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61]저자著者가 사인한 책을 드리는 까닭
하아-, 최근 16년만에 출판기념회를 두 번 가졌다. 지난 2월 27일 서울, 3월 15일 전주. 유난스럽다 하겠지만, 나로선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내 인생의 ‘길동무’(학연 學緣 지연地緣 직장연職場緣 친인척親姻戚 서연書緣 등)들이 소생의 졸저 출간을 축하하며 한자리에 모여 밥과 술을 한다는 게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서울 70명, 전주 110명. 내가 마지막 눈을 감기 전, 이렇게 모여 '눈인사'를 하는 '사전死前 장례식(생전生前장례식?)'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게다가 단체로 구입한 160여권에 저자 사인을 하는 기쁨은 더욱 남달랐다. 내 생애에 나의 사인본 책을 받기 위해 줄서는 일도 생겼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흔할까 싶었다.
아무튼, 사인을 하려면 글씨도 잘 써야 한다. 다행인 것은 그런 ‘사인체’에 내 글씨가 조금은 어울린 듯도 싶었다. 흐흐. 후배들에게는 ‘아우’‘동생’‘學兄’이라 쓰고, 친구들에게는 ‘仁兄’ ‘雅兄’ ‘畏友’ 등을, 그냥 이리저리 아는 사람은 ‘oo님’이라 썼다. 이름 다음에 쓰는 ‘혜존惠存’은 ‘받아 간직하여 주세요’라는 뜻이다. ‘혜감惠鑑’ ‘근정謹呈’ ‘청람淸覽’ 등 여러 단어가 있지만, 한글로 ‘받으심’ ‘드림’이 좋겠다 싶어 그렇게 썼다. 이름과 이름 사이에 짧은 사연이나 드리고 싶은 문구文句를 써도 좋겠다. 나는 주로 “일일신日日新, 나날이 새로우소서!”라고 썼지만, 한참 선배나 어른께는 “늘 강건하소서”라고 썼다. 어쨌든, 사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는 이야기이다.
엊그제 분당에 있는 콜렉터(근현대사 도서나 각종 유물 수집가) 선배의 사무실에 들렀다. 이 분도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곳에서 아주 재밌는 도록 한 권을 빌려왔다. 이 글 직전에 쓴 ‘아름다운 사람(13)'편의 김종규(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선생이 2009년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전시한 <책을 건네다-저자서명본전展> 도록圖錄이었다. ‘아하- 이런 전시회도 가능하구나’‘이런 책도 있구나’ 호기심이 바짝 들었다. 이 도록은 한국의 각계 분야에서 내로라한 학자나 문인, 예술인 100명이 자신의 저서에 사인을 해 ‘문화계의 대부’ 김종규 선생에게 선물한 책들의 책표지와 사인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 만든 것이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어떤 사람인지 대부분 알 수 있는 존성대명尊姓大名의 인물들이 책이 나오자마자, 통과의례인 듯 보내온 것들. 어찌 인상 깊지 않겠는가. 작가 신봉승 홍사중, 문학평론가 장석주, 시인 고은 김남조 김후란 박노해 성찬경 오세영 이근배 구상 이근삼 김지하, 소설가 김주영 김훈 남지심 박범신 문순태 이호철 신경숙 한승원 현기영 황석영 전숙희, 수필가 원종성 이경희, 미술평론가 이석우, 건축가 김원, 만화가 박재동, 조각가 심문섭, 전각가 정병례, 자수박사 정영양, 교수 최정호 김우룡 김학준 문명대 김홍남 백낙청 이배용 이어령 정옥자 천혜봉 신영복, 언론인 김진현 홍성유, 성우 배한성, 관료 오명, 출판인 이겸노 홍지웅 윤형두, 외교관 이동원 양세훈, 법조인 한승헌, 스님 중광, 음향감독 김동찬, 배우 김혜자 최불암, 불교사학자 김상현, 복식연구가 김영자, 철학자 김용옥 김충렬, 수학자 김용운, 화가 김청강, 한학자 이성무 박석무 최범술, 보따리 수집가 허동화 등이 김종규 이사장에게 드리는 선물이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이름만 쓴 사람도 있지만, 한마디 말이나 그림을 남긴 저자도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저자와 독자의 소통행위인가. 자신의 책을 선물하는 진실한 마음이 친필 서명에 담겨 있지 않은가. 또한 자신의 책에 대한 책임의식도 있을 터이나 ‘기탄없는 질정叱正을 부탁한다’는 겸손한 자부심도 깔려 있다. 그러니, 저자로서 자기의 책을 읽어주는 독자, 저자로서 알아주는 독자가 있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다. 그에 대한 정중한 답례가 바로 서명(사인)행위일 것이다. 결론은 책과 책으로 이어지는 소통疎通이다. 이 또한 아름다운 행위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