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은 뒷전, 진흙탕 속의 당파싸움
이괄의 반란 사건이 평정되자 서인(西人)들은 조금만 의심스러운 자가 있
어도, 이괄의 당이라고 하여 잡아 죽였다. 흥안군도 역시 잡히어 옥중에
있었는데 훈련대장 신경진이 자고로 난신(亂臣) 역적은 죽어야 한다고 하
며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흥안군이 임금 노릇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괄의 강박에 못 이겨
하였던 것이었고 또 그는 평민과도 다른 왕족인 이상 응당 인조의 재가(裁
可)를 얻어 처리를 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경진은 제멋대로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인조는 서울로 돌아와서 그러한 처사를 듣고 크게 노하여 신경진을 며칠
동안 금부에 가두기까지 하였다. 반정공신들의 방자한 행동은 날로 심해
갔다. 서인 아닌 사람들은 한시도 기를 펴고 살 수 없었다. 사실 역적이
아니더라도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서인에 의해
희생이 되었다.
이때부터 거리에는
『폐주 광해군을 다시 모셔와야 한다. 이번의 반정이라는 것은 서인들이
자기네 당만 생각하고 일으킨 것이다. 더구나 나라에는 왕자가 얼마든지
있는데 광해가 잘못 했으면 다른 왕자를 내세울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고
한 대를 거너 손자를 세웠으니 될 말이냐. 이것은 반정이 아니고 순전히
서인들의 농간이다.』
이러한 격문이 나붙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서인 일파에서는
"이는 인성군을 내세울려고 역모하는 자들의 소행이니 당장 인성군을 없애
야 하오."
하고 들고 일어났다.
이원익을 중심으로 한 남인(南人)들은 인성군을 두둔하여 서인 일파에게
대항했다. 서인측에서 특히 공신들이 인성군을 죽여야 한다고 떠들어대면
남인측에서는 죽여선 안 된다고 나섰다.
공신들 중에서 가장 온건하다는 평을 듣던 이귀마저도
"인성군은 전에 폐모를 적극 주장한 자로서 대비에 대한 죄과도 있고 또
그 후 역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으례 인성군을 추대한다는 말이 나오니
응당 처벌해야 하오."
하고 주장했다.
인조는 이러한 이귀의 주장에 대하여
"경마저 그런 소리를 하면 내 마음이 어찌 되는가. 인성군을 죽이라는 말
은 나의 덕을 더럽힐 생각에서 하는 말이 아닌가."
하고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잠잠하던 조정은 인성군 문제를 가지고 서인 남인으로 갈라져 또 다시 당
파싸움으로 흔들렸다.
그 후 계속해서 효성 땅의 선비 이인거(李仁居)의 역모사건과 또 광해군의
왕비 유씨의 조카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이 추대하려는 인물이 또한 인성군이었다. 삼사에서는 합세하여 인성
군을 참하라고 부쩍 떠들어댔다.
그러나 대사간 정온(鄭蘊)은
"전에 영창대군은 역적들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고 해서 죽였는데 이번
인성군의 경우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극형에 처하라고 하니 이 아니 원통
하고 억울한 일이 아니오니까. 역옥은 거의 해마다 일어나고 있는데 오늘
날 인성군을 제거하면 다음날에 또 다른 인성군이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오리까. 삼사에서는 종사(宗社)를 위해 인성군을 죄 주어야 한다지
만 전하는 광해군 때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아야 하오."
임금은 정온의 말을 옳은 말이라 하며 칭찬까지 하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대비로부터도 인성군을 죽여야 한다는 정음(한글) 전교가 내려왔다. 대비
는 물론 서인편을 두둔해서 인성군을 죽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서
인 일파에게는 이것이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서인 일파와 대비, 이렇게 양측에서 들고 일어나는데는 임금도 더 견딜 수
가 없었다.
마침내 임금은
"아무리 종사를 위한 일이라 하나 골육간에 서로 살상하게 되니 나의 마음
이 아프도다."
하는 비통한 말로써 승낙하였다.
이리하여 죄없는 인성군은 반정공신들의 등살에 못 이겨, 결국 원통한 죽
음을 당한 것이다.
조선에서 이렇게 내란과 시비로 무비(武備)를 등한히 하고 있을 때 북쪽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後金)은 점점 그 힘이 강해졌다.
그 태조(太祖)인 누루하치는 명나라가 쇠약해 감을 틈타서 중원(中原)으로
진출할 야망을 품고 우선 후방인 조선의 동향을 타진해 왔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광해조 때같이 명나라 편을 들어 우리에게 도전하면 재미없
다.』
하는 식의 일종 위협이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도 오랑캐들의 힘이 강대하여 거역해 내지 못할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낼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사신을 보내려 하니, 누구 한 사람 내가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평안병사로 있는 정충신이 이 어려운 소임을 맡았다. 그는 오랑캐들의 만
지(蠻地)로 들어가서 형제지국(兄弟之國)의 의를 맺고, 무사히 돌아왔다.
때마침 역적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이괄이 패주할 때, 구사일생(九
死一生)으로 도망하여 한동안 구성(龜城) 땅에 숨어 있다가 아무래도 불안
하여 만주로 달아나, 후금국에 의지코자 했다. 거기에는 광해조 때 명나
라를 도우려고 출병했다가 잡혀서 아직까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
는 강홍립(姜弘立), 박난영(朴蘭英) 등이 있었다.
한윤은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고 강홍립, 박난영 등을 충동질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본국과 연락이 끊겨서 매우 궁금하던 차요, 그래 본국의
사정은 어떻게 되었소?"
강홍립이 궁금해 묻는 말에 한윤은
"말 마십시오. 광해군을 내쫓은 뒤로는 전에 벼슬하던 사람들까지 다 내쫓
고 있습니다. 민심은 새 임금을 싫어하여 이번에 이괄 장군이 반기를 들었
을 때만 해도 백성들은 크게 환영했습니다."
"음, 그럼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제가 듣기에는 장군의 가족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합니다."
사실에 있어서 공신들이 강홍립의 처자를 죽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었다. 그러나 강홍립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는 한윤의 말에 크게 노하
여 은근히 복수할 생각을 가지고 누루하칭게 동병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누루하치는 정충신과의 언약도 있고 해서 출병을 하지 않았다.
인조 4년에 누루하치가 죽고 그의 넷째 아들 홍타시(弘他時=皇太極, 뒤에
淸太宗이 됨)가 그 뒤를 이었다.
홍타시는 한윤과 강홍립의 못된 말을 듣고 군사 삼만명을 보내 조선을 치
게 했다. 홍타시의 군사는 회오리바람같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義
州)를 엄습하여 부사 이완(李莞)을 죽이고 계속해서 곽산(郭山), 정주(定
州)를 함몰시키고 청천강을 건넜다.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던 목사 김준(金浚)과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끝까
지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적군은 평양을 무너뜨리고 평산(平山)에 이르렀다. 이때는 벌써 조정이 서
울을 버리고, 묘사주(廟社主)와 대비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한 뒤이다.
홍타시는 자기 장졸들에게
"출병의 목적이 조선에서 시위하는 정도로써 유리한 조건 아래 화의를 맺
아 후고의 우려를 없이함에 있으니, 구태여 인명을 함부로 희생하여 조선
과 원수가 될 것이 아니다. 또 시일을 천연하여 전쟁이 오래 계속되게 하
는 것은 우리에게 불리한 노릇이니, 적당히 화의를 맺도록 하라."
이렇게 경고한 까닭으로 그들은 평산에서 더 진진하지 않고 사자(使者)로
유해(劉海)라는 항복 한인(降伏漢人)과 강홍립, 박난영 등을 강화로 보내
어 화의를 교섭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