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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딸이라 미안합니다(1)
ㅡ발칙한 연애사를 까발리며
깊은밤 울려퍼진 엄마의 말투는 나직하고 다정하게 둔갑했다. 거칠고 부서지지 않는 돌덩이처럼 차갑고 무겁게 나를 옭아매었다. 이제 엄마는 무당이 돼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엄마 자리를 대신해 집안에 들어앉았다. 대학 3학년,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의 일이다.
갑작스러운 말처럼 엄마가 단 하루 만에 무당이 된 것은 아니었다. 무당이 되려는 조짐이 가정 내에 우후죽순처럼 삐져나왔을 테지만 알아차리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세월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부모가 그어려운 시절을 견디며 벌어들인 돈이 한순간에 사라졌고,아빠는 몇 년 새에 머리가 두 번이나 깨지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우리 가족은 제각기 해체의 길을 걸었다. 엄마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혼이 빠진 듯 했을 테고 사 남매를 두고 떠날 결심까지 했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처녀 시절부터 수없이 꿈을 꾸었고 점쟁이들을 자주 찾아다녔다고 했다. 내가 스무 살이 넘도록 신(神)기를 누르고 눌러 살았을 엄마. 이제는 신내림 굿을 받고도 그만큼의 시간이 더 흘렀고, 이십대의 나는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었다.
무당 딸로서의 23년! K장녀 시절부터 부모 대신 정육점에 나가 고기를 썰어 팔았다. 칼질을 제법 하고 굉음이 나는 기계를 동작시켜 갈비를 척척 잘라냈다. 짝짝 소리로 맛나게 껌을 씹으며 손님들에게 너스레를 떨던 엄마. 스프레이로 한껏 앞머리를 추켜올리고 쫙 붙는 청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 부츠를 신던 멋쟁이 정육점 안주인이었던 엄마를, 나도 모르게 닮아 가는지도 몰랐다. 엄마가 무당이 되기 전부터 시작된 K장녀의 삶에서 무당 딸이 되기까지, 엄마의 아픔을 이해할 겨를도 없이 나는 묵직한 젊은 날의 상처를 먼저 파헤치려 한다.
갓 핀 꽃처럼 젊은 나에게는 같은 대학 선배인 남자친구가 있었다. 모든 처음을 함께 해준 사람, 나를 꽤 아껴주었고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무당이 된 이후로 그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물론 내가 달라졌기에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집에 처음 인사를 간 날이었다. 하필이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어색하고 냉랭한 가운데도 교양을 잃지는 않았다. ‘나를 만나기도 전에 무당의 딸이라고 말해버린 막내아들의 말이 진저리나게 싫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만 헤어지면 안 되겠느냐고. 노량진의 빨간 벽돌집 계단을 내려서면서부터 나는 눈물바람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가 옆에 있었지만 내게는 아무도 없는것과 같았다. 그로부터 일 년쯤 지났을까. 그와 나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결별했다. 그날 터미널 너른 주차장은 깜깜한 혼돈의 물결이 바다처럼 출렁였다. 나는 아무리 눈을 비비고 씻어내려도 눈 앞이 흐려와 걷기조차 힘들었다.
고향에 가려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 눈물은 눈치 없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져 내렸고 그는 창밖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개를 떨군 나는 그가 달리는 버스 앞을 막아서길 빌고 또 빌었다. 그는 결코 나를 부르지도 잡지도 않았다. 나는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흔들리며 생애 첫 이별과 고독하게 조우했다. 이후 수 년 동안 그를 나쁜 새끼, 소 새끼라고 욕을 하며 길에서 툭하면 울고 다녔다. 그와의 이별을 떠올려도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을 무렵에야 나는 그 이별이 선물임을 깨달았다. 서른이 넘어 동창회에서 만난 그를 보니 그렇게 미어지던 머리숱이 휑한 것이 아닌가. 모든 걸 차치하고라도 그건 아니 될 일, 나는 그날 그와의 모든 억하심정을 정리했다.
스물 일곱의 봄, S를만났다. 나의 두 번째 남자친구. 가난한 무당딸이 K대 수재를 만났다고 무당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교댄스 동아리의 불타오르는 열기처럼 우리는 금방 사랑에 빠졌고 그와 나는 함께 유학길에 오를 희망으로 부풀었다. S의 엄마는 무남독녀라했다. 말씨가 거칠고 툭하면 자살소동을 벌이는 이상한 여자라고 S로부터 들었다. 내가 엄마가 무당이 된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S도 자기 어머니의 성품이나 행동거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일정 부분 우리는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일테면 엄마 흉보며 다정해진 커플이랄까.
어느 날 길을 걷다 S가 배를 움켜쥐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김 여사 말이야. 내가 일 년에 한 번씩 약 털어놓고 자살소동 벌일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진짜 이상해. 글쎄, 너랑 나랑 궁합을봤는데 그 무당이 네가 과거에 애를 하나 낳았다고 그랬대. 허허허, 참나, 내가 하도 기가차고웃겨서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어버렸잖아. 김 여사 진짜 못 말린다니까.”
나는 그의 말에 더 이상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땅바닥으로 흘러내린 순간, 나는 땅을 치며 오열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란히 굳어있는 그의 구둣발을 흘끔거리며 나는 통곡했다. 급기야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고 나는 뿌리치는 척하면서도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섰을 테지만, 사실이 대목이 가장 지우고 싶은 장면이다. 벌떡 일어나 그의 뺨을 후려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오래도록 후회했다. 나는 S의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고, 자기 엄마 얘기라며 웃어젖히던 그는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S에게도 보기 좋게 차인 거다. 얼핏 보면 내가 그를 떠나보낸 것 같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홍수의 계절이 왔다. 첫 번째 이별보다 더 아프게 울며 나의 서른 살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첫 번째도 눈물바다였지만 두 번째 이별 후엔 후유증이 심각했다. 꼭 이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른 살의 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꽤 오랜시간을 우울해하고 슬퍼하면서도 또 그만큼의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아내야 했다. 그렇게도 촌구석 고향을 떠나고 싶어 상경했는데 어찌 서울 하늘 아래 내 남자는 없단 말인가! 그로부터 5년을 싱글로, 아니 노처녀로 살았다. 간간이 소개팅이 있긴 했지만 나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군인처럼 기운이 빠져 있었다. 솔로 탈출을 위한 치열한 노력 따위는 없었다.
이상하게 ‘대머리’가 연이어 소개팅남으로 등장했다.처음 만난 사람은 모든 것이 괜찮았는데 대머리였고 가발을 쓰고 있었다. 가발은 마치 봉숭아 학당의 맹구가 저요, 저요! 라고 소리를 치는 것처럼 대번 눈에 번쩍 띄었다. 같이 살던 남편이 대머리가 되는 꼴은 봐도 처음 만난 상대가 대머리인 것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더욱 황당한 건 그 대머리 아저씨가 내게 애프터를 하지 않았다는 청천벽력같은 사실이었다. 불감당의 연속이었다.
다음번 타자는 대머리였지만 홍석천처럼 시원하게 머리를 밀고 다니는 남자였다. 머리가 반질반질 빤짝거리는 남자를 가까이에서 본 건 대머리가 된 아빠 말고는 처음이었다. 우리 아빠는 젊은 시절 알랭 들롱을 뺨치는 외모였는데도 대머리가 된 후 정말 볼품없어질 정도로 대머리의 신체적 타격은 엄청났다. 대머리는 인류의 재앙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예 싹 밀어버린 민머리는 대머리보다는 훨씬 봐 줄만 했다. 그 민머리를 홍석천이 아닌 꿍따리 샤바라 클론의 구준엽으로 상상하며 데이트를 즐겼다. 건물주라던 그를 만날 수 없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대머리가 아니라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대표적 이혼 사유인 성격 차이. 인간도 동물이라서 그런 건지 나와는 어떤 인간적 교감도 나눌 수 없던 그는 나의 데이트 거절 한 방에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 후로도 소개팅은 이어졌다. 나를 좋다고 하는 남자들은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리도 매력이 없던지. 머피의 법칙처럼 내가 맘에 드는 남자들은 한사코 내게 또 만나자는 제의를 어찌나 하지 않던지. 솔로는 계속 솔로이려고 하는 관성의 법칙이라도 작용하는 건가.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몇 번 데이트를 즐겼던 항해사는(처음친구가 소개해준다고 했을 때 ‘한의사’로 잘못 알아듣고 매우 기뻐했던 나는 그저 그런 속물임을 고백한다.) 나와의 두 번째 데이트에서 게임을 하자더니 벌칙으로 팔목 때리기를 제안했다. 난 재미로 응했는데 온몸의 힘을 실어 내 가녀린 팔목을 내리치던 그 항해사에게 하마터면 욕을 날릴 뻔했다.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그다음 내게 연봉이 얼마고 모아놓은 돈이 얼마냐고 묻는 게 아닌가. 순간 그의 얼굴에 침을 뱉지 않은 건 그래도 내가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내공을 쌓은 덕분이었다.
겁없이 매력적이지 않은 인간이 다가오면 내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엄마가 무당이라는것을 비롯해 쫄딱 망한콩가루 집안사를 들이밀면 대부분 나가떨어졌다. 무당과 가난 중 어떤 것이 그를 보내버렸는지 궁금했지만 꼭 알 필요는 없었다. 남자들은 딱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내가 무당 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즉시 깔끔하게 등을 돌리는 부류와 그따위 무슨 상관이냐고 호기 부리며 시간 좀 끌다가 돌아서는 부류. 어쨌든 내게 관심을 보여준 남자들에게 무당 딸이라고 거들먹거린 것에 대해 갑자기 사과가 하고 싶어졌다.
“거참, 무당 딸이라 미안합니다.”
무당 딸이라 미안합니다(2)
ㅡ23년 차 무당 딸로서 사과해야 한다.
23년 차 무당 딸로서 사과를 해야 한다. 비로소 그것은 권장이 아닌 의무임을 알아차린다. 엄마가 신을 받고 처음에는 모든 것이 화가났다. 사과를 받는다면 그건 응당 내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을 받으러 나간 엄마의 처지를 (감히) 이해해야겠다고 울면서 글을 쓴 낮과 밤이 있었고, 부인이 하루아침에 무당이 되어버린 한 남자가 있었고, 나보다 어렸던 세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이제야 타인의 삶을 조금은 들여다볼 줄 아는, 머리가 아닌 가슴이 생겼다. 고백하건대 사과는 받아야할 것이 아니라 건네주어야 할 일이 되었다.
엄마가 무당이 되었을 때, 사남매 중 맏딸이란 이유로 총대를 메야하는일들이 많았다.스물 셋의 나는 모든 것이 원통했고부끄럽고 게다가 바빴다. 나보다 어린 동생들의 마음을 돌볼 겨를 따위는 없었다. 귀하게 태어난 막내 남동생의 처지가 참 가련했다. 세월이 지나서야 그가 얼마나 외롭고 처절했을지 짐작해볼 뿐이다. 엄마가 신을 받으러 떠난 뒤, 나는 툭하면 늦잠이 들어 남동생의 손에 라면 값을쥐어 주어야 했다. 어떤 날은 없는 솜씨로 싼 다 식어 빠진 도시락을수줍게 내밀었다. 말없이 받아 들고 나가는 남동생의 뒷모습이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얼마 전 매형들과 술을 들이켜며 남동생이 그랬다.
“난 버림받았어요.”
동생의 목소리가 내 맘을 돌덩이처럼 묵직하게 눌렀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남동생을 두고 떠난 엄마와 자기 삶에 치여 툭하면 눈물을 찍어내던 아빠에게 동생은 버림받았음에 틀림없었다. 미처 그의 슬픔을 들춰보기도 전에 각자의 아픔으로 우리는 경주마처럼 앞만보고 달렸다.꽤 오랫동안 막내는 고독을 삼키며 담배를 태웠을 테다.
둘째와 셋째 여동생은 나와 마음을 깊게 나눈 자매들이다. 어릴 때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기도 하고,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옷 쟁탈을 벌였었다. 지금은 사는 모양새가 달라도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은 지구 밑바닥에서부터 에베레스트 정상만큼 치켜 올라갈 태세다. 얼짱\사남매\단체카톡방에 일만 터졌다하면 각자 유능한 분야로 우리는 총출동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를,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한 아빠를 견뎌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나도 때로는 일탈하고 싶었다. 아빠가 사고로 머리가 깨진 날에도, 엄마가 신을 받으러 집을 나간 날에도, 난 시험공부를 했던 것으로기억한다. 징크스처럼 꼭 시험 기간에 사고가 터졌다.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난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자위해본다. 동생들의 자잘한 일탈을 보고 부모처럼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머리를 맥주로 샛노랗게 염색하고 온 여동생의 머리를 후려갈겼고, 담배꽁초를 페트병에 산처럼 쌓으며 살아가는 남동생에게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나의 야단 때문인지, 그들의 노력으로 인한 건지 몰라도 동생들은 시샘이 날 정도로 나보다 더 잘 살아가고 있다.
내가 하기 힘든 일 중 하나는 무당 엄마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일이었다. 여동생들은 수시로 점사 손님을 물어다 엄마에게 건네주는 제비들 같았다. 하지만 나는 차마 엄마가 무당이라고 홍보하지 못했다. 더구나 엄마에게 와서 점을 보라고 권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창피한 마음이 앞섰고 점사의 결과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결코 지고 싶지 않았다. 말로는 편견을 갖지 말자 했다. 무당 엄마를 당당하게 여기자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난 다분히 위선적이었다. 17년간 일한 회사의 대표에게 엄마의 직업을 숨겼다. 기독교 신자인 그에게 굳이 엄마의 종교를 알려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회사의 자금까지 담당하는 내가 가난한 집의 무당딸이라는 것을 나서서 알릴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어쩌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궁색함은 온몸에서 퍼져나갔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을 뿐이었다.
우선 과거로 날아가, 굴욕감으로 물든 스물셋의 나를 살포시 안아본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했던 답답한 마음의 끈을 훅 당겨본다. 옷고름이 풀리듯, 스스로 당겨져 나온다. 마흔여섯의 내가 스물셋의 나에게 온기 가득한 손을 내민다. 참아내느라 애썼노라고 작은 어깨를 다독인다. 가식으로 똘똘 뭉쳤던 더 젊은 날의 머리칼을 용서로 빗어준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내 가족이다. 나의 말뿐인 당당함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행동하는 번듯함을 보여준 동생들을 존경한다. 필요한 이들에게 무당 엄마의 소중한 능력을 나눠 준 그들의 정정당당함에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나의 부모. 목숨처럼 사랑하면서도 밥 먹듯이 부모를 미워했다. 어떤 날은 이래서 다른 날은 저래서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세월의 풍파 속에서 모든 것을 견뎌낸 부모가 이제야 조금은 자랑스럽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헤매고 쓰러진 날이 다반사였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사남매 곁에 건재함에 코끝이 찡해진다.
특히 무당엄마. 엄마가 무당이라서,라는 만만한 삶의 도피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힘겨울 때마다 나의 방패막이가 돼주던 무당이라는 화두는 결국 그 어떤 행위의 이유도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남매 결혼의 서막에도 무당이라는 엄마의 존재는 일말의 영향도 끼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린 둘째 여동생의 이혼에도 무당 엄마는 무관한 사람이었음을 밝힌다.
삶이 잘 안 풀리고 속상할 때마다 냉장고 위에 몰래 숨겨둔 초콜릿 과자처럼 꺼내먹은 것이 ‘무당’이라는 해결책이었다. 인생이 어떤식으로 흐트러지더라도 꽤 번듯한 명분이 되어주었다. 지금에서야 치기 어린 행동을 뉘우친다. 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한다.
무당이 대물림하듯이 아빠의 유전자도 내게 대물림되었다. 그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의 상흔이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전해진다. 엄마의 박복한 팔자가 비슷한 밑그림을 그리며 다가온다. 내 인생 최대의 과업은 무당의 대물림을 거슬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유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과 배려의 부재로 가득한 부모의 삶을 내 아이들에게 결코 대물림해서는 안 된다. 거세게 흔들리고 단단하지 못한 조상의 유전자를 도려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히려 무당이 대물림되는 것보다 결핍이 가득한 삶이 대물림될까 두려워해야 한다.
무당이 그리는 무늬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우뚝 설뿐, 누구에게도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기쁜 마음으로 고유의 인생 문양을 그려나갈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