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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의 河川과 地名 대부분의 역사 기록물들은 나라가 안정 되엇을 때 편찬 된다. <삼국사기>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이후 편찬된 역사서다. 고려 왕조가 안정적이 상황엇다는 말이며 자신들의 산천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기록할 수 잇는 상황임을 의미 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三國史記>에 등장하는 지명들이나 하천은 그 위치를 설명한 것이 없으며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 지명들과 하천의 이름들만이 등장한다. 우리 후세 史家들이 미루어 짐작하고 억지로 꿰맞추어 비정하고 있을 뿐이다. <舊唐書>백제의 인구 논리의 모순 우리 국사가 말하는 660년 한반도 <구당서>는 백제의 인구를 76만호라고 하엿다. 고대에 당이 어떤 기준으로 1戶를 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수렵 유목민들의 戶란 씨족 중심의 초대형 가족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즉 76만 호란 1천만명은 될것이라는 것이다. 백제 인구 76만호의 진실은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로 하여금 이 기록을 믿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한반도 백제 영토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수치의 인구 기록이기 때문이다. 2017년 현재 보다 높은 인구 밀도의 한반도 백제는 성립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백제를 한반도에만 존재한다는 반도사관은 고대의 기록들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주류사학들 마져 우리 고대사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백제를 한반도에만 비정을 하면 <舊唐書> 자체를 믿지 말하야 한다. 唐軍의 덕적도 上陸說 논리의 모순 신라는 다급하게 唐에 援軍을 청한다. 이때 백제는 신라를 거의 멸망 시킬 기세 였다.
이에 "唐 高宗은 주저하지 않고 신라의 원군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고 13만 군대를 인천의 덕적도에 상륙시킨다"라고 우리 주류 사학은 주장 한다.
13만명의 精銳兵이 黃海를 단숨에 건너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에 도달하였다?
中原 최근 인하대 역사 연구팀이 漢武帝에 의한 위만조선의 멸망 과정에서 한나라 배로는 黃海를 절대로 건널 수 없다라는 結論을 내렷지만 唐 나라 역시 내륙 국가이기 때문에 唐이 보유하고 있던 배는 강에 띄우는 배이기 때문이 이 배로는 西海를 절대로 건널 수 없다는 것이 專門家들의 見解다.
지금은 시안이며 당나라 때의 수도
이곳 장안을 출발한 당나라 군사들이 1만여척의 배를 타고 단숨에 덕적도에 도착을 했다? 우리 국사가 주장하는 660년 당의 백제 침공 루트 당나라의 공격에 의자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하는데 흥수가 의자왕에게 말하기를 "당군과 신라는 기각(기병)으로 되어 있으니 平原으로 나가 싸우면 승산을 알 수가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한다 라고 <三國史記>는 전한다. 平原:平原县位于山东省西北部、德州市中部, 是汉昭烈帝刘备做过县令的地方,自秦朝置县至今已有2200多年的历史。 평원은 산동성 서북부와 덕주시 중부에 있다.
平原/평원의 위치가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 방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平原은 漢나라 소열제때의 刘备做过县(陝西省)적 지방, 秦朝때 부터는 2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흥수의 이 말로 미루어 당군과 신라군은 騎兵(기병)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최정예 부대라는 말이다.
따라서 平原으로 나아가서 싸우면 안된다는 말이며 이때의 平原은 백제의 북쪽 영토로 보인다. 武烈王의 戰時 職責 이때 신라왕 김춘추의 직책은 "仍令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이었다. 즉, 이것을 해석하면 우이 정벌 안내 총사령관이라는 뜻이다. "우이"는 山東半島 태산의 동쪽 地名이며 우이라는 지명은 堯舜 시대로 부터 시작 되는 지금의 칭따오(청주)를 지칭하는 지명이다. 우이라는 지명 하나로도 백제의 영역은 山東半島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불어 김춘추는 당의 수많은 군벌의 수장인 것이며 총사령관인 소방정 보다도 아랫 계급이엇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를 唐과 대등한 별개의 국가로 보는 애국사관으로는 仍令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이라는 기록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신라가 唐이라는 외세를 끌어 들여서 三國을 통일 햇다는 역사관은 애국적 역사 소설이다. 唐 水軍의 木船 <三國史記>의 기록은 "13만 당군은 목선을 나누어 타고 黃海를 건넜다'라고 한다.
우리 강단 사학은 이들 唐軍이 도착한 곳은 인천의 덕적도 였을 것이라고 批正을 한다.
이 당시의 唐 水軍은 보잘것이 없었다. 水軍과 海軍은 다르다. 또한 中原 內陸 國家들의 海라는 槪念을 正確하게 理解 할 必要가 있다. 내륙국가들은 黃河와 淮水 長江의 本流를 海라 表現하는 것이며 진짜 바다는 大海라고 表現하는 것이다. 또한 黃海는 中原國家들 입장에서 보면 東海다.
내륙의 中原 국가인 唐이 海軍을 양성했을 이유가 없다. 당이 무엇 때문에 해군을 양성해야 하는가?
唐軍은 50여명이 탈 수 있는 木船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덕물도를 건넜다는 당군의 13만 병력은 말 또한 병력에 필적하는 숫자가 배에 실렷을 테니 병력만을 수송한다 해도 3천여 여척이 필요 하다면 말과 최소한의 보급품과 무기를 합한다면 최소한 배 1만여척이 필요 한 것이다. 실제로 당군은 범선 1만여척을 나누어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1천년이 지난 후 임진 왜란 때 일본이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동원한 군대가 10만여명이고 700여척의 수송선으로 6번에 나누어 조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단 한번에 도착시키기 위해서는 4200여척의 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해탄과 황해는 그 거리와 물살 세기등은 그 차원이 다르다고 하며 1천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의 섬나라 일본의 배와 1천년전의 내륙 국가인 당나라 배는 그 규모와 조선 건조 기술이 다르다.
천안함 폭침에 여러 의혹이 제기되고 우리 해군도 물살이 센 황해에는 잠수정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와 같이 황해의 해류는 산동반도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물살과 산동과 한반도의 중간 해역은 아래로 흐르는 해류로 1만톤급 카페리호도 그 해역을 벗어나려면 안간힘을 써야 하며 대련에서 인천까지 꼬박 21시간을 달려 와야 인천에 도착한다.
이곳을 고작 50명이 승선 할 수 있는 木船을 타고 13만 당군이 몇칠을 달려 왔다?
만약 걸프 스트림이라도 만난다면 1만톤급 페리도 절절매는데 50여명이 타는 목선을 타고 황해를 건넜다는 당나라 군.
더구나 백제는 로마와 비견되는 해양 제국이었으며 고구려의 수군은 패배를 모르는 무적 함대를 보유했음에도 황해 바다에 1만여척의 배가 떳는데도 해전의 기록을 찿을 수가 없다.
거기다 당나라는 내륙에 있었던 내륙 국가이며 선비 출신들이 당나라의 지배 계층이엇기에 海戰에 능통한 장수가 있을 수 없으며 적벽대전도 바다가 아닌 강위의 싸움이며 이 마져도 적벽대전은 실체가 없는 소설속의 전쟁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 군대가 황해를 건넌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군사전문가들은 말한다.
요동치는 물살에 멀미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데 고작 50명에서 100여명 태운 목선으로 바다를 구경 조차 하지 못햇을 당나라 군대가 황해를 건너고 말과 같은 동물이 놀라서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그런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일제 잔당 사학자들은 부득 부득 1만여 척으로 인천 덕적도에 당군이 도착햇다고 소설을 쓴다.
당 고종은 아버지인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치"를 이끌었던 유능한 가신들을 옆에 두고 안정된 국가 내정을 운영을 했으며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고구리를 종이 호랑이로 만들고 주변의 속국들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백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그것은 백제가 고구리와 동맹을 맺고 고종의 영을 백제가 무시하기도 하는 것이며 당의 속국적 위치였던 신라를 계속 공격을 하자 이에 사신을 백제에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강압했음에도 백제가 전혀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제동맹 당시 신라가 백제를 먼저 배신했으며 또한 자신의 왕인 643년. 651년,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고종은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백제는 이를 간단히 무시한다.
이 당시 백제가 만만치 않은 국력을 보여 주는 대목이며 이때의 백제는 고구리와 동맹관계 였으며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리 정벌에 실패하며 체면을 구긴 상태이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리가 호락호락 당의 말을 들어줄리가 없다.
오히려 신라의 김춘추(태종 무열왕)가 654년 신라의 왕위에 오르자 신라의 정세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백제와 고구리는 655년 정월 신라를 대대적으로 협공하여 33개의 성을 함락시켜 수도인 금성까지 위협한다.
이에 신라는 고구리와 백제로 부터 자신을 구해 줄 구원군을 당나라에 요청한다. 唐은 隨를 이어 中原을 차지하며 중국(the middle kingdom)이 된 것이다. 唐에 굴복한 수많은 衛星國家들이 이들의 전쟁을 지켜 보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리와 백제가 당에게 굴복하지 않고 버틴다면 이들 위성국가들은 언제 당에게 조공을 거부하고 대항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唐으로서는 백제와 고구리를 손보지 않을 수가 없엇다. 고구리와 백제는 당에 조공을 하지만 이들은 언제든지 당에 반기를 들수 있는 나라엿다. 백제와 고구리의 王朝를 바꾸어야만 하는 이유인 것이고 그래야 中原이 안정 된다.
마침 백제의 의자왕이 계속된 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군사방비를 소홀히 하자, 고종은 백제의 세력이 미약해졌다 판단하고 660년 3월소정방에게 13만군사를 주어 백제를 멸망시키도록 지시한 뒤, 백제의 동맹국인 고구리에서 구원병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 이적에게 고구려 국경지역인 遼河(황하의 중류)에 군사를 배치시켜 고구리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때의 고구리는 고종의 아버지인 당 태종 이세민과의 전쟁 후유증으로 또 다른 전쟁을 치룰수 없는 그로기 상태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그래도 당군에게 천운이 있어서 인천 덕적도에 당군이 무사히 도착을 했다고 치자.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補級品의 確保가 必須的이며 만약 당의 공격 대상인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가정하에서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고구리 영토를 통과해야 하거나 해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상륙작전은 성공하면 적 후방에 깊숙히 침투하여 상대의 진영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內戰과 같은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지만 만약 사전에 이 같은 전술이 발각되어 실패했을 경우에는 상륙부대 모두가 몰살 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전술인 것이다.
하지만 백제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 었다.
이런 당시의 시대 상황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의자왕과 신라 정도는 안중에도 없던 백제가 신라를 공격함으로서 신라는 국가 존망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었다.
즉 당시의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의자왕이 3천궁녀와 더불어 주색잡기로 나라가 위태했다거나 백제가 기울어 가는 나라가 아닌 전성기와 다름 없는 시대를 구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막강했던 해양 대제국 백제가 어떻게 이렇게 허망하게 패망할 수 있었는가? 同盟國 고구리 이런 상황에서 백제와 동맹을 맺엇던 고구리는 어찌하여 백제를 돕지 않은 것일까? 이때의 고구리는 백제를 도울 여력이 없엇던 것으로 보인다. 隨와의 4차례의 전쟁, 그리고 唐 太宗과의 전쟁으로 고구리는 경제가 파탄나 있었기 때문에 고구리는 백제를 도울 수가 없엇던 것이다. 아마도 고구리는 백제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잇었을 테지만 이때의 고구리는 절대로 군사를 움질 일 수가 없엇다. 당 고종은 고구리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薛仁貴로 하여 고구리를 견제 하도록 조치 하고 잇엇던 것이다. 百濟의 敗亡 過程 여기서 필자는 백제가 어떻게 패망했는가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13만 당군이 목선을 타고 황해를 건넜다는 역사 해석의 허구와 의자왕이 어디서 어떤 이유로 사로 잡혔으며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 있었으며 백강은 어디에 존재했었는가를 설명하려 함이다.
唐나라의 首都는 長安이었다.
고구리를 멸망 시키기 위해서는 백제와 돌궐을 괴멸 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며 고구리를 멸망시키는 것은 이 당시의 통일이며 覇權의 완성인 것이며 주위의 당 위성국가들에게 당이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 주어야 하는 당으로서는 절체 절명의 대망이기도 한 것이다.
이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는 고구리가 간신히 당 태종의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으나 고구리는 연이은 전쟁으로 백제와 신라 그리고 돌궐등이 고구리의 속국적 위치에서 독립적 위치로 돌아 섬은 물론 고구리를 막 보고 고구리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고구리는 그져 그런 국가로 전락한 상태 엿으며 당나라에 조공을 해야 하는 등 그 위상이 말이 아니 었지만 당 고종의 최종 목표는 고구리의 멸망이었을 것이다.
당 고종은 먼저 突厥을 공격한다.
돌궐을 공격하지만 고구리는 자신들의 위성 국가엿던 돌궐을 도와 줄 수가 없엇다.
결국 돌궐은 서쪽 오도로스 넘어로 토껴 버리고 지금의 터어키가 되는 것이다.
당의 견제 세력인 돌궐이 무너지자 동아시아의 고구리와 백제의 멸망은 시간 문제 였던 것이다.
전열을 정비한 고종은 신라와 함께 백제를 무너트리기로 결정을 하고 백제 사비성으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당군의 진격 루트 기록의 모순 의자왕의 충신 성충은 의자왕에게 "무릇 용병은 지형을 살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니 강의 上流로 나아가서 싸워야 하며 적군이 육로로 들어 오면 침현을 지나지 못하게 해야 하며 수군이 들어 오면 기벌포로 들어 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遙塞를 의지하여 막아야 합니다" 라고 간언한다.
우리의 상식대로 라면 배를 타고 왔을 당군은 배를 타고 하류에서 상류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당군은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 온단다.
우리의 일제 잔당 사학은 기벌포를 지금의 장항으로 비정한다.
지금의 장항에 험새(요새)가 존재할 만한 곳이 있더란 말인가?
또한 "遙塞(요새)"란 흙으로 쌓아 만든 토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진시황의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 서자 한나라는 "요동은 멀고 지키기 어려워 패수에 遙塞를 쌓았다"라는 기록에서도 "遼塞"란 뚝방 같은 토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남부여(백제)도 토성을 쌓았다. 그러나 백제 토성을 요새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패수를 경계로 쌓은 것이 요새이며 요새란 지역적 측성이 존재하는 성일 것이다. 즉 농경정주민족인 한족들은 평지에 城을 쌓을 수 밖에 없엇기에 성을 높이 쌓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며 고구리와 같은 사람들은 협곡에 의지해서 살았기에 山城을 쌓을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遼塞란 진흙으로 쌓은 土城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삼국사기> 신라 본국기에는 "당나라는 峽州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길을 따라 東으로 내려 왔다" 라고 기록 한다. 峽州의 위치/北周武帝时,改拓州为峡州,因为在三峡之口得名。 治所在夷陵县(今湖北省宜昌市西北,唐朝在今宜昌市,宋朝末年在江南,元朝回江北)。 相当于今湖北省宜昌市、远安县、枝江市。隋朝大业三年(607年)改夷陵郡。唐朝初年,复名峡州 협주에서 東으로 내려 왔다? 峽이란 깊은 계곡을 의미하는 글자인데 지금의 충청도 어디에 깊은 계곡이 존재하며 협주는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또한 백마강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인데 東으로 올라가야 맞는 것 아닌가? 지금의 錦江을 白馬江이라고 해석하지만 지금의 금강이 백마강이엇다는 기록은 어디에 존재 하는가? 반도사관으로 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군이 백제로 진군하는 방향은 동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정상 아니가?
그리고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났기 때문에 계백으로 하여 황산으로 보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백마강과 붙어 있다.
이미 白江을 지난 唐軍은 百濟 首都인 사비성을 향하고 있는 절체 절명의 상황에서 보급 부대인 신라군을 막기 위해 계백을 황산으로 보낸다?
도데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백강을 지났다는 것은 이미 백제의 도읍지인 사비(부여)를 향하고 잇다는 말이며 수도인 사비성이 이미 당군에 의해 점령되지 않앗다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또한 "江"이라는 표현은 남조의 나라들이 쓰던 표현이다. 적어도 당이 668년 고구리를 멸망 시키고 명실 상부한 帝國이 완성되고 나기 전에는 장강 이외의 하천에 강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강이라는 표현은 당이 제국을 왕성하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隋書>는 백제의 도읍은 "거발성"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적어도<隋書>가 만들어 지는 시기는 백제가 건재하고 있던 當代임을 간과 하면 안된다. 중국 24사는 대부분 전해져 오는 이야기와 이렇게 이어져 오는 이야기로 쓰여진 역사서를 또 다시 기록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隋書>는 바로 그 시대의 기록을 담은 역사서인 것이다. 거발성의 위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백제에 관해서 정확한 기록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물이 <隋書>다. 또한 <舊唐書>는 백제의 도읍지가 동서 兩城이라 햇다. 兩城이란 거발성이 東西로 두개의 성으로 이루어 졋다는 것을 의미 할 것이며 백제의 중심 위치는 미산호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階伯(계백)의 황산벌 急派 미스테리 그리고 수도가 절체 절명의 순간을 맞이 했음에도 주력군인 계백 부대를 黃山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인가?
또한 황산은 어디인가?
오히려 백마강은 명백하게 중국 산동에 존재하는 강이다.
백마강의 위치
그런데 백강을 지난 당군을 막기 위해 계백을 황산으로 급파햇다고 하는 것을 두고 우리 강단 사학은 지금의 논산을 황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도데체 뭐라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당군의 최종 목표는 사비성 아니던가?
그런데 부여는 백강과 붙어 있는데 당군과 신라군은 백강을 지났다 하니 도데체 말이 안된다.
백마강은 중국 山東半島를 흐르는 강이다. 만약 계백이 통솔하는 부대가 백제의 최정예 부대이며 결사 항전의 부대라면 사비성의 함락이 우려 되는 상황에서 보급 부대라는 신라의 군대를 막기 위해 황산벌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전쟁의 상식 아닌가? 그러나 <삼국사기>는 신라군은 기각(기병)으로 이루어 졋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舊唐書>는 백제의 都邑地는 兩城이라고 하엿다. 즉 백제의 도읍지는 두개의 성으로 이루어 졋음을 알 수 있으며 3천 궁녀가 거주 할 수 있는 정도의 거대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의 부여는 성이 아닌 궁궐에 불과하다. 백제의 중시지엿다는 충남의 부여와 공주 어디에 3년을 버틸 수 있는 성이 존재하는가? 이렇게 견고한 성이 잇엇다면 성벽을 쌓았던 성곽이라도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백제를 한반도에만 존재하던 나라로 고정 시켜 놓다 보니 역사 해석을 모두 한반도에 꿰 맞추려는 무리한 역사 해석으로 일관 하는 것이다. 백제 멸망 당시의 백제 지명들은 한반도에는 단 한개도 없지만 대륙의 산동반도와 하남과 절강성에는 기록에 나타나는 백제의 지명들이 거의 모두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반도 백제 중심설은 3류 소설이다. 소설을 써도 이치에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해양 백제는 멸망했으며 그 다음의 역사는 승자의 손에 기록되며 승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역사는 조선 중종 때 <삼국사기>의 개정판을 내면서 조선 史家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百濟와 新羅는 韓半島에 同時代에 存在한 적이 없다. 우리 역사는 승자인 당이나 신라에 의해 쓰여 진 것이 아니라 조선 사대부들과 우리의 일제 잔당 사학인 주류 강단 사학에 의해 쓰여지고 조작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디에 신라 자신이 삼국을 통일 햇다고 자랑하는 흔적이 존재 하는가? 백제 멸망전 까지의 신라는 한반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라이며 백제 멸망후 한반도 백제는 자연 스럽게 신라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백제의 멸망 시기가 660년이며 한반도에서 신라의 유물이 모두 660년 이후의 것들만 나타나는 이유인 것이다. 필자는 한반도에 백제와 신라가 동시에 존재 한적이 없다고 확신을 한다. 百濟의 復興運動과 滅亡 우리 국사는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부여)이 함락되자 의자왕은 인근의 熊津(공주)에서 3년간 계속 항전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부여가 사비성이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며 지금의 공주가 웅진이었다는 기록 역시 찿을 수가 없다.
지금의 강단 사학이 그렇게 추정하여 비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地名들이 모두 산동반도에 존재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항전 5일째 갑자기 의자왕과 그의 수하들이 웅진성의 성주인 "예식진"에 의해서 줄줄이 잡혀 나온다.
수하인 예식진의 배반으로 백제의 사직이 문을 닫는 순간이다.
그리고 의자왕은 김춘추와 김유신등에게 무릎을 꿇고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수모를 겪고 김춘추와 김유신등이 의자왕을 처결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소정방에 의해 長安으로 압송되고 당나라 고종에 의해 모멸적 훈계를 듣고 방면되었으나 2달 후에 장안에서 허망하게 죽고 만다.
웅진성의 견고함은 백제가 망한 후에도 3년이나 함락되지 않고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 했다고 우리 일제 잔당 사학은 말하고 있으나 지금의 공주 어디에 3년이나 항쟁을 할 수 있는 견고한 험새의 흔적이라도 있는가?
일본 백제에서 본국인 백제를 돕기 위해 온 일본 백제 군사 4만 7천과 백강(백마강) 전투를 마지막으로 백제는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이 당시의 본국 백제를 도우러 온 일본 백제의 수장인 의자왕의 아들은 탄식하며 "이제 본국을 잃었으니 어디에 마음을 둘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에서 백제의 멸망은 대륙 백제와 더불어 일본 백제를 잃는 아픔을 겪게 되고 본국 백제를 잃은 일본과 신라에 의해 이어져 오는 우리와 영원히 앙숙이 되는 역사를 써 나간다. 이때 까지 동양의 어느 역사서에도 日本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때의 倭는 일본 열도가 아니다. 그냥 倭다. 日本이라는 이름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는 백제 멸망 후부터다. 실제로 최근의 연구는 일본이라는 지명은 백제의 일개 지방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때의 倭를 지금의 일본 열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때의 왜는 長江 중.하류에 존재 했었으며 지금의 타이완 역시 백제의 영토 엿다. 장강 중하류의 왜 역시 백제 본토인 산동이 멸망하자 당과 신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왜의 주력이 지금의 일본 열도로 이동해 오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일본이 소위 말하는 삼한을 한반도 남부로 설정하는 이유가 자신들이 馬韓의 후예라는 역사 설정 때문이다. 하지만 마한은 장강 유역에 존재 했으며 마한은 절대로 한반도일 수가 없다. 한반도 어디에 배만한 대추가 열릴수 있으며 무덤과 같은 주거지가 존재 할 수 있으며 겨울에도 여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한은 동이의 역사로는 설정이 가능하지만 지금의 한반도와는 전혀 관계가 있을 수 없다. 落陽 北邙山의 백제 무덤의 진실 일전에 예식진의 무덤이 洛陽 北邙山에서 발견 되엇다고 한다. 또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과 백제에 인색한 역사 기록을 한 김부식도 백제의 위인으로 지목한 흑치상지 역시 황제와 같은 가문만 묻힌다는 북망산에 그 무덤들이 발견 되엇다. 왜 일까?
수년동안 백제 부흥 운동에 앞장섯던 흑치상지는 백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위인으로 기술하면서도 그는 백제를 큰 나라를 섬기지 않는 몹쓸 국가의 군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신당서》및 《삼국사기》에 입전된 그의 열전에서는 의자왕 때 벼슬은 달솔로서 풍달군(風達郡)의 군장(郡將)을 겸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백제 멸망 직전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한반도와는 관계가 없는 인물들 뿐이다.
백제와 고구리의 지배 게층 사람들이 훗날 당나라를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 당나라의 최상위 계층을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두고 "민족적 변절"로 보는 경향도 존재 한다. 당을 중국 역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통일 되고 북한 고위 관리엿던 사람이 통일 대한민국을 위해 일을 한다면 더 먼 훗날 우리 역사는 그 북한 출신 고위 관리를 변절자로 볼 것인가? 13만명을 실어 날랐다는 작은 목선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 됐던 당군은 40만명이라는데 이 병력은 어떻게 황해를 건넛다는 말인가? 고구리는 백제 멸망후 8년만인 668년 멸망한다. 즉 고구리가 당군의 진로를 고구리 영토를 지나가게 햇다면 모르지만 당군은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널 수 밖에는 없엇을 것이다.
나당 연합군이 3년동안 공격을 햇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임존성은 지금의 예산 대흥이라고 하는데 도데체 그 난공 불락의 요새인 임존성이 예산의 어느 곳이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말인가?
적어도 백제 땅이었다는 충남에는 난공불락이 될만한 험한 요새는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서기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 땅의 백제 사람들은 <日本書記 천지 전황기>에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써 끊어 졌으니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다 말인가?" 라고 탄식했다. 이것은 4만 7천여명의 왜군이 본국 백제를 돕기 위해 백강 전투에 나왔다가 당군에 참패를 하고 돌아가는 倭軍의 선봉장인 의자왕의 또 다른 아들인 부여풍이 했던 말로 전해 진다. 그런데 이때의 4만 7천명의 왜군이 정말 현해탄을 건너 지금의 금강 하구로 들어 왓다는 것일까? 1천년이 지나 임짐왜란때의 왜군도 한반도를 돌아 직접 한양 근처에 상륙할 생각을 못햇다. 만약 왜군이 한양 근처에 상륙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구태여 부산 앞바다를 통해 한양으로 올라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1천년 전의 부여풍의 4만 7천의 왜군이 금강 하구에 도착을 햇다? 이 때의 사건은 일본 열도에서 4만 7천의 병력을 동원 한다는 것은 일본 열도의 전군을 동원 햇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가? 만약 백제의 사비성이 山東半島에 존재 햇다면 이것은 한반도 백제를 구하기 위해 왜군을 동원 햇다는 논리 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日本書紀>와 <三國史記>는 다같이 이때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은 허구적인 사실이 아닌 것이다. 다만 이때의 왜를 일본 열도로 비정하는 것은 분명한 역사 해석의 오류라는 것이다. 즉, 일본 열도에서의 일본의 건국은 백제 멸망 후인 것이며 그 이전의 일본 열도는 백제와 고구리 그리고 말갈이 나누어 통치 햇던 것으로 보인다. 嵎夷는 太古적 부터 우리의 땅 授衛尉卿. 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 <百濟>之種遂絶. 이로부터 그 땅은 신라 및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으며, 백제의 종족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백제의 한반도 영토와 하남의 일부 그리고 월주는 신라의 영토로 편입이 되는 것이며 산동반도 등주를 발해 말갈이 공격하여 차지 햇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산동 반도는 발해 말갈이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산동 반도는 이정기의 濟로 분리되는 것이며 이정기의 濟는 당조와 갈등을 빚다가 신라 3만 기병대의 공격으로 이정기의 濟는 60여년의 짧은 생을 마감 한다. "濟"라는 글자는 산동 반도에서 건국되는 나라들의 고유한 이름이다. 산동반도의 고대 이름은 嵎夷이며 우이는 태산의 동쪽 모퉁이를 말하는 것이며 우이는 요순시대 부터 朝鮮의 땅이엇으며 姜太公이 周武王의 명을 받아 산동반도에 濟나라를 세운 이후 이정기의 濟를 마지막으로 이 지역에 나타나는 나라들의 이름은 반드시 濟다. |
첫댓글 저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계시군요. 저도 삼한은 요서에서 양쯔강 이북까지 이어져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서 요동 한반도의 서해안루트는 마한의 땅/ 산동반도와 인근은 변한의 땅/ 이남 양쯔강 북쪽까지는 진한의 땅/ 그리고 양쯔강 이남은 왜의 땅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치원의 당에 보낸 서신에서 보여지듯이 고구려는 마한/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는 내용에 부합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반도도 유물에서 보여지듯이 삼국의 식민지로써 분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대륙의 삼국과 한반도에서의 삼국기사가 혼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님의 요서는 어디를 말하는 건가요?
여전히 한반도를 삼한의 일부라고 생각 하시는군요.
그리고 고구리를 마한이라고 하시는 군요
죄송 합니다.
제 생각과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다.
댓글 고압습니다.
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역사책을 못 읽고 있습니다. 무명 저고리님!!! 제 젊었을때 내린 아이디어를 위에 용기내어 올려보겠습니다. 한번 읽어주세요 ㅎ 백제 위치 비정은 완전히 제 생각하고 똑같거든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