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8> 김해김씨(金海金氏)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1-05-24 21:06:34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가야 수로왕이 시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씨
수로왕 금함서 나왔기때문 김씨로 써…알지왕 신라계 김씨보다 20여년 앞서
印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왕비로 삼아…아들에 모후 성씨 내려 ‘동조동본이성’
한국의 김(金)씨는 신라계(알지계)와 가야계(수로계)로 나뉜다. 김(金)씨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姓氏)이다. 2000년 주택인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21.6%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해(2010년) 조사된 인구는 1072만명이다. 그중 신라계 김씨가 약 600만명이 넘고, 가야계인 김해김씨가 420만명(2000년 인구센서스에선 412만명)이다.
그 외 김씨 중에서 신라계도 가야계도 아닌 김씨가 있다. 이름하여 사성김해김씨다. 사성김해김씨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귀화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우선봉장 사야가(김충선)와 부장 사여모(김성인)를 시조로 하는 씨족이다. 약 20만명으로 파악되는 이들은 조선왕조에서 북방 경계를 맡겼기 때문에 북쪽에 많이 살고 있고, 남쪽에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어 우록김씨라고도 하고, 경북 청도군 이서면 구라동리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어 구라동김씨라고도 한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관,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해김씨는 한자식 성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성씨 중 하나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의 수로왕 탄생연대가 서기 42년으로 되어 있으니, 서기 65년 신라계 김씨의 시조인 대보공 알지의 탄생연도보다 23년이 빠르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한씨나 기씨, 선우씨 등에서는 고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상을 언급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조선 준왕의 세 아들이 삼한의 왕이 되었고, 그들이 자신의 시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요양고씨’나 국내 ‘횡성고씨’ 등 고씨의 일부에서는 자신들의 성관이 ‘제주고씨’가 아니라, 고구려의 고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신빙성을 부여하기 힘들다.
또 한자식 성씨를 쓴 것은 고구려에서는 장수왕 때,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이기 때문에 근초고왕의 여씨(余)가 가장 먼저이고, 두 번째가 장수왕의 고(高)씨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런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현재 고구려의 고(高)씨와 백제의 여(余)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가 없다.
다른 한편 김씨라는 성을 쓴 것은 진흥왕 때부터이기 때문에 김해김씨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즉 가야의 왕족에게 김씨의 성을 함께 쓸 수 있도록 부여한 것은 신라의 왕족이었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성씨는 신라계 김씨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수로왕의 재위기간이 158년이라는 것과 가야국이 신라에 병합된 532년(법흥왕 18년)까지의 왕이 10명에 불과할 수가 없다(평균 한 명의 왕 재위기간이 49년)는 지적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관은 김해김씨가 아니라, 경주김씨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들은 중국사서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추론하는 것이지, 역사적 근거는 없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 시조로 언급된 수로왕의 탄생연대를 김해김씨의 ‘시작’으로 본다면, 김해김씨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씨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김해김씨의 연혁과 갈래
삼국유사에서는 수로왕의 성씨를 김씨로 한 것에 대해 “수로왕이 금함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왕위에 오른 수로왕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왕비로 맞았는데, 수로왕과 왕비 슬하에 10남2녀를 두었다. 그중 태자를 통해 김씨 성을 잇게 하고, 다른 두 왕자에게 허씨 성을 주어 모후의 성을 계승케 했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출가하여 하동칠불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가야계 성씨는 김해김씨와 김해허씨(許氏), 김해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하양허씨, 양천허씨가 있다. 그리고 당나라로 갔다가 중국 황제로부터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은 고려 현종 때의 상서좌복야 이허겸을 시조로 하는 인천이씨, 양산이씨가 있다. 따라서 김해김씨, 김해허씨, 양천허씨, 하양허씨, 인천이씨, 양산이씨는 수로왕을 시조로 삼는 동조동본(이본)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해김씨는 중시조 김유신 이후 148개 파로 나뉘어졌다. 그중 경파(卿派), 사군파(四君派), 삼현파(三賢派), 그리고 문경공파(文敬公派)가 가장 많다.
경파는 김유신의 직계손인 김목경(金牧卿)이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지면서 생겨났다. 사군파는 목경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고려 말에 예의판서, 대제학에 오른 김진문(金振門)과 조선시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김완(金完)이 유명하다. 그리고 삼현파는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파로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때 참수당한 김일손(金馹孫)과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가 유명하다.
하지만 김해김씨에 대한 논란도 없지 않다. 즉 한자식 성을 쓰지 않았던 가야시대에 김씨(金氏)와 허씨(許氏)를 나누어 쓰게 되었다는 기록을 믿을 수 있는가이다. 또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가 한자식 성명인 허황옥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 전래가 한참 후의 일인데도 7왕자가 출가를 하여 성불하였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해김씨 일족이 신라와 고려조를 지나면서 일부가 허씨 성을 얻거나 이씨 성으로 변성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역사적 부침(浮沈)이 심했던 김해김씨
김해김씨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부침이 많았던 성씨 중의 하나이다. 가야의 왕족으로 출발해서 신라에 병합된 후 무력, 서현, 유신 3대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래서 김유신은 흥무대왕에 추존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통일신라 하대에는 신라계 김씨의 차별에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삼국사기 기이편(紀異篇)에는 [혜공왕 15년 4월,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어 미추왕릉으로 불어갔다. 얼마 뒤 무덤이 진동하며 김유신 혼령이 호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지난 경술년 신의 자손들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군신이 저의 공렬을 잊음이라,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습니다”고 말해 미추왕의 혼령이 ‘대의가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자, 김유신 혼령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미추왕은 신라계 김씨를 상징하는 것이고, 김유신은 가야계 김씨를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혜공왕은 김경신(金敬臣)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 대신 사과하고, 공덕보전을 취선사에 내려 김유신의 명복을 빌게 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김해김씨는 많은 문무명신을 배출했다. 고려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과 명신 공신 10여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을 배출하여 위세를 떨쳤다. 그래서 김해김씨는 삼한 갑족의 하나로 명성을 드높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김해김씨 가문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역대 정승에서도 숙종조의 김우항(金宇抗) 한 사람뿐이었다. 삼한 갑족으로 명성을 떨치던 김해김씨 문중이 조선시대 쇠락을 면치 못한 것은 무오사화 등 많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인구가 가장 많은 성관답게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특히 조선 말기나 일제 강점기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정관계는 물론 재계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인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인물들
김해김씨의 인물로는 수로왕을 비롯한 가야의 10왕이 있다. 수로왕-도왕-성왕-덕왕-명왕-신왕-혜왕-장왕-숙왕-양왕(구형왕)이 그들이다. 구형왕의 아들은 3명이 있었는데, 첫째가 세종이고, 둘째가 무득, 셋째가 무력이다. 그중 무력은 신라의 각간을 역임하고 혁혁한 무공을 세웠는데, 그 아들이 서현(舒玄)이고, 손자가 유신이다.
김유신(金庾信)은 김해김씨의 중시조인데, 동생을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에게 시집보내고, 그의 딸(지소부인)을 부인으로 맞았다. 성골에서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자, 매부인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에 세웠으며, 태종무열왕·문무왕와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 후 42대 흥덕왕에 이르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동생 흠순(흠춘)은 문무왕 대에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였으며,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때 대당총관이 되어 큰 공을 세우고 각간이 되어 나라를 평안케 했다.
김일손(金馹孫)은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사초를 썼다. 하지만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하고, 상소하여 원한을 샀다. 그러다가 세조의 왕위찬탈을 규탄하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실었다가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의 모함을 받았다. 그로 인해 발생한 무오사화로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고, 김일손은 참수(斬首)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 목천의 도동서원과 청도의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김홍도(金弘道)는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로 판화를 그렸다. 풍속화를 많이 그렸으며, 조선의 3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대건(金大建)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神父)이다. 세례명은 안드레이고, 아버지는 기해사옥 때 순교하였다.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영세받고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필리핀으로 건너가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천주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교세 확장에 진력하다가 1845년 상하이에 가서 한국인 최초로 신부직을 받았다. 그 후 청나라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25세 나이로 사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김대중(金大中)은 김해김씨 경파의 한 갈래인 안경공파의 사람으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 되었다.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후 1960년 민의원, 6·7·8·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1·1987·1991년에는 신민당·평민당·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낙선했다. 1997년에는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과 후보단일화에 성공하여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집권 후 국가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김해김씨 문중에는 김종필(金種泌) 전 총리(전 자민련 총재)와 김형오(金炯旿)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김기춘(전 법무부장관), 김성기(전 법무부장관), 김근수(전 국가보훈처장, 전 국회의원), 김상현(전 국회의원), 김성곤(전 국회의원, 쌍용그룹 창업주), 김영배(전 국회의원), 김용갑(전 국회의원), 김무성(국회의원, 전 한나라당 원내총무), 김부겸(국회의원), 김홍신(소설가, 전 국회의원),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 김혁규(전 국회의원, 경남지사), 김중권(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종곤(전 해군참모총장, 전 국회의원), 김정길(전 행자부장관, 전 국회의원)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