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장애
우리의 전통 民話인 <청개구리 우화>를 보자.
어머니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는 새끼 청개구리가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東으로 가라 하면 西로 가고, 西로 가라 하면 東으로 갔다. 결국, 청개구리의 어머니는 恨을 품은 채 죽어가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아들아. 내가 죽거들랑 산에 묻지 말고 강가에 묻어다오”
왜 강가에다 묻어달라고 했을까? 자식이 반대로 할 줄 알고 그랬다. 이것은 평소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아들은 그동안 자신의 처신을 크게 뉘우치며 어머니의 유언대로 어머니의 시신을 강가에 묻어드렸다.
어느 날 큰비가 내리자 어머니의 시신은 강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 이후 비만 오면 아들은 강물에 떠내려간 어머니의 시신을 생각하며 구슬프게 운다는 것이다.
“청개구리 우화”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이 원했던 것은 자식의 효도였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소통 부재의 원인”은 부모에게 있었다는 것을 자인하고 말았다. 임종할 때조차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아들의 심성을 이용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소통은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만큼 열린다. 밥을 흘리며 먹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아버지 : “밥 흘리지 마라. 아빠 어렸을 때는 밥 먹기도 힘들었다”
아들 : “그럼, 라면 먹으면 되잖아요?”
과거에는 밥 먹는 것이 힘든 시대였지만 그러나 지금은 식당에서 손님이 남긴 밥과 반찬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린다. 만일 아깝다고 그걸 재활용했다가는 영업정지를 당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에서 소통의 장애를 일으킨 사람은 아들이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현실이 아닌 과거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의 배경을 가진 성경과 소통을 잘하려면 이스라엘의 고대문화를 아는 것은 필수다. 만일 현대문화로 성경을 해석하면 반드시 오류를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