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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매우 큰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셔서, 바다쪽에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바닷가 뭍에 있었다.
4:2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는데,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4:3 "잘 들어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4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4:5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으므로 싹은 곧 나왔지만,
4:6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4:7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 그 기운을 막아 버려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4:8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
4:9 예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4:10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예수의 주위에 둘러 있는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비유들이 무슨 뜻인지를 예수께 물었다.
4: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4:12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 주해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과 사역으로 전도하시려고 보냄을 받았다.
1) 말씀과 사역으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여신다.
2) 십자가와 부활 후에 그들이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과 사역 그리고 식사교제, 잔치, 가족과 같은 그림언어로 보이신다.
2.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자, 한 부류는 예수님께 문제해결을 받기 위하여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왔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며 귀신들려 미쳤다는 비난을 하였다.
1)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대적하시나, 문제해결을 받기 위해 나아온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치시며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2) 왜냐하면 예수님은 병든 자, 즉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이다. 죄인이란 죄가 들어온 이후의 사람을 말한다. 죄인은 죄만 짓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연약하다. 예수님은 죄인의 특징을 알면서도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
3. 예수님이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자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1)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직접적인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다.
2) 오늘날 설교자가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대부분 더 쉽고 생생하게 설명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것은 “외인”은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인 너희”들만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다.
4. 예수님이 하신 비유는 그 유명한 씨 뿌리는 자와 네 가지 밭에 대한 것이다.
1) 씨 뿌리는 자인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씨앗을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린다.
2) 어떤 씨앗은 길 가에 떨어진다. 그러자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린다.
- 하나님 나라 복음을 깨닫기도 전에 그 말씀을 잃어버린다.
3) 어떤 씨앗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싹을 낸다. 흙이 깊지가 않아서 해가 돋자 뿌리가 없음으로 말라 버린다.
- 새 언약 백성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다. 마음에 기록되지 못한 말씀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말씀이 되어 말씀에 반응하여 싹이 나지만 곧 말라 버린다.
5. 어떤 씨앗은 가시떨기에 떨어진다. 이 씨앗은 새도 피하고 돌도 없어서 뿌리를 내린다.
1) 그런데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는 속도보다 가시가 자라는 속도가 더 빨라서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하여 기운을 막아 버려서 결실하지 못한다.
2)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햇빛을 받아서 말랐는데,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햇빛을 받지 못해서 결실하지 못한다.
3) 이 씨앗은 처음에는 말씀을 깨닫고 뿌리를 내리고 말씀대로 행하면서 잘 자라고 있었기에 결실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주변의 가시가 자라는 것을 간과함으로 결국 기대는 무너지고 결실을 하지 못한다.
4) 씨 뿌리는 자가 씨앗을 뿌리는 목적은 “결실”이다. 단순히 싹이 나게 하거나, 줄기가 잘 자라는 것은 씨앗을 뿌리는 목적이 아니다.
6. 어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진다. 좋은 땅이기에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 무성하여져서 결실을 한다. 하나의 씨앗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
1) 결실하기 위해서는 3가지의 위협, 새들이 와서 먹는 것,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마르는 것,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2) 예수님은 귀 있는 자 즉 말씀을 들으면 들을 줄 아는 자는 들으라며 비유를 마친다.
7. 예수님이 홀로 계실 때에도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과 12제자가 그 비유에 대하여 묻는다.
1)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크게 3부류다.
2)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시기하여 제거하려는 자들과 예수님께 문제해결만 받으려고 찾아오는 자들과 문제해결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따르는 자들이다.
3) 예수님을 찾아온 큰 무리의 대다수는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여든 것이 아니다.
4) 말씀을 들은 이들 중 소수만이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8.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함께하는(따르는) 자들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①수수께끼로 들린다. / ①그, '비유로' (12) 그것은 ②'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 ②사 6:9; 10”(막 4:11~12, 새번역)
1)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주님이 “외인”인 사람에게는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가르쳤다는 것은 의외다. 더군다나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말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9. 예수님은 그 이유로 이사야 6장 말씀을 인용하신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를 부르시는 소명장으로 유명하다.
1) 웃시야가 죽던 해에 하나님은 성전에서 이사야에게 영광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8) 그 때에 내가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 내가 말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9)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이 백성에게 전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10) 너는 이 백성을 고집 센 백성으로 만들어라. 그들의 귀를 닫고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라. 혹시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마음에 깨달음이 생겨, 내게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걱정된다.”(사 6:8~10, 쉬운성경)
2) 제사장이던 이사야를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부르는 유명한 소명장이다. 주님은 분명히 “누가 나를 위해 갈까”라고 하셨고, 이사야는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순종하였다.
3) 그러면 “이 백성에게 전하여라, 그러면 그들이 회개하고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셔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고집센 백성으로 만들라”고 하신다.
10. 이사야는 웃시야가 죽던 해에 부르심을 받는다. 웃시야는 52년간을 통치하면서 다윗 시대 이후로 가장 번영한 국가를 이룬다.
1) 이스라엘은 번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었다며 겸손해지기 보다는 교만하여졌고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말씀을 듣지 않는 고집센 자들이 되어져 갔다.
2)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 백성’이라고 부르며 이사야가 말씀을 전해도 그들이 불신앙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하신다.
3) 교만한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심판의 말씀’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 말씀을 선포하게 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 자신의 교만, 마음의 완악함이 드러나, 그 완악함을 알고 마음 가죽을 벗기기 전까지는 구원의 복음은 무용지물이다. 심판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 가죽을 벗기는 것만이 구원의 방편이다.
5) 이런 사명을 받은 이사야는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래서 묻는다.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이 제거될 때는 그들이 심판을 다 받고 황폐해질 때이다.
11. 이사야의 본심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을 때, 백성들이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1)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의 완악함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드러내는 말씀사역을 감당한다. 얼마나 가시밭길 같은 사명인가?
2)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라면 누구나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십자가의 길에 순종한다.
12. 예수님은 지금 가시밭길을 걷는 복음전파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1) 하늘 아버지가 “누가 나를 위하여 갈까”라는 말씀에 “나를 보내십시요”라며 성육신하여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
2) 그러나 다수의 백성들의 마음은 완악하여져 있고 고집이 세다.
- 바리새인들은 대놓고 성령의 사역을 귀신의 사역이라 비난하고, 큰 무리 중에도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 상당수라는 것이다.
3) 그들을 구원하는 길은 그들의 완악함을 드러내어, 그들이 자신의 완악함을 인정하고 마음을 찢는 것이다.
13. 마음이 완악하여서 실제로는 결실하지 못하는데도, 말씀을 들으면 깨달아져서 기분이 좋아지고, 예수님의 치병과 축사와 같은 능력을 경험하면서 흥분되면 착각이 일어난다.
1)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모르는데도, 기도만 하면 응답되고, 예배만 드리면 소원이 성취되면 착각이 일어난다. 내가 만든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믿음이라 여기게 된다.
2)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고 있는데 말씀을 들어도 들리지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3) 하나님은 죽을 것 같은 목마름을 통하여 심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완악한 마음을 찢기를 기다리신다.
14. 하나님의 심판, 광야,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들을 결과만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의심하게 된다.
1)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이 아니라 광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불평이 아니라 회개해야 한다.
2) 가나안 땅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라고 하신 말씀을 떠나 심판의 말씀을 주시며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서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마음이 가난해 져야 한다.
3) 자기 백성에게 빛으로 오셨으나 성령의 사역을 귀신들려 미쳤다고 하는 자기 백성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탄식해야 한다.
15. 오죽하면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을까? 오죽하면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실까?
1) 오죽하면 부모가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오죽하면 밥을 않주고 용돈을 끊을까?
2) 그런 부모에게 “사랑이 없다, 매정하다, 제대로 된 부모가 맞냐?”고 하는 자녀가 있다면 “매를 맞는 것”외에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3)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유산을 받아 허랑방탕하고자 하는 고집센 자식에게 “탕자의 비참한 삶”외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
4) 탕자의 길, 그 마지막 여정에서 아버지는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 나의 묵상
나는 목사이기에 자신의 완악한 마음과 고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 하나님이 깨닫게 하지 않고 도와주시지 않는지를 한탄하는 성도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면 참으로 안타깝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고 성도들과 다르지 않다. 남들을 관찰하면 심판의 말씀이 살길임이 보이는데, 나로 돌아오면 나도 하나님께 탄식하며 묻는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듣고 보고 만지고 싶은데, 왜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냐고 하나님께 묻는다. “용호야 오죽하면 내가 너에게 얼굴을 가리겠느냐? 오죽하면 깨닫지 못하게 하겠느냐? 오죽하면 심판하겠느냐?”라고 하신다.
마음의 완악함, 만물보다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의 속임이 참 무섭다. 왜냐하면 완악한 마음은 자신의 마음이 완악함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속인다. 내가 나를 속인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겸비하는 능력이 상실되었다. 암덩어리가 온몸을 점령하듯이 완악함이 온 마음을 점령한다. 하나님께서는 황폐하게 되는 것 외에는 완악한 마음을 고치기 어렵다고 하신다. 왜라는 질문은 필요 없다. 항암이라는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암을 고치려 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저 받아들여 고침을 받을 것인지? 거부하고 고통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하면 된다. 마음의 완악함은 그래서 마음의 암같다. 항암은 고통을 주면서 암을 치료한다. 마음의 완악함도 황폐하게 되는 고통을 통해서 치유된다. 대부분의 암환자는 고통을 인정하고 항암을 한다. 치유가 보장되지 않음에도 항암을 하는데, 치유가 보장된다면 당연히 항암의 고통을 수용한다. 하나님은 심판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장하신다. 좁은 길인 것은 맞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암이라는 진단을 인정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해야 할 일들조차 내려놓고 항암이라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의 마음이 나에게도 필요하다. 마음의 암, 영적인 암인 완악함과 교만은 황폐함이라는 심판을 통해서만 고쳐진다. 먼저는 마음의 완악함을 인정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했다가 포기했다가, 선택했다가 미루다가를 반복한다. 심판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 그 주님의 도움이 없이 마음을 고치는 여정을 마치기는 힘들다. 그래서 염치 없지만 십자가로 사랑을 확증해주신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한다. 내 마음에 빛을 비추사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밝히 보여주시고, 복음을 통하여 내 안에 있는 생명을 밝히 보게 하여 주시기를 구한다. 그래서 가난한 마음, 좋은 땅으로 마음이 귀경하시기를 기도한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해 주신 그 사람이 언제나 소망이다. 그리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을 의지하여 죄인 된 모습 그대로 십자가로 나아간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납하시는 그 사랑을 용납한다.
◈ 묵상 기도
주님, 왜 인생들은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요. 죄가 무엇이고 사탄이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까지 망가졌을까요.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할 정도로 부패하고 병들었는지요. 말기 암환자처럼 되어버린 인생들과 저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정도로 부채하고 망가진 죄임임을 알고도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심이 감사합니다. 말기 암이면 말이라도 잘 들어야 하는데, 병도 심각한데 말도 않듣는 환자와 같습니다. 성령님, 제 안에 계시고 저의 마음을 아십니다. 나도 모르는 저의 마음을 아시오니 완악한 마음을 만지사 부드럽게 귀경하여 주십시오. 너무 완악한 마음은 검과 같은 말씀으로 도려내어 주십시오. 그리고 황폐하게 될 때까지라고 하신 말씀을 받아들여, 심판을 통하여 마음을 낮추고 말씀으로 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길 가 밭, 돌밭, 가기떨기 밭이 이렇게 많은데도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시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그 복음을 제가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음을 알아 듣게 하셨고, 깨닫게 해 주셔서 죄사함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만으로도 감사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 안에서 누리는 생명과 안식을 얻기까지 제 영혼은 쉬지 못합니다. 목마른 사슴과 같은 제 영혼이 있어야 할 그 곳, 아버지 집에 거하게 하옵소서.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제 마음의 완악함을 이기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다음세대와 함께하는 한밤의 기도회를 통하여 온 가족들이 그리고 다음세대가 부드러운 마음으로 복음이 깨달아지고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