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수필가(9) - 이원성
이원성은 1930년 선비 고을인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이육사와는 6촌간으로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퇴계 선생의 14세 손으로 어릴 때부터 민족의식이 강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정휘창이 이원성의 문학을 육사의 영향이 강하다고 평하였듯이 출생의 배경이 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44년에 덕산공립심상학교를 졸업하고 안동 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농업학교 시절에 그는 많은 문학서를 탐독하면서 습작기를 가졌다.
1947년에는 서울 국학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학교를 끝내지 못하고 대구로 내려왔다. 1950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였다.
1953년에 양남중학교에 교사로 발령받으므로 그의 평생 천직이 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국어 선생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문학의 길로 나아갔다.1958년에는 그의 수필이 신문에 실렸다.
1961년에는 마산공고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상서여 중, 고에 자리를 잡았다.
1968년에 대구에 수필 동호인 모임인 경북수필동호회(영남수필의 전신)가 창립되면서 창립 회원이 되었다. 이 후 7년 간 편집을 맡았다. 이원성의 문학 활동은 영남수필이 무대가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영남수필을 통하여 그는 본격적으로 수필을 썼다. 지금의 영남수필 회원을 보면 그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창립회원이다. 그만큼 대구에서는 원로 수필가이고, 수필문학에 공헌도가 높은 분이다
문학 단체의 활동을 보면 1977년에 대구 문협 회원이 되었고 1979년에는 한국 문협의 회원이 되었다.1980년에는 대구 문협 부지부장을 하였다. 1988년에는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이 되었다. 1985-88년에는 영남수필문학회 회장직을 맡았다.
이후로 여러 학교에서 교사-교감-교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하양에서는 하양여고 설립에 관여하여 교감-교장으로 재직하고 정년퇴임을 하였다.
이원성의 문학 활동을 보면 오로지 수필만 썼다. 영남수필문학회에서 제일 많이 활동하였다. 1987년에는 첫 수필집 ‘뜻을 잃은 언어들’을 출간하였고, 1995년에 교직에서 물러나면서 수필집 ‘허공에 흩날린 메아리’와 정년 퇴임 기념 문집 ‘시공을 주워 담다.’를 발간하였다.
이유식은 이원성의 수필을 두고 안동 양반골 출신이라선지 어딘지 모르게 선비 기질이 느껴진다고 평하였다. 그의 수필에는 우리 전통에 관한 강한 애정을 표현하였다.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많이 담겨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사색 수필도 썼다. 그런 면에서는 이유식의 말이 맞다.
산업화 이전의 전통 사회 속에서 성장하였고, 성인이 되어서 산업화의 강한 물결을 경험한 세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가치관은 전통에 대한 애착이다. 대구-경북 수필문학 형성기의 작품이 전통 가치관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이 많고, 회상형 수필이 많은 것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정휘창의 지적에 의하면 이원성 수필에서 구사하는 언어와 문장은 아름다운 국어가 바탕이다. 문장이 간결하고 의미가 분명하면 소통이 잘 일어난다. 문법에 맞는 국어와 정확한 표현도 이원성 세대가 구사하는 문장이다. 아마도 이 세대의 수필가는 대부분이 국어를 전공한 교사가 많기 때문이리라.원로 수필가가 살아온 배경은 도외시하고 이 세대의 수필가를 후배 작가들이 너무 보수적이다, 라는 평을 한다. 그러나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이 이들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이다.
원로 세대의 수필가가 보수적이다, 라고 폄하하지만 수필 발표라든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철저하게 지킨다든지 등등 여러 가지 면에서 후배 수필가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이원성은 대표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작가로 생각한다. 그런 탓인지 작품활동이나 문단활동에 비하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는 작가이다. 내가 대구 수필가를 쓰는 이유도 이런 작가를 조명해기 위해서 이다.
내가 옆에서 바라본 이원성 선생은 대단히 꼬장꼬장한 성격을 가지신 분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반드시 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다.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가치관에 대해서는 아주엄격하다. 그의 수필은 그의 성품과 다르게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수필도 많다.
이 세대의 수필가들이 많이 언급하는 수필가는 윤오영과 피천득이다. 이원성의 수필도 한흑구류가 아니고 윤오영류에 가깝다. 그러나 수필에 의미 내용을 담으려는 작법은 한흑구류의 양식을 탈피한 것은 아니다.
2001년에 발간한 수필선집 ‘오후의 산책’에는 실린 작품에는 다듬이 소리, 장독간, 보리밥, 박 바가지 등 전통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다. 이런 류의 수필은 근원수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고고학자 김원룡의 수필이 중,고 국어 교과서에 등재되면서 우리의 미를 찾으려는 시대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유식의 총평을 옮겨 보면 “ 산업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에서 물질만능화와 인간이 부품화, 기계회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이나 미덕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사라져가는 옛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라고 하였다.
1999년에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수필집
1987 - 뜻을 잃은 언어들
1995 - 허공에 흩날린 메아리
1995 - 정년 퇴임 기념 문집(시공에 주워 담다.)
2001 - 오후의 산책(교음사)
오후의 산책
토요일 오후다. 오늘따라 별다른 용무가 없다.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는 팽팽한 생활 속에서 용케 얻은 한가한 시간이다. 무턱대고 거리로 나왔다.
무엇을 잃은 듯한 허전함, 무엇을 뻬앗긴 듯한 배신감, 무엇엔가에 쫓기고 있는 듯한 초조함, 외톨이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고독감, 무엇인가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답답함, 낭떨어지 끝에 서 있는 듯한 불안감 등이 뒤섞여 한꺼번에 엄습해 온다.
눈앞에 움직이는 것ㅇ라고는 자동차와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어진 환경의 전부인 것 같은 착각으로 눈앞이 캄캄해진다. 붐비는 인파에 휩싸여 멍하니 걸으면서 먼 하늘을 바라 보았다. 맑게 겐 오월의 하늘이 나를 유혹한다. 잠시라도 좋으니 이 숨 막히는 시공(時空)에서 탈출하고 싶은 충동이다.
s사(寺)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등산 채비를 한 젊은이들이 뒤쪽에 십 여 명 타고 있었다. 하나 같이 즐거운 표정들이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0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버스는 도시 한 복판을 가로질러 교외로 빠져 나갔다. 차창으로 푸른 향기가 날려 들어온다. 참으로 오랜 만에 맡아 보는 신선한 냄새다.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미풍에 흔들리는 모양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의 동공도 그것을 닮아 신록으로 물들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다.
뒤쪽의 젊은이들이 녹음기를 틀어 놓고 노래의 가락에 맞추어 손뼉을 치면서 흥을 돋운다. 그들도 이 맑고 깨끗한 빛깔과 상쾌한 바람에 그냥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가다가 어느 호젓한 산모퉁이에서 내렸다. 산이 있고, 숲이 있고, 개울이 있고, 논과 밭이 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마을이 한적하다. 도시의 답답함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젖는다.
밭둑길을 따라 느릿느릿 걸었다. 경사가 완만한 언덕길이다. 산등성이를 타고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간질인다. 미인의 보드라운 손길이 와 닿는 것 같은 감촉이다. 폐가 터지도록 그 잔잔하고 맑은 바람을 들이마셨다. 후! 하고 토해내는 날숨에 덕지덕지 앉은 도시의 진애(塵埃)가 씻겨 나오는 것 같아 상쾌하기 그지없다.
바람 소리와 나뭇잎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을 아직 잃지 않았구나 고 깨닫았을 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사람이 자연과 할게 할 땐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인가 보다.
다시 모퉁이를 돌아가니 남새밭이 있다. 상추, 아욱, 파, 부추 등이 깨끗이 자라고 있다. 하나같이 싱싱하다. 비닐하우스에서 온상 재배한 것보다 생명력이 더 있어 보인다. 밭 가장자리에 앉아 상추 잎을 만져 보니 보드라운 촉감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순박한 산촌 생활이 그리워진다. 보리밥과 상추쌈, 그리고 구수한 된장 냄새가 코에 와닿는 것 같아서 군침이 돈다. 한참을 앉아 있노라니까 아욱국과 상추쌈을 실컷 먹은 듯했다.
몇걸음 건너에 감자밭이 있다. 계절로 보아 땅 밑에 감자가 주렁주렁 여물었으리라. 탐스러운 감자알을 생가하니 턱턱 갈라진 먹음직한 삶은 감자가 눈에 선하다. 밭고랑에 들어가 흙을 조심스럽게 헤체 보았다. 주먹만 한 허연 감자가 쑤욱 얼굴을 내민다. 순간 규중 처녀의 허벅지를 본 것 같은 부끄러움에 얼른 묻어버리고 후다닥 일어섰다. 사방을 살펴보니 아무도 보는 이가 없어서 다행이다.
조그마한 언덕을 넘어서니 제법 펑퍼짐한 잔디밭이 있다. 다리도 쉴 겸 거기에 번듯이 누웠다. 끝없는 하늘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다. 푸른 하늘을 자꾸 마셨다. 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보니 날개가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이때, 바로 눈앞에 2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애벌레 한 마리가 기어 가고 있었다. 몸을 폈다 오그렸다 하면서 잔디 잎 위로 기어 올라갔다는 내려와, 다시 뿌리를 타고 다음 포기로 옮아가고 있었다. 딴에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보잘것없었다. 마이 아코디언의 주름을 신축시키는 것처럼 오그렸던 몸을 한껏 펴곤 한다. 그러나 한 번 움직이는 거리는 1센티미터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먹이가 됨직한 연한 잎이 있는 나무까지는 십여 미터나 되는 먼 거리에 있다. 이런 속도로 거기까지에 다다르자면 밤중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나무에 기어올라 잎에까지 이르자면 삼경 녘은 실히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혹시 도중에 소낙비라도 한 줄기 쏟아지면 큰일이다.
‘빨리빨리 기어라 이것아! 힘을 내어라. 힘을!’
하고 마음속으로 응원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애벌레는 태연히 똑같은 속도로 같은 동작만 되풀이 하고 있다.
이것이 태어난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제 갓 부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어미의 보호와 이끌어 줌도 없이 오로지 본능에만 의존하여 먹이를 찾아가고 있다. 그것도 먹이가 될 만한 잎이 어느 뱡향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더듬어 풀포기를 한 포기 한 포기 건너가고 있다. 마치 망망대해 에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일직선으로 기어가면 좀 더 빨리 갈 수 있으련만 이무도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체 너는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나는 가늘게 속삭이는 듯 물었다. 그러나 아랑곳 않고, 그냥 몸을 오그렸다 폈다 하는 전진의 동작만을 계속하고 있다. 불쌍하게 미로에 빠져 갈팡질팡 허덕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만약 어린아이가 길을 잃었다면‘엄마! 엄마! 하면서 목이 쉬도록 울부짖으며 헤멜 게 아닌가.
좀처럼 애벌레의 긴 여정은 진척되지 않는다. 나는 답답하다 못하여 살며시 잡아 보드라운 나뭇잎을 골라 그 위에 얹어 주었다. ‘얼른 얼른 자라라! 그리하여 고운 나비로 태어나 보드레한 날개를 펴고 가볍고 예쁘게 하늘을 날아라’고 빌어 주면서.
어느덧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서녘 하늘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다. 개울 길을 따라 내려왔다. 길섶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석양을 등지고 폴폴 날고 있다. 내가 한 마리의 나비가 된 듯이 마음이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