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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 턱을 책상 위에 대고 눈을 치켜 뜨고 문을 연 사람을 바라보았다.
“헉!”
놀란 그녀가 일어나려다가 책상에 걸려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왜..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알아.”
“아직 퇴근 안 한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말할 지 내 머릿속에 괜찮은 생각이 아직은 없어요.”
“이 건물에 경비 빼고 다른 층 여자 직원 한명 말고는 우리 뿐이야.”
“맹세해요. 당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걱정을 하는 거라면..”
“틀려..”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문에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려고 움찔했다가 다시 그 자리를 지켰다.
“떠날 건가?”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으로 그 쪽 사람들을 어떻게 속일 생각이지?”
혜영이 고개를 숙였다.
“한성씨가 말하는 ‘그들’ 이 누구인지, 뭘 하는 사람들인지도 전혀 몰라요. 단지..”
“당신 언니를 쫓고 있다는 것만 아는 건가?”
그녀가 놀라 토끼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을 감고 고통을 참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그게 중요해..? 문제는 당신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거야. 많이 알수록 그들을 피할 수 있어.”
“자꾸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않는다면 문제없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네. 더는 힘들어서..”
그가 몸을 돌려 벽을 짚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괘.. 괜찮아요?”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살에 맞은 건 난데 왜 당신 얼굴이 더 창백하지?”
그녀가 숨을 들이마신 채로 멈추었다.
‘화살로 쏘다니.. 도대체 언니는 왜..’
“일부러 그런 건..”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맞아. 내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 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을 거야.”
그가 비틀어 하는 말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사람을 헤치는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너무 가까이에 다가오니까..”
“그 여자를 쫓은 게 아니야. 단지.. 쓰러질 것 같으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고.”
그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사무실을 빠른 동작으로 정리하고 가
방과 코트를 들고 나왔다.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몸을 기대고 힘겹게 서 있었다. 그녀가 손
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어떻게 하지? 가까이 하면 안 되는데.. 아픈데 집에는 어떻게 가지? 택시만 잡아서 태워 주면 될 것 같은데.. 설마 아픈데 무슨 짓을 하겠어?’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하고는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했지만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부축해 드릴게요.”
“뭘 해줘? 나보다 키도 작고 몸무게도 훨씬 적게 나가는 당신이 무슨 수로 날 부축해 주겠다는 거야? 음~~.”
그가 턱에 힘을 주고 눈을 감았다.
“신경 쓰이니까.. 그냥 가.”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그가 힘겹게 움직이자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
다. 그들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그가 벽에 몸을 기대며 팔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 그러다
상처부위가 벌어지자 고통에 그의 숨이 헐떡였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녀는 가슴
에 이상한 느낌이 들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당신 갈길 가. 난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멀리 도망가라고. 당신 언니가 경고했듯이.”
“일단 한성씨가 나으면요. 그 때는 멀리 도망갈께요. 지금은.. 그 몸으로 뭘 하실 수 있겠어요..”
그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로 안전하지 못할 거야. 힘든 척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지?”
그녀의 눈에 놀람이 스치고 심장이 더욱 거세게 울렸다.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마른 침을 삼키고 그녀가 물었다.
“그.. 그래요?”
“이번은 아니야. 하지만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믿지 말라고..”
1층이 아닌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자 그가 턱에 힘을 주고 바르게 섰다.
“떨어져.”
“네?”
“떨어지라고..”
그가 힘겹게 팔을 들어 그녀를 반대편으로 밀었다. 그녀가 중심을 잡았을 때 문이 열렸다.
“늦게 퇴근하시네요?”
“네. 지금 퇴근하세요?”
혜영이 밝은 표정으로 여자 직원에게 인사를 했다. 여자 직원은 한성 근처에 안 가고 그녀 옆에 와서 섰다.
“소문에 영국에서 온 근사한 분과 데이트를 하셨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났어요?”
“사진을 갖고 있다는 사람도 있던데요?”
“그래요? 그건 좀 곤란한데.. 그 분이 돈이 많으셔서 초상권 침해로 법적대응 하실까봐 그게 걱정이네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좋으시겠어요~.”
“네.. 멋진 분이랑 저녁식사를 하니.. 꿈 같더라고요.”
“부러워요. 다음에 그 분 친구 분이라도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네.”
1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여자직원과 혜영이 먼저 내렸지만 그는 내리지 않는 듯 했다. 혜영은 옆의 직원 때문에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건물을 나갔다.
“저는 택시 타려고요. 어느 방향이세요?”
“아.. 저는 지하철 타거든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두 사람이 헤어지고 그녀는 지하철 역으로 가는 듯 발걸음을 옮기다가 택시에 올라 출발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 멈춰서 있었다. 그녀가 버
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여 1층에 도착했다. 안에 탄 그녀가 얼른 지하 2층 버튼
을 누르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 도착하자 뛰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성을 찾아내고 뛰어 다가갔다. 그는 눈을 감고 비지땀을 흘리
고 있었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녀가 그의 이마에 손을 대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키가
큰 그의 이마에는 손이 닿지 않았다. 그녀가 껑충거리며 이마의 땀을 닦으려고 하자 그가 그
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떠 그녀의 손에 있는 손수건을 잡아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
을 닦았다.
“아는 사람이 데리러 올 거야. 어서 가. 누가 보면 뭐라고 말할지 생각 못 했다면서..”
“고열에 감기 몸살까지 걸려 아픈 한성씨를 아는 사람이 데리러 올 때까지 보고 있었다고 말하면 돼요.”
“완벽한 거짓말도 진실도 아니네..”
“원래 이야기는 진실 반, 거짓 반일 때 제일 잘 믿게 만들거든요.”
“똑똑한 것 같지만 바보야, 당신은.”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멀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히 이대로 집에 간다고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
만 언니가 당신을 다치게 했으니까..”
“그 책임을 당신이 진다고?”
“이기적인 마음이에요. 그냥 한성씨가.. 아프지 않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이기적인 마음이 나한테는 다정하게 보이니.. 확실히 나도 정상은 아니네..”
멀리에서 차 한 대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도혁이 들었다.
“나를 태우러 차가 들어올 거야. 어서 가. 저 녀석이 당신을 보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걱정하는 거라면.. 당분간 어디로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네?”
“어디로 도망가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금방 건강해져서 나타날 테니까..”
그녀가 곧 쓰러질 것 같은 그를 바라보았다.
“약속해요. 아무데도 안 갈 테니까.. 며칠 쉬시면서 얼른 건강해져서 오세요.”
“100% 믿는 건 아니지만.. 얼른 가야 할 것 같아.”
“조심해서 가세요.”
“당신도.. 오늘은 지켜보지 못 하니까..”
“네.”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던 혜영이 엘리베이터에 다시 오르고 문이 닫혔다. 잠시 후 검은 차
가 도혁 옆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진혁이 달려와 도혁의 아프지 않은 어깨 아래쪽으로 몸
을 넣어 부축했다.
“그러게 출근하지 말라니까. 말도 징글맞게 안 들어..”
“어지러워. 그만 쫑알거려..”
“알았어. 조심해서 타.”
도혁이 누울 수 있도록 뒷좌석에 태우고 문을 닫은 후 진혁이 운전석으로 가서 차에 앉아 출
발시켰다. 도혁이 식은땀을 흘리며 시트에 누웠다. 팔을 들어 이마 위에 올리니 손에 들린 그
녀의 손수건이 보였다. 진혁이 보기 전에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서.. 삽사리푸들은 도망갔어?”
“아니..”
“내일은 도망 갈 거래? 그러던지 말든지, 내일은 쉬는 거야. 알았어? 내가 회사 CCTV 모두 연결해서 화장실 갈 때도 노트북 들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응?”
“그래..”
“그래야지..”
진혁이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점점 기운이 없는 도혁은 턱에 힘을 주고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감돌았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혜영은 4층까지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깊은 한 숨을 내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과 코트를 벗어 내려놓고 책상에 다가가 커튼을 치고 의자에
앉았다.
“괜찮겠지?”
그녀는 그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도.. 오늘은 지켜보지 못 하니까..”>
“그 말은 그 사람도 내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헷갈려.. 후우..”
그녀가 눈을 감았다.
집에 도착한 그를 원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은땀에 옷이 온통 축축해져 있었다. 그를 침대
에 눕히고 옷을 벗긴 후 따뜻한 물에 적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상처를 소독하고 약
을 발랐다. 그에게 간단한 스프를 먹이고 약을 먹였다.
“자라.”
“네. 형수님 혼자 가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은 네 몸 걱정만 해.”
“죄송해요.”
“다 낫기만 해 봐..”
진혁이 궁시렁 거리며 바닥에 놓인 옷가지를 줍자 원성이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만 해. 다 낫거든 그 때 말하자고. 응?”
“네. 영감도 얼른 가요. 형수 혼자 고생하잖아.”
“그래. 그럼 네가 수고 좀 해라.”
“조심해서 가요. 멀리 안 나가.”
“그래.”
원성이 나가고 진혁이 빨래를 분류해서 넣었다. 그러다 재킷 주머니에서 살짝 삐져나온 것을
보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끝을 잡아당겼다. 분홍색에 테두리가 흰색 물결무늬에 보라색 작은
꽃이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여자 손수건? 설마..”
진혁이 짜증나는 표정으로 도혁이 누워 있는 방을 노려보았다.
“그거 들었어? 루저 말이야. 병가냈다면서?”
“그렇대? 바보도 어디가 아픈가?”
다들 키득거렸다.
“그렇게 말 하지 마.”
솔희가 말했다.
“왜?”
“사람은 누구나 아프잖아. 그렇게 말 하면 기분 좋아?”
“뭐 어때?”
“다음에 너 아파서 이 모임에 빠지면 볼 만하겠다.”
“뭐야~. 설마 내 얘길 하려고?”
다른 직원들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자 “뭐야. 진짜 그럴 거야?” 라고 말했다.
“아니야~. 우리끼린 안 그러지.”
하지만 혜영도 솔희도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알고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말이다.
“기분은 혜영이가 나빠야지, 네가 왜 기분 나빠하는데?”
“나도 너희들이 박한성씨말고 다른 사람들을 루저라고 부르는 것 까지는 뭐.. 너희들의 오랜
재미니까 그렇다 치지만 옆에 있는데 대놓고 놀리는 걸 모자라 아픈 사람을 놀리는 건 진짜
못 봐주겠다. 그리고 혜영이가 왜 기분 나빠 하는데?”
“어젯밤에 같이 퇴근했다면서?”
“무슨 근거 없는 소리야?”
“맞아. 같이 퇴근했어.”
다들 놀란 표정으로 혜영을 바라보았다.
“왜?”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퇴근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거든. 그런데 식은땀을 흘리면서
힘들어 하더라고.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3층에서 탄 여자 직원이랑 나는 1층에서 내리고 그
사람은 안 내렸어. 거기까지 같이 퇴근 한 셈이지.”
“뭐야~. 그건 같이 퇴근 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네. 그런데 아파보였어?”
“감기 몸살에 고열까지 시달리는데 어제 무리해서 출근 했다고 하더라고.”
“그렇구나. 어제 안색이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나는 또 에반스씨 만나서 큰 상처를 입어서 그런 줄 알았지.”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
다들 쿡쿡 웃음을 터트리려다 솔희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는 참았다. 혜영은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연락할 방법도 없고, 그녀가 그에게 연락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오후에
열심히 일을 찾아가며 시간을 보냈다.
“흐익~! 무슨 일을 그렇게 해? 이러다 쓰러져~.”
“그냥.. 시간이 안 가서.”
“쉬엄쉬엄 해.”
솔희가 과자를 내려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혜영은 넘어갈 것 같지 않아 서랍에 넣고 다시 일을 했다.
도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몸이 조금 가뿐한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진혁이 문을 열고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났어? 밥 여기로 갖다 줄까?”
“나가서 먹을게.”
“그래. 부축해 줘?”
“아니야. 푹.. 잘 쉰 것 같아. 얼마나 누워 있었냐?”
“음.. 정확히 78시간 24분.”
“오래도 잤네..”
도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어깨를 구부렸다가 폈다.
“괜찮아 진 것 같은데?”
“한 번 볼까?”
“응.”
진혁이 다가와 붕대를 풀고 거즈를 젖혔다. 상처가 아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응. 많이 좋아졌네.”
“밥 먹어야겠다.”
팔에 꽂힌 수액바늘을 빼고 팔을 구부린 채 거실로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진혁이 나와 주방에 들어갔다.
“죽 줘?”
“밥 줘.”
“알았어.”
진혁이 미수가 만들어 준 음식을 렌지 위에 올리고 불을 올렸다.
“형수님 오셨다가 가셨니?”
“응. 걱정 많이 했어. 영감도 형수도. 형수가 욱 했었지. 그 여자 나타나면 가만 안 둔다고. 그랬는데 삽사리푸들 언니라니까 움찔하더라. 그래도 화는 냈어. 형 다치게 했다고.”
“응.”
진혁이 끓은 찌개와 반찬을 내려놓고 밥을 퍼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물로 입을 축인 그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제 건강해졌으니까 말 해. 뭐야?”
“뭐긴 뭐야?”
“그 여자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 그 여자 언니가 쏜 화살에 비명횡사할 뻔 했는데. 그 여자가 도망 갈까봐 죽을 것 같은 몸으로 출근을 해? 도대체 그럴 가치가 있어?”
“나도 모르는 이유를 묻는 거라면 대답할 게 없는데?”
“음음~!”
진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 지하주차장에 같이 있었다는 증거가 이렇게 있는데?”
진혁이 서랍에서 손수건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도혁이 손수건을 보다가 숟가락을 들어 찌개를 떠서 입에 넣었다.
“음.. 같이 있긴 했지. 식은 땀 닦으라고 준 거야.”
“병 주고 약 주나? 언니는 아프게 하고 동생은 형을 걱정한다고? 바보같이 또 믿어? 그 여자를? 형을 따돌리려고 남장까지 서슴지 않는 그 여자를 믿는다고?”
“맛있다. 밥 한 그릇 더 주라.”
밥그릇을 비운 도혁이 진혁에게 내밀었다. 진혁이 밥그릇을 받아 들며 밥솥 뚜껑을 열고 밥을 뜨면서 말했다.
“믿지 마. 알았어?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르니까.”
진혁이 몸을 돌려 도혁 앞에 밥그릇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혁은 대답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진혁이 썩은 표정을 지으며 “쯧..” 혀를 찼다.
“무슨 뜻이지? 계속 믿겠다는 거야?”
“내일은 출근 할 수 있겠다.”
“미치겠네.. 형~. 왜 그러지, 진짜? 내가 요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미안해. 조심할 게.”
“멀리 하라고. 응?”
“노력해 볼게.”
“그게 왜 안 돼? 매력적이지도 않고, 예쁜 건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몸매가 봐 줄만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쪽에게 쫒기고 있는 엄청 위험한 자를 언니로 두고 있는데 괜
히 가까워졌다가 형이 다칠 수도 있어. 그들 사이에 끼면 곤란하다고.”
“네가 무슨 뜻으로 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 여자도 피해자야. 그런 가족을 보호해야 하기 때
문에 꾸미지도 못하고 데이트도 못해. 단지 잘 알지 못하는 이유로부터 숨어 있어야 할 가족
을 위해서.”
“꾸미지 못하는 게 아니라 꾸며도 별 볼일 없겠지. 삽사리푸들이 꾸민들..”
도혁이 피식 웃었다.
“다시 만나는 것 같아?”
“아직. 요즘은 이어폰도 안 꽂고 다닌다고.”
“그래?”
도혁이 생각에 잠기자 진혁이 주먹 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쳤다.
“아직 아파.”
그가 덤덤하게 말하자 진혁이 신경질을 냈다.
“아플수록 형이 가까워지려는 여자의 언니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기억하라고.”
도혁이 미소를 지으며 남은 식사를 마쳤다. 저녁에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려는 도혁을 현관 앞에서 진혁이 막았다.
“제발.. 이러지 마. 그럴 가치 없는 여자야.”
“금방 다녀올게.”
“연락만 안 했지, 그 미친 여자가 또 형을 해치면 어떻게 하라고!”
“내가 알아서 해. 오늘은 센서 안 끈다. 괜찮지?”
“원성이 형한테도 말 해 놓을 거야.”
“그래. 그렇게 해. 금방 다녀올게.”
진혁이 막았던 팔을 내리자 도혁이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진혁이 고개를 돌렸다. 도혁이 미소 지으며 진혁을 바라보고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집에 도착한 혜영은 힘이 없었다. 걱정이 되어 밥이 잘 넘어가지 않고, 잠도 잘 못 잤다. 샤워
를 마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퀭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
다.
“미쳤지.. 미쳤어. 내가 왜..”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헤어드라이어기로 머리를 말렸다. 물기가 조금 말랐을 때
팔에 힘이 없어 드라이어기를 끄고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머리를 대고 엎
드렸다.
“괜찮나? 괜찮겠지.. 미수언니한테..”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풀문에 가지 않고 있었다.
“가서 뭐라고 하려고? 한성씨 괜찮나요? 지금 쯤 언니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도혁이 맞은편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한 숨을 연신 내뱉고 있는 걸 알고는 찾
아갈까 하다가 몸을 돌려 바닥에 내려왔다. 어깨가 아직은 조금 아파 손을 들어 어깨를 만졌
다.
“그렇게 말해도 커튼도 안 치고.. 하여간 안심이 안 되는 아가씨라니까..”
그가 몸을 돌려 풀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성이 놀랍기도 하고 반가운 듯 걸어와 도혁을 안았다.
“괜찮냐?”
“네.”
“하여간 끈질긴 놈. 죽다 살았구나.”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미수가 주방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와 도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달려가 도혁을 안았다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이제 괜찮은 거야?”
“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뭘.. 저기 혜영이는..”
원성이 미수의 팔을 잡았다.
“미안해.”
“아니에요. 지금 보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형수님..”
미수와 원성이 그를 바라보았다.
회사에 출근한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는 기운이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주소를 알아내서 집으로 찾아가? 아니야.. 그건 좀..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전화해서 뭐라고
하지? 괜찮아요? 다 나았나요? 더 아픈 건 아닌가요? 병원에 같이 가 줄까요? 아니야.. 병원
에 갈 수 있겠어? 어떻게 다쳤는지 어떻게 설명하냐고..’
그녀는 눈을 감고 한 숨을 내쉬었다. 의자를 뒤로 빼고 책상에 턱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때
그녀의 컴퓨터 모니터에 메시지 창이 뜨고 짧은 멜로디가 울렸다. 눈을 뜨고 모니터를 바라보
았다.
<10분 후에 옥상에서 봅시다.>
그녀는 발신인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의자를 바로 하고 키보드 위에 올렸지만 뭐라고 쳐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메시지가 알람과 함께 또 날아왔다.
<보자고.>
그녀는 턱에 힘을 주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저기요.. 괜찮아요?”
그녀는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사람들 많은데 내가 직접 당신 사무실로 들어가서 확인 시켜 줘도 되긴 하는데..>
그녀가 ‘설마 그러겠어..’ 하는 생각으로 메시지 창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옆 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긴장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녀가 자신의 사무실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옥상으로 와.>
메시지가 떴다. 그녀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어떻게 하지? 아.. 어떻게 하지?’
그녀는 고민을 하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옥상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에서 내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저으면서 “미쳤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문을
열고 옥상을 바라보았다. 한성이 벤치에 앉아 모포를 어깨에 두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닫고 그에게 걸어가 앞에 섰다.
“괜찮아요? 추운데 왜 자꾸 여기에서 보자고 해요..”
“아니면 퇴근시간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인상 펴. 건강해졌으니까 출근했지. 어디 안 도망간다더니 약속 지켰네.”
“연락이 없었으니까요.”
“가족은.. 아직 안 돌아왔나?”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은 먹었나?”
“내가 물을 말이에요. 밥은 드셨어요?”
“같이 먹을까?”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놀랄 거 있나? 농담인데.”
“아..”
혜영이 붉어진 얼굴을 숙이며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볼펜뚜껑을 바라보며 그가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늦게 올라와서 다 식었을지도 몰라.”
“네?”
그가 모포를 펼치고 자신의 품 안에 끌어안고 있던 다른 색 모포를 풀었다.
“여기 앉아 봐.”
“싫어요.”
“내가 다 나았을까 고민했지만 막상 건강해지니까 다시 두렵나?”
그녀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모포 안에서 나온 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음식이었다.
“죽이에요?”
그녀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따뜻한 것을 받아 들고 뚜껑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재첩국이 들어있었다.
“밥도 있어. 조금 말아서 먹어 봐.”
“이건 내가 아니라 한성씨가 드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난 다른 거 먹었어.”
“설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직접 만드신 건 아니죠?”
“응. 형수님이.”
그녀는 미수가 보냈다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못 먹어요.”
“사람은 미워도 만든 음식은 미워하지 말라고.. 그래도 새벽시장 가서 아침부터 만든 음식이니까. 정성을 봐서라도 좀 먹어.”
눈물이 고이자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 먹고 나면 이것도 마시게 하래.”
그가 옆에 있는 보온병을 들어보였다.
“배랑 연근이랑 갈아서 만든 음료래. 두통에 좋을 거라고 했어. 사실 숙취에 좋은 건데..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이제야 만들어 준다고.. 미안하다고 했어. 요즘 잘 못 먹는 것 같으니까 좀 먹고 힘내라고.”
혜영이 뚜껑을 다시 닫으며 조금 훌쩍였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눈물을 힘겹게 삼켰다.
“그 날 그렇게 헤어지고 한 번도 못 갔어요. 그리고 한성씨를.. 다치게 한 사람이 제 가족인 걸 알 텐데.. 용서해 주시겠어요?”
“당신 가족이 한 거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단 한사람.. 말고는 이해하고 있어. 당신이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날 일에 대해서 미안해하고 있어.”
그녀가 고개를 돌려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언니가 이거 넣어 준 가방 어딨어요?”
그가 벤치 아래에 놓아 둔 가방을 꺼내 보여주었다. 혜영이 가방을 받아 들고 그 안에 다시 넣었다.
“안.. 먹으려고?”
가방 지퍼까지 잠그고 손에 든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집에 가서 혼자 먹으려고요. 이제 건강해지셨으니까요. 이렇게 보는 건.. 안했으면 좋겠어요.”
“왜?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서?”
“네. 한성씨가 그랬잖아요. 멀리 도망가라고. 한성씨가 다 나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요.”
“응.”
“그럼. 들어가 볼게요.”
“응.”
그녀가 몸을 돌려 가방을 가슴에 안고 옥상 문을 열고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한성은 추워진 몸을 부르르 떨고 모포를 접어 뻣뻣한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너무 오래 있었어.. 감기 걸리겠다..”
저녁에 퇴근하면서 혜영은 택시를 탔다. 그래야 풀문 앞을 아주 빠르게 지나갈 수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 앞을 지날 때 그녀는 눈물이 나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원
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먹었을까?”
미수가 다가와 물었다.
“글세. 도혁이가 전해줬다니까 먹겠지?”
미수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만들었다.
“어떤 결정을 하든. 받아들이자고..”
“응.. 자기 잘못이 아닌데 왜 저렇게 모든 짐을 자기가 다 짊어지려고 하는지 몰라.”
미수가 축 쳐진 어깨로 주방에 갔다.
집에 들어 온 그녀는 커튼부터 닫았다. 그리고 주방에 가서 미수가 만들어준 것들을 식탁 위
에 올려놓았다. 재첩국을 냄비에 담아 가스 불에 데우고, 밥도 전자렌지에 돌렸다. 김치냉장고
에서 김치를 꺼냈다가 속이 울렁거려서 다시 넣었다. 따끈한 국에 밥을 말아 한 입 넣었다.
그녀는 눈물이 다시 고이자 옷소매로 쓱 닦았다.
“자꾸 눈물이 나고 그러냐.. 흠..”
그녀는 진정을 하려고 애쓰며 국과 밥을 먹었다. 다 먹은 그릇을 닦아 건조대에 올려놓고, 커
피 대신 배, 연근 주스를 마셨다.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샤워까지 마친 그녀는 책상에 앉아
물끄러미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지난 며칠과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쓸 수 없을 것 같
아서 노트북을 닫고 침대로 향했다. 머리 아픈 것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 사람도 건강해졌고, 언니한테 연락 오면 여길 떠나면 돼.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안 돼. 혹시.. 또 다치면 어떻게 해..’
그녀는 생각을 하기에도 지친 것 같았다. 정신이 몽롱하더니 잠이 들었다. 그녀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변하자 도혁이 옥상에서 내려왔다.
<형. 어디야?>
“왜?”
<지금 가야 하는데. 52번 거리.>
“뭔데?”
<레드 3.>
도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가 턱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 가면서 설명 듣자.”
<응.>
도혁이 몸을 돌려 52번 거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출근하면서 혜영은 풀문(Fullmoon)에 들렸다. 아직 준비중이라 의자들이 테이블 위에 다 올라가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원성이 나와 그녀를 보고 멈추었다.
“출근하는 길이야?”
“네. 미수언니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미수가 주방에서 나왔다. 하지만 달려오지 못하고 원성 옆에서 그녀를 향해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난 청소할 게 있어서.. 출근 조심해서 잘 해.”
“네.”
원성이 안으로 들어갔다.
“고마웠어요.”
“음.”
미수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했어요. 그 날은..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누구한테나 비밀은 있잖아요. 이해.. 할 것 같아
요. 분명히 언니도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힘들게 비밀을 지키고 있는 거잖아요. 저도.. 그
렇거든요. 결국 일이 안 좋게.. 한성씨를 다치게 해서 죄송해요. 변명이지만.. 다치게 할 줄은
몰랐어요.”
혜영이 도시락이 들어 있는 가방을 바(Bar)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오려고 문을 잡았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는 따뜻한 집 밥 먹어서 좋았어요. 또 올게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미수를 바라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머플러에 코를
묻고 종종 걸음으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원성이 나와 미수를 뒤에서 안았다. 미수의 눈물
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축하해.. 당신 친구가 돌아왔네..”
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제발 힘 내줘. 어제처럼 음식 만들면 곧 문을 닫아야 할 거야.”
미수가 원성의 말에 피식 웃었다.
점심 식사 후 휴게실에서 모여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휴게실 입구를 바라보게 되었다. 혹시나 그가 불쑥 오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거
나 뭔가를 흘릴까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자기 자신의 비밀은 숨기는 일은 쉬워 보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비밀을 숨겨주는 건 생각보다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휴식시
간이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되어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조금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아침 뉴스 봤어?”
“응. 나 봤어.”
“너도? 나는 아침에 출근길에 라디오 뉴스로 들었는데..”
“무슨 일인데?”
혜영이 묻자 다진이 한심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상 돌아가는 것 쯤은 알아야 하지 않아? 설마.. 돌아오지 않을 왕자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거 아니야?”
다들 피식 거리며 웃었지만 솔희만 그녀의 손을 잡았다.
“혜영이만 그래? 나도 그런데.. 그렇게 멋진 사람은 영화관에서 말고는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너희들은 안 그래?”
“사실은 나도 사진이 있어서 그런가.. 자꾸 생각나더라고..”
“사진?”
혜영이 물어보자 다이어리에 있는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서 그녀는 그의 배경이
었다. 포커스 자체가 그에게 맞춰진 오로지 그를 위한, 그 만을 위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그는 냉철함이 묻어 나오면서도 로맨틱한 분위기가 나는 남자였다. 그녀는 지금 사무실에 있
는 남자와 아무도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 재미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절대로 밝혀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 턱에 힘을 주고 웃음을 참아야 했다.
“설마.. 벌써 보고 싶은 거야? 얼굴이 너무 진지한데..”
“내가? 설마.. 네가 보고 싶은 거겠지. 그런데 어떻게 하지? 에반은 똑똑한 여자가 좋다는데..”
“뭐?”
“아침 뉴스에 뭐가 나왔는데?”
혜영이 솔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린 아이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던 변태 있잖아.”
“응.”
“어젯 밤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대.”
그녀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렸다.
“자기 집에서 죽었다지?”
“응. 그런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놈들이 왜 다들 심장마비로 죽는 거야?”
“글세..”
“혹시 누군가 약물로 살해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내가 예전에도 말 했지만 분명히 사이코패스가 한 일일 거야.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게 보통 일이니?”
“하긴 보통 사람은 아닐 거야.”
그녀는 귀에서 심장이 뛰는 기분이었다. 이 분위기를 다른 쪽으로 옮겨야 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내버려 두고 머릿속 이야기에 집중했다.
“웃긴 이야기지만.. 혹시 그거 아닐까? 옛날 공포 영화 중에 ‘링’ 있었잖아. 자신이 해친 사람의 영이 귀신으로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서 엄청 놀라서 죽었나?”
“역시~. 작가라더니 그거 말 된다~.”
“그러게.. 그런 거라면 설명이 되겠는데.”
“그래. 올 해 여름에도 귀신을 본 사람이 뉴스에 나와서 말하는 거 봤는데, 진짜 대박이더라.”
다들 이야기가 귀신 이야기로 옮겨갔다. 친목도모를 마치고 사무실로 향하는데 솔희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주사 얘기 해줬잖아. 삼촌이 그러는데 비슷한 자리에서 주삿바늘 자국이 발견됐대.”
“아마 내가 스릴러 쪽 글을 쓰기는 하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럴 거야.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좀..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죽음으로 인해서 잊혀졌
던 과거 범죄까지 다시 기사화되기도 하잖아. 피해자와 가족들은 또 다시 사람들의 수군거림
을 참아야 하고..”
“하여간 네 상상력은 항상 남들보다 저 만치 앞서서 날아다니는 구나. 그걸 생각하는 사람들 별로 없을 걸?”
“나도 내 머리가 단순했으면 좋겠다.”
진심을 담은 혜영의 말을 들은 솔희가 미소 지으며 인사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혜영
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려다가 슬쩍 옆 방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 일을 시작하려고 책상에 앉자 메시지가 떴다.
<그렇게 대 놓고 감싸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가 깜짝 놀라 창을 완전 삭제했다.
<난 옥상에 갈 건데..>
메시지 창이 또 떴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옥상 문을 향해 걸었다. 여전히 그녀의 입에는 “미쳤어.
내가 미쳤지..” 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안에 발을 디디고 뒤로 문을 닫았다. 문 뒤 벽에 등을 대고 고개를 숙
이고 있던 그가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그녀가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잠깐만.. 1년 전에 한 말.. 지키게 해 주는 거야.. 1분만.. 이렇게 있게 해 줘..”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1년 전에 내가 당신한테 안기겠다고 말 했다구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러다 문득 휴게실에서 솔희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알기론 귀 아래에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대.”
“그래?”
“응. 뉴스에 보도되지 않은 극비사항이지만. 누군가 심장마비를 일으킬 약물을 주사한 거지.”
“응..”
“넌 어떻게 생각해?”
“뭘?”
“정말 잘 죽었다고 생각해? 아니면 다진이 말처럼 너무 쉽게 죽었다고 생각해?”
“그 사람 때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가족들, 고통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갔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잘 된 일일지도 모르지. 또 그 사람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길에서 지나가는 차에 치어 죽어가는 강아지를 본 적 있어. 강아지를 살려보
고 싶어서 품에 안고 동물병원으로 달려가는 중간에 숨을 거뒀었어. 그 때.. 마음이 참 아팠거
든. 전혀 모르는 강아지였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네 말대로 그 연쇄살인범을 누군가 법 대
신 주사로 직접 집행을 했다면 그 집행한 사람은? 설마 로봇이 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짐승
도 아니고 사람인데..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마음이 아프지는 않더라도 무겁지 않을까? 신이
아닌 사람이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 거야. 잠이 올까? 분명히 죄책감에 시달릴 거라고 생
각해. 그냥.. 그 사람이 안 됐다고 생각해.. 누군지 모르겠지만.”
“뭐야.. 또 머릿속으로 상상의 날개를 폈구나?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선까지 마구 생각이 달려 가셨어~.”
“그런가? 그냥.. 마음이 그렇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넌 어떻게 할 건데?”
“난 도망가지? 무서우니까. 넌?”
“글세..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안아주지 않을까? 힘들었겠다고.. 앞으로도 꼭 해야 할 일이냐고..”
“무섭지 않아?”
“왜?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 그건 맞다. 이따 저녁 같이 먹을래?”
“너 최근에 한 소개팅 잘 되었다면서.. 눈치 없게 끼기 싫어. 즐거운 시간 보내.”
“그래. 그럼 오후도 힘내라.”
“너도.”
혜영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가슴 아랫부근이 묵직했다.
“왜 이러지.. 후우.. 마음이.. 무겁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어젯밤 나쁜 사람의 목숨을 거둔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다.
나쁜 사람이었다고 해도.. 사람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마감하는 그 일이 쉬웠을까? 분명 그녀
뒤에 있는 남자를 무서워해야 했다. 팔을 풀어버리고 그에게서 떨어져야 했다. 아니.. 그 보다
는 그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여기에 올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더 이상 그와 연결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그 연결 고리를 끊어야했다. 말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말이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그녀를 안고 있는 그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가 그녀의 머리에서 고개를 들어 그녀의 떨
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팔을 풀고 멀어졌다.
“미안.. 미안해..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무섭게 해서 미안해. 물론 무섭겠지.. 이해해.”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
“당신 말이 맞아. 다.. 맞아.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건 아니야. 늘.. 경고에서 멈춰줬으면 하고 바래.”
그녀의 눈이 커졌다.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바텐더 찬모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술주정뱅이에게 단 한 번의 기회만 남았다고.. 그는 지난 밤 잠을 못 잔 듯 얼굴이
창백하고, 눈 아래에 그늘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못 먹은 듯 두 볼은 핼쑥해져 있었고,
그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경고도 해 줘요?”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턱에 힘을 주고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2번.. 3번째에는 집행명령이 떨어져.”
“꼭 해야만 해요?”
그녀는 1년 전에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그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가 한 걸음 다가가자 그가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벽에 등이 닿은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 다시는 여기로 불러내는 일도, 나와 엮이게도 안 할 테니까..”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안경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성씨가 꼭.. 해야만 해요?”
그의 턱 근육이 긴장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난.. 난 선택되었으니까..”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원한 게 아니라 선택.. 되었다구요? 누구한테요?”
그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멀어지겠다고 말한 게 불과 27시간 전이야.”
“힘들었겠어요.. 많이.. 외롭진 않았어요? 그녀들의 말에... 수군거리는 소리에 상처받지 않았어요?”
그가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명령이 내려오고, 누군가는 해야만 하니까 하는 것 뿐이야.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젯 밤.. 수고했어요. 당신이 한 일로 인해.. 분명히 두 발 뻗고 잠을 청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대신 해 준 당신에게.. 고마움을 담은 기도를 했을 거예요. 고
통스러운 일을.. 대신 해 줘서 고마워요.”
그가 이를 세게 물었다. 시선을 피했지만 그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물론 난 당신이랑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지
도 않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기 당신 앞에 있고, 내 손이 당신을 위로해 주고
싶다고 말해요. 그래서 난.. 지금 머릿속에서 경고 사이렌이 울리지만 그걸 무시하고 심장
이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그녀가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볼에 대자 그가 움찔거렸다. 그의 눈이.. 검고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
아주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커다란 몸을 안았다. 그가 그녀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무서운 일을 경험하고 난 후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처럼.. 그녀를
꼭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자신
의 얼굴을 묻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첫댓글 오홋~딱내스타일이에요~^^
12편을 기다리고있어요~둘이 잘됐으면 좋겠당~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숨가뿌게 정주행 달렸어요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