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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시험에는 몇명이 응시했을까_?
※ 임금님도 시험으로 뽑았다면 어땠을까?
과거(科擧)는 양반(兩班)이 관직에 나가기 위한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또 법적으로 立身陽名할 수 있는 절대적 기회였다.
물론 이들에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조건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국인들이 사법고시와 같은 국가시험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과거제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前朝ㆍ고려 과거사적)
(최초의 과거 합격자 최섬_어디 최씨일까요)
신라시대에도 讀書三品科라는 시험이 있었으나 과거가 처음 실시된 것은 고려 958년 후주의 쌍기에 의해서다.
그러나 이때 과거에 몰려든 응시생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인구가 늘어난 조선시대는 응시생이 더 늘어났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1차 시험격인 小科를 거쳐 本科 시험을 쳤기 때문에 본과 응시생의 수는 원천적으로 제한되었다.
그런데 소과를 거치지 않고 한번에 치르는 시험이 있었는데, 영조 때 기록에는 이 시험에 무려 1만 8천명이 응시했다고 한다.
이것이 기록상으로는 最多이다.
식년시(式年試)는 유일한 정기 과거로 3년마다 한번 있었다. 식년이란 십이간지 중에
쥐, 토끼, 말, 닭띠 해를 말한다.
그 前年에 소과 初試를 보고, 그 해 2월에 소과 복시(複試)를 본다.
초시에는 각각 700명씩 도합 1,400명을 뽑았다. 여기에 성균관이나 지방 수령이 별도로 인재를 뽑아 소과 복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으니,
성균관에서는 10명, 개성과 수원에서는 4명, 제주도에서 2명이 정원이었다.
이 밖에도 관료들이 별도로 시험을 봐서 초시를 거치지 않고 복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인원이 많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초시를 통과한 사람들이 식년 3월에 한양으로 모여 시험을 치루는데, 규정대로 한다면 대략 1500명 정도가 응시한다.
여기서 생원 100명,진사 100명을 뽑는다.
생원,진사만 되어도 일단 양반으로서 행세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어사화ㆍ御賜花 (종이꽃)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