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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 제 16장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전장에서는 사울이 두 번째 시험도 통과하지 못하므로 결국 이스라엘의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릴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켰는데 그가 바로 다윗이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이제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권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사울은 점점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고 다윗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새 명령 (16:1-5절)
하나님은 사울의 일로 인하여 슬퍼하고 있는 사무엘을 찾아오시고 사울을 대신할 인물을 찾아주시며 그에게 기름을 부을 것과 방법을 지시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울을 버리셨는데 사울에게 선언되었던 ‘폐위 선고’는 이미 확정적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이 사실을 두고 슬퍼했는데 그의 슬픔은 단순히 사울 개인에 대한 심정뿐만 아니라 사울의 폐위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나타날 부작용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울의 군사력만은 인정받았기 때문에 사무엘은 그가 하나님께 버림 받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사울이 훌륭한 용사라는 것은 다윗도 그의 ‘애가’에서 인정했었다.
*삼하1: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려졌도다.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사무엘은 사울에 대해 심히 애통하며 슬퍼했는데 그 슬픔을 강하게 밖으로 표출시켜 하나님의 신령한 책망을 받았다.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심으로써 그의 슬픔을 소망으로 승화시켜 주셨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사울은 그다지 악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비록 하나님께는 버림을 받았으나 사무엘과 다윗에게 인정을 받았고 백성들에게도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양의 뿔에 기름을 채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서 그의 아들 중에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다. 왕의 기름 부음을 위해서는 뿔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병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는 병을 사용했으나 다윗에게는 뿔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왕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는데 뿔은 긍정적인 면을 암시하고 병은 부정적인 면을 암시한다고 한다.
*왕상1:39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왕하9:1-2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거기에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의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그를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
뿔은 성경에서 권세를 상징하고 또한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도 사울과 예후에게는 병을 사용하였고, 다윗과 솔로몬에게는 뿔을 사용한 것이다.
‘이새’는 부호였는데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의 아들로서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사람’이다. 당시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셨다. ‘예선했다.’라는 말은 ‘보았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왕’이라는 단어 ‘멜렉’은 사울에게 적용되었던 ‘지도자’ ‘나기드’와는 그 의미에 있어 다르다. ‘나기드’는 방백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지도자라고 부르고, ‘왕’은 명실공이 한 나라의 군주를 뜻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13:14에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 15:28절에 ‘사울보다 나은 사람’ 등으로 표현되었다. 사울은 인간적인 기준에서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선발된 사람이었으나 다윗은 오래 전부터 신적인 기준에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예비된 왕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신정적 왕정 체제는 사울 때가 아니라 다윗 때에 이룩된 것이다.
사명을 받은 사무엘은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그것은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사실이 사울에게 발각된다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최종 폐위 선언을 받아 영적 왕권은 상실된 처지였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이스라엘 왕으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사무엘이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을 경우 그 일은 당연히 역모 행위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무엘이 자신과 전 가족, 가문 전체가 죽임을 당하고 추방 되고 종으로 팔리게 되는 것이다. 사무엘은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고충을 아시고 지혜로운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꾸짖지 아니하시고 놀라운 지혜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무조건 기름병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지 말고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이새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이새를 그 제사에 청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지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사를 사울을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실로 성소가 훼파된 상황에서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은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에 가서 하나님께 실제 제사를 드리면서 이새를 그 제사에 청하여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제사’라는 말 ‘자바흐’는 화목제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이며 희생제물이 암송아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제사는 화목제였을 것이다. 화목제는 제사를 드린 후 제물을 나누어 먹는 잔치가 동반되었기 때문에 사무엘이 그 지방의 유지를 청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에도 그를 잔치에 초대하여 먹게 했고 그 다음 날 사울이 떠날 때 기름을 부었었다. 그러므로 그 지방 유지인 이새를 잔치에 청하고 그의 아들들을 부른 후에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사울에게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 지니라.’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목적은 백성들의 요청에 부응하는 일이었고,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님의 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 것이다.
사무엘이 베들레헴 성읍에 도착하자 성읍 장로들이 두려워하며 그를 영접하였다. 장로들이 두려워한 태도는 무엇인가.
첫째,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가장 권위 있고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둘째, 사무엘은 사사로서 그 직무상 종종 죄를 범한 성읍을 방문하여 책망하고 징벌했기 때문에 장로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징치하기 위해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찌 오셨는가를 묻지 않고 ‘평강을 위해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장로들의 불안한 마음을 감지한 사무엘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평강을 위해서 왔다고 말하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참석하라고 한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몸과 의복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과 영적 교제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2. 기름 부음 받는 다윗 (16:6-13절)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다. 다윗은 사울의 경우와는 달리 사람의 눈에 왕재로서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의 시각과 사람의 사각의 차이점이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무엘은 용모를 중시했으며 이새의 장자 엘리압을 차기 왕의 적격자로 본 것이다. 다윗의 아름다운 용모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용사를 원하던 당시의 풍조와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외모보다는 중심을 보시는 것이다.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도 제사에 청하였는데 그들이 다가올 때에 이새의 장자 엘리압을 보고 ‘이 사람을 여호와께서 기름 부을 왕으로 택하셨다.’ 고 마음에 생각했지만 하나님께 거절당하고 만다. ‘엘리압’은 ‘하나님은 아버지시다.’라는 뜻으로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사울을 따라 종군했으나 전과를 세우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엘리압의 용모가 아름답고 키가 크고 외모가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서 용모나 신장을 무조건 배격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꾼이 될 기준을 보시는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을 직역하면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보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의 눈으로 보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마음의 눈을 가지고 그 사람의 내적 겸손, 신앙, 인격, 진실성 등을 감찰하시는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마음의 눈으로 이새의 아들들을 보기 시작했다. 이새의 아들들 즉 아비나답, 삼마 등 차례로 자기 앞을 지나가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으나 일곱 아들 중에는 왕으로 선택된 자가 없었다. ‘아비나답’의 뜻은 ‘아버지는 훌륭하시다.’이며 ‘삼마’는 ‘황무지’라는 뜻인데 다른 성경에서는 ‘스므아’로 표기되어 있다. 본장에는 이새의 아들이 여덟 명으로 나타나고 대상 2:13-15절에는 일곱 명으로 나타나는데 여덟 명 중 한 아들은 일찍 죽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막내’라는 말 ‘하카탄’은 ‘가장 어린’ ‘가장 작은’이라는 말로 당시 다윗의 키가 형들에 비해 아주 작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어른들만 제사에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새는 어린 다윗에게 양을 치게 하고 형들을 데리고 제사에 나온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나이가 이십 세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무엘은 다윗을 들에서 불러오게 하고 그가 올 때까지는 제사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사무엘이 다윗을 볼 때에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그의 빛이 붉었다는 것은 머리털 색깔이 붉은 것을 의미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은 머리털을 가지고 있으나 다윗은 머리털이 붉었으며 이것은 귀한 것으로 아름다움의 한 조건이었다고 한다.
둘째, 눈이 빼어났다고 하는 것은 총기 있는 눈, 반짝이고 맑은 눈을 가리키는데 뛰어난 얼굴 모습을 한 자가 소유해야 할 조건이었다.
셋째,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은 외적인 아름다운 용모와 함께 내적인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이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한 것과 일치한다.
다윗은 모두 3차례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았다.
첫째, 사무엘에 의하여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둘째,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추대 되었을 때 기름 부음을 공식적으로 받았다.
셋째, 전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했을 때 12지파의 장로들과 두령들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받았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심에 따라 사무엘은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이새의 가족들 앞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이 사실은 극비에 부쳐져 유지되었다. 사실 이새의 가족들은 사무엘이 무슨 이유로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지 알 수 없었고 사무엘 역시 그 일에 대하여 함구함으로 기름을 부은 사무엘과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만이 알 수 있는 지극히 비밀한 일이었다.
기름을 부은 바로 그 시간에 여호와의 신이 다윗에게 즉각적으로 임했고 또한 영속적으로 임재하고 계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도덕적,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역량과 은사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다윗의 말과 행동을 통해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기름을 붓는 객관적 의식을 통해 여호와의 신이 주관적으로 임재 했던 사실은 사울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나타났지만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확연히 달랐다. 다윗의 경우는 하나님의 임재가 기름 부음의 의식 직후에 나타났다는 것과, 임재하신 여호와의 신이 끝까지 떠나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와의 신이 임하실 때 어떤 특별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울은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자 예언도 하고 찬송도 불렀지만 다윗은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것은 사울에 대한 다윗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호와의 신을 부어주신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여호와의 신에 충만하여 목자로서 강한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고, 나아가 사울이 악령이 들었을 때에 왕궁으로 나아갈 길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여호와의 신에 충만하여 블레셋을 멸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는 사울이 아니라 다윗임을 백성들 앞에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3. 다윗의 왕궁 출입 (16:14-23절)
사울은 외견상 훌륭한 풍채를 지녔고 어느 정도 용기까지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질상 소심하였으며 심리적으로 항상 불안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는 일반인과 동일하였으나 정작 왕위에 오른 후에 사무엘에게 책망을 받으면서 그는 불안했고 초조했으며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자 심한 우울감이 그를 엄습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하여 일종의 정신병이 발작하게 된 것이다.
사울이 왕이 된 초기에는 여호와의 신이 그와 함께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왕직을 제대로 수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왕위가 폐위된 이상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머무실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 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여호와께로부터 온 악령’이라는 말이다. 영어로는 ‘an evil spirit form Jehovah' 이며 ’악한 영‘ 즉 ’루아흐 라아‘는 인간의 도덕적, 영적 생활을 고양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는 본질상 뚜렷이 대조되는 사탄의 영으로서 곧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억누르고 파괴하는 사악한 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교만한 사울에게 사탄의 역사를 방치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탄의 영은 하나님의 허락과 지배 하에서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사탄의 영이 역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사울의 왕위가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함이다.
둘째, 새롭게 하나님의 영을 받은 다윗을 사울 앞에 등장시켜 대조시키기 위함이다.
셋째,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악신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사울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정신병적 우울증에 시달리고 정신 착란증 증세까지 일어나 사물을 옳게 분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신하들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 사실을 왕에게 직보하여 처방을 받게 했던 것이다. 물론 사울에게 임한 악신의 활동은 간헐적이었으며 정신 심리학적 면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기 때문에 신하들은 음악을 통한 심리적 치료 요법을 권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에게 나타난 현상은 심리적이 아니라 영적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음악을 통한 치료는 불가능했고 단지 신령한 음악을 통하여 임시적으로 치료의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울은 신하들의 요청을 일단 수긍하고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에 젊은 신하 중 한 사람이 다윗을 천거하게 된다. 이는 장차 왕위에 오를 다윗의 여러 뛰어난 자질이 이미 주위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 소년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섯 가지이다.
첫째 호기가 있다는 것이다. ‘호기’는 ‘능력이 있는 용사’라는 말로 이것은 다윗이 자기가 치는 양에 대하여 목자로서 사자나 곰을 쳐서 죽인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 범사에 겁을 내지 않고 담대하다는 것이다.
둘째, 무용이 있다고 하였다 ‘무용’은 ‘전사’라는 뜻이다. 앞에서 말한 ‘호기’와 비슷한 말로서 전쟁터에서 나타내는 무예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구변이 있다고 하였다. ‘구변’은 말을 아름답게 하고 매사에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으며 말 재주가 있다는 것으로 다윗은 작시의 능력이 있었고 그의 시편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애송하는 명시가 되었다.
넷째, 준수한 자라고 하였다. ‘토아르’라는 이 말은 잘 생긴 미남자를 일컫는 말이며 특히 여성스럽게 잘 생긴 얼굴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다윗은 남자처럼 씩씩하게 잘 생긴 얼굴이 아니라 여성스럽게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여호와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신에게 크게 감동된 다윗의 모습이다. 다윗은 그동안 은혜 안에서 신앙이 성장했고 믿음의 사람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드디어 다윗을 차출하는 사울의 명령이 이새에게 하달되었다. 이새는 왕의 권위를 존중하였으며 자신의 아들이 왕에게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예롭게 여겼는데 아들이 미래에 왕이 될 것을 상기하고 왕국에서 일하게 된 것이 첫 출발이라는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이새는 왕에게 빈손으로 보내지 아니하고 예물을 준비했는데 이는 상대방에게 존경심을 표명하거나 감사를 나타낼 때 하는 행동이다. 야곱도 아들들을 바로에게 보낼 때 예물을 준비하게 했는데 그것은 상대방에게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던 것이다.
다윗은 본격적으로 사울의 신하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사울이 악신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 다윗이 수금을 타며 신령한 노래를 불렀고 위로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사울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하였고 사울의 사랑 받는 요인이 되었다. 사울은 다윗을 처음에는 수금 연주자로 삼았으나 후에는 병기 든 자로 승격되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첫째, 다윗에 대한 사울의 사랑과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는 것이다.
둘째, 사울이 다윗의 무예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병기 든 자는 주인의 창칼이나 방패를 가지고 다니는 일종의 부관으로서 주인으로부터 가장 신임 받는 정예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서 다윗은 모세처럼 궁중에서 고상한 직책을 감당하고 왕궁의 여러 가지 법도와 국사를 배우게 되었으며 장차 이스라엘 왕으로서 필요한 훈련을 받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사울은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계속적으로 자기 곁에 두겠다고 고지했는데 이는 다윗에 대한 자신의 신임을 강력히 표명한 것이다.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이 말을 직역하면 ‘그가 나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며 사울도 다윗을 만족하게 여겨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을 괴롭히면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연주하였고 곧 바로 악신은 떠나고 사울이 상쾌하게 낫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다윗의 능력이 사탄을 물리치고 사울을 은혜 속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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