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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 강 문 석 -
원고를 청탁해온 문인협회의 기획의도야 모를 리 없지만 그렇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첫사랑을 얘기하기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글속이라 해도 젊은 날의 불장난으로 치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대가 자신의 애정행각이 온전히 세상에 까발려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보다도 실은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내 젊은 날의 어설픈 로맨스를 아내에게 고스란히 고해바치는 꼴이니 어찌 쉽게 써내려 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글을 시작한 것은 요즘처럼 치매환자가 득실거리는 현실을 걱정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의 첫사랑이지만 더 이상 기억에서 멀어지기 전에 활자로 남겨두려는 욕망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눈 감는 날까지 가슴에 묻어두어야 했던 비밀스런 사연인지라 머뭇거리게 된다. 자칫 신변잡기로 비치기 십상인 스토리지만 반세기 세월을 거슬러 올라야하니 이래저래 힘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앗아간 아버지로 인하여 모진 가난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아야했던 성장기의 나는 낭만적인 이성간의 사랑 같은 호사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줄로 알았다. 그러한 내게 운명처럼 소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성탄 이브의 자정 무렵이었다. 그 만남은 반백 년 전 대구의 도심이었던 시청 앞 단팥죽점에서였다. 그때의 성탄절 분위기도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땐 임시로 통금까지 해제한 때문에 청춘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비싼 땅값을 말해주듯 단팥죽점 홀은 협소해서 나는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자릴 잡을 수 있었다. 테이블은 겨우 두 뼘 정도의 네모난 탁자로 두 사람이 마주 앉기에도 협소했다. 막 주문을 하려는데 종업원이 아닌 낯선 소녀가 다가왔다. 생판 처음 보는 청년과 합석하기가 거북했던지 소녀는 목례를 보내면서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당시 대전에서 일하던 나는 성탄을 맞아 작은 선물꾸러미를 들고 초등학교 시절의 은사를 찾아 그곳에 막 당도했던 것이다.
대전에서 대구까지 걸린 열차시간이 길었던지 퇴근하여 곧장 서둘렀는데도 자정 무렵에야 닿은 것이다. 내가 굳이 시청 앞을 찾았던 것은 목적지인 종로초등학교의 인근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그곳에 있는 회사 당직실을 찾아가 하룻밤 신세를 지면서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짙은 자주색 코트에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녀는 말수가 적었고 큰 눈동자를 껌벅이면서 시종 웃는 표정만 지었다. 부산에서 온 그녀는 안강에 사는 고모 댁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그해에 졸업했고 서울의 대학을 지망했다가 낙방한 재수생이었다. 자신이 스스로 밝힌 이름은 박진영. 그러면서 진영의 집 주소를 내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화가 귀하던 시절이라 그랬던 것 같다. 당시 난 야간대학 진학을 목표로 부산 전근을 희망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맡고 있던 대형공사가 늦어지는 바람에 상사가 난색을 표해 갈등을 빚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본사에서 나의 부산행을 승인했다. 한여름 늦더위가 물러가던 8월 말이었다.
그 무렵 개인 간 연락수단은 거의가 편지에 의존했기에 나도 진영에게 서신을 띄웠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답신이 하숙으로 날아들었다. ‘부산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니 기죽지 말고…’하면서 남포동 에츄드다방으로 오라고 했다. 당시 대전과 부산의 도시 규모 차이를 그렇게 표현한 것 같았다. 불과 8개월 만인데도 서로를 몰라볼까 걱정했던지 하늘색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나오겠다는 것까지 밝혔다. 진영은 서울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해 가을 범어사 계곡을 찾아 나의 직장 동료들과 진영의 학교 친구들이 어울려 ‘라노비아’와 ‘새드 무비’에 박수를 보내며 단체로 미팅을 갖기도 했다. 진영은 학교가 파하면 광복동 입구의 클래식음악실을 즐겨 찾는다고 했다. 그런데 진영이 나와의 간극을 좁혀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그녀가 보내오던 엽서가 만들었던 것 같다. 나보다 대여섯 살이나 위인 직장의 선배는 일부러 총무과까지 찾아가서 진영의 엽서를 들고 오는 것 같았다.
선배가 나를 아껴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진영의 엽서를 그가 큰 소리로 낭송하며 사무실을 들어설 때의 당혹스러움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항상 ‘디어 강’으로 시작되던 진영의 엽서는 서로 만나서는 차마 주고받을 수 없는 낯 뜨거운 애정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문학소녀다운 면모도 보이긴 했지만 ‘밤비가 추적대는 창가엔 고독이 몸부림…’ 어쩌고 하는 식의 당시 라디오방송 전파를 탔던 ‘한밤의 음악편지’에서 자주 듣던 표현들도 빠지지 않아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그때 이미 결혼 적령기에 달했던 그 선배가 보기엔 엽서 상의 표현이 얼마나 유치하고 진부하게 보였을까. 야간대학엔 내가 원하는 학과가 개설되지 않아 훗날 편입학할 요량으로 우선 기계공학과를 선택했다. 그 무렵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엘리트 교수들은 학기 내 교과분량을 소화하느라 강의에 열의를 보이면서 전공이 다른 나를 힘들게 했다. 칠판만 쳐다보고 노트에 휘갈겨도 따라잡기 힘든 속도였다. 이렇게 쌓이는 나의 노트정리를 진영이 자진해서 도와주었다.
그것은 사무실에서도 외근 직원들의 서류들을 혼자서 도맡아 뒤치다꺼리하느라 갈팡질팡하다가 급기야는 내가 신경쇠약 증세로 병원을 찾고 난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중년의 신경과 의사는 나에게 자가 치료법을 알려주었다. 이성간의 진한 사랑에 몰입하든지 아니면 탁구나 바둑과 같은 취미활동을 해보라고. 하숙엔 가까운 시외전화국에 다니는 체신공무원들과 나의 직장 사람들이 십여 명이나 있었는데도 대범하게 진영은 내가 없는 하숙방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내가 너무 꼿꼿한 자세로 냉랭한 때문이었던지 진영은 가끔씩 자신의 옆집 남자 얘길 꺼내곤 했다. 어릴 때부터 이웃에서 함께 자란 동네 오빠라고 했다. 그 오빠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타가 선망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S대생으로 방학 때가 아닌 주말에도 수시로 부산을 찾아 자기에게 노골적으로 치근댄다고 했다. 업무와 학업으로 과부하가 된 나는 그마저도 무덤덤하게 흘려듣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어느새 나의 부산생활도 한 해가 지난 늦여름이 되었다.
꿈같이 달려온 날들 속엔 진영의 도움도 들어 있음이 떠올랐다. 땅거미가 내려앉던 옛 부산역 앞 막걸리주점에 진영과 마주 앉았을 때 뜻밖의 선물을 내밀었다. 벌써 봄에 지난 나의 생일에 주려고 만들었지만 기회를 보느라 늦어졌다고 했다. 사랑고백을 담은 ‘역에서’란 제법 긴 자작시에 부산역 야경을 그림으로 바탕에 깐 액자였다. 하지만 난 그 선물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진영은 은연 중 나와의 결혼을 꿈꾸고 있는 눈치였지만 나에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만으론 결혼이 어렵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몸뚱이 하나뿐인 궁색한 처지에다 은행대출 같은 제도마저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그보다 더 다급한 것은 곧바로 닥칠 군 입영이었고 서로 나이차가 없다는 것도 난 부적격 요인으로 꼽고 있었다. 난 그때까지 술을 마실 줄 몰랐다. 그날은 내가 선물을 받을 수 없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느라 힘들게 막걸릿잔을 기울여야 했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진영도 자신의 정성을 전하지 못하자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러면서 그날 밤 자신은 귀가하지 않겠노라고 객기를 부렸지만 불과 한 달 후면 내가 입영을 해야 한다는 말은 끝내 들려줄 수 없었다. 그러고 그해 찬바람이 선들거리던 9월 말에 난 입대를 했다. 세월은 또 그렇게 흘러 백설이 온 세상을 뒤덮은 날, 강원도 산골 원주까지 진영이 날 찾아왔다. 처음 대구에서 그녀를 만난 날로부터 이태가 지난 때에 원주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바쁘게 달려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러면서 군문에 매인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제 입대한지 겨우 석 달, 내가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한 번 더 확인하자 이틀을 쓸쓸하게 여관에서 보내고 진영은 힘없이 떠나갔다. 그러고 귀로에 신탄진에 살고 있는 언니 집에서 쓴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자신은 이제 입산을 결심했으니 더 이상 찾지 말아달라는 당부였다. 대한민국 남아라면 누구나 감당해야하는 병영생활이지만 편지를 받아들고 난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서 그 전 해에 세상에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동백아가씨'의 노랫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뒤에 의정부로 옮긴 후에도 정말 진영이 머리를 삭발하고 절로 들어갔을까가 궁금했지만 꾹꾹 눌러 참고 또 참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세상엔 동갑내기 부부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그땐 내가 진영을 잡고 있는 만큼 그녀의 앞날을 막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단념해야 한다는 최면을 수없이 자신에게 걸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고참병이 되어 나에게도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지만 작심하고 마음을 닫은 탓인지 진영에 대한 그리움은 아침햇살 만난 새벽안개처럼 옅어져 갔다.
천 명이 넘는 말기 암 환자에게 일본의 호스피스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는 것들을 물었더니 그 다섯 번째에 ‘마음에 깊이 남는 뜨거운 연애를 하지 못한 것’이란 대답이 나왔단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솔직해진다고 하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진영은 과연 어떤 사랑이었을까.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절박함 앞에서 그녀를 통해 알게 된 이성간의 사랑은 내 인생에 또 다른 삶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첫사랑이란 테마 앞에서 오랜 동안 잊고 지내던 여인을 떠올리자니 그녀와 함께했던 젊은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러면서 진영이 성장했던 도시를 떠나 오늘의 ‘강남사모님’으로 등극하기까지 삶에 쏟았을 열정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반세기 세월이 어제 같건만 우린 어느새 황혼에 이르고 말았으니 어쩌랴. 세월에 떠밀려 그녀도 지금쯤은 반백년 전 냉혈인간으로 야박하게 자신을 대해 눈물까지 쏟게 했던 비정한 남자지만 아련하게 추억으로 그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진설명]
맨 위 1965년 3월 태종대
중간 1966년 10월 원주 제1통신단 제77가설대대
맨 아래 1967년 2월 의정부 미1군단
첫댓글 회장님^^첫사랑 이야기 잘읽었습니다~ ^^
고민하신 흔적이 보입니다 그것이 더 마음을
움직이네요~ 진영씨라는 분이 매우 궁금합니다~ ㅎㅎ 수소문 해서 찾아 보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추억속에 있는 것이 좋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