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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김준근, 〈기산풍속화도〉, 석전하는 모양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박물관 소장 |
1. 개요
석전(石戰)은 한민족의 민속 놀이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때는 정월 대보름이나 단옷날에 했던 놀이다.
눈싸움과 비슷하지만 석전(石戰)은 말 그대로 돌(石) 싸움(戰)으로, 눈뭉치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
그러니까 전장에서의 피튀기는 투석전을 민간인들이 한 것이다.
보통 인접한 두 마을끼리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직접 마주보고 던지거나 아니면 지형지물을 활용해 상대편 마을까지 밀어붙여 점령하면 승리한다.
2. 역사
옛 기록에 따르면 최소 삼국시대 고구려 때부터 석전과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석전은 이후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것과 기록상 다소 차이를 보이기에
풍년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성격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고,
조선에서 명절이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도 석전을 행한 것으로 보아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담아 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측이며 확실한 근거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석전이 문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 후기로,
1345년 충목왕이 단옷날에 척석희(擲石戱: 돌을 던지는 놀이)를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기록과
1374년 공민왕이 격구와 석전 놀이를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 석전이 14세기 당시부터 격구에 준할 정도로 고려에서 널리 성행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은 석전 경기를 구경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존성(李存性)이라는 문신이 석전은 왕이 구경할 만한 게 아니라며 말리자
하급 관리를 시켜 그를 때리게 한 뒤 탄환을 쏘아 내쫓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석전에서 돌을 잘 던지는 사람 몇 명을 불러 술과 몽둥이를 하사해 기예를 마음껏 발휘하게 하기도 했다.
한편 고려 말의 문인 이색은 석전을 구경하며 느낀 소감을 시로 남긴 바 있다.
이러한 석전 풍습은 하술할 내용과 같이 조선 전기에도 여러 차례의 금지령을 겪으며 살아남아
구한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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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을 묘사한 현대 민속화 | 1880년대에 촬영된 석전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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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2월 8일자 《그래픽(The Graphic)》지에 실린 석전 삽화 |
구한말 외국인이 기록한 석전을 보면 수십, 수백의 장정들이
서로 짱돌을 던지고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하며 심지어는 승세를 탄 쪽이 상대방 마을로 쳐들어가서
집까지 부술 정도였으니 마치 전쟁 같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듯하나,
그래도 위의 사례를 보면 '일단은' 놀이 취급이라 총 같은 무기는 반칙이었던 듯하다.
어찌나 과격한 놀이였던지 실제로 사람 몇 죽어나가는 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례로 1903년 2월경, 석전놀이를 구경하던 운산금광의 미국인 직원 클레어 헤스(Clare W. Hess)는 재미삼아 한 편에 끼어서 다른 편으로 돌 하나를 던졌는데, 하필 다른 편 석전꾼의 머리에 적중, 맞은 석전꾼은 머리가 터저서 뇌가 흘러나와 즉사했다. 클레어 헤스는 죽은 석전꾼의 가족들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움에 떨었지만 백성들 생각으로는 원래 석전놀이는 상대편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려고 돌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작 그거 가지고 문제를 삼은 조선인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석전은 때로 권력자, 예를 들어 평소에 횡포를 부리던 지주나 수탈의 앞잡이 역할을 하던 아전 등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돌을 던지는 식으로 항의하는 민심의 표출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마을간에 벌어지는 일종의 모의전 같은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의 계투처럼 마을간 이권 다툼의 전장이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권 다툼 성격의 석전이 벌어지면 투석구를 구비한 전문 석전꾼들을 고용해서 싸우기도 했다고.
이 와중에 놀이와는 별개로 프로스포츠 성격의 석전이 또 따로 있었다.
즉 전용 코트를 정해놓고 그 영역 안에서 정해진 인원끼리 투석전을 벌였는데
민첩원딜인 투석꾼과 별개로 몽둥이를 쓰는 근딜과 방패를 쓰는 탱커가 있으며,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진을 짜고 기동하는 등 전략적인 요소도 있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검투경기처럼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고 사람이 실신하거나 죽어나가는 맛까지 있으니
이렇게도 재미진 경기에 관중이 없을 리가 없다.
단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돌던지기와 돌피하기에 능한 전문 석전꾼이었다.
이 스포츠는 상무적인 요소가 강했던 초창기 조선왕실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태종 이방원은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워 있다가도 석전경기가 열린다 하면 벌떡 일어나서 구경갔고,
태조 또한 석전을 좋아했다.
세종의 경우 처음에는 지원했지만 아무래도 유교를 국시로 삼는 국가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싸움을 즐기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다 하여 결국 금지했는데,
이런 와중에 양녕대군의 아들들이 몰래 석전을 벌이다가 사람을 죽여서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제전 성격의 석전경기는 계속 했다.
조선시대에 석전으로 가장 유명했던 고장은 안동, 김해, 평양 세곳으로
개중 안동의 석전꾼들은 기록에 이르기를 맨손으로 짱돌을 던지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작정하고
사람 죽이는 데 쓰는 전쟁용 줄팔매, 그러니까 투석구로 돌을 날렸다고 한다.
숙련자가 쓰는 투석구는 조약돌조차 시속 140km의 속도로 발사해
중갑옷을 입은 상대도 한방에 골절시킬 수 있는 흉악한 물건인 만큼 당연히 전투력이 엄청났다.
안동 석전꾼들은 특히 중무장하여 근접전에 능한 왜인들을 잘 때려잡았는데,
삼포왜란 때 제포에 웅거한 왜구가 차일(가리개)과 방패를 설치하고 조선 관군의 화살을 막으면서 버텼으나
안동 현지 주민들을 데려와서 돌팔매질을 시키니 모조리 개박살났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죽령 방면 방어를 명받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긴급소집한 안동 석전꾼들로
안동에 접근하던 일본군 2군 선견대를 격퇴해 사흘 이상의 시간을 벌고
초조해진 가토 기요마사가 길을 바꿔 1군이 통과한 조령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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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소장 평양도 병풍에 그려진 석전 풍경[10] |
조선 후기의 평양 석전꾼들은 맷집으로 유명했는데, 당장 나무 몽둥이에 방패까지 든 평양 석전꾼들이 터프하게 돌맞으면서 밀고들어오자 서울 석전꾼들이 밀렸다는 내용도 있다. 위장 잠입하여 적 마을에 침투 사보타주를 벌이거나, 상대 마을로 처들어가 집을 부수기도 하고, 부락의 체급별로 다양한 단체전을 벌이기도 하는 등, 군사 작전에 버금갔다. 한양 깍쟁이 석전꾼들은 몸 사리면서 재미없게 석전을 한다고 하찮게 보았다는 일화가 존재한다.
한성부(서울) 근교에서는 특히 염천교 패와 애고개 패[12]가 만리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석전놀이 앙숙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기록에 왕왕 석전 부대가 나타나지만, 조총 등 개인화기가 발달하면서 유희 수준으로 내려간다. 그래도 영조 때에도 기록이 보이는 등 꾸준히 나타난다. 조선 전기에는 안동의 석전꾼들이 이름이 높았으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평양의 석전꾼이 유명했으며, 돌을 던지면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평양 장정들은 머리에 돌을 맞은 흉터가 없으면 치욕으로 여겼고, 석전에 패해 집으로 도망오면 어머니가 이를 크게 질책하며 석전장으로 돌려보낼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가 대단했고 터프했다 하겠다. 소년들도 사내다움이 있어야 한다며 참여가 권장 되었을 정도. 석전에 승리한 마을은 석전꾼들이 환영을 받으며 마을로 개선했고, 패배한 마을의 석전꾼들은 마을 밖에서 노숙해야 했다고 한다. #
매우 위험한 행위이기에 조선시대 당시에도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워낙 뿌리가 깊어 명이 잘 안 먹히다가 20세기에야 치안 안정과 안전을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금지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독립 후와 ~ 6.25 사이때도 사회적 혼란때문에 놀이(?)로써 부활할 기미도 없었다.
다큐멘터리 '깡패와 건달로 보는 100년'에 따르면 석전꾼들은 정월 대보름에 강을 사이에 두고 돌싸움으로 한 해의 농사를 여는 풍습인 석전에 전문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다. 석전꾼은 범죄자나 거지 등 불량배들이 많았고, 관의 감시를 받았던 이들은 관리들의 동원에 쉽게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반체제적인 독립협회가 집회를 할 때 공권력으로는 해산시킬 수 없었기에 사적인 인력들[13]을 동원하여 해산시켰는데, 이 중에 오강의 석전꾼들이 기록되어 있다. 즉, 석전은 일반적으로 강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당연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금지다. 했다가는 폭처법은 기본이요 돌멩이를 던지는 것이므로 특수상해 내지 살인미수죄도 성립하고, 재수 없으면 소요죄가 적용될 공산이 크며, 사상자라도 나오면 가해자는 폭행치사죄가 적용된다. 대신 현대에는 학교 운동회나 행사 같은 때 돌 대신 콩주머니나 모래주머니[14]를,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박을 향해 던지며 노는 '박터트리기 놀이'[15]를 한다. 이 박터뜨리기를 포함한 운동회는 영미권의 Field Day 형식을 일본에서 수입하여 만들어진 문화인데, 만국기를 걸어놓는 건 일본의 영향이다.[16] 주로 점심시간 직전에 진행되어, 박을 터뜨리면 "점심 잡수세요" 같은 현수막이 꽃종이와 함께 흩날리게 된다.
북한에서 1980년대 말, '민속경기놀이'라는 이름으로 널뛰기나 각종 민속놀이를 인민들에게 권장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석전놀이도 딱 한번 재현되었는데,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서 취소시켰다. 대신 군사체육종목으로 미국놈 까부시기라며 미군이 그려진 나무판을 세우고 돌을 던지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3. 해외 유사 사례[편집]
석전과 비슷한 행위를 하는 전통들을 세계 각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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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연중행사 에마키(年中行事絵巻)》[17]에 수록된 단오 석합전 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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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의 화가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18~1694)가 그린 석합전 풍경 | 석합전을 설명한 일본 만화 |
실제로 일본에는 석합전(石合戦, いしがっせん)[18]이라는 명칭으로 조선의 석전 같은 놀이는 아니지만 풍습의 형태로 존재했다. 이쪽도 유서 깊은 역사가 있어 《일본삼대실록》 간교 5년(881년) 기사와 가마쿠라 시대 군기소설 《겐페이 성쇠기》[19]에서부터 언급되며, 마찬가지로 단옷날에 주로 치러졌다. 아츠타 신궁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사원에서 성행한 것으로 보아 신령과 부처를 받들어 액을 물리치는 종교적인 의미도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1231년 싯켄 호조 야스토키가 석합전 금지령을 공포했으나 백성들의 반발이 심해 결국 제재를 완화했을 정도로 일찍이 그 인기가 대단했다.[20]
중국에 존재한 계투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마을 간 패싸움으로 돌팔매에서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장병기를 들고 싸울 정도였다. 역시나 중앙권력이 잘 닿지 않는 외변에서는 이민족의 맹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묵인해줬었다.
또한 이탈리아 북부 이브레아에서 개최되는 '오렌지 전투 축제'에서는 이름대로 오렌지를 던진다. 19세기 평민 출신의 비올레타라는 여성이 결혼식을 치른 뒤 초야권을 요구하던 영주의 성에 불려가게 되는데, 영주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숨겨 가지고 있던 단도로 영주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에 자극을 받은 민중들이 폭정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이때 변변찮은 무기가 없어 영주의 사병을 향해 오렌지를 던진 것이 오렌지 전투 축제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주로 시칠리아산 오렌지를 사용하는데, 축제에서 던지는 오렌지는 상하거나 상품가치가 떨어진 것만을 사용하며 사전에 손으로 주무르거나 해서 최대한 물렁물렁하게 만들어 부상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한다. 또한 집중 사격받는 영주의 사병 역할을 맡은 인원들은 높은 탑을 형상화한 축제 차량 위에 올라가고 투구도 쓴다.
남아메리카 엘살바도르에는 불덩이 던지기 축제가 있다. # 17세기에 악령이 화산 폭발을 일으키는거라 믿으며 역으로 산을 향해 불을 던지며 저항하던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4. 대중매체[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