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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일본인 이야기 – 김시덕
책의 저자 김시덕은 고려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해 ‘이국정벌 전기의 세계’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문헌 등 다양한 자료를 근거로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미친 영향과 역사의 흐름을 추적해 오고 있으며, 일본에서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으로 2011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고전문학학술상을 받고, 2015년에는 한국의 동방문학비교연구회에서 주는 석헌학술상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그들이 본 임진왜란〉〈교감, 해설 징비록〉〈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전쟁의 문헌학〉등이 있다.
이 책 〈일본인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일본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그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하고, 책은 다섯 권으로 기획하고 있다하며 16세기 일본 전국시대로부터 1945년 패전 때까지 4세기 동안의 동아시아와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국제관계 맥락 속의 일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고 했다. 제1권인 이 책은 「전쟁과 바다」로 「제1장 대항해 시대 유럽과 동부 유라시아. 제2장 바다와 일본. 제3장 조총과 십자가. 제4장 일본·중국·유럽. 제5장 조선과 가톨릭. 제6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택으로 되어있다.
더운 날씨에 430쪽이나 되는 양에 부담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일본에서 한국과 비슷한 것만 찾아서는 결코 일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 저자의 말처럼 말로만 일본을 미워하지 말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읽어갈 생각을 해본다.
고대 일본은 ‘세계는 중화문명의 중국과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서 알고 있었던 인도가 있다’는 정도였는데 불교라는 종교는 추상적으로 접했을 뿐이었으므로 중화문명, 즉 중국이 세계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중국을 통해 율령격식(律令格式)인 법령을 받아들이고, 대왕 또는 천황이란 호칭을 쓰면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천황의 나라라고 한 것은 7세기부터였다.
이는 흉노군주가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의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라는 호칭을 기원전부터 썼고, 고구려 광개토왕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한 것과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907년 천황라고 칭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주변 국가들은 대부분 스스로 제국이라 칭했던 것으로 어쩌면 중화문명 ‘따라 하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게 될 일본의 중세시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릴 만큼 수십 개 지방정부가 제각각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이를 하나로 통일하면서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이 통일과정에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호웅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다. 첫 번째 인물로 오다 노부나가는 1549년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로서 전국시대 유력한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사이토 도산(齊藤道三, 1494~1556)의 딸인 노히메(濃姬)와 혼인함으로써 도산의 힘을 업고 세력을 넓혀갔다. 이 무렵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통일을 염두에 둔 장군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들은 당시 유럽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쉼 없이 전투를 치렀는데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무기를 개량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동남아시아를 거쳐서 일본에 들어온 조총은 철포(鐵砲-뎃포)라고 했는데, 공식적으로는 1543년 동남아시아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포르투갈인이 일본 서남부에 위치한 다네가시마(種子島)로 조총을 가져왔고, 10여년 뒤인 1555년에는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대량 생산하기도 했다. 또 조총과 함께 유럽의 가톨릭이 일본열도에 전파되기도 한 시기가 이때다.
일본이 전국시대에서 에도(江戶)시대로 넘어가는 1600년 전후 유럽은 근대적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네덜란드가 그 선두에 있었으나 네덜란드는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일본과는 1609년 규슈 하리도에 무역거점을 마련하는데 만족해야했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힘이 부친 이유도 있었겠지만, 유럽 세력들에게는 손쉬운 정복대상이 전 세계 곳곳에 많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한참 뒤 강해진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 일본에 접근하지만 이들 강대국들의 관심대상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유럽인 선교사가 선물한 ‘지구의’를 돌려보며 세계정복을 꿈꾸었고 그 꿈을 이어받아 명나라와 인도까지 정복하려 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그러나 그 꿈을 포기하고 국내 안정을 꾀한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신부와 일본인 신자들을 해외로 추방하였으며 동남아시아 곳곳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귀국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동남아시아·아메리카·유럽 등에서 상인 또는 노예가 되었고, 이들 중 일부가 인적네트워크를 형성해 동남아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거나 무역하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동남아 각지에 정착하기 전 바다를 무대로 활동한 이들을 ‘왜구’라고 불렀는데, 주로 1274년과 1281년 몽골·고려연합군이‘일본을 침략’*후에 활동하였으며 이때 활동한 왜구들은 일본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생존을 위한 약탈행위를 한 것으로 한반도와 중국남부를 대상으로 하였지만, 이후 16세기에는 일본인과 중국인, 포르투갈인까지 뒤섞인 혼성부대로서 조총도 이때 전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북으로 몽골의 침략을 받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괴롭힘을 받았는데 이를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여몽연합군의‘일본정벌’또는‘일본원정’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몽골을 침략한 적이 없으므로 몽골의 ‘일본침략’으로 보아야 한다.
2017년 대만여행 때 알게 된 인물이지만 후금과 청에 맞서 명나라 부흥운동을 벌이다 타이완으로 건너가 독자적으로 세력화한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의 아버지 정지룡은 ‘니콜라스 이콴 가스파르드’라는 유럽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후기 왜구로 보인다고 한다. 우리는 전기 왜구를 격퇴한 이성계의 활약상에 대하여는 알지만, 16세기 임진왜란 이후 왜구활동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모르는 것인가?)
*정성공 : 1645년 만주족에게 난징이 함락되자 아버지 정지룡과 함께 푸젠 성으로 피신한 뒤 명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군대를 모아 해안지대에서 강한 세력을 구축했다. 1659년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청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곧 고립되었다. 1661년 4월 네덜란드가 점거하고 있던 타이완을 빼앗고, 타이난을 중심으로 효율적인 행정조직을 만들고 정착했다. 본토를 수복하려는 야심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1662년 사망했다. 20세기 들어 민족의식이 강해지면서 정성공을 역사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일본은 중국 왕조와 마찬가지로 고대로 부터 동전을 만들어 써 왔는데, 자국 동전보다도 명나라에서 만든 영락통보(永樂通寶)등 도래전(渡來錢)을 많이 가진 장군이 우위를 차지했는데 전쟁에 대비해 많은 도래전을 가진 장군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문장에 영락통보를 그려 넣기도 했으며, 2018년 사이타마현 아라이 호리노우치(新井堀の內)유적지에서 영락통보 등 26만개가 담긴 항아리가 발굴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5년 일본의 남쪽 끝 오키나와를 여행했을 때 일본은 아열대 기후를 가진 곳과 한대 기후를 가진 홋카이도를 동시에 가진 나라라고 부러워한 기억이 나는데, 11월 말이었음에도 낮 기온이 28℃ 이상이어서 어쩔 수 없이 반팔 샤츠를 사기도 했었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琉球)왕국으로 1429년 통일되기 전까지 삼국시대를 거쳤는데, 그전 12∼13세기에는 순천(舜天, 재위 1187∼1237), 영조(英祖, 재위 1260∼1299)등이 왕위를 잇고, 이후에 산북(山北)·중산(中山)·산남(山南)등 세 나라로 갈라져 각각 중국에 조공했고 삼산시대를 통일한 상씨(商氏)왕조도 명·청에 조공했다.
그러나 1609년 일본의 시마즈 가문이 류큐왕국을 정복해 국왕인 쌍녕(尙寧)을 일본으로 끌고 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79∼1632)에게 알현시킴으로써 류큐왕국은 사실상 일본 땅이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30년 뒤, 1637년 조선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는데 인조가 후금으로 끌려간 것은 아니지만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갔으니, 인조와 세자의 처지가 류큐 왕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일본이나 한반도, 류큐 왕국, 나아가 베트남 왕조들도 마찬가지로 중국 왕조에 의해 국왕책봉을 받고, 조공을 했으며 무역으로 이익을 챙겼다는 것인데, 이들 네 지역의 차이라면 류큐 왕국은 줄곧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으나 자체 연호를 세우지 않았고, 한반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대부분이 중국왕조의 책봉을 받고 때때로 연호를 세우고 때로 황제를 칭하기도 했으며, 베트남은 중국왕조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대내적으로 황제라 칭하고 줄곧 자체연호를 세웠고, 일본은 실권자인 쇼군이 중국왕조의 책봉을 받았으나 대내외적으로 줄곧 황제라고 칭한 텐노(天皇)가 공존하면서 자체적 연호를 세웠다는 점이다.
베트남, 일본도 최고 실권자가 중국왕조의 책봉을 받았다는 것은 결국 네 지역 모두가 궁극적으로 중국왕조와 완전히 구분되는 황제제도를 수립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왕조의 실권과 관념세계가 강력하게 동중국해 연안지역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1801년 조선은 가톨릭을 탄압한 신유박해로 충북 제천의 베론 토굴에 숨어 있던 황사영(黃嗣永-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이 ‘청나라와 서양세력이 조선을 공격하기를 바란다.’는 밀서를 천주교 베이징교구장에게 보내려고 했지만 전하지 못하고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조선을 공격해서 천주교 신자들을 해방시켜 달라는 그의 바람은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통해 실현되었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프랑스, 미국 등은 조선의 가톨릭 신자들을 해방시켜 주지는 못했다. 이들 두 차례 전쟁에서 이긴 흥선대원군 정권이 조선통치 정당성을 인정받아 가톨릭탄압과 쇄국정책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더 이상 바다는 일본에 평안을 주지 못한다.’며 가까운 시일 내에 유럽 국가들이 침략할 것이라고 했던 하야시 시헤이의 예측대로 러시아가 저지른 흐보스토프 사건(1806∼1807)과 영국군함이 나가사키를 공격한 페이튼호 사건(1808)이 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와 무사계급은 러시아와 영국의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일본을 지배할 정당성을 의심받은 일본의 무사계급은 그때부터 서양의 군사기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폐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863년과 1864년 잇따라 유럽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쇄국정책을 폐기하고 개국과 동시에 메이지(明治)정부를 수립했다. 반성이 빨랐다는 말이다. 일본과 달리 조선은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살리지 못하고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렇듯 일본과 한국은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졌으며, 그 경험의 차이가 가장 크게 두드러진 부분이 16∼17세기 남중국해 연안에서 전개된 일본인의 활동과 그로부터 촉발된 유럽과의 접촉이었다. 이런 차이를 못 본 척하고 한자문화권이니, 유교문화권이니, 왕인박사 천자문이 어쩌고 하면서 우리와 비슷한 점만을 찾고 우월성을 강조한다면 결코 일본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121쪽)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잘 알려져 있고 잘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것도 많은 것 같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기 4년 전, 1488년에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돌아왔고,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열었다. 이로 인해 인도가 세계무역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나 사실은 참여라기보다 지역에 확립되어 있던 상업 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유럽의 거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에 식민지 쟁탈이 시작되고 두 나라 사이에는 영역권을 확립하려는 암투가 벌어졌다.
1493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식민지 분계선을 그은데 이어서, 1494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아라곤·카스티야 등 세 왕국이 세력 확장범위를 정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고, 1529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아시아 영토 분계선이 그어지기도 했다. 그전 1500년에는 포르투갈의 페드루 카브랄이 브라질에 건너갔고, 1501년에는 이탈리아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남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조사하기도 했다. ‘아메리카’라는 지명은 베스푸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509년에 인도 디우에서 포르투갈 해군과 인도 구자라트 술탄 해군이 전투를 벌여 포르투갈이 승리하면서 인도 고아지역을 점령했다.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 핵심 지역이자 이슬람국인 말라카 왕국을 점령하여 포르투갈은 인도·중국·이슬람국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하였다. 이는 유럽에는 귀한 향신료를 확보하기 위해 말라카 왕국을 꺾을 필요가 있었고, 말라카는 태국·버마·명나라로부터 수입한 대포로 두 달간은 버텼지만 결국 비이슬람 세력과 내통한 포르투갈에게 굴복해 식민지가 되었다.
적의 내부를 이용한 이와 같은 승리는 1567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나바야마성 전투에서 사이토 다쓰오키(齊藤龍興, 1548∼1573)를 이기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쓰나라(石田三成, 1560∼1600)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가 이끈 서군에 승리한 것도 패한 측의 내부분열과 내통자를 이용한 때문이었다. 이것은 포르투갈과 유렵국가들이 세계를 정복해 가면서 했던 것과 상통한다.
1519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세계정복을 본격화했는데 이 때 스페인 왕 카를 5세의 지원을 받고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 일주에 나섰다. 마젤란은 2년 뒤인 1521년 필리핀에 도착했으나 막탄섬에서 현지주민과 전투에 휘말리면서 살해되었고, 선원 270명 중 18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그가 죽은 그해 스페인 에르난 코르테스는 중앙아메리카 아스테카 왕국(마야)을 정복하고, 1533년에는 곤살로 피사로가 남아메리 잉카제국을 정복했다. 또 1545년에는 오늘날의 볼리비아 포토시 지역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었는데 원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채굴한 은은 전 세계 생산량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며 유럽에 부를 안겨주었다.
1565년 5월 19일, 일본에 온 가톨릭신부들이 장군의 지위를 지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 신부들을 보호해 주었던 무로마치 막부의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미쓰나가 하시히테 등 중부지역 영주들의 하극상으로 살해되었다. 이것을 ‘에이로쿠의 변’이라 하는데 이 사건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전체를 통일할 패자를 꿈꾸게 되었다. 사건발생 2년 후 사이토 가문의 땅이었던 이노쿠치를 점령한 뒤에 그곳의 이름을 기후(岐阜)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이 기산(岐山)에서부터 은나라를 정벌하기 시작한 것을 본 딴 것이었다.
‘에이로쿠의 변’이후에 후견인이던 쇼군을 잃은 10만 가톨릭 세력은 새로운 패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두 달 뒤 오기마치 텐노(천황)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신부를 추방하는 금교령(禁敎令)을 내렸다. 새 정치적 후견자가 필요했던 가톨릭 세력은 그 대상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택했다. 유럽에서 온 가톨릭신부들에게 호감을 가졌던 오다 노부나가는 신부들을 추방하라는 텐노의 명령을 사실상 무시했다. 쇼군과 텐노를 모두 없애고 자신이 일본의 유일한 지배가가 될 의사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가톨릭 세력과 접촉을 통해 기존의 중화문명 중심적 세계관을 폐기하고 새로운 가치관과 신식무기를 얻는 데는 성공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1567년 이나바야마성 전투에서 사이토 가문에 승리한 뒤에 거점을 옮기고 그곳 지명을 기후로 바꾸고, 일본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을 노골화했다. 그는 공공연히 천하포무(天下布武-무력으로 재패한다)를 선언했으며, 그가 이나바야마성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유력한 장군이자 훗날 장인이 되는 사이토 도산과 내통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나바야마성 전투에 대해 ‘7년이나 걸린 미노(美濃) 공격의 결말로는 맥 빠지는 것이었지만, 이로부터 천하포무를 내건 노부나가 전쟁이 개시되었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노부나가 이전 두 명의 텐노가 존재했던 남북조시대에 힘이 약한 고다이노 텐노 측에 서서 주군과 왕조를 지키기 위해 술수와 책략을 썼으나 실패해 할복했던 구스노키 마사시게(植木正成, 1294∼1336),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로 서군장수 고바야키와 하데아키(小早川秀秋, 1582∼1602)가 배신하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책략으로 행운으로 바꾸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도쿠가와, 자신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자결한 오다 노부나가, 이들 세 사람 모두 세상이 어떤 곳인지 꿰뚫어 본 점만은 공통적이었다.
1570년 1월 오다 노부나가는 쇼군들에게 제시한 5개 조항의 문서에서 쇼군 대신 자신이 일본을 다스린다는 의지를 나타내며, 다이묘 및 장군들에게 교토로 올라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에치젠 지역 센고쿠 다이묘인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응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노부나가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에치젠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때는 여동생인 오이치노카타와 결혼한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 1545∼1573)도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아사쿠라 편에 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이토 가문과 싸울 때는 사이토 측 분열과 배신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던 그가 이번에는 자기진영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이다.
측근의 배신에 당황한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후방 호위를 맡기고 교토로 퇴각했으나 이 모습을 본 잇코잇키* 세력들이 미나미오미 지역에서 봉기했다. 3월 21일 노부나가는 반격 준비를 갖춘 뒤, 6월 19일 기후를 출발해 아사이 나가마사 세력을 공격했다. 이에 맞서 나가마사, 요시카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과 연합한 노부나가와 오미에서 아네가와를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는 노부나가가 승리했지만 나가마사 측은 여전히 기타오미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잇코잇키(一向一揆)세력 : 일본불교 종파인 정토진종(淨土眞宗)가운데 혼간지 파에 속하는 승려·무사·상공업자·농민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무장봉기
그 후 미요시 삼인방*이 노부나가에 맞서 봉기하고, 이시야마 혼간지의 주지 겐뇨(顕如, 1543∼1592)가 반노부나가 측과 연합함으로써 노부나가 측은 삼인방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그 직전인 9월 12일 조총으로 무장한 혼간지 측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이들은 엔라쿠지(延曆寺) 승병 세력과 손잡고 노부나가 세력권인 교토를 공격했다. 노부나가는 회군하여 아사이 세력과 맞서기는 했지만, 이해 11월 이세(伊勢) 지역의 잇코잇키 세력이 노부나가를 공격함함으로써 노부나가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삼인방(三好三人衆) : 미요시 가문의 후계자인 요시쓰구를 보좌한 세 명의 후견인
노부나가는 화해를 권유한 오기마치 덴노의 서한을 받고서 아사쿠라·아사이 측과 화해해 궁지에서 벗어나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이듬해인 1571년 2월 포위망을 뚫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히에이잔 엔라쿠지를 불태우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한국의 원효·의상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던 헤이안 시대 승려 사이초(最澄, 766∼822)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면서 일본 불교의 상징이기도 한 이곳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이는 종교를 무기로 삼는 저항 세력이야말로 일본 통일의 꿈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11년 일본에 여행 갔을 때 제사 모습을 사진 찍다가 제지당하기도 한, 일본의 황실 제신을 모신 이세(伊勢) 신궁은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며, 승려가 참배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태양신이자 일본 창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바다 속에서 밀교(密敎)의 부처인 대일여래(大日如來)의 모습을 보고 건져내려고 창을 휘저었더니 창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일본 영토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하고, 이 모습을 본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이 이렇게 만들어진 일본은 불법이 흥성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마테라스의 작업을 방해했다고 한다. 이에 아마테라스는 일본이 만들어져도 자신이 불교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제육천마왕을 무마한 뒤 일본열도를 창조했다고 한다. 제육천마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마테라스를 모신 이세신궁에서는 지금도 승려들의 참배를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텐노 가문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와 대척 지점에 있는 제육천마왕을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캐릭터로 선택했다는 것인데, 그가 텐노를 없애고 스스로 일본의 황제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는 부분이기도 하다.
1575년 5월 13일 노부나가, 이에야스 연합군은 다케다 가쓰요리의 기병대와 맞서 나가시노에서 조총으로 막아내고 승리했다. 이에 노부나가는 나가시마 잇코잇키 세력을 학살한데 이어서, 8월에는 에치젠 잇코잇키 세력도 섬멸했다. 저항세력을 철저히 학살함으로써 후환을 없앤 것이 노부나가, 이것이 일본 통치에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도 뒤를 이은 히데요시도 이러한 전략을 이어받아 임진왜란(특히 정유재란)때 조선과 명나라 양민을 대량 학살하고 훗날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도 이것을 반복했다.
노부나가의 힘이 절정에 이르자, 반노부나가 기치를 들었던 이시야마 혼간지 주지 겐뇨가 화의를 청했다. 노부나가는 사면을 명분으로 요청에 응하였고 우코노에노 다이쇼(右近衛大將)로 승진한 후에는 간토지역 여러 장군들에게 ‘다케다 가쓰요리가 자신에 대해 불의를 저질렀으므로 가쓰요리를 치는 것을 돕는 일은 천하를 위하는 것’이라는 편지를 장군들에게 보내기도 했는데 이것은 ‘노부나가의 천하’라는 것을 명확히 더러 낸 것이었다. 많은 전쟁을 치르고 이긴 오다 노부나가! 그는 분명히 일본통일의 주역이었다.
공사 중이던 아즈치성이 완성되고 노부나가는 자신의 생일이던 1579년 5월 11일 아즈치성 천수각에 들어 자신에게 우호적이던 예수회에 수도원을 지을 땅을 내려 주기도 하고, 교토 우바야나기초(咾柳町)에서는 교회 상량식을 가지기도 했다. 이런 교회들을 난반데라(南蠻寺)라고 불렀는데, 남만인(유럽인)의 절이라는 뜻이다. 이무렵 스페인의 세레페데스 선교사는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세례명 아우구스티노)와 만나고 나중에 조선에 오기도 했다.
노부나가의 기질과 전략을 살펴봤다. 물론 책에 적힌 것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화무십일홍이라던가! 1582년 5월 서일본에서 모리세력이 준동하자 노부나가는 자신이 직접 출전하기로 결정하고, 심복인 하케치 마쓰히데에게 선봉을 서게 하고 교토 혼노지에 머물렀다. 서일본 공격을 명받은 마쓰히데는 자신의 거점이던 오미지역 사카모토성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가메야마성으로 갔다가 5월 27일에는 교토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타고산(愛宕山-애탕산)에 올라 밤새 무언가를 기원 한 뒤, 이튿날 여러 장수들과 시 낭송회(렌가카이)를 열었다. 여기서 아케치가 읊은 와카는 다음과 같다.
‘도키와 이마 아메가 시타시루 고가쓰카나’
일본의 전통적 정형시인 와카는 하나의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중시하는데 이 시도 그렇다. 첫 번째는 ‘이제 계절은 비 내리는 오월이구나’이지만, 다른 뜻으로 해석하면 ‘이제 아케치 미쓰히데가 천하를 다스리는 오월이구나’로도 해석되는 것이다. 이때 교토는 군사적으로 공백 상태였으므로 거사를 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봤던 아케치는 6월 2일 밤 노부나가가 머물던 혼노지를 습격했고, 노부나가와 장남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는 결국 자살하기에 이른다. 노부나가 나이 49세였다.
일본에도 ‘삼일천하’라는 것이 있었는데, 당시 큐슈로 출전해 있었던 히데요시는 이튿날 노부나가 사망 소식을 듣고, 상대인 모리측과 비밀리에 화해를 시도한 뒤, 6월 9일 히메지를 출발해 11일 셋쓰 아마가사키에 도착해 가톨릭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 등과 합류한다. 그리고 이틀 뒤에 교토 남쪽 야마자키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두 시간도 채 안 돼 아케치측을 제압했다. 아케치는 도망했으나 결국 농민에게 발각되어 자결한다. 이를 아케치의 삼일천하라고 하는데, 아케치에 대해 1600년에 있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하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마을의 농부에게 발각되자 농부가 도주할 것을 권하였으나 고니시는 오히려 자신을 데려가면 포상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과는 대조적이라며 아케치를 비난하기도 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후계자 자리가 굳어진 히데요시는 오사카성 건설을 시작하여 1584년 8월초 준공식을 갖고 입성했다. 이때 히데요시와 협력관계를 유지해 온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카스는 히데요시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는데, 에에야스가 차남 오키마루를 히데요시 양자로 보내기로 하는 등 인질 교섭을 계속하나 교섭이 결렬되어 1585년 말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공격할 준비를 한다.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덴노 최고 보좌관인 간파쿠(官伯)에 취임하면서 히데요시의 성은 다아라(平)에서 후지와라(藤原)로 바뀌었다. 최하위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노부나가 휘하에서 성장한 그가 교토 귀족 가문의 권위를 빌려 이제 노부나가로부터 독립한 것이었다.
한편, 이에야스와의 인질교섭이 난항에 빠지자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공격할 뜻을 다이묘들에게 전하고 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오하리 지역에 있던 오다 노부카쓰가 둘 사이를 중재한 끝에 양측은 간신히 화해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이에야스는 교토로 올라오지 않았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히데요시가 자신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大政所, 1513∼1592)를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다. 그만큼 이에야스의 순종과 복속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에야스는 그해 10월 14일 교토로 올라와 히데요시에게 ‘무엇이든 간파쿠님 뜻에 따르겠다’고 했고, 그러자 히데요시는 간토(關東)지역을 이에야스에게 맡겼다. 이에야스가 임지로 출발하기 전날, 1585년 11월 7일은 오기마치 덴노가 고요제이 덴노(後陽成天皇, 재위 1586∼1611)에게 양위하는 즉위식이 있었는데, 여기서 히데요시는 다이조다이진(大政大臣-총리)으로 승진했고, 도요토미(風信)라는 성性을 하사받았다. 명실공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소신대로 1587년 조선국왕에게 신하로 입조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각지의 잇키(봉기)가 진압되고 나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1562∼1611)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고, 조선 공략을 위한 사전조치를 취했는데, 7월에는 해적 금지령을 내리고 농민과 승려의 무기를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육지에서 잇키를 금지하듯이 해적활동을 금지한 것은 피지배자들의 저항수단을 빼앗고, 해상 운송력을 확보하며, 명나라와의 무역에서도 유리한 점을 갖기 위한 사전 정리 작업의 일환이었던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기 전부터 이미 외국을 공략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는데, 1586년에 데리모토에게 규슈 공격을 명하는 서한에서 조선공격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1587년 쓰시마의 소(宗)가문 측에서 전쟁 전에 조선국왕을 일본에 오게 만들겠다고 해 조선 침략을 일단 중지시켰다. 1588년 3월 조선 공격 선봉에 고니시와 가토를 세우겠다고 결정을 내리기도 했으나, 이때도 쓰시마 영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가 직접 조선으로 건너가서 담판을 짓겠다고 함으로써, 전쟁을 미루었다. 일단 히데요시를 멈추게 한 요시토시는 게이테스 겐소(景轍玄蘇, 1537∼1611)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통신사 파견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하여 1590년 7월 조선은 황윤길·김성일·허성·황진 일행이 교토에 도착한 것이었는데, 이때 히데요시는 오다와 라성을 함락시키고 오슈지역으로 향하던 즈음이었다.
조선사절단과의 면담을 몇 날이나 미루던 히데요시가 교토의 쥬라쿠다이에서 이들을 만난 것은 11월 7일. 조선사절단이 가져온 국서에는 항복한다는 내용이 없었지만 히데요시는 사절이 왔다는 것 자체가 항복의사 표명이라고 생각하고 답서에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나라 공격의 선봉에 설 것을 요구한다며 답서를 준다. 답서를 조정에 어떻게 보고할지를 놓고 논쟁하다가, 연말에 교토를 출발한 조선사절단은 1591년 1월 28일 부산포에 도착했다. 조선사절단과 동행한 쓰시마 측은 정명향도를 가도입명(假途入明), 즉 명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로 바꾸고 어떻게든 사태를 무마해 보려고 했다.
이무렵 일본에서는 조선사절단이 교토에 도착할 즈음,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가 죽고, 뒤이어 둘째부인인 오도도노가 첫아들 쓰루마쓰를 낳고 세 살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이런 상황에 히데요시는 조카 히데쓰구에게 간파쿠 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막후에서 다이코가 되어 대륙 침공을 진두지휘하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선 침공의 거점으로 히젠 나고야 성을 짓기로 하면서 매우 빠른 속도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쯤에서는 자신의 정복목표가 조선과 명을 넘어 자신이 알고 있는 전 세계로 확대된듯하다. 이미 1588년에 류큐 왕국에 협박 서한을 보내고, 1591년 7월에는 인도 고아의 포르투갈 부임 왕에게 명나라 공격 의사를 밝히면서, 가톨릭 포교는 금지하되 무역은 환영한다는 뜻을 재차 표명한 것을 봐도 그렇다.
뒤이어, 1591년 9월에는 필리핀에 와 있던 스페인 총독에게 항복하라는 내용의 국서를 보냈다.
“그대의 나라는 아직 나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오지 않았기에 군대를 보내 정벌하게 하려 했으나, 하라다 마고시치(原田孫七郞) 라는 자가 나의 신하에게 ‘그 나라에 설득해 보겠습니다’라고 전해왔다. ‘기치를 올리지 않고 천리를 정복한다’는 옛말이 지당하다. 그래서 비천한 자의 말이기는 하지만 이 말을 받아들여 잠시 군대를 보내 정벌하는 것을 멈추었다. 내년 봄에는 규슈 히고에 진영을 설치할 것이니, 신속히 깃발을 내리고 와서 복속하라. 만약 시간을 끌 경우에는 신속히 정복할 것이다.”
필리핀 마닐라 총독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나스는 히데요시가 5만 명 단위의 군대 3개와 거대한 함선을 준비해 조선을 친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조선은 중국에 면한 강대하고 각박한 토지’이므로 히데요시가 이기기 어려울 터이니, 아마도 조선을 친다고 해놓고 루손섬을 공격하려는 계획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더욱이 필리핀은 중국과 가깝고 스페인과 멀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노릴 테고, 조카에게 일본을 물려주고 자신은 해외 정복전쟁을 나가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있었는데, 서한에 대해서는 신빙성을 믿지 않았지만 후안 코보 신부를 보낸다는 답신을 보냈다. 후안 코보 신부는 『명심보감』을 〈맑은 마음의 풍요로운 거울〉이라는 제목으로 최초로 중국서적을 유럽언어로 번역하기도 한 인물이다.
후안은 편지를 히데요시에게 전하고 다시 히데요시의 편지를 받아들고 돌아가다가 타이완 근처에서 난파되어 그곳 원주민에게 살해되었다. 후안 이후, 1593년에는 히데요시 편지를 가지고 타이완으로 항복을 권유하러 갔던 하라다 마고시치로는 타이완에는 편지를 받은 영주가 없어서 전달하지도 못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1592년 1월 18일 히데요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를 아내로 삼은 소 요시토시를 조선으로 보내 조선이 일본에 항복했으니 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군대를 보내서 조선을 퇴치하겠다고 했다. 이 때 고니시와 요시토시가 조선에 온 것에 대해서는 두 사람이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는 의견에 대해 이견이 많다고 한다.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해 4월 12일 고니시가 이끈 제1군 16만 명이 부산포에 도착했다.
5월 3일 제1군이 한양에 입성했으며, 이 소식이 히데요시에게 전달되기 전에 히데요시는 첫 번째 부인이던 기타노만도코로(北政所, ?∼1624)에게 9월이면 명나라도 정복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 초기 히데요시의 낙관적 예상이었으나, 5월 16일 양주 해유령에서 신각이 이끄는 조선군이 소규모지만 일본군에 승리하였고, 7월 17일에는 조승훈이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해 패하기는 했지만, 명나라가 참전했음을 일본측에 알렸다. 전황이 히데요시의 바람대로 흐르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얼마 뒤에 가토의 편지를 받은 히데요시는 자신이 조만간 조선으로 건너가 명을 정복한 뒤에 고요제이 덴노를 베이징으로 옮길 것이며, 다음 에는 천축(인도)을 칠 것이라는 구상을 담은 계획을 세우고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여진족을 경계하기 위해 만주 국경에는 조선과 명의 정예병이 주둔해 있었고, 일본군의 사기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상도에 머물던 데루모토가 자기 영지에 보낸 편지에는 “조선은 일본보다 넓어서 모두 다 정복할 수 없고, 말도 통하지 않아서 통역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현지에서는 전쟁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7월 15일 명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취소하고, 우선 조선 지배를 안정화시키라고 명령한 히데요시는 7월 22일 나고야를 떠나 29일 오사카로 돌아왔지만 아내인 오만도코로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9월초 나고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지만 ‘날씨가 추우니 나고야로 가지 말라’는 덴노의 칙서 때문에 오사카에 머물다 이듬해 1593년 3월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1월 26일에는 백제관 전투로 일본군 최전선이 평양과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내려가게 되자 히데요시는 자신이 조선으로 가겠다는 뜻을 접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조선주둔 일본군 대장으로 삼으면서 전황에 따라 그때그때 판단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4월, 명에 강화사절을 보내 명나라 군대를 철수하면 일본군도 한양에서 철수하고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전라도 공격을 명하는데 이는 전쟁 목표가 한반도 남부 지역 확보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5월 23일 명나라 사절단과 만난 뒤 6월 21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는데 끈질겼던 진주시민이 항쟁으로 이어진 2차 진주성 전투는 6월 29일 성이 함락되면서 끝이 났다. 그리고 명나라에 7가지 화의 조건을 제시했는데 ‘명나라 황녀를 일본 덴노의 후비로 삼고, 조선 국왕은 한양근처의 4개도를 일본에 주는 대신 조선왕자와 대신 1명씩을 일본에 인질로 보내고, 조선은 일본에 영원히 거역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라는 등 명나라는 물론 조선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히데요시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던지, 조선남부에 거점에 성을 쌓게 하고, 1차로 5만의 군사를 귀국시켰고, 8월에는 명군도 한양에서 철수해 9월 압록강을 건넜다. 8월 8일에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8월 25일 나고야에서 오사카로 돌아왔다. 이것이 임진왜란 초 1592년과 1593년 사이 전쟁의 대략이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1596년 8월 중순, 명과 조선의 사절이 일본에 건너가 히데요시를 만나 강화를 의논하던 중에, 히데요시는 명이 자신을 책봉한 것은 인정하지만 조선이 왕자를 보내 사과하지 않는 것은 무례하다는 이유로 조선을 재침공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5월부터 대규모 일본군이 건너와 이전에 점령하지 못한 전라도를 집중 공격한다. 이것을 정유재란이라고 하는데, 이 전쟁의 목적은 명 정복이 아니라 이미 일본 영토라고 생각했던 한반도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해 조선과 명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로서 대규모 ‘코 사냥’이 이루어지는 등 전쟁양상이 임진왜란 때보다 가 일층 잔인해졌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1년 뒤, 1598년 8월 18일(양력 9월 18일) 히데요시가 병사했다. 히데요시는 생전에 자신은 군신(軍神)으로 하치만(八幡)에 뒤이은 신하치만(新八幡)이란 칭호를 받고 싶어 했지만, 조정에서는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明神)이라는 신호(神號)만을 주었다. 히데요시를 일본에서 신으로 모시는 이유다. 하층민에서 출발해 덴노 아래 직위까지 출세한 자신의 행운을 너무 믿은, 명나라를 단숨에 정복해 버린다는 꿈이 무산된 데에서 자신의 운이 다했음을 깨닫지 못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히데요시가 죽기 10년 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오기도 한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를 박해하는 간파쿠도노(히데요시)는 하류계급 출신으로서 나무를 하러 산으로 다니기도 하였고 농부의 일을 거들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지 않고 군대에 입대하여 대단한 노력과 영리함과 신중함으로써 차츰차츰 일어서기 시작하여 전 일본의 영주가 되기에 이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악마의 오만함으로 ‘가미’로서 숭배 받고자 꾀했는데, 이 가미란 일본 내에서 숭배하는 거짓의 여러 신들을 일컬으며 이 세상 사물들에 대하여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도 끝내지 못하고, 유럽과의 문제도 매듭짓지 못했다. 이들 과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남겼는데 이에야스는 조선과는 국교를 재개하는 방향으로, 유럽문제는 교역 상대를 이베리아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바꾸었다. 이 두 가지 결정이 이후 거의 300년간 일본의 대내외 관계를 결정짓게 된다.
이제부터는 마지막 제6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택’이다. 그 동안 지루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것 같기는 하지만, 일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중세 일본의 가톨릭 포교를 위한 유럽선교사들의 활동, 천주교 탄압, 그리고 영주들의 부침에 대해서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거나, 여기에 적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움은 남는다.
히데요시 치하에서 탄압받던 가톨릭 세력은 떠오르는 지도자 이에야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된다. 세스페데스는 1601년 이에야스에 대해 이렇게 감회를 적었다.
“지금은 전 일본의 군주 다이후시마(이에야스)의 통치 아래 있는데, 그는 우리 친구이며 우리의 성실한 교리의 옹호자로 보입니다. 그의 편에 있는 다이묘들도 역시 그러하므로 천주교는 다시금 발판을 만들었으며 짧은 기간 내에 일본의 많은 왕국에 가장 큰 전교를 이룩할 희망에 차 있습니다.”
이에야스는 세계 최강국 스페인의 식민지 무역루트를 활용하기 위해서 가톨릭 신부들의 포교활동을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강했지만, 머지않아 히데요시와 같은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상업적 이익을 위해 가톨릭 세력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을 계속 허용하다가는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바다건너 로마의 권위에 복종하는 피지배집단이 점점 세력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히데요시와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새로운 선택지가 된 것은 어쩌면 그에게 행운이었다.
1600년 3월 16일,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난 그해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출항한 리프데호가 태평양을 황해하던 중에 일본 우스키에 표류했는데, 배에 탄 110명의 선원 가운데 선장 야콥 콰케르닉 등 24명만 살아남았다. 이때 포르투갈 예수회 측은 이들이 해적이므로 처형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에야스는 이들을 오사카성으로 불러 세계정세에 대해 질문했다. 그리고 일부는 귀국했고 일부는 일본에 남아 도쿠가와 막부에서 외교고문이 되었다. 선원 중 영국인 윌리암 에덤스는 미우라 군에 영지를 받고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뒤에 막부에서 조선술·기하학·지리학을 가르쳤다. 그가 일본에서 건조한 유럽식 범선 산부에나 벤투라호는 1610년 필리핀 임시총독을 태우고 멕시코를 돌아왔고 후에도 무역활동에 이용되었다.
1611년 에덤스가 자바에 있던 영국인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편지에 자극받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1613년 국왕 제임스 1세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도착해 이에야스로 부터 무역을 허가받는 주인장(朱印狀)을 받고 돌아갔으며, 3년 뒤 막부 측에서 영국도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니냐며 힐문하자, 초대 영국 상장관 리처드 콕스는 영국이 그리스도교 국가이기는 하지만 가톨릭이 아니며, 스페인과는 적대관계임을 강조하여 주인장을 갱신 받기도 했다.
우호적이고 유연했던 도쿠가와 막부에서 설치한 왜관에 대해서 일본의 일부 인사들은 일종의 식민지배의 상징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본과 청나라가 나가사키와 광동에 설치했던 것과 같이 공식 대외무역 장소 성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이 맺은 기유조약 이후, 부산 동구 두모포에 왜관이 설치되고, 1678년 초량왜관으로 옮겼던 이들 왜관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서는 많지만 유물은 거의 확인되지 않다가 2018년 9월 옛 초량왜관 터에서 도자기파편 등이 대량 발굴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의 중세 역사기도 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살펴보면서 느낀 점은 이들의 행적이 모두 정치라는 사실이다. 무조건 밀어붙이는 정치를 하다가 부하에게 배신당해 자살한 노부나가, 조카에게 권력을 물려줄 준비를 하다가 잡자기 아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모든 과정이 얽혀버린 상태에서 죽은 도요토미, 아들에게 통치권을 물려줄 충분한 시간을 갖고 활용한 이에야스, 히데요시에게는 새로운 세계와 접할 수 있는 통로가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나라뿐이었으나, 이에야스에게는 네덜란드와 영국이라는 좀 더 입맛에 맞는 상대가 나타나주었다는 행운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에야스는 1616년 4월 17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후손은 200년 동안이나 일본의 에도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이에야스의 후손들은 일본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것이 역사의 흐름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히데요시가 망상에 빠져서 망쳐놓은 국가를 이에야스가 수습했다가 보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세 덕분에 한껏 넓어진 일본의 국제적 활동무대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제한함으로써 무사집단의 이익을 지키려했던 아류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대외적으로 무역이 번성하고 일본인들이 화교처럼 일본 바깥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대내적으로는 경제성장에 따라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피지배민들이 무사 집단에 도전하는 상황을 끝내려 한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배 엘리트들인 무사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장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와 때로 협력하고 때로 갈등하면서 북동 유라시아 연안 지역에서 최소한 현상유지를 할 수 있었고, 아직 영국·프랑스 세력이 지역에 본격 진출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 세력 확장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사집단이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유럽과 통하는 문을 걸어 잠그고 더 이상교류하지 않았던 것인데 도쿠가와 막부가 전쟁 없는 200년의 치세를 만들어낸 것을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그 후로도 계속 전쟁을 치르면서 기술을 개발하고 효율적인 정치·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유럽과는 격차가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점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조선에 비해...
마지막으로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옮겨보면서 줄일까 한다.
“1690∼1692년 일본에 머물던 독일인 의사 엥겔베르트 캠퍼는 아시아에 관해 집필한 책에서 일본 부문만 떼어내어 1727년 《일본사 -The History Japan》라는 제목을 붙여 영어로 번역·출판합니다. 이 책이 1729년에 《일본지》라는 제목으로 다시 네덜란드어로 번역되고, 책은 네덜란드 통역관이자 학자인 시즈키 다다오가 번역하면서 《쇄국론》이라는 제목을 붙여 ‘쇄국(鎖國)’이란 단어가 처음 탄생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 시기에 이미 글로벌 네트위크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감탄과 막막함이 밀려옵니다.” - 2020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