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년전 나라잃은 억울한 세상이였지요, 절대 잊어서는 안될것 입니다 2월14일 발렌타인 데이를 더 생각하게 되는것이 안타 깝네요 올해는 광복 70주년의 해 안중근의사유묵 <->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安重根義士遺墨 <->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 ||||||||||||||||||||
해제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서 가시가 돋아 남 제가 소장하고 있는 안중근의사의 유묵은 분명 인쇄가 아닌 묵으로 書 하셨는데 < 묵인지? 인쇄인지 혼동이 매우 심함 ㅠㅠ> 인쇄본으로 잠정 추정 했으나 진품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니 저의 소장 유묵은 제가 알고 계신분께 서체를 문의 하니 안의사님의 필체를 따라한 임서라고 말하시더군요 부족한 저의 눈에는 같은 필체로 보고 인쇄하여 인쇄본 위에 묵으로 덧칠하지 않았나 생각 했는데 임서본이라고 하니 혼동이 되네요 회원선생님들이 보시는 보물 569-2호 안의사님의 친필유묵과 제가 소장하고 있는 안의사님의 유묵 임서본의 서체에 대해 한말씀 해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설마 이런 유묵을 안중근의사께서 몇장 書 하실 일은 만무 한듯 합니다 특이한것은 안 의사님의 손바닥 장인(掌印)의 각도가 인쇄가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찍었는지도 의문 이네요 안중근의사님의 임서본이지만 (추정) 안중근의사님의 유묵이니 끝까지 소장할 생각이다^^ ==========================================================================
안중근의사유묵 -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에 대한 설명입니다.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ㆍ지정한 것이다.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을 나타낸 것, 세상의 변함을 지적한 것, 일본에 경계하는 것, 이밖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유묵 대부분은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그중 제569-21호는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여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사람[절전독(折田督)]이 받은 것으로, 8ㆍ15 광복으로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절전간이(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고, 그것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 또 569-25호는 안의사 수감 당시 여순감옥에서 경관을 지냈던 이의 손자 [팔목정징(八木正澄)]가 2002년 10월에 안중근의사 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또 제569-22, 23호는 앞쪽에 “야스오까 검찰관에게 증여한다(贈安岡檢察官)”라고 적었듯이 당시 관련했던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 내용출처 문화재청-
|
첫댓글 감사하는마음 전합니다...
좋음말씀 감사 합니다
행복하고 평안한 날 되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2.14 16:2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2.16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