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08
9월9일[연중 제2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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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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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09MRk3onNkc
(이병호 세바스티아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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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수님!>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이나 사회적 일탈 행위 앞에 법 집행은 엄정해야 마땅합니다. 때로 구금되어 수사를 받기도 합니다. 재판을 받아 톡톡한 대가를 치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상 참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인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부인이 참다 참다 폭발한 경우라든지, 극심한 가난이나 오랜 병수발로 인해 야기된 사건 등등.
언젠가 굶주리는 자녀들을 보다 못한 젊은 엄마가 대형 마트에서 식자재를 몰래 가져 나오다가 들킨 일이 있었는데, 소문을 전해 들은 지역 주민들의 선처 호소가 이어졌고, 그 가정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법행위를 습관적으로 저질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공동선을 위해 제정된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처한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사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법이 제정된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법, 사람의 영적 육적 건강을 위한 법,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든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법 규정이 점점 불어나고, 가지를 치고, 세분화되면서, 나중에는 사람을 위한 안식일 법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법, 사람을 꼼짝달싹 못 하게 옭아매는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따르면, 안식일 당일날, 주중 계속된 과중한 업무에서 손에 떼고, 몸과 마음을 편히 쉬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더없이 좋은 것입니다. 원한다면 강변길을 따라 마음 편히 산책을 하거나, 좋아하는 운동도 원 없이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시장도 보고 요리도 해서 나눠 먹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 잘난 안식일 규정에는 그 모든 것들이 다 금지되어 있습니다. 몇 걸음 이상 걸으면 절대 안 됩니다. 운동을 물론 절대 금지입니다. 요리를 한다거나 텃밭을 가꾸는 것도 안됩니다. 그저 하루 온종일 대리석으로 된 석상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게 무슨 법이며, 무슨 웃기는 짬뽕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형식적인 안식일 규정을 보란 듯이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그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갖은 법이나 규정에 앞서 한 인간 존재를 더 중요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앞에 서 있는 한 인간 존재가 이런저런 규정에 매여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충만히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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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QZlQw8dG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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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를 키우는 새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보고는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물음은 곧 ‘구원’에 관한 물음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간의 일을 마치시고 7일째 쉬신 시간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이렛날 쉽니다.
우리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나에게 영혼을 구원하라고 일을 시키신 분 안에서 쉬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영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당신의 일을 하는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의 집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 자기 뜻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그분께 순종하는 새로운 아담들입니다.
영화 ‘비바리움’(2019)은 인간이 왜 고생은 하는데 안식이 있을 수 없는지를 고찰하는 내용입니다. 이야기는 함께 첫 집을 구입하려는 젊은 부부인 젬마와 톰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 초반부에 뻐꾸기 새끼와 그가 밀쳐내 떨어져 죽은 다른 새들의 새끼들이 나옵니다. 한 아이가 왜 뻐꾸기는 자기 집을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젬마는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떨어진 두 마리의 새끼를 묻어줍니다. 어미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뻐꾸기 새끼에게 음식을 물어주며 지쳐갑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법칙에 사로잡히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줍니다.
젬마와 톰은 부동산 중개소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조금 이상한 세일즈맨 마틴을 만납니다. 그는 욘더라는 새로운 개발 주택지를 보도록 초대합니다. 도착하자마자 마틴은 사라집니다. 그들은 욘더를 떠나려고 할 때 어느 방향으로 운전해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항상 같은 집인 9번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그들은 연료가 떨어져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합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안에 아기가 들어 있는 상자와 “아이를 키우고 석방되라”라고 적힌 메모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이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곳에 갇혀 자기 아이가 아닌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아이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
98일째가 되면 아이는 아이보다 어른처럼 행동하고 소름 끼치고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톰과 젬마의 소리와 행동을 모방합니다.
톰은 땅이 가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앞마당을 파기 시작합니다. 젬마는 차에 들어가 지난날의 향수에 빠져듭니다. 결국 소년은 이상한 부동산 중개업자 마틴의 복제품으로 성장합니다. 톰은 땅을 파다 지쳐 죽고 맙니다. 아이는 톰을 비닐에 싸서 톰이 파 놓은 땅에 던져버립니다. 분노한 젬마는 소년을 죽이려 하지만 도리어 압도당하고 결국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소년은 역시 젬마도 구덩이에 던져 묻습니다. 이후 그는 여행 가방을 싸고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와 늙어 죽은 마틴의 이름표를 달고 미래의 톰과 젬마처럼 될 순진한 커플들을 맞이합니다.
‘비바리움’은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며 감시하고 실험하는 곳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희생합니다. 여기에서 뻐꾸기 새끼, 혹은 마틴이라는 톰과 젬마가 키운 아기는 자기 안의 자아입니다. 탈출기에서는 파라오가 될 것입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것들에게 이용당하고 죽게 됩니다.
누구나 어떤 시스템이나 법에 지배받습니다. 내가 있는 욘더라는 곳은 내가 지배받는 자아의 시스템입니다. 결국 나는 새로운 법의 시스템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시스템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뻐꾸기 새끼에게 지배받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길은 뻐꾸기 시스템을 이길 수 있는 누군가에게 길러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길러진다면 자기 새들을 죽이는 뻐꾸기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집에 머물려면 인간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의 법을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뻐꾸기의 시스템을 벗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 뜻에 따라서 그분 집에 머물지 않으면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아의 시스템 안에서 안식을 찾으려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벌써 하느님의 집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뜻을 주님께 강요하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이라야 안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나의 뜻 자체가 나의 안식을 빼앗습니다. 마치 파라오처럼 나를 종살이시킵니다. 오직 주님의 뜻만이 그 뱀의 압제에서 나를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안식을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뜻을 따르느냐가 어느 집에 머무느냐를 결정합니다. 어느 집이건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의 집에 살면서 안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따르는 법, 곧 욕구가 내가 사는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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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1-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절)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본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해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것보다,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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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꿈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32년 전 이맘 때 저는 첫 본당에서 새 사제가 되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제 의식의 저편에서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다른 꿈들도 있지만 가끔 이렇게 미사를 봉헌하는 꿈을 꾸곤 합니다. 새 사제의 첫 미사 강론은 대부분 ‘아버지 신부님’이 해 주십니다. 아버지 신부님은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준 신부님을 말합니다. 아버지 신부님의 강론은 사제생활의 이정표가 되기 마련입니다. 신부님들은 크게 4가지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샘이 깊은 물과 같다고 하십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다고 하십니다. 유혹과 갈등이 찾아와도 이내 이겨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말씀입니다. 사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가까이 하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건강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네 번째는 친교입니다. 사제는 동료사제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아야 하듯이 사제는 교우들과 친교를 이루면서 지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슴이 사나운 사자에게 잡히는 것은 무리에서 떨어져있을 때입니다.
우리의 뇌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반응입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지체할 수 없는 반응입니다. 우리의 심장, 허파, 신장, 혈관은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뇌가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율신경계라고 합니다. 위험에 처하면 우리의 몸은 생각하지 않고 즉시 피하기 마련입니다. 오랜 시간 뇌는 이런 기능을 통해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도록 진화하였습니다. 이것을 본능과 직관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문화와 문명을 키워가면서 또 다른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민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에만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방 정리를 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며칠씩 생각만 하기도 합니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전화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에 머물기만 하면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고, ‘기쁜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생각에만 머무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은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정하였습니다. 안식일에 해서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계명과 율법이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안식일의 규정도 버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직원회의를 할 때입니다.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직원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직원이 있습니다. 저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직원이 더 고마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 보면 ‘해결사’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안 되는 방법을 찾는 바리사이가 되기보다는 되는 방법을 찾는 주님의 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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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원수들과 화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길을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우리가 온전한 관계를 되찾도록 그 사이에서 중개자로서 사명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겪으신 수난과 죽음이 이 화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의 중개자로 뽑히신 이유는 바로 그분께서 지니신 충만함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 가까운 “그리스도 찬가”(콜로 1,15-20)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15절 참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창조된 만물은(16절 참조) 온갖 충만함이 머무는, 그분 안에서(19절 참조),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20절 참조).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에 하느님과 원수로 지내던 시절을 청산하고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화해는 충만함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고귀한 피의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면, 이는 화해 이전에 하느님의 원수로 지내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고 이미 화해를 이룬 우리는 언제나 그분 안에 머무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나서며, 우리의 걸음은 계속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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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22장 3절 / 26장 5절 참조) 그러나 다마스쿠스 사건을 체험한 뒤(사도행전 9장 1절-19절 참조) 그는 자신이 받은 모든 종교적 특권과 윤리적 노력이 하찮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다만 옛것이기에 버린 것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을 자신들의 위선으로 왜곡하여 하느님께 가는 구원의 길을 막았고 그들의 행동은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 ‘물질적인 것에 대한 믿음’ 에서 나왔으므로 하느님 계명의 본질적인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갈라디아서 1장 12절)이기에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통하여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참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도 중요하고, 그 정신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우리’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몸소 오시어 구원하시고자 한 대상인, 바로 우리 ‘사람’인 것입니다. 혹시 사람보다 일을, 돈을, 명예를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의 어떤 것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는 않나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곧 사라져 버릴 것에 믿음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께서 만드신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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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은총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복음 6장 2절)
그들이 트집 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일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 5장 17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마태오 복음>의 병렬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2장 7절)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병렬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코 복음 2장 27절)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기 23장 12절)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막을 가리던 휘장을 찢듯, 율법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말씀으로 은총의 새 옷을 입히십니다.
앞 장면에서 단식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이제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복음 6장 5절)
오늘 우리는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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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를 위한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 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라면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얽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참례를 하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성체를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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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베네딕토 성인은 서방 수도 생활의 초석이 담긴 ‘규칙서’를 쓰셨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세웠고, 그 안의 수도자들에게 절대적으로 금지한 한 가지가 규칙서에 담겨 있습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을 죽이는 것? 교회에서 도둑질하는 것? 여성과 함께하는 것? 기타 십계명에 어긋나는 것들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절대적으로 금지한 한 가지 규칙은 바로 ‘불평’입니다. 규칙서에는 그 내용이 이렇게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어떠한 이유로든지, 어떤 말이나 혹은 표시로라도 불평의 악을 드러내지 말 것이며, 만일 이런 자가 있거든 더욱 엄한 벌을 내릴 것이다.’(규칙서 제34장)
불평만큼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이 있을까요? 불평 속에 있으면 제대로 행동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 역시 죄 안에 빠지게 만듭니다. 또 불평이 커질수록 이를 멈추게 할 방법도 없어집니다. 스스로 멈출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 안에 하느님의 일이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평하면서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으니, 그 일 자체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 불평을 자주 했음을 반성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자리가 아닌 악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불평보다 인내와 호의를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평 섞인 의견은 나 혼자만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바리사이 몇 사람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을 보고는 예수님께 불평 섞인 말을 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겨우 밀 이삭 몇 개 뜯어 먹었다고 시비를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 불평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편에 서지 않고, 또 특별한 권위로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불평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철저하게 예수님 반대편에 서면서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게 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행동으로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참으로 많은 불평 속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불평의 악을 통해 마귀의 자리만을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평을 줄이고 대신 인내와 호의의 마음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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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일 쉼>
루카 6,1-5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 일 쉼>
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지요
쉼을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요
쉼을 위해 쉬는 것은 아니지요
일을 위해 쉬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사람을 위해 쉬는 것이지요
사람이 일해야 할 때 일할 수 있고
사람이 쉬어야 할 때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이기에 일할 수 있고
사람이기에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고
사람으로서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답게 일할 수 있고
사람답게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이 일을 위해 있지 않고
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요
사람이 쉼을 위해 있지 않고
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요
일도 쉼도 사람을 옥죄지 않고
사람이 일도 쉼도 누려야지요
이런 세상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지요
이런 세상이 바로
살맛나는 세상이지요
이런 세상이 바로
하느님나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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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 안에 쉬고,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의 아들은 누구이고, 안식일의 주인이란 무슨 뜻일까요?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심은 이 세상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 행세치 않으시겠다는 의지의 표시인데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당신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악마가 깨려고 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유혹받으실 때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악령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해보라는 말로 깨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 유혹을 깨고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지켜내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겁니까? 그것은 당신이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주님과 우리 모두를 일컫는 것이며 그러니 사람의 아들이 안식의 주인이라는 말씀도
주님과 우리 모두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윗과 다윗의 일행이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음으로써 하늘의 양식, 천사들의 빵을 훔쳐 먹었던 것처럼 주님과 우리도 하늘의 음식을 훔쳐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마르코복음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거기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란 뜻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뜻이며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쉬게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인간답게 하기 위함입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의 노예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 시골에 가서 마늘 수확을 같이한 적이 있습니다. 해 뜨면 밭에 나가고 해 지면 돌아와 미사도 드리고 교리도 하곤 했는데 그때 같이 일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나는 사람도 아냐. 소야 소! 그저 눈 뜨면 일만 하니.’라며 푸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식일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것이고, 안식일 법도 이런 사람들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것인데 부자들은 이 법을 지킬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은 정작 지킬 수 없었기에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다른 차원에서 성찰할 것이 있습니다. 안식일이 일을 쉬는 것에 그치거나 심지어 노는 것뿐이라면 이것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비신앙인의 안식일일 것입니다. 신앙인의 진정한 안식은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하느님 사랑 안에 잠기고 사랑으로 재충전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을 지내고도 그리고 주일 마사를 봉헌하고도 사랑할 수 없고 일에 지친다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안식일이 사랑 안에 쉬는 안식일,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안식일이 되어야겠습니다.
어제 성모님 생일이 왜 2,020회냐는 의문을 제기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2,023회째이니 성모님 생일은 2040회째쯤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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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일치의 중심>
-참 권위의 예수님을 닮읍시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ㄱ)
요즘처럼 나라 걱정 많이 하는 분들을 만나기는 생전 처음입니다. 면담고백성사때도 자연스레 나오는 나라 걱정 이야기들입니다. 어제도 대전에서 40대, 청주에서 30대 초등학교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입니다. 역시 오늘 밤도 기상하여 집무실에 들어와 어제처럼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육창후 강론을 씁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면담고백성사후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써드린후 보속 하나 더하여 애국가 1절을 부르도록 합니다. 들을 때 마다 감동이요 부르는 이도 마음 차분해지는 분위기입니다. 아, 정말 “일치의 중심”이 되어 나라와 국민을 섬기고 사랑하여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참 권위를 지닌, 기도하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정의롭고 용기있는 나라 지도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라 세우기는 시간 오래 걸려도 나라 망해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일치의 중심-참 권위의 예수님을 닮읍시다-”로 어제 이미 정해 놨습니다. 교회공동체 역시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이라 하지만 가시적 중심의 장상인 지도자의 리더십은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나라 공동체, 가정 공동체등 모든 공동체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일치의 중심이 되는 분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말그대로 참권위의 핵심인 섬김의 리더십이, 사랑과 지혜를 겸비한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교회공동체로 말하면 궁극의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을 날로 닮아가는 지도자요 공동체의 성원들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어제는 뒤늦게야 깨달음처럼 참 반갑고 기쁘고 고마운 성모님 축일임을 화들짝 놀라 깨닫고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할 때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데, “어머님 생신”이라 말을 바꾸니 즉시 마음에 와닿으며 정말 성모님은 영원히 내 어머님이란 생각에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효성스런 자녀로서 날마다 어머니 생신처럼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머님 은혜라는 동요도 듣고 불러봤고 고인이 된 돌아가신 육친의 어머니도 생각났고, 예전 어머니를 그리며 일부 대목도 떠올랐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 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같애”
늦게서야 성모 마리아 어머니 생신임을 깨달아 참으로 오랜만이 어머님 은혜 동요를 불렀고 성모 마리아 어머님을 연상하며 산책중 자주 불러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불어 나이들어갈수록 그립게 떠오른 육친의 어머님 생각에 예전 글 일부도 나눕니다.
“어머님은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은 분이셨다
애교나 아양은 거의 없었지만
강인한 의지에 아주 지혜로운 분이셨다
심한 밭일에 몸 많이 피곤하여
밤에 끙끙 앓으셔도
아프다는 내색 하나 않으셨다
아버지 원망하는 말 하나 들은 적 없고
큰 소리 내셔서 다투거나
화내신 적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 거나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내 어머니”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예수님은 물론이고 가톨릭 교회의 일치의 중심의 되시는 참 권위의 성모 마리아 어머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큰 일 났구나! 이를 어쩌나 나라가 무너지겠다!”
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 과장의 “2023 교사 직무 관련 마음 건강” 실태 조사 결과를 인터뷰한 내용을 출력하여 정독한 결과, 저절로 쏟아진 탄식이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실태조사에 응한 교사들의 주관식 답변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마디였다 합니다. 일반 성인 대비 4배 많은 38.3%가 심한 우울을 겪고 있으며, 16%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합니다. 교사들의 업무 부담 요인 중 수업은 3.2%에 불과했고, 학부모 상담 민원(37.5%) 및 생활지도(28.4%)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과장의 언급도 참 심각했습니다.
“교직생활을 하며 예상과 다른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스스로가 무너지고 갈수록 스트레스가 커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도를 통해 해결하기는 너무 늦습니다. 우선 위험에 처한 교사들을 빨리 도와야 합니다. 일반인은 가벼운 우울 증상이 20% 정도고, 심한 경우가 8-9%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는 가벼운 우울이 60%이고, 심한 우울은 40% 가까이 나왔으니까요. 서비스직 노동자의 경우에도 대개 15-20% 정도입니다.”
저에겐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70년대 8년동안 아이들 교육에 전 삶을 걸었던 “20대 후반-30대 초반까지” 초등학교 교사시절에는 꿈에도 상상치 못할 오늘의 지옥같은 교육 현실입니다. 미래의 주인공들인 어린이 교육을 책임진, 누구보다 정신 건강하고 학교에서의 아이들 공동체의 참 권위를 지니고 일치의 중심이 되어야 할 교사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니 이들을 그대로 보고 배울 어린이들이 어른이 될 미래의 모습은 어떻겠는지요!
악순환입니다. 이런 교사들로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나오기 힘듭니다. 정말 교사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처우 개선이 절박하며, 교사들 역시 분발하여 내외적으로 강인해져야 할 것입니다. 정말 치열한 영적전쟁의 싸움터에서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나라의 총체적 위기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나라의 실상을 보는 듯 했습니다. 현재를 보면 미래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나무처럼, 평생 잘 길러내는 인재여야 하는데 참 난감한 현실입니다. “이를 어쩌나, 큰 일 났네!”그래서 한밤중 일어나 나라 걱정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분발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일치의 중심이 되어 참 권위를 지닌 삶이 되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구체적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나라 사랑입니다. 삶은 평생 영적전쟁이요 평생 학교입니다. 믿는 이들은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요, 죽어야 졸업은 영원한 학생의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나와 싸워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우리의 일치의 중심이, 참 권위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선택-훈련-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섬기는 것이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이요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이렇게 섬김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닮아갈 때 각자는 공동체 일치의 가시적 중심이 될 수 있고 저절로 참 권위도 은총의 선물처럼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각자 주인 의식을 지니고 지도자처럼 일치의 중심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외부의 공격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되고 제자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해하여 이들을 두둔해 주는, 공동체 일치의 빛나는 모델임을 보여주는 다음 참 권위의 주님이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얼마나 멋진 일치의 중심이자 참 권위를 지닌 다윗이요 예수님인지요! 이분들의 자유로운 처신을 통해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해 있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자부심이 이런 자존감 높은 삶에 자유로운 처신을 가능하게 했고,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참 권위의 사람, 공동체 일치의 중심으로 만들어 줬음을 봅니다.
일치의 중심이자 참 권위의 사람, 바오로 사도의 권고 가르침도 참 적절합니다. 이대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 훈련하여 습관화하면 우리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일꾼이자 참 권위를 지닌 일치의 중심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일꾼! 얼마나 멋진 칭호입니까? 정말 복음의 일꾼으로 살 때 저절로 참 권위를 지닌 일치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사람들인 우리에게 참 고맙고 자랑스러운 사실은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일치의 중심의 모델인 참 권위의 성인들을 무수히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또 참 권위를 지닌 일치의 중심으로 살게 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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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6,2)
<(1)주일의 참의미!>
오늘 복음(루카6,1-5)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6,2)
'그렇다면 안식일, 곧 주일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려 주신 십계명 중에 제3계명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인데,
'주일을 거룩히 지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주일(안식일)에 해야 할 일은 단순하게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은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주일의 본질', 곧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의 본질'은 복음(기쁜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금 확인하고, 내가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한 주간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충실하게 살지 못한 허물(죄)에 대해 용서와 자비를 청하고, 하느님의 자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본질이요 주일을 거룩히 지냄에 대한 본질'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콜로1,21-23)에서 우리에게 선포된 복음(기쁜소식)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1,21-22)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예수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결정적으로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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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복음 6장 2절)
<(2)안식일에 대한 성찰!>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율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사업을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신 것에서 시작된 규정입니다.
안식일에는 39가지 노동을 금지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추수작업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을 추수작업으로 보고,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예수님께 항의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규정 자체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질과 오히려 안식일에 해야 할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본질과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콜로새서 1장 21절-22절)
이렇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나를 살려주신 하느님, 나의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더 깊게 머무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힘입어 다시 일어서는 날', 곧 '부활의 날'입니다.
안식일인 주일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복음 6장 5절)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주일을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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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dbRBrtDb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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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 2)
우리자신을
알게 하는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의 정신에
먼저 도달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자라게 하는
안식일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키우는 것은
안식일의
사랑입니다.
안식일의 사랑은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시는 행복한
사랑입니다.
행복과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실천하게 하시는
안식일의
본질이시며 참된
주인이십니다.
사람이 아니라
물질을 섬기기에
안식일은
공허합니다.
결코 물질로
채워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안식일도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마음을 열면
사람이 보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는
사람을 살리는
나눔과
배려입니다.
나눔이 사라진
안식일과
배려가 사라진
안식일은
함께 살아가는
공생(共生)의
정신을
잃어버린
안식일입니다.
완벽한 사람
완벽한
안식일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사람의
안식일입니다.
소중한
안식일의
가치를
짓밟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매정한
마음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이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변화되길
기도드립니다.
해야할 일을
실천하는
안식일의
고귀한
실천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랑을 실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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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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