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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온 원성과 미수도 도혁과 함께 진혁이 커다란 화면에 띄워 놓은 자료들을 보기 시작했다.
“여러 방향에서 조사를 해 봤는데.. 저 5개에 대한 자료가 없어. 아마 저걸 가져간 사람들도 정확하게 어떤 건지 몰라서 가져간 것 같아. 저건 진짜 봐야 내용물을 알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사망한 경비원들 사진 좀 띄워봐.”
진혁이 키보드 버튼을 몇 개 누르자 화면에 경비원들의 사망 사진이 떴다. 원성과 도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들이 뭔가를 알아낸 모양이다. 우리보다 앞서서 찾아내면 안 돼. 위에 보고할 테니까 우리도 긴장을 좀 해야겠다.”
원성이 도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혁이 조용히 다른 각도의 사진에서 벽에 표식을 찾아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형..”
진혁이 그를 불렀다.
“그래.. 긴장을 좀.. 해야겠다.”
“응.”
미수가 문을 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야식 먹을까? 잘 먹어야지. 앞으로 잘 싸우려면. 안 그래?”
원성이 미소 지으며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하여간 예쁜 행동만 골라서 하고..”
“뭐하는 짓이지? 여긴 우리 집이야. 신성한 우리 집 안에서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줘.”
두 사람이 키득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혁을 바라보았다.
“외로워서 그러지?”
“외롭긴 누가.. 전혀 아니거든?”
진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원성과 미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도혁을 쳐다보았다.
“얼른 와. 식는다.”
“뭐 만들었는데? 야식 먹으면 살찌는데..”
“그럼 너는 먹지 말던가. 어차피 너는 힘도 안 쓰잖아?”
“머리 쓰는 것도 에너지가 엄청 필요한 일이거든?”
진혁이 투덜거리면서도 할 수 없다는 듯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방에 혼자 남은 도혁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벽에 새겨진 X 표식을 바라보았다. 그가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과거 회상)
“사.. 살려줘.. 제발.. 목숨만.. 목숨만 살려줘..”
52세의 타깃이 그의 앞에 엎드려 울며 애원하는 모습이 도혁이 쓰고 있는 선글라스에 비쳤다.
아직 어린 도혁은 주머니에서 주사액이 든 주사를 빼내는 것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눈 앞의 남자가
고통스럽게 애원하는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뭘 주저하는 거야?”
뒤에 높은 선반에 앉아 있던 예쁜 소녀 모습의 소진이 가볍게 뛰어 내려와 도혁의 옆에 섰다.
“내가 해?”
도혁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
소진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똥폼은.. 나도 자기랑 같은 집행자거든? 여자 손에 피 묻히는 게 그렇게 싫어?”
도혁이 대답 대신 주사기를 꺼냈다.
“제발.. 살려 줘.”
“경고를 무시하고 또 범죄를 저질렀잖아. 아저씨 잘못이야. 아저씨가 해친 그 아이도 지금 아저씨처럼 애원하지 않았어? 그 아이의 처지가 되어 보기 어때? 재밌지..”
소진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도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진이 싸늘하게 도혁과 마주했다.
“나도 알아. 하나도 재미없어. 그러니까 빨리 끝내라고.”
도혁이 주사기를 들고 왼손으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남자가 일어나 그를 바라보며 광기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거.. 나 혼자 갈 순 없지. 길동무나 해 달라고..”
남자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도혁은 눈을 들어 타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눈을 감고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소문에 집행자 중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눈동자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자가 있
다더군. 대부분 잔인하게 사형을 집행하지만 그 자만은 주사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다
고 말이야. 그 유명한 자를 죽기 전에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하지만 내가 너의 눈을 보지
않으면 너의 마법도 통하지 않아.”
그가 눈을 감은 채 그에게 달려왔다. 당황하고 놀란 도혁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칼에 맞을 뻔
했을 때 소진이 다가와 도혁을 밀치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도혁이 벽에 부딪쳐 바닥에 앉았
다. 소진이 고개를 돌려 도혁을 바라보았다.
“눈 감아..”
“....”
“눈.. 감으라고..”
도혁이 눈을 감았다. 짧게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남자의 시신이 바닥에 꼬꾸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을 때 남자의 목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고, 그 남자의 등을 밟고
앉아있는 소진의 손과 얼굴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피가 떨어지는 칼
을 들고 벽에 X표식을 그렸다.
“표식은 안 돼..”
소진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대로 서서 보면 X같아 보이지? 하지만 이건 내 영혼을 위한 표식이야..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십자가 모양같거든.. 어차피 천국에는 못 가겠지만..”
도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진이 바닥에 떨어진 그의 선글라스를 주워 다가오자 도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 눈동자로 날 유혹해주면 좋겠는데..”
“일단 이걸로 닦고.. 들어가서 샤워부터 해.”
도혁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소진이 피식 웃고는 그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끼워주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받아들고 얼굴과 손을 닦았다.
“따로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도혁은 소진을 바라보았다.
“피 냄새 나. 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따로 가자고..”
소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도혁은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진이 가슴 아픈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자.”
그의 말에 소진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에서 경찰차 소리가 들리고 그들은 건물위로 올라갔다.
(현재)
고개를 든 도혁이 화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소진아..”
도혁이 고개를 숙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머리가 복잡했다.
어깨에 타투를 한 여자를 잡아왔다. 소진이 의자에 묶여 정신을 잃은 여자의 팔에 주사기를 꽂았다.
****
그렇게 일상이 찾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혜영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여자직
원들 모임도 했다. 하지만 혜영은 전혀 예전 같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그의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나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귀가 즉각 반응을 했다. 점심 식사 후에 휴게실에서는
그가 나타나면 다른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게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듯, 직원들의 말에 귀를 기
울이는 듯 행동했지만 그녀는 자세히 보이지 않는 시야 속에서 그가 뭘 하는지, 누구와 이야
기 하는지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 쪽을 바라보면 고개를 숙여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랬
다. 휴게실에서 일어나 뒷정리를 하다가 남자 직원이 남기고 간 신문이 보이면 그걸 들어 잘
접어서 겨드랑이에 끼우고 쓰레기를 버리고 자신의 사무실에 갖고 가서 읽은 후에 다시 제자
리에 갖다 놓기도 했다. 풀문에 가서도 노트북을 열어놓고 멍 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미수
가 주는 저녁을 먹고, 원성이 주는 후식을 먹고 아무것도 쓰지 못한 노트북을 닫고 집으로 왔
다. 자기 전에 인터넷으로 사건, 사고 파일들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오늘도 별 사고 없다
는 것을 알고 노트북을 닫고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였다. 그녀가 서랍장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고 한 숨을 내쉬었다.
“왜 이러냐.. 후우...”
그녀가 서랍장을 열어 커피봉지를 꺼냈다.
도혁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예의바르게 예전과 같이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를 의식
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그녀를 바라보면 그녀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풀문에서 창밖을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지만 하늘에 별이 떠 있는지, 길을 가는 사
람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눈길에 차들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반
대편 건물 옥상에서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도 원성은 눈치를 채도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
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신문이나 인터넷으로
뭘 살펴보고 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뭔가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인상을 찡그리고 손으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활자에 집중했다. 그러다 그 사건
이 그와 상관이 없다는 걸 알고 나면 심장박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눈을 감고 한 숨을 내쉬
며 피식 웃고는 커피를 마셨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고 바라보고 있는 도혁을 지나가던 진혁이 멈칫 하고 그를 바라보았
다.
“전기세 많이 나와.”
진혁의 말에 도혁이 생각에서 벗어나 물병을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뭐해?”
도혁이 물을 마시고는 고개를 저었다. 진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혀로 입 안을 쓸며 지나갔다.
식탁에 기댄 도혁이 한 숨을 내쉬었다. 규린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집행자. 그가 상대하는 사람
들은 살인자, 강간범, 사이코패스 같은 위험한 자들이었다. 오늘 밤이라도 그에게 집행 명령이
떨어지면 그는 나가서 집행을 해야 한다. 자신이 보통 사람보다 신체적, 지능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는 하나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면 그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이 마
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사는 그의 인생에 혜영을 데리고 오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것
은 가장 바보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물을 마시고 한 숨을 내쉬었다.
둘 다 늦게 퇴근을 하던 어느 저녁, 그가 이제 막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통과해 안에 오르자
혜영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려고 했다. 도혁은 손을 들어 닫힘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가 턱
에 힘을 주고는 열림 버튼을 눌렀다. 혜영이 그를 바라보고는 뛰어 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고마워요.”
그가 버튼에서 손을 떼자 문이 닫혔다.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엘리베이터 안 불을 잠시 나갔
다가 들어왔다. 혜영과 도혁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혜영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곧 덜컹 거리더니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혜영이 손을 들어
경비아저씨와 연결 된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아저씨.. 엘리베이터가 멈췄는데요..”
반대편에서 치익거리는 소리만 들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저씨..”
“잠깐만..”
도혁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얼른 풀어.”
<무슨 소리야?>
“엘리베이터가 멈췄어.”
<나 아닌데? 나 지금 집이 아니라 밖이야. 왜 멈췄는데?>
“모르지.. 경비도 없는 것 같으니까 빨리 알아 봐.”
<알았어. 그런데 혼자 있어?>
도혁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혜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몸을 돌리며 이를 물고 조그맣게 말했다.
“빨리 해. 안 그러면.. 가만 안 둔다.”
<알았어~.>
전화를 끊은 도혁이 창 밖의 번개 치는 것을 바라보며 턱에 힘을 주었다.
“누구예요?”
도혁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동생. 컴퓨터 쪽 일도 잘하고, 설비쪽도 잘 해서. 집에 가서 곧 알아보고 해결해 준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네.”
혜영이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가 피식 웃었다.
“왜?”
“아니요..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기억나세요?”
도혁은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 기억이 났다.
“응..”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엘리베이터가 저렇게 자꾸 멈추면 불안해서 어떻게 타나.. 했거든요. 저건 필시 누가 멈춘거다. 저런 거에 속으면 안 된다고.. 죄송해요. 저 혼자..”
혜영이 자신의 상상 속의 일을 웃으며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섭게 하지 않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혜영이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의 심장소리를 전혀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는 무서
워서 그랬지만, 지금은 왜 그런지.. 그는 알고 있었다. 밖에서 번개가 번쩍하고 잠시 후에 큰
천둥소리가 들렸다.
“안 무서워? 보통은 무서워서 주저앉거나..”
‘안기거나 하던데..’
그가 다음 말을 숨겼다.
“지금 제일 무서운 건 일이 잘못되어서 엘리베이터가 줄이 끊어져서 1층으로 추락하는 것뿐이에요. 가방 안에 우산도 있고, 아직 지하철도 다니니까요. 천둥과 번개는 그렇게 무섭지 않아요.”
다시 엘리베이터 전등이 깜박이더니 팟! 하고 나갔다.
“아..”
“어두운 건.. 무서워?”
“음.. 조금요.. 한성씨는.. 아니에요.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어려서는 조금.. 지금은 오히려 밤이 편하게 느껴져. 나를 숨길 수 있으니까.”
“아..”
어느새 도혁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려고 하다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 혜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 그가 가까이 다가간 것도 그녀의 머리를 만지기 직전이라는 것
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뭔가 잡을 것을 찾으려고 몸을 돌리며 손을 뻗었던 혜영의 손끝에 도
혁의 코트가 만져졌다.
“죄송해요.. 뭔가 잡을 것이 필요해서..”
도혁이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고, 숨을 들이마신채로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숨 쉬어..”
“하아.. 놀라서..”
“무섭게 하지 않아. 그냥.. 잡을 거 필요하대서.”
“고마워요..”
“뭘..”
혜영은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길 기도하며 천천히 호흡을 고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투닥거리는 심장이 제 상태로 돌아오길 바랬다. 도혁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만약에.. 작년에 내가 당신한테 달려들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혜영이 흠칫 놀란 듯 고개를 돌려 어둠속에서 그의 얼굴을 찾으려다 포기하고는 한 숨을 내쉬었다.
“그 때.. 뭔가 긴장을 하긴 했지만.. 한성씨가 생각하는 그런 걸 생각해서 두려웠던 건 아니었
어요. 한성씨는..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았거든요. 단지.. 남자랑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갇혀
본 적이 없어서 긴장을 했던 것 같아요. 드라마의 나쁜 영향이죠, 뭐..”
도혁이 피식 웃었다.
“지금은? 지금도 긴장했나? 남자랑 단 둘이 어두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있어서?”
혜영이 마른 침을 다시 힘겹게 삼켰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혀로 쓸었다.
“조.. 조금요.. 하지만 곧 괜찮아 질 거예요. 불도 켜질 거고, 엘리베이터도 금방 운행할 테고..”
도혁은 자신을 너무 믿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예전부터 이상했는데 나를.. 너무 믿는 거 아니야?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오히려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생각하는.. 보통 남자보다 더 나쁜 사람..”
그녀가 놀란 듯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 때 불이 팟! 들어
왔다. 눈앞에 그의 얼굴이 있자 혜영이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혁이 고개를 들고
그녀의 손을 놓았다.
<“괜찮으세요? 저희가 잠깐 저녁을 먹느라..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곧 운행해 드리겠습니다.”>
혜영이 붉어진 얼굴과 뛰는 심장으로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도혁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잠
시 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1층에 도착하자 그녀가 뛰듯 내려 건물을 나갔다. 우산을 펼치
지도 못하고 그녀는 비를 맞으며 지하철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천천히 걸음을 천천
히 했다.
“뭐지..? 왜 저러는 거야..”
그녀는 아직도 귀에서 심장이 뛰는 듯 쿵쾅거리자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그의 차가 옆에 섰다.
“타.”
“괜찮아요.”
“안 잡아먹어. 감기 걸린다고.. 그렇게 걱정 되면 뒷좌석에 타면 되잖아..”
혜영은 그의 뒷좌석에 올랐다.
“시트가..”
“그런 걱정하지 말고, 얼른 타.”
혜영이 차에 오른 후 차 문을 닫자 그가 출발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수건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장난이 심했어. 미안해.”
“네.”
그녀가 안경을 벗어 무릎 위에 놓은 가방 위에 올려놓고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룸미러로 그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남자도 안심하지 말라고.”
“알았어요.”
혜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차를 그녀의 집 쪽으로 몰기 시작했다. 그녀를 내려주고 그녀의
집에 불이 켜진 것을 확인한 도혁이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혜영이 한 숨을 내쉬었다.
“진짜.. 깜짝 놀랐잖아.. 그런 장난을 치고..”
혜영이 손을 들어 붉어진 볼을 감쌌다.
집에 도착한 도혁이 진혁을 바라보았다.
“뭐야?”
“뭐긴.. 엘리베이터는 왜 그런 거냐?”
“번개에 충격을 좀 받았나봐. 또 그럴까봐 지금 사람 보내서 자세히 알아보고 있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형.. 그 여자 괜찮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왜 기분이 별로인데?”
도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예전에 나를 구해준 것 같은 동물병원 여자.. 동영상 아직도 갖고 있어?”
“김규린 말이야? 응. 왜?”
“내 아이패드로 전송 좀 해 줘.”
“왜?”
“확인 좀.. 해 볼게 있어서 그래. 그 당시 파일들 좀 다 보내줘.”
“응.”
도혁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진혁이 컴퓨터 폴더에서 13년 전 사건 파일을 전송했다.
며칠 후, 그들은 풀문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도혁은 고민에 빠졌다. 혜영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쪽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혜영이 그가 하는
일이나, 그 쪽 사람들이나, 그녀의 언니.. 복잡한 일 속에서 그녀가 다치게 될 것이 걱정되었
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와 있으면,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는
자꾸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손, 얼굴, 머리카락.. 어디든 손 대고 마음의 안정적인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눈앞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향기를 내뿜고 있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
기가.. 쉽지 않았다.
“솔희한테 받은 자료를 토대로 파티플래너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았어요. 작년과 비슷하게 할 생각이에요.”
혜영은 퇴근 후 한성과 풀문(Fullmoon)에서 연말 파티에 대해 상의하려고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성은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와인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혜영이 그를 바라보다
가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말했다.
“그리고 제 방에 커튼을 새로 달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요?
한성이 고개를 들어 혜영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같이 골라줘?”
“뭐에요.. 다 듣고 있었으면서..”
혜영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 옥상에서의 사건 이후로 그들의 관계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가 두렵지 않았다. 그에 대해 알수록 겁이 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비밀을 공유하면서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미안해. 생각할 게 좀 있어서. 파티는 당신 생각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한다거나 못질을 해야 한다거나.. 잡일은 내가 다 할 테니까.. 머리 쓰는 건 당신이 했으면 좋겠어.”
“치.. 그게 제일 어렵구만..”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용케도 이런 모습을 한 나와 저녁식사를 해 주네?”
혜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회사에서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예전에도 조금 촌스럽다 생각했지 변태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가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혜영이 고개를 숙이고 와인 잔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은 참.. 독특해.”
혜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 종종 들어요. 애인지 어른인지 구분도 안 가고,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없고, 덜 큰 사내아이 같다고들 하죠.”
그의 입가에 미소로 부드러운 주름이 만들어졌다.
“그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나도 알아요. 내가 예쁘지도 않고, 꾸미는 것도 잘 못하는 거.. 소질도 재능도 없는데 흥미까지 없어서.. 어떤 면에서는 회사에서의 한성씨와 닮았었다고 생각해요.”
“틀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가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볼에 홍조가 오르고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남자아이 같았어?”
“어렸을 때요?”
“응. 긴 머리를 가리고 다녔다거나.. 남자아이처럼 입고 다녔다거나..”
혜영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일인데요.. 9살 전의 기억이 없어요. 언니 말로는 제가 큰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었
다고 했어요. 9살 때 언니가 자고 있는 저를 깨워서 다른 나라로 가야 한다고 공항으로 데려
간 기억이 처음이에요. 그리고 처음 기억대로라면 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원피스
를 입고 있는 여자아이 모습이었어요. 심지어 머리에 해바라기 모양 큐빅이 달린 머리띠까지
하고 있었는걸요? 그런데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머리를 잘랐어요. 귀찮아서..”
“그래?”
“지금 여성스럽지 않아서 남자아이처럼 하고 다녔을 것 같았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왜 여성스럽지 않다는지 모르겠어.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 제일 여성스럽고..수다스럽
지 않고, 명품에 중독되지 않고, 힘든 사람, 어려운 사람, 그리고.. 아픈 사람 마음 헤아릴 줄
도 알고.. 지금도 궁금할 텐데 물어보지 않는 건. 나를 배려한 건가?”
혜영은 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고 있었다.
“틀려요. 물어보지 않는 건..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정말 당신이랑 얽히고 싶지 않아서..”
그의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와인잔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말이 맞아. 우린 얽히면 안 돼. 나에게서 멀어지는 게 좋겠어. 그래서 말인데.. 필요한 건 이 번호로 연락 줘. 이렇게 만나는 건 안하는 게 좋겠어.”
그가 주머니에서 번호가 적힌 종이를 꺼내 반으로 접은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녀쪽으로 밀었다.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그녀가 손을 들어 종이를 손끝으로 만졌다. 그가 종이에서 손을 떼지 않아 그들이 손끝이 닿았다. 혜영이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손을 먼저 뗐다.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럼.. 회사에서 봅시다.”
그가 냅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종이를 집어 주머니에 넣고 마른 침을 삼켰다. 차마 뒤 돌아 보지 못했다. 소
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그가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서였다. 미수가 그녀 앞에 앉았다.
“왜 벌써 간 거야?”
“언니..”
“응?”
“기분이.. 이상해요.”
“그래?”
혜영이 웃을 듯 울을 듯 한 표정으로 미수를 바라보았다.
“어김없이 오늘도 그 ‘산책’을 하고 오셨구만?”
벌써 집에 온 도혁을 흘긴 눈으로 진혁이 바라보고 있었다.
“응.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 산책은 안 하려고. 그들이 뭘 원하는지 조사하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뭘 좀 알아냈어?”
“아직은.”
진혁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 옐로우 있었어?”
“없었어.”
“레드는?”
“그건 모르지.”
“나.. 아프다고.. 오늘은 다른 요원에게 하라고 메시지 보내.”
도혁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들고 소파에 앉았다.
“형..”
맥주캔을 따서 단 번에 마셔버린 도혁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진혁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거 아니야?”
“...”
“그런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말했듯이 난..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이야.”
“알고 있었어. 지난 번 옥상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전부터도 이상했거든. 이미
1년 전부터 좋아했던 거지? 믿어도 좋을 사람이라니.. 벌써 마음이 움직였다는 소리잖아. 심
지어 소진이 누나가 그렇게 형한테 작업을 해도 눈길한 번 안 준 형이야. 비밀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크게 분노하던 건 뭔데? 형의 정체를 그 여자한테 드러낸다고 했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난 거였어. 형은.. 알고 있었어. 형에 대해 모든 걸 말해도.. 그 여자는 도망가지 않을 거라
는 걸. 오히려 형에게 끌려 올 거라는 걸.. 아니야?”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내 그 자리에서 마셔버렸다.
“능력이.. 돌아 온 거야?”
도혁이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능력이 다시 돌아오길 내가 얼마나 바랬는지.. 알아?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전혀..
그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눈동자에 내가.. 빠져버리는 것 같아. 내 모든 걸
다 말하고 싶고, 다 털어 놓고 위로받고 싶게 만들어.. 그 여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나를 지나가는 차에 치여 길에서 죽어가는 강아지처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 뿐이야.
정말 내가 하는 일을 단 한번이라도 본다면.. 그 일을 하는 내 모습을 본다면.. 도망갈 거야.”
“형..”
“독한 술 없냐? 역시 맥주는 하나도 안 취한다니까..”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형수도 도망 안 갔잖아. 오히려 영감 옆에서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도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 같은 여자가 또 어딨냐? 형수님은 강하고, 지혜로운 여자야. 그 여자는..”
“보호해 주고 싶지? 안아주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진혁이 의자에서 일어나 도혁에게 걸어갔다.
“우리 형이 차가운 심장을 갖고 태어난 줄 알았더니.. 사람이었네.. 축하해, 형. 드디어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 답도 없다는 사랑이라는 것에 발을 담근걸. 이럴 땐 독한 술이 최고지.”
진혁이 서랍장을 열고 안에서 보드카를 꺼냈다. 잔에 얼음을 넣고 보드카를 부어 한 잔을 도혁에게 건네었다. 두 사람은 건배를 하고 잔을 비웠다.
“크~~~.”
진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써.. 우왁.. 써..”
냉장고에서 딸기를 꺼내 물에 대충 씻어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도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못 마실 술일세..”
진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진저리를 쳤다. 도혁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짓다가 한 숨을 내쉬었다.
“내일.. 간단히 해 줄 일이 있어.”
“뭔데?”
도혁이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커튼을 치지 않고 침대에 엎드려 연말 파티 자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인터넷을 연결해
서 사건, 사고 소식을 보도하는 곳을 클릭했다. 그리고 눈으로 사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던 혜영이 일어나 커튼을 쳤다. 몸을 돌려 책상에 앉았다.
“이게 뭐지.. 답답한데..”
그녀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걸음을 옮겨 벽에 걸어놓
은 코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접힌 것을 펼치자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그녀는 그
종이를 들고 침대 위에 놓인 자신의 핸드폰에 그 번호를 저장했다. 이름을 적는 칸에서 커서
가 깜박거렸다. 그녀는 버튼을 눌러 이름칸을 채우고 저장버튼을 누르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
지듯 누워 천정을 바라보았다.
“답답해..”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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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