미 여러 날 동안 문안도 하지 않았다. 이를 어찌 참을 것인가. 이런 태도로 유추하건대 흉물을 매장하고 나를 독살하려 한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강빈의 시녀들은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조작된 각본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정렬·유덕·계일·향이·천이·난옥·일녀는 다 자복하지 않았고 난옥은 먼저 죽었다. 인조는 특히 강빈이 신임하던 정렬과 유덕에게 독을 넣은 상황을 자백하라며 압슬과 낙형(烙刑)을 가했지만 끝내 자백하지 않고 죽었다. 이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의도한 자백을 얻지 못한 인조는 하는 수 없이 국청을 파하고 나머지 세 사람을 석방했다.
바야흐로 인조의 본심이 강씨를 죽이는 데 있음을 알고 조정 중신들은 불가함을 논박했다. 강빈은 서인의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조는 과거 강빈이 청에서 비단을 많이 가져와 대신들에게 주었으니 무슨 일을 도모하지 못하겠느냐며 대신들을 압박했다. 대사헌 홍무적, 지평 조한영, 헌납 심로, 정언 강호, 부제학 유백증 등 대간들의 상소도 이미 심사가 뒤틀린 인조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그는 장차 일어날 역모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강빈을 죽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해 2월 3일 인조는 대신들에게 비망기를 내려 강빈이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옹립하려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선언했다. 그녀가 심양 관소에서 왕비의 복색인 홍금적의(紅錦翟衣)를 만들어두고, 내전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시종들이 세자를 동전(東殿), 강빈을 빈전(嬪殿)으로 칭했으니 이는 장차 청나라사람들과 짜고 자신을 쫓아내려 한 증거라는 것이었다.
2월 5일, 대사헌 홍무적, 집의 김시번, 장령 임선백, 지평 조한영·이태연 등이 강빈의 죄악이 비록 무겁기는 하지만 여염으로 폐출하고 특별히 그의 목숨만은 살려 준다면 이는 실로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에 부합하고 전하께서도 끝내 자애로운 아버지의 도리를 잃지 않게 될 것이니 위호를 강등하여 여염으로 내쫓고 법에 따라 치죄하라는 어명을 거두어달라고 상소했지만 인조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승정원일기》에는 그해 2월 7일 인조와 김자점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당시 인조는 강빈이 소현세자의 장례를 치룰 때 하루에 두 차례 녹두 미음 한 종지만 먹고, 저녁에는 그마저도 먹지 않았다는데, 자세히 알아보니 몰래 여종의 밥을 김치와 함께 먹고 따로 불을 지켜 음식을 해먹었다며 괘씸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자점은 장례가 끝나자 그녀가 옷에 남색 물을 들였다며 괴이하다고 맞장구를 쳤다. 혼군과 간신이 그렇듯 한통속이 되어 강빈을 파렴치한 인물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그해 2월 29일, 인조는 강빈의 형제인 강문성과 강문명을 곤장을 쳐서 죽였다. 3월 15일에는 드디어 강빈을 사가로 내쫓은 다음 사약을 내렸다. 당시 강빈이 탄 흑색 가마가 선인문을 나가자 남녀노소가 길거리에 모여들어 호곡을 하며 뒤따랐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의 번영을 꿈꾸던 강빈은 그렇듯 억울한 죽임을 당한 뒤 남편과 떨어져 강씨 문중의 선산에 묻혔다.
1647년(인조 25년) 4월 25일, 인조는 폐비 윤씨와 연산군의 일을 거론하며 소현세자에게 아들이 셋이나 있으니 큰일이라고 개탄했다. 이제는 무고한 손자들까지 해칠 태세였다. 인조는 강씨가 죽기 전에 ‘인평대군과 조소용이 자신을 모함했으니 아이들이 장성하면 이를 알리라’는 혈서를 써서 인척과 나인들에게 주었다고 하면서 다시 강빈의 시녀 7명을 내수사 부엌에 가두고 고문을 가했다. 이미 강빈이 죽은 뒤라 허탈해진 시녀들은 인조의 각본대로 자백했다. 그리하여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그중에 첫째 이석철과 둘째 이석린은 1년도 못되어 병으로 죽었고 셋째 이석견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숙종 때 송시열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세자빈 강씨에 대한 신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1718년(숙종 44년)에 이르러 강빈은 민회빈(愍懷嬪)으로 복위되었고, 그녀의 묘도 민회묘란 칭호를 받았다. 1750년(영조 26년) 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년~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는 조선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본관은 금천(衿川)이며,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1627년, 만 16세의 나이로 세자빈이 되어 소현세자와 결혼하였다. 병자호란으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도르곤에 의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환했다. 효종때 민회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상소를 처음 올린 김홍욱은 국문을 받던 중 장살되었는데, 이는 민회빈의 무죄가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인조에 의해 법살당했으나 당대에도 신독재 김집, 송시열, 김홍욱, 송준길 등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억울함을 신원하는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되었고,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숙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인질과 석방
1636년 병자호란을 발발 후 이듬 해 1637년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되고, 강화조약에 따라서 소현세자와 19세의 봉림대군(효종)과 그의 부인 장씨(인선왕후)와 함께 청나라 선양에 볼모로 잡혀간다. 1644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이 멸망하자, 1645년 정월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8년간의 억류생활을 끝마치고 조선에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반청노선에 반기를 드는 소현세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불화는 계속된다. 결국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4월 23일 인조의 어의 이형익의 시침을 받고, 3일 후 소현세자가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인조는 진상조사를 바라는 강빈과 대신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장례일을 앞당겨 입관을 서둘렀고 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장례절차를 밝게 했다. 참관 인원도 일부 종실로 제한하고, 어의를 처벌하라는 논의 자체를 금했다.
조소용과의 갈등과 법살
그해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고, 강빈과 대립관계에 있던 조소용(훗날의 귀인 조씨)이 인조를 저주했다고 강빈을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키자, 강빈은 인조에게 조석문안도 거부한다. 1646년 정월 강빈 궁 소속의 궁녀들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강빈은 이 혐의로 별당에 유치되고,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에 사약을 내려 죽게 한다.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당한다. 1646년 강빈의 죽음 이후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진다. 그곳에서 1648년 첫째 석철은 장독으로 죽고, 둘째 석린은 병으로 죽게 되며, 셋째 석견(경안군)은 숙부인 효종 때에 귀양에서 벗어났다.
강빈과 그녀의 아들들의 옥사는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일파의 정치공세성 성격이 짙었으므로 김집 등은 효종 때 경안군(강빈의 셋째 아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서인 산림 계열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 보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소현세자와 강빈의 명예 회복과 복권을 여러번 건의하였다. 이 때문에 남인으로부터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효종 즉위후 5년째 되던 해에 구언에 의해 황해감사 김홍욱은 강빈 옥사의 조작을 탄원하며 억울하게 옥사로 죽은 강빈의 신원회복과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셋째 아들 석견(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김홍욱을 국문 끝에 장살로 죽였다.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김수항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조선 숙종은 1718년 그녀의 무혐의를 인정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억울하게 죽은 지 80년 만이었다.
광명 영회원(光明 永懷園)은 사적 제35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