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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879.10.18.(음력) ~ 1910.7.18.(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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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어차피 한 번 죽고 마는 것이니 왜놈과 가까이해서 죽게 될 진데 어찌 의병에 충실하다 죽어서 끝내 좋은 이름을 차지하는 것만 하겠느냐.”-[전해산진중일기](1908) 중에서-
해산 전수용(全垂鏞, 1879. 10. 18(음)~1910. 7. 18(음)) 선생은 187 9년 전라북도 임실군 남면 국화촌 호전동에서 부친 전병국과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휘(諱)는 기홍(基泓), 자(字)는 수용(垂鏞), 호(號)는 해산(海山)이다. 선생의 가문은 양반이었으나 조선시대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진안에 내려와 정착하였고 그 이후 수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향반으로 남아 빈한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선생은 불의를 보면 의기가 북받쳐 분개하는 마음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경(家耕)에 종사하는 한편, 당천 이한용(李漢龍) 문하에서 학문을 틈틈이 연마해 사장류(시가와 문장) 학문에 영특함을 보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한용은 영남의 거유(巨儒) 곽종석의 문인으로 그 부근 고을에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그가 인근의 양반 자제들을 모아 교육을 시키자 선생도 그 문하에 출입하여 학문을 닦고 원근의 유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유학의 경전 중에서도 특히 심취했던 것은 의리와 명분을 양대 지주로 하는 춘추좌씨전이었으며 월남 망국사(越南亡國史)와 같은 외국 역사와 관련된 사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선생은 성장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 호남 각지를 두루 여행하였는데 이때 호남의 명유지사들인 기우만, 기삼연, 김영엽, 오성술, 고광순, 오준선 등과 교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날로 기울어가던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구국의 방책을 모색하는 등 학문과 시국에 대한 안목을 넓히었다.
1903년 한창 열혈의 기질이 발하던 청년시절에 절의로 이름 높던 선비들인 송병선, 기우만과 면암 최익현 등이 인근 마을인 익산군의 낙영당(樂英堂)에서 회동, 강회를 베풀 때 동향인 이석용과 함께 참가하여 선비들의 우국충정에 어린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은 이러한 견문과 학식을 바탕으로 하여 사장류의 박학한 지식과 춘추대의 정신에 입각한 실천 유학자로서 성숙하였다.
이 당시 최익현은 일제가 무력과 강압에 의해 매수한 대신을 앞세워 이른바 을사조약을 늑결하는 것을 보자 곧 창의토전소를 올려 거의할 뜻을 밝히고 호남 유림지사와 문하생들을 규합하여 1906년 6월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하였다. 이때 선생은 이석용과 함께 태인에 가서 최익현을 만났으나 최익현의 의진이 전력과 전술면에서 일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빈약함을 알고 실망을 느껴 귀향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의 거두 최익현은 정읍, 순창, 남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군에 붙잡히어 대마도에서 순국(1907. 1)하였다. 그러나 위정척사의 거두로서 그 때까지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백성으로부터 추앙 받던 최익현의 창의는 선생으로 하여금 의병항쟁에 투신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 9월 기삼연, 김용구등이 전남 장성의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하자 선생은 이 회맹소의 종사라는 직책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 회맹소는 1908년 2월 공음전투에서 김용구 의병부대가 패전한 이후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이즈음 전북 임실 등지에서 이석용이 창의동맹단을 조직하자 선생은 동단에 합류, 참모로 활동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의병항쟁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 장수, 무주, 남원, 순창, 구례, 곡성 등 호남 동부지역 9개 군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도처에서 경찰서, 헌병분파소, 수비대 등의 건물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군 토벌대와도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이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3월 남원 사촌에서 일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이어 4월 진안과 임실의 경계인 대웅 전투에서의 연패로 의진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이에 선생은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기삼연 의병장이 전사한 뒤 장성부근에서 활동 중이던 김태원과 합류하기로 하고 이석용과 결별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장성에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태원이 광주 어등산에서 일본군의 흉탄에 맞아 순국(1908. 4. 25)한 후였다.
김태원 의병장마저 순국하게 되자 김태원 의진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이 의진의 일부를 거두어 진세를 확장하고 있었고 오성술이 흩어진 의병을 규합,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선생이 오성술의 의진에 참여하여 광주, 나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일시적으로 의진을 정비하고 있을 때 8척의 헌헌장부인 정원집이 광무황제의 조칙을 휴대하고 수십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선생을 찾아왔다. 정원집은 시위대 참위 출신으로 일찍이 을사늑결을 규탄하다가 국사범으로 몰려 전남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를 탈출했던 것이다.
전해산 의병장 약속문. 선생이 생존 당시에 남겨둔 필적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덕과 인륜에 관한 내용으로서, 재산을 다스림,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와 당위성, 사물의 시비(是非)를 가릴 수 있는 판단력, 이웃과의 관계, 양심을 지키는 힘, 의병 부대 내에서 상벌 기준(상, 중, 하) 등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선생은 정원집이 이끄는 해산 군인들이 합세, 의병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1908년 7월 25일(음)에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면서 “왜노(倭奴)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임진란의 화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 시국모(弑國母)는 물론이고 우리 종사(宗社)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모두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이오.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돕고 조종을 돌보아 이 적을 소탕한다면 그 날 우리들은 마땅히 중흥제일공신(中興第一功臣)이 될 것이다. 일체 폭략(暴掠)을 하지 말고 힘써 나라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죽자.” 라 맹서하여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공표하고 의병항전의 당위성을 밝힌 후 적을 치는 길에 오르게 되었다.
대동창의단은 1908년 8월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다음해 5월 의진이 해체될 때까지 10여 개월 동안 일제 군경과 70여 차례의 교전을 벌였다. 동단의 활동 지역은 호남 서남부의 곡창지대인 함평, 나주, 영광, 장성, 광주 등지였고 그 밖에도 장흥, 순창, 무안, 고창, 화순, 담양 등지에 이르기까지 활동영역으로 삼았다. 선생의 의진은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 외에도 부근에서 활약하던 심남일, 조경환, 김영엽, 김원국, 박경욱 등의 의병부대와 자주 연합작전을 펼쳤다. 선생은 신속한 부대이동과 작전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부장급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기 40~100여명의 의병을 통솔케 하였으며 자신은 평소 100~150여명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작전을 수행하였다. 총 500여명에 달하던 대동창의단의 의병은 평소 소부대 단위로 나누어 통상적인 활동을 하다가 필요 시에는 합동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의병들이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식별되면 의병들의 집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일군의 보복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훈련되지 않은 의병으로 일군과 정면 대결할 수 없다는 점 등 때문에 소규모의 병력으로 야간에 이동하며 투쟁하는 게릴라식 전법을 사용하였다. 변복한 종사나 군사들을 일군의 헌병분견소, 경찰서, 수비대의 배치지역에 은밀히 파견하여 일군의 이동상황을 미리 탐지하거나 마을 주민의 신고, 면장이나 동장을 통해서 얻은 적의 이동상황을 종합하여 은밀한 곳에 매복하여 적을 기습하였다. 또한 밀정들에 의해 의병진의 소재가 파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병들이 유지하는 곳에서는 마을 어귀에 파수를 세우고 종사원들에게 줄을 세워 계속 말을 전달하게 하는 연환식(連還式) 전달제도를 운영하였다.
전해산 의병장의 모습.
의병의 기본화기는 화승총(火繩銃)이었다. 이 총은 화승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 손으로 철환과 화약을 비벼 넣어 사격해야 하며 비가 올 때는 쏠 수 없었고 더욱이 유효사거리는 20보(약 12미터)에 불과하였다. 신식무기를 휴대한 일군과 대적하기 위해 의병진에서는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한 천보총(千步銃)을 개발했다. 더욱이 이 천보총을 일부 진에서는 자체 생산하거나 수리할 수 있었고 총탄 또한 구식 납철환을 개량하여 보룡철환(寶龍鐵丸)이라는 철탄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였다. 화승총, 개량 화승총인 천보총, 개량탄환, 화약 이외에도 일군에서 노획한 신식총을 휴대하고 있었는데 그 수효는 극히 적었다.
선생은 훈련되지 않은 의병, 빈약한 무기와 군수에도 불구하고 장성, 영광, 나주, 부안, 함평 등 당시 호남 24개군 가운데 중서부 지방을 완전 장악했으며, 일제가 무역이라는 미명 아래 미곡수탈을 자행하여 지역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광 서해를 거쳐 부안에까지 진입하여 서해를 경략, 장차 이들을 없애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선생은 정규군으로 무장한 일군에 대해 유격전술을 벌였는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의진을 주로 영광 불갑산과 함평 석문내산 일대에 주둔시켜 작전을 전개하였다. 불갑산은 서남부의 고지대이며 석문내산은 장성, 광주, 함평, 나주 등지의 평야로 둘러싸여 있는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곳이다. 이 두 지역을 근거지로 함으로써 선생의 의진은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군수품을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다.
대동창의단의 활동이 활발해질 무렵인 1908년 겨울에 선생은 심남일, 김영엽, 오성술 등의 의병장과 함께 수차에 걸쳐 호남의병 연합체 결성을 상의한 끝에 호남동의단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여러 의병장들의 추대를 받아 동단의 의병대장에 선입되었다. 이 호남동의단의 의병장들이 활동했던 지역은 전라남북도 전역을 망라하고 있었으며 선생은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활동하였다.
전해산 의병장이 쓴 8폭 병풍용 묵서(墨書). 서정적이며 유교적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의 분수에 맞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 직분·책임을 다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생은 호남지역에서 의진을 규합하여 일군과 투쟁을 벌이는 한편 가렴주구를 일삼던 지방관, 일본의 위세를 믿고 횡포하던 친일관리, 일진회원, 친일부호, 헌병보조원, 경찰 등의 횡포를 징계했다. 세금 징수원을 위협하여 친일 내각의 납세를 거부하게 하는 대신에 면장이나 동장을 시켜 마을마다 군수전(軍需錢)을 배정하되 도세로서 공평하게 가산에 따라 분배, 징수했고 해산 군인을 빙자한 무뢰배, 가짜 의병을 칭하고 살인, 약탈, 강간, 방화를 자행하던 자들을 처단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민생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수 차례에 걸쳐 헌병보조원, 순경, 일진회원, 세금징수원, 친일부호, 가짜 의병들을 상대로 경계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이들을 토왜(土倭)로 규정하고 회유하기도 위협도 하여 그 직을 그만 두도록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고 체포해서 다스리기도 했으며 심한 자들은 총살로서 징계하였다.
한편 1908년 일제는 일본군, 헌병보조원, 경찰 등을 포함하여 11,000여 명의 병력으로 의병을 토벌하더니 1909년에는 일본 본토에서 임시 파견된 약 2개 여단의 병력을 더 투입하고 4~5월 사이에 한국 주둔 헌병대의 천안 및 영산포 분견대의 관할 하에 45개소의 임시파견소를 증설하는 한편 43,000여 명의 한인 무뢰배들을 헌병보조원이라 해서 분산 배치시키고 의병토벌과 정보수집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의병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년 3월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 일군 수비대와 헌병대에 연패를 당한 뒤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탈출하였으나 의병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어 거의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주변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의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최후의 방편으로 부대이동을 결심하고 새로운 항전기지를 독립운동가들이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만주로 정하고 부하들에게 북상하자고 권고하였으나 가족의 생계문제 등 많은 난관이 있어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더구나 순종황제의 의병 해산령이 당도하자 선생은 사세가 다했음을 판단하고 마침내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심하여 동년 5월 영광 오동촌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호군장 박영근에게 넘겨주고 선생은 후사를 도모하고자 했다.
일제는 선생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탐문하는 한편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이때 선생의 의진에 출입하던 조두환이란 자가 영산포 헌병대 통역 김현규에게 밀고하여 선생은 남원 고래산(古萊山)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수개월 만에 일군 수십 명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일군들에게 “오늘이 있을 것을 이미 각오하였다. 죽는 것은 거의(擧義)하던 날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노부모와 약한 처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만나보고 떠나는 인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부모를 만나 인사를 올리고 부인에게 “지금 내가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니 부모님을 잘 봉양하기 바란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영산포 일군 헌병 분견대에 구금되었다.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후 대구 감옥소에 이감되어 대구공소원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선생은 박영근,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 등과 함께 7월 18일(음)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선생이 순국하자 그 시신을 선생의 4촌형이 운구해 와서 장례를 치렀는데 상여가 고택 앞으로 흐르는 시내를 건너자 선생의 부인 김해(金海) 김씨는 집으로 돌아와서 극약을 마시고 자결함에 상여가 다시 돌아와서 쌍상여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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