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최근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해 추진중인 나가사키현의 하시마섬(端島). 이 섬에서 탄맥이 발견되면서 1890년 미쓰비시사는 섬을 사들여 매립공사를 통해 현재 규모의 인공섬으로 만들고 탄광개발을 하였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지원위원회)는, 이 탄광에 많게는 800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했다. 그리고 강제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조선인은 122명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할린에서 온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 머나먼 북쪽에서 왜 이곳까지 왔을까? 그리고 사할린에서 온 조선인들은 일본 땅에서 해방을 맞이한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사할린에서 일본 본토로, 이중징용
▲ <사진설명 : 사할린 한인문화센터 마당에 있는 이중징용 피해자 추모비> © 최상구 | | 필리핀에서 버마까지 전선을 확대했던 일제는 전쟁수행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대책을 강구한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대대적인 식량공출과 학도병 등 징병과 강제징용 등 인력충원을 실시하였고, 일본 본토와 사할린 등지에서는 산업현장의 효율적인 생산과 인력관리를 위한 통폐합, 노동력의 재배치를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할린의 주요 탄광도 휴,폐광되었고 여기에 있던 노동력을 일본 본토로 재배치하게 된다. 이에 따라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도 일본 본토로 이동하게 된다. 즉 이중징용(二重徵用)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환배치’라 표현한다.)
1942년부터 태평양에서 일본해군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는데, 1944년 마리아나 제도에서의 패배는 일본 패전의 분수령이 되었다. 1944년 7월 일본의 작전계획은 방어선의 사수였다. 본토 북쪽 방어선을 치시마(쿠릴열도) 및 홋카이도로 설정하고, 사할린이 최후 방어선에서 제외되었다. 이것은 1944년 8월 11일 일본 각의에서 ‘이중징용’을 결정하기 보름 전이었다.
또한 수송선의 부족과 연합군 공격 등으로 사할린에서 일본으로의 수송이 어렵게 되었다. 1944년 8월에 이르면, 에스토르(현 우글레고르스크)지역으로의 운항이 전면 중단되면서 생산한 석탄의 출하가 안되고 계속 쌓여가자 이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였다.
그리고 사할린 탄광 개발 당시 일본은 사할린 탄광개발 기업들에게 세 가지의 보조금(석탄증산 장려금, 석탄신갱개발조성금, 석탄매입가격 보상금)을 지급하였는데, 전쟁수행을 하면서 이러한 보조금 지급의 효율성도 고려해야 했다. 즉 보조금 지급에 비해 생산성이 낮은 탄광들에 대한 폐광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1944년 8월 11일, 일본 각의가 ‘화태(사할린) 및 쿠시로(홋카이도에 위치) 탄광 근로자, 자재 등의 급속 전환에 관한 건’을 결정한다. 총 26개 탄광 중에서 에스토르(현 우글레고르스크) 이북 14개 탄광을 휴,폐광하고 일본인 6천명, 조선인 3천명에 대하여 이중징용을 실시하였다. 지원위원회에 의하면 실제 이중징용 인원은 3천191명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3천여명 중 가족이 있는 인원은 1천 여명이며 가족의 수는 약 3천 5백여명이었고, 나머지 2천여명은 단신자(單身者)였다.
그해 8월 19일부터 21일 사이에 징용령이 전달되고, 25일부터 출항하여 9월 16일까지 일본 본토에 입항했다. 이토록 징용이 일사 분란하게 이루어진 것은 삼엄한 경비와 관리, 감시 속에서 가능했다. 작업장 배치 원칙은 동일한 계열회사였으며, 지역은 후쿠시마, 이바라키, 큐슈(후쿠오카, 나가사키)였다. 또 도착 직후 작업에 임할 수 있도록 침구, 일용품, 작업복, 갱내모, 회전지 1식 등 일상작업용구를 지참하도록 하였다.
혹독한 노동, 또다시 겪게 된 이산(離散)의 아픔
▲지구촌동포연대가 해마다 실시한 사할린 동포 면담 중 확보한 이중징용피해자의 메모. 부친인 안차문이 나요시(현 레소고르스코예)에서 나가사키현 미쯔비시 하시마탄산(하시마섬)으로 갔음을 정리해 놓은 메모. 안차문은 사할린으로 돌아온 후에 심한 폭행 후유증으로 일을 전혀 못했다고 한다. ©최상구 | |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노동조건은 사할린에서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사할린 작업장은 대량채탄과 수송을 위해 기계설비를 갖추었지만, 일본의 작업장은 대부분 인력에 의존하여 작업을 하였고 시설도 노후화되어 있어 사고도 빈번했다. 식사의 양과 질도 부실해졌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고 위험, 그리고 미군의 공습에 대한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감행하는 조선인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시마 섬은 ‘지옥섬’으로 불렸으며, 일부 생존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1942년 징용되어 토로(현 삭조르스크) 미쓰비시탄광으로 징용되었다가 하시마섬으로 이중징용 된 김영길 씨의 증언을 보자.
“채굴현장에 들어가면, 그 속의 온도는 40도 이상으로 더워서 견딜 수 없었지요. 셔츠는 벗어 버리고 훈도시(성기만 가리는 좁고 길다란 천)뿐, 그래도 덥고 훈도시 안에 석탄이 들어가거나 소금물이 스며들면 아파서 그것조차 필요가 없었습니다. 채탄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시간이 되어도 못 올라오게 했기 때문에 10~12기간 때로는 15시간도 일했습니다. .... 탄광에는 음료수가 없어서 섬까지 배로 싣고 와서 배급했지요. 밥 먹기 전에 한 컵뿐 더 마시고 싶어도 주지 않았어요. 미국 비행기가 날아와서 공습경보가 계속되면, 며칠 동안 물이 없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사할린 아리랑> 48쪽)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고(낙반)가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였는데, 전환 배치된 한 탄광에서는 10개월 동안 조선인 18명이 같은 사고로 사망할 정도였다. 갱부들의 생명이나 안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채탄에만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인들에게 찾아온 해방. 이중징용된 조선인들은 어디로 향했을까? 이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가고, 일부는 사할린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일본에 남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패전의 혼란 속에서 교통망의 와해는 사할린으로의 귀환을 어렵게 만들었다. 한 증언에 의하면 규슈의 후쿠오카에서 사할린으로 돌아가는데 무려 2개월 28일이나 걸렸다. 또한 홋카이도 와카나이에서 소련이 점령하기 시작한 사할린으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 전후 혼란한 시기에 사할린 상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사할린 조선인이 폭격으로 몰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리고 사할린의 가족들도 귀국선을 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경우가 많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평생을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게 된 발걸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족을 사할린에 남겨두고 고국행을 택했던 이들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할린 가족과의 재회는 점점 희박해졌다. 이를 비관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던 이산의 아픔. 이것은 이중징용되어 홀로 떨어졌던 가장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겨진 가족들,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다
급작스러운 이중징용에,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측 문서에 의하면 일본인을 포함해 9천여명의 노무자들이 사할린을 떠날 때 동반한 가족은 918명뿐이었고, 1만여명의 가족이 사할린에 남았다. 조선인 가운데 가족이 일본으로 이동한 경우는 후쿠시마로 간 125명과 개인적으로 이동한 서너 명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이중징용 당시 일제는 ‘가족원호’, ‘징용원호’를 내세워 가족과 떨어지는 것을 설득하였다. 별거 수당, 생활비 지급, 사망여부 고지와 유골봉환 등을 약속한 것이다. (이처럼 ‘원호’란 일본 정부가 동원체제를 가동하는데 필요한 유인책이자 일본 정부의 책임임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호정책은 일부 시행된 경우가 있었으나, 규정대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또한 가족을 일본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족수송계획은 문서상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잔류한 가족에 대한 조치로, 가족 합류가 아니라 ‘원호’와 민심 안정 도모를 계획하고 있었다.
허울뿐인 약속만 믿고 가장을 떠나 보냈던 사할린의 가족들이 패전의 혼란 속에서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련의 2차대전 참전으로 1945년 8월 9일부터 남사할린에는 소련군이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들은 숙소와 집을 떠나 피난을 가야 했고, 전시상황에서 가족의 생사를 걱정하며 기다려야 했으며,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부친이 이중징용을 당했던 안명복 선생님은 동생들이 아사(餓死)하는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주었다.
▲ 안명복 선생님 인터뷰. 안산고향마을에서. 2012년 6월 22일. © 최상구 | | “당시 1946년 4월에는 사할린 식량난이 극심하였다. 일제가 실어온 예비(쌀)는 바닥이 났으며 소련은 아직도 충분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 배가 고파도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 없었다. 생각해보세요. 피난 갔다가 왔지요 살던 나가야(숙소) 들어오니까 아무것도 먹을 거 없지요. 정말, 야 어떻게 살았는지도 지금 모르겠어요. 누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그러나 아버지들이 있는 아이들은 우리들보다 훨씬 나은 형편이었다. 아버지 있는 사람들 아버지가 돌아와서 먹이고 했지요. ... 우리는 아버지가 있을 때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도 공부 못하고 겨우 소학교 과정을 끝내고 노동판에 뛰어 들어 가야만 했다. 이런 고된 참지 못할 생활 속에서 나의 14살짜리 여동생과 7살 되는 여동생은 결국 먹지 못해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죽었어요.” (<사할린 희망캠페인 안명복 선생님 인터뷰 녹취록> 2012년 6월 22일)
안명복 선생님의 부친은 해방 후 한국으로 들어오셨다. 한소 수교 이전에 돌아가셔서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일시 고국방문 당시 40여년 만에 아버지의 묘를 방문했다고 한다.
안명복 선생님의 부친은 지원위원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되었지만, 위로금 지급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사할린 지역의 경우는 1938년 4월 1일부터 1990년 9월 30일까지 기간 중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 된 사람이 신청대상이기 때문이다. 국내로 들어와 한국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위로금 지급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행정인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중징용자들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린 나이에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소련에서도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가 없었고, ‘결손가정’에 대한 사회적 편견 속에 살아야 했다. 사할린의 가족들은 피난을 갔다 돌아왔으나 가장은 오지 않고(소수의 사람들이 돌아오기는 했다), 종전 후의 혼란기에 소식도 들을 수 없고, 소련의 봉쇄조치로 사할린을 빠져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에 잔류하고 있던 이중징용 피해자들은 가족을 보내달라고 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국정부는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사할린으로 징용 될 때는 부모와 형제자매와 헤어지고, 일본으로 이중징용 될 때는 사할린의 처자식과 헤어져야 했던 가혹한 삶.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 고향으로 갈 수도, 사할린으로 갈 수도 없어 일본 땅에 남아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파업을 했던 사람들. 이들의 오랜 절규에 과연 우리는 어떤 화답을 보낼 것인가?
“한국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조국입니다. 조국은 (우리에게) 어머니입니다. 아이가 밖에서 머리가 터져서 들어오면, 어머니는 된장을 바르고 헝겊으로 싸매는 것이 급합니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우리의 어머니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할린의 동포들은 머리가 터져서 피를 철철 흘리는데, 어머니는 냉정하게 ‘누구의 잘못인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뿐, 자식의 상처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게 어머니가 할 짓입니까?” (<사할린 ‘이중징용’피해 진상조사> 113쪽)
참고자료/문헌 국립민속박물관 편 <러시아 사할린•연해주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2001. 사할린희망캠페인 <안명복 전 이중징용광부 가족회 회장 인터뷰 녹취록> 2012. 이토 다카시, 김문규 옮김 <사할린 아리랑-카레이스키의 증언> 눈빛, 1997.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검은 대륙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2006.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사할린 ‘이중징용’피해 진상조사> 2007. 장석흥 <사할린 한인 ‘이중징용’의 배경과 강제성> 국민대출판부, 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