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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11:1~4
바울이 소유했던 신앙생활의 액기스를 뽑아낸다면 이 말씀입니다.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살전5:20 예언을 멸시하지 말며
살전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살전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런 믿음의 수준은 그리스도인이 근심 중에도 기쁨을 잃지 않아야 하고, 환난 중에도 내세의 소망을 내다볼 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의 안에 계셔서 인간의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平康)을 주실 줄 믿어야 한다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고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찾아오시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이 세상에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기도입니다. 기도 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이유는 그 기도를 하나님이 만드셔서 친히 요구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왜 합니까? 도움받을 것이 있어서, 기도할게 없는데 목사가 자꾸 기도하라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받기 위해 기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에 머무는 것이기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기도를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자녀들을 만나는 방법으로, 자녀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열어놓으신 것이 기도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기도하는 이유가 어떻든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만나주시고, 상 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게 인생의 정답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물어보면 기도생활이라 말할 것입니다. 왜 기도 생활이 힘들까요? 기도 생활은 규격화되지 않고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어려울 때 신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하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올해 느꼈는데요. 기도하면 살도 잘 빠져요. 그만큼 기도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이기에 어렵습니다. 기도 중 중보기도가 가장 어렵습니다.
기도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믿음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솔직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공간에 갇혀 땅에서 살아가고 있고,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아야 알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손으로 만져져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도, 잡히는 것도 없어요. 그래서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기도 가운데는 잘못된 기도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잘못된 기도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께 기도한다면서 사람에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을까요?
유대교 지도자들은 구약시대부터 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가르치기 위해 기도를 세트 메뉴처럼 만들었어요. 내용과 형식, 시간까지도 규격화 시켜서 가르쳤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요. 이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잘못된 곳으로 빠졌어요. 그것은 마음은 없고 말만 있는 형식화된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기도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책망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복받은 나라가 현재까지 없습니다. 중동 전체가 작은 이스라엘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참 기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골방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길 원하십니다. 이 기도는 다른 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내가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그런 기도를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공간에서도 이 여건만 충족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없는 산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산이 골방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유 역시도 그 어떤 방해를 받지 않는 좋은 시간대였기 때문입니다. 24시간 중 그 어떤 시간이든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갖기를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왜 골방을 좋아하실까요? 어떤 눈치 보지 않고 진실 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시고 그 사랑을 방해받지 않고 내게 가득 주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도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와 마음을 열고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만든 하나님의 고유 발명품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셔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너무나 소중한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면 그 즉시 하나님은 우리 앞에 계시고 만나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체험하는 성도님들의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에 대해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3:17절처럼 하나님은 우리 중에 거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찾으면 우리를 보시면서 나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진정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는 것만으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방법과 그 안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원직입니다.
첫째 나의 아버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거예요.
예수님은 기도의 문을 열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려고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기에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은혜가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가득하길 소원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내 믿음을 보여드리는 거예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말씀은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겠다는 신앙의 표시이자 하나의 서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하고 부른 후에 “저 이렇게, 저렇게 해주세요.”라고 요청하잖아요. 그러기 전에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길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기도하는 자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행위를 하라는 뜻입니다.
셋째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 이 부분부터는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말씀은 기도하는 본인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날마다 육체적 양식이든, 영적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린 이 기도를 드릴 때 자세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 꿈과 소망과 있어야 할 것과 없어져야 할 것, 돈, 건강, 삶의 환경, 자녀의 꿈과 비전까지 자세히 기도하면 좋아요.
넷째 회개는 이렇게 해라. <용서하오니..... 나의 죄도 사하여 주세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생각나거든 핑계 대지 않고 진실 되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찾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마음에 불편함을 주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거예요. 이 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이 생각날 때는 그를 용서함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이 놓치지 않아야 할 기도 = 그러나 신앙인이 등한시하는 기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이 뜻을 해석하면 “시련에 지지 않게 해주세요!”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시험은 성경에서 세 가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시험(시련), 사탄이 신앙인들을 흔들어 넘어지게 하려 하는 시험(유혹),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이 행위는 성경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의 시험은 신자가 하나님께 충실하느냐, 또는 그 신앙이 진실한 것인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주어지는 것과(하나님이 주시는 시험), 죄의 유혹을 위해 쾌락 같은 것이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사탄이 주는 시험). 전자의 경우는 시련, 후자의 경우는 유혹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구별해 내는 것이 어려워서 신자는 신앙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련에 지지 않게 항상 구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임하는 이 시험의 경우 하나님께로부터의 시련이면 잘 견디며, 참으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 시련은<사람을 통해, 생활환경 여건을 통해, 실망감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련을 통해 의로 여김을 받았고, 모세는 이 시련이 임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련이 오면 왜 행복해야 할까요? 우리 같이 히12:6 읽겠습니다.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우리가 만약 이 시련을 당하고 있거나, 당해본 적이 있다면 그 뜻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받아들이신 자녀 임의 증거이기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기도하라 하신 시험은 즉 시련은 일종의 고난인데요. 인간의 신앙을 시험하는 수단이므로 시련을 당할 때 신앙을 버리는 일 없이 야고보 사도가 전하는 것처럼(1:2) 오히려 그것을 크게 기쁜 일로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시련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예수님 품격을 낳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하나님이 복 주시려고 준비된 나의 그릇에 100배로 더하게 하는 신앙생활이기에 그렇습니다. 시련을 만나거나 겪는 것은 여러분이나 저나 괴롭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 시련 가운데 여전히 예수님이 주인 된 신앙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기도하면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마태복음 19:16~22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셨는데 그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시험에 빠진 청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중 18~22절만 읽겠습니다.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 안에 근심이 되면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그 시험에 지지 않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바랍니다.
22절의 근심하며<헬 뤼페오> 단어인데요. 고통하다는 뜻에서 파생되어 슬퍼서 서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내가 바라는 것, 추구하는 것과 상충되어 고통스러워서 서운한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서운하다는 것은 마음에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이 가득함을 뜻합니다. 이런 것이 시험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 직접 들었는데도 듣는 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섭섭하면 시험에 들어 따로 갔다고 마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 청년처럼 섭섭한 서운함이 마음에 찾아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때 이 청년처럼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주님과 같이 가고, 더불어 먹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선택의 신앙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은 시련에 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기도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고민되겠죠.
제일 좋은 기도 방법은 앞에 말씀드린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순서를 잘 배우고 이용하는 거예요.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세요. 혹시 잘못한 것이 생각나면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세요.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일이 생각나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을 하고요. 그다음에는 마음에 걱정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말하세요. 가족 친구와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고 기도를 마치면 됩니다. 참 쉽죠.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저의 믿음을 지켜 주세요라는 기도를 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세히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7장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하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 것을 요청한 자에게만 주시기에 자세하게 구할 책임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기 전 우리와 한 가지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을요. 그 시험이 내게 올 때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일을 행할 것이고, 그 자리에 세움을 받게 될 것이고, 이생에서 그만한 복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을 토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필요가 있어서,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든지 우리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기도 자들을 만나주시고 상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하나님을 매일, 매 순간 만남으로 내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기도자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