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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묵상글 ( 연중 제3주일. - 때가 찼습니까? 아직 덜 찼습니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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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때가 찼습니까? 아직 덜 찼습니까?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저에게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복음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즉시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 기쁜 소식이 아닌 사람도 즉시 회개하라!
사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그 생활을 그대로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죄입니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어떻게 그 생활을 하는 겁니까? 자기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사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는 행복 정도를 삽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행복을 사는 이유가
불행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정말 불행하기에 불행하지 않다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행복이란 만족 상태이기에 행복하지 않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만족하는 것도 궁색하지만 행복의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지 않은 것이 행복입니까?
이 정도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은 현명이지만
불행하지 않은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고
그래서 현명하고 자기 인생에 책임감이 큰 사람은 즉시 ‘행복 회개’
다시 말해서 불행한 삶을 회개하고 행복을 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일반 사람도 이러해야 한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더 그래야 합니다.
일반 사람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 것이면서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일반 사람처럼 살았을 땐 행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행복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믿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태중 교우였지만 한동안 다른 철학과 다른 종교를 기웃거린 사람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왜 굳이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방황하고 편력을 한 십 년 하다가 그리스도에게서 답을 찾았고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교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저의 인생철학은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가 아닙니까?
왜 행복하지 못하고 왜 행복에 조건이 있습니까?
무조건 행복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만 내게 있다면.
하느님 나라가 없는 것이 불행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하느님 나라가 자기에게 아무리 가까이 왔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시 얘기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아닌 사람,
그래서 복음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주님께서 부르셔도 즉시 따라나서지 않는 사람은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의 니네베 사람들은 즉시 회개한 사람들이고,
복음의 첫 제자들도 주님의 초대에 즉시 응답하여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미뤄서는 안 되고 즉시 뭔가 해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행복의 때가 찼습니까?
나의 행복의 때는 아직 덜 찼습니까?
행복을 미루겠습니까? 즉시 행복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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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오심은 회개와 복음을 믿는데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가 먼저 선행됨을 말합니다. 회개란 죄스런 생활 태도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길을 바꾸다’, ‘돌아오다’라는 뜻으로 구약 시대에는 악을 피하고 하느님께 향하는 행위, 생활 방식을 바꾸어 생활전체에 새로운 방향으로 설정하는 행위를 말하였습니다. 신약에서도 회개는 불신을 버리고 신앙을 가지며, 죄를 끊어 버리고 덕행을 실천하는 전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회개는 자신의 전 생명을 하느님께 내맡기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근본적 결단이요, 엄숙한 선택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를 회개, 회두, 회심, 참회 등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하느님의 은총을 위해 이루어지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제 1독서에서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여 삶을 변화시키게 했던 것은 먼저 자신이 생각과 행동이 변화되는 회개를 몸소 체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 또한 자신의 회개 체험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행동이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잠시 지나가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적인 것,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며 세상의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생계기반이 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들의 근본적인 행동변화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으로 회개의 본질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표현은 언뜻보면 즉흥적인 행동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영원한 삶을 갈망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변화를 일상안에서 늘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순간은 고기를 낚고 그물을 손질하는 그들의 일상적인 삶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고기를 낚으면서 갈릴래아 호수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면서 영원히 변치 않는 하늘나라를 늘 갈망하고 있었고 그물을 손질하면서 근본적인 복음적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부르심에 깨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 또한 제자들의 모습처럼 평범한 일상안에서 삶의 모습에 충실하고 몸은 잠시 지나가는 세상에 있지만 마음은 늘 영원히 변치않는 것을 바라보며 새로운 삶에 늘 깨어 준비하는 회개의 삶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생이 바뀌는 회개여정을 걸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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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체브레로( Cebrero) 고개에서의 성변화(聖變化) 기적
스페인 -13세기
13세기 베네딕토 수도원 원장의 하인, 바야 마이어는 체브레로 언덕의 농가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신앙심이 매우 깊어 하루라도 미사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는 매일매일 성당에 나갔다. 어느 혹독한 겨울날, 사방 온천지에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을 때, 수도원의 보좌신부는 성스러운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아직 밖에서는 여전히 심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 신부가 성체축성의 말씀을 봉독하여 이로써 빵과 포도주를 진짜 살과 진짜 피로 변화시켰을 때 그는 누군가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깜짝놀랐다. 다름아닌, 바야 마이어 농부였다. 그는 미사전례 때 모습을 나타내시는 주 예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 심한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성당까지 눈보라를 헤치고 온 것이었다. 신부는 이 열정적인 농부의 신앙심에 기뻐하지는.않고, 오히려 그러한 희생을 각오한 용기를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중얼거렸다.
“정말 바보같으니라구. 누가 이런 눈보라에 이까짓 작은 빵 조각과 포도주를 보기 위해 성당에 온단 말인가! "
그가 이렇게 말을 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눈 앞에서 성체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숭고한 기적으로써 이 농부의 성체에 대한 믿음에 축복을 내리신 것이고, 또 자만하고 의혹을 품은 그 신부를 회개시키려고 하신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기적은 성 야곱의 순례자들에 의해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주 예수의 몸으로 변한 그 성스러운 성체는 200년 이상 성반(聖盤)에 담겨져 보관되었으며, 주 예수의 피로 변한 포도주는 기적을 일으킨 그 성작에 담겨져서,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 이사벨과 그녀의 남편 페르난도가 15세기 말경에, 체브레로 고개에 있는 수도원을 방문하여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을 때까지 보관되었다. 그들은 경건하게 이 기적의 성유물을 숭배하였다. 그리고 이 군주는 신하와 함께 산티아고의 콤포스텔라를 순례하기 전에, 주님의 몸으로 변한 성체와 공경해야 할 그 가치에 합당하도록 하기 위해, 베네딕토회 수도사에게 성유물함을 보냈다.
수도원 연대기 편찬자 옙스(Yepes) 신부는 17세기 초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비록 합당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그 기적을 내 눈으로 직접보고, 경배하였다. 나는 그 성유물을 자세히 바라다보았다. 한 성유물함에는 거의 마르지 않은 주님의 붉은 피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성유물함에는 말라 있었지만 아직도 피가 묻어 있는 주님의 살이 있었다.”(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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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오늘은 연중 제 3 주일입니다.
한편, 1월 21일인 오늘은 성녀 아녜스 축일입니다. 저희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있어, 오늘은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1313년, 지금으로부터 710년 전에 이탈리아의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도시 시에나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심오한 열정에 사로잡혀” 늦깎이 40대 귀족청년들 3명이 고대의 수도승들이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아 사막으로 떠났던 것처럼, 약 35km 떨어진 아꼬나 계곡으로 떠나와 기도와 고독 속에서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였습니다.”(안토니오 다 바르가의 연대기). 그로부터 6년 후에는 감명을 받은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교황으로부터 파견된 조사관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레쪼 교구장의 인가를 받아 1313년 3월 26일에 <몬떼 올리베또의 성 마리아 수도원>이 창설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급속도로 성장하여 31년 후에는 15개의 공동체가 창설되었고, 그리하여 1344년에 1월 21일 교종 클레멘스 6세에 의해 <베네딕도회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연합회(congregatio)>회”로 인준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703년 전,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그래서 미사 후에는 마침성가 대신 “사은찬미가”(떼데움)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제2독서> 말씀도 바로 이 하늘나라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둘째>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회개와 믿음에 대한 요청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바로 이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셋째>는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시고 줄곧 준비해온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이요, 목표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이 “나라”는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와 있다’는 말씀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루가 11,20 참조).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회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곧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바꾸되, 나아가야 할 목적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곧 ‘~어디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와 함께, ‘~어디에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결국,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회개”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 역시, “하늘나라”라는 “복음”을 ‘믿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임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회개하여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듯이, 이제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당신께로 부르신 이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당신께 “오너라.”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서 “떠나” 당신께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가는 길을 “따라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함께 데리고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데리고 함께 “하늘나라”로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을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고 있던 것, 의지하고 있던 것, 배도, 그물도, 삯꾼도, 아버지도, 모두 버려두고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바로 이 ‘따라나서는 것’이 회개의 실천적인 모습이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 “버림”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보다 더 큰 가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위한 배나 그물보다도, 또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아버지보다도 더 값지고 중요한 “그분”을 향하여 믿고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려야 하는 이유, 곧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버리는가?’ 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향하여 있고,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따라 나선 ‘자신을 따르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지’,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 와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라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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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부르시면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은 일상 안에서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시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부르시면‘나’ 달려가지요.
하던 것 멈추고, 있는 것 버리고……
님께서 부르셨으니‘나’ 응답하지요.
두려움 버리고, 망설임 없이,
임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예’하며… -홍요한-
예수님께서는“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마르1,18-19).
소중한 생계 수단인 배와 그물을 선뜻 버리고 심지어 아버지를 남겨둔 채 따라나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가진 바를 서로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친교를 나누었던 초대교회 공동체 역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습니다(사도2,47). 아마도 그들의 발목을 잡는 복잡한 계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따라보자! 그들은 따름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기쁨,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버렸기 때문에, 낚인 것이 아니라 낚였기 때문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사람에게 '성당가자'할 때 어떤 매력을 줄 수 있을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것이 바로‘기쁜소식’, 복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임금이 되시어 당신의 주권을 펼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주권은 권력을 마구 휘두르거나 군사적, 물리적 강력한 힘과는 다릅니다. 그분의 강력한 힘은 자비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한 상태, 곧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고통을 없애주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시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그 사실을 알리는 것 또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병고와 악령과 같은 악한 세력의 속박에서 해방해 주심으로써 강력한 하느님의 자비가 이미 당신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데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생각을 바꿔라. 불의한 기존 질서를 따르지 말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태의연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 통독을 통해 가르침을 듣고, 성체 조배를 하며 그분 안에 머무르고, 신앙의 기쁨을 선포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은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온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 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천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2,17). 따라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남겨두는 것은 편안함과 안전, 기득권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앞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사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루카9,6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주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그물을 버리듯, 아버지와 삯꾼과 관계를 끊어버리듯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4,23-24).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것은 좁은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더운 여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래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를 모르는 것은 그 한 가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내 안에 갇히면 다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예수님의 잣대로 나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내려놓는 만큼 주님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삶의 현장에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믿음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당신의 뜻을 실천하길 원하시며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그분 마음에 드는 답을 해야 하겠습니다. “일단은 따라보자!” 매 순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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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서 한국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습니다. 자막은 영어로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았는데 미국에서 한국영화를 영어자막으로 보니 조금은 생소했습니다. 한국영화 ‘노량’도 곧 개봉한다고 합니다. 서울의 봄도, 노량도 역사적인 사건에 재미를 더한 영화입니다. 서울의 봄은 45년 전의 사건이고, 노량은 426년 전의 사건입니다. 서울의 봄에 저는 서울에 있었지만 노량해전은 제가 태어나지 않았던 먼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봄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과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권력을 얻으려고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이 승리했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얻어 호사를 누린 사람들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부당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군인의 길을 걸었던 이들의 애국심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생 갈 것 같았던 권력도 10년이 못 되어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백담사로 유배를 가야 했고, 내란 음모죄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서울의 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몰입감이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의 봄’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칼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고, 중풍병자는 일어나 걸었고, 눈먼 소경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치유되었고, 죄인들은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 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자비를 베풀면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쉽게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의 봄은 오지 않았음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사이와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없앨 음모를 꾸몄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인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끝났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삼일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는 놀라운 소문이 돌았습니다.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군인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들풀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두려움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제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에페소, 고린토, 갈라디아로 봄은 퍼져나갔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도 봄이 시작되었고, 240년 전에 조선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도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봄이 시작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내 마음의 봄에는 꽃이 핍니다.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내 마음은 언제나 화사한 봄이 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그날처럼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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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주님이 부르니까 제자들이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들을 하느님의 사도라 부르고 그들은 축복된 사람이라 말합니다.
착하디착한 사람, 주님과 함께 사랑을 베푸는 사람, 열정적이고 선한 사람, 반면 언제나 냉혹하게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 칼 같은 마음으로 악을 단죄하는 사람. 주님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매몰차게 돌아설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부드러움 속 강함을, 뜨거운 열정 속 차가운 냉철함을 지닌 사람, 그들이 사도입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사도들의 모습에서 그 말의 의미를 다시 금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오늘 선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합니다. 세상이 아니라 주님을 선택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이란 단어는 양면을 지닌 칼과 같습니다. 선택된 것이 있는 반면 선택되지 못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얻은 것이 있다면 내가 버린 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쪽을 항상 선택하며 사는 삶이 바로 회개의 삶이고, 그 삶을 믿고 의지하고 그곳에 하늘나라가 있음을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기도할까 말까? 성당 갈까 말까?
그런데 선택은 때로 아픔을 동반할 수도, 매몰참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매몰차게 그랬듯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언제나 내게 평화를 가져다주거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분해도 참아야 할 때도, 바보처럼 보여야 할 때도,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버려야 할 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길을 걸어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고 있는 신앙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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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니까 그 정도 하는 거야
공중화장실 안에 쓰여있는 말입니다.
너니까 그 정도 하는 거야.
짧은 이 한마디가 힘을 줍니다.
나 자신을 탓하지 않고
응원하는 모습이 좋습니다.
오늘은 다른 기도나 바람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너니까 그 정도 하는 거야
잘했어. 아주 잘했어.
마음 저 한구석이 따뜻해질 거예요.
마음 저 한구석이 빛나기 시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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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종종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빌려 보곤 했습니다. 형제가 육 남매나 되기에 만화가게에서 책을 보는 것보다 빌려 보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화책을 보다가 화날 때가 있습니다.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긴장하며 만화책을 보게 되는데, 누군가가 어느 인물의 얼굴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범인’이라고 적어 놓은 것입니다. 소위 ‘스포일러’를 한 것입니다. 결과를 알고 나면 이 만화책이 그렇게 재미있지 않습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만화책을 긴장하며 읽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찢어져 있는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으니 만화책 보는 재미가 역시 떨어집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미래를 미리 알면 어떨까요? 사실 우리는 미래를 미리 알면 행복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하고, ‘오늘의 운세’ 같은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드는 삶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삶이라면 과연 재미가 있을까요? 또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일 때, 이 시간이 훌쩍 지나갔으면 하지요. 이렇게 시간이 지나간다면, 이 역시 재미없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를 미리 알려는 노력보다는 지금에 충실하도록 더 힘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고통과 시련 역시 나에게 중요한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임을 기억하면서 피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시간이 나의 삶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삶도 사랑해야 할 삶이며, 지금에 충실할 때 멋진 미래가 내게 주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때가 찼고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주 ‘나중에~~’라고 말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아직도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뒤로 미루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라는 결정적인 순간 역시도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시간이 가까이 왔기에 우리 모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지금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기쁜 소식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보다 더 깨끗한 상태, 바로 회개해서 주님의 곁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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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슴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자. 결국 나는 내 안의 나와 살아가는 것이다(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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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새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것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의 일터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
죄는 마약과 같아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마비시킵니다. 만일 새로와지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체를 보고, 자신의 죄를 보고, 그 위험을 인식해야 합니다.
니네베 백성들은 요나로부터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도시가 무너진다는 하느님 말씀을 믿고 한치의 망서림도 없이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고 회개를 했기에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반성과 회개는 마치 마음 깊이 숨겨져 있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 불이 밝혀진다면 마음 속 깊이 꼭 꼭 숨겨놓은 아주 작은 죄라도 환히 비춰 들어내 줄 것입니다. 반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깊게 파묻혀버린 죄와 양심을 캐내는 과정입니다.
회개
죄를 깨닫게 되면 소극적이었던 마음은 적극적으로 변하여 바로 행동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동안 무관심했던 쓰레기가 가득한 집을 더럽다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회개는 더러운 집을 청소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영혼에 낀 먼지와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의사가 종양을 제거함으로써 암을 차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가 강렬할수록 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집니다. 깊이 회개할수록 영혼은 더욱 더 빨리 부활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깊이 반성한 타오 단은 끊기 어려운 마약을 끊었습니다. 니네베 백성들도 노인부터 아기까지 모두 죄의 길을 버리겠다고 단식을 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영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준비
회개는 새로운 삶을 약속합니다.
회개란 과거의 구부러지고 낡은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회개의 영혼은 과거의 잘못을 고침으로서 새롭고 밝은 미래로 향하는 결단을 하게 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도 새로운 길을 떠나기 위해 자신들이 머무르고 소유했던 가족과 재산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 새로운 길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며, 형제 자매를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영적인 삶을 맺게 해 줍니다. 그 새로운 길을 걷다보면 다가 올 주님의 왕국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걷다보면 나의 형제자매에게도 주님의 왕국에 도달하는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운 희망을 가집니다. 새로와진 영혼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영혼을 새롭게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결심을 한다면 주님의 은총으로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정확히 알 수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 인도 속에 참으로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십시오.
주님, 우리의 모든 것이 새로와질 수 있도록 인도해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교황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어려운 분이십니다. 높은 곳에 있는 당신을 만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어느 만큼 가고 있습니까?
2. 삶을 새롭게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고집과 편견, 자기애, 자만 폐쇄적인 마음 등 무엇입니까?
3. 새해에는 나를 돌아보며 버리기 어려운 습관 한 가지를 버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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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悔改)의 여정, 귀가(歸家)의 여정
-‘하느님의 나라’ 꿈과 실현-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자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9월 20일에 매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낼 것을 선포하였고, 교회는 이날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1월18일부터 1월25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 우리 가톨릭교회는 일치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일치주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고백하지 않습니까? 바로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가난도 아닌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빛인, 영원한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말씀공부와 실천뿐임을, 평생 주님의 학인이, 말씀의 학인이 되어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을 정의하면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오늘 말씀의 주제도 회개가 중심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꿈도 실현되며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꿈이 없으면 살아있다 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이 있어야 힘도 샘솟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꿈을 희망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꿈중의 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꿈이요, 예수님이 평생 추구했던 바가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하느님의 꿈쟁이였던 것처럼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꿈은 예수님의 평생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겨울철 1월이 되면 생각나는 26년전 써놨던 “봄꿈”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화장실에 들렸다가 창문밖 하얀 눈덮인 언덕을 보며 떠올라 쓴 글입니다. 이 시를 써놓고 그해 겨울은 참 따뜻한 마음으로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눈 덮여 있다
흰눈 덮인 하얀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봄꿈이 상징하는바 파스카의 꿈,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이와 더불어 24년전 “별꿈”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꾸며 잠못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을 상징하는 별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화두이자 평생꿈이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회개를 통해 실현됩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예수님의 선포를 요약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현재성을 띄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오늘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될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 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tual...the more real)”란 말마디입니다. 하늘 높이 나뭇가지들 올라갈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참으로 진짜 꿈과 희망의 이상주의자일수록 현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시한 참된 영성가들은 모두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 나라가, 결코 죽어서 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서, 또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심으로 현실화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나라 꿈의 현실화입니다.
복음의 네 제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공동체인 여기 수도공동체도, 우리 신자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도 역시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의 내적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이들 형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이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 중심의 제자공동체, 하느님 나라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예수님의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바야흐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할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제1독서의 요나입니다. 요나의 회개에 선포에 즉각 응답하여 살아난 니네베 주민들입니다. 이들의 전격적 회개가 회개의 모범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부였다가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이들이 전격적으로 주님을 따라나서는 모습이 그대로 니네베 사람들을 연상케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응답보다 더 좋은 회개의 표현도 없습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갈릴레아 호숫가에 살던 네 어부들이,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삼 부르심의 은총은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만약 세례로 부르심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은 정말 부질없는 상상인 것이지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했습니다. 회개는 바로 전격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전환을 뜻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여정중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충실히 한결같이 따를 때 하느님의 나라 꿈도 더욱 현실화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제가 즐겨 일컫는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위한 회개의 시스템같은 하루 일과표의 중요성 강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회개의 시스템 같은 기도와 일이 균형을 이룬 일과표에 충실함이 우리의 성소를 굳건히 하면서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 기여를 하는지 요즘 깊이 깨닫습니다. 비단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공동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기도와 일이 균형잡힌 회개의 시스템 같은 일과표의 준수입니다. 참으로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나라 꿈의 현실화에 이보다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귀가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여기 지상의 장소가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잠정적으로 지상에 머무르는 순례여정중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보면 회개의 여정이자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중인 순례자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온전한 실현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와 더불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고맙습니다. 회개의 여정에,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지상 삶에 집착하지 말고 참으로 초연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래야 참으로 너그럽고 관대하고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처럼” 살자는 것입니다. 솔직한 것이 다 좋은 것도 아니니 담아둘 것은 담아둬야 합니다. 이건 위선이 아니라 고귀하고 품위있는 삶의 절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아파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슬퍼도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자취없이, 흔적없이, 가볍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매임없이 자유롭게 무공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쓰레기도 훨씬 적게 내고 살것입니다. 바로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것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라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맑은 의식으로 깨어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수렁에,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러니 지상의 순례자로서 회개의 여정에, 귀가의 여정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 나라의 꿈을 현실화하며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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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6-17)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라네
일터에서 땀 흘리는 노동자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노동자라네
가족에게 헌신하는 엄마아빠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돌보는 엄마아빠라네
꾸밈없이 해맑은 어린이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밝히는 어린이라네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북돋우는 젊은이라네
여태껏 세상을 돌본 늙은이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품는 늙은이라네
오롯이 제 몫 다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살맛나게 하는 사람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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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연중 제3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십니다.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두 번이나 '곧바로'라는 표현을 보여줍니다.
한 번은 시몬과 안드레아의 행동을 묘사하고
다른 한 번은 예수님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이 단어는 어떤 일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그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시몬과 안드레아는
즉시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자
즉시 그들을 부르십니다.
두 행동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없는 것은
철저한 순명처럼 보이지만
생각이나 판단이 없는 무모한 행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시몬과 안드레아의 경우
그물을 버리는 것은
생계를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평생 살아왔던 생계 수단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을 맡깁니다.
예수님의 경우 당신이 가지신 신적 능력으로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자마자
그들을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비록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들을 알아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아의 경우를 다시 보자면
부르심의 순간은 선택의 순간입니다.
즉 선택의 순간에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신중한 선택을 위해서는
숙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두 제자의 모습을
우리 삶에도 적용하기에는
그래서 우리도 즉시 즉시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사전은 '곧바로'라는 단어에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라는
또 다른 의미를 덧붙입니다.
여러 어려움 때문에 즉시 결정하기는 어려워도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하나에만 집중해서 고민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그것보다 더 좋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소위 말하는 저울질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더 좋을까
저것이 더 나을까 고민합니다.
하나만 놓고 고민하기에도 벅찬데
둘 셋을 놓고 고민하기도 합니다.
고민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하느님께 응답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들을
우리가 점점 더 놓치지 쉽다는 것입니다.
고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선택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민이라는 영리한 방법이
오히려 영리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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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매일미사ㅣ유재선 안드레아 신부 집전
https://youtu.be/vdE65fafulk 44:31
cpbcTV가톨릭콘텐츠의모든것
2024. 1. 21.
2024년 1월 21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매일미사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강론 주제: 기다림
14:40부터 22:45까지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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