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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평생 친구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장희
나와 한국교직원공제회는 천생연분의 유대관계를 이어왔다. 독학으로 고시검정을 통해 중등교원자격증을 받은 것이 1971년 1월인데 같은 시기에 공제회가 설립되었으니 50년 세월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한 동지인 것이다. 나는 군복무 중이었기에 이태 후인 1973년에 첫 발령을 받아 교직원공제회에 가입하였다.
정부의 학교교육환경 정상화 방침에 따라 태어나 교직원 생활안정과 복리증진을 위해 노력한 공제회와 나는 동기처럼 함께 생활해 왔다. 교직원공제회는 설립 이후 변함없이 재직 중에는 물론 퇴직 후에까지 교직원들이 보람과 생활의 풍요함을 누릴 수 있도록 여러 면에 걸쳐 힘쓰고 있다.
재직 중 교직원공제회에 대해 잘 몰랐던 시기가 있었다. 총각시절에는 봉급도 쥐꼬리 만했었고 그나마 경북에선 넉 달 동안 전임강사를 거쳐야 정식 교사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공제회 회원이 되고서도 적립식 장기저축 형태라 나중에 목돈으로 모아진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 구좌 육백 원씩 5구좌뿐이었다.
결혼 후, 증좌 권유에 따라 구좌 수를 늘여 갔지만 액수도 미미했고 입출금이 자유로운 예금이 아니라서 한동안은 그저 묻어놓는 돈 정도의 의미로만 알고 있었다. 동료 직원들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중년에 이르러 살림 형편도 국민소득도 늘어나 30구좌까지 증좌가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그때부터 최대한 증액하여 부었더니 퇴직 때 상당한 목돈을 챙길 수 있었다. 몇 달이라도 더 일찍 많이 넣지 않았던 게 후회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금에 이자가 붙어 복리로 불어나니 당시로서는 국내 최고율의 금융재테크가 아니었나 싶다.
퇴직 후, 아들 장가 밑천도 할 겸 수천만 원 목돈을 장기저축급여로 넣어두었더니 해마다 꽤 짭짤한 수익이 되었다. IMF 여파로 젊은이들 취업도 어려워 공부라도 더 뒷받침하자니 목돈 마련이 절실했다. 알뜰히 살아도 암담했던 일은 금융위기 후에도 맏이는 독립할 처지가 안 된다며 신붓감을 두고도 결혼을 미루는 거였다.
부득이 둘째부터 결혼시키기로 했다. 예식장소를 교직원공제회관으로 정한 이유는 교통도 편리하고 무엇보다 비용이 덜 드는 장점이 있었다. 장기간 공제회에 불입했다가 퇴직하면서 받은 목돈이 혼사비용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기인사 때마다 뿔뿔이 흩어진 과거 직장동료의 주소를 몰라 널리 알릴 수가 없었다.
삼십 년 학창 친구는 몇몇에게만 알렸는데도 더 많은 이들이 축하를 해주었다. 반면에 교직원은 더 많은 과거의 동료교사에게 알렸지만 하객 수는 많지 않았다. 공립학교 교사는 되도록 퇴직 전에 혼사를 치러야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주례 인사 모시기가 신경 쓰였는데 마침 아들과 내 생각이 같아서 주례 없이 혼사를 치르게 되었다. 친구들 중 내가 첫 기록을 세운 셈이다. 사전 약속은 없었지만 사돈 간에 역할을 나눠 마무리를 잘 해내었다. 경비도 최소한으로 치른 셈이었다.
이듬해 맏이 혼사는 공제회관을 빌리지 못했다. 예약기회를 놓쳐 교통 불편한 변두리에서 치르고 보니 교직원공제회 예식장이 더욱 그리워졌다. 장기저축급여에 들고 나니 특별회원으로 인정돼 대출도 용이했다.
그때는 인쇄물 교직원신문까지 집으로 우송되었다. 매주 배달되는 신문지면은 몇 쪽 안 되지만 나날이 변해가는 세상에서 노후의 취미생활, 재테크, 인문학상식, 건강관리 등 멋진 기사들이 눈과 마음을 씻어주었다.
은퇴 후에 다시 교직원공제회의 주간신문을 받아보니 내용이 더 알차고 교육적인 내용의 칼럼이 머리에 쏙 들어왔다. 좋은 기사를 보면 스크랩해 두었다가 훈화자료로 활용했다. 특히 공무원연금센터에서 재능기부 강의를 맡아하던 때여서 적기에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칼럼 작가가 있다. 00일보 창간기자였던 원로 언론인으로 그분의 에세이집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마침 한국교직원신문에서 그분의 기사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분의 칼럼이 아직도 많은 교육가족의 가슴에 힘 있게 꽂히는 촌철살인의 매력으로 빛나고 있음을 확신한다.
수십 년 전, 신문에서 한국교원공제회가 주선하는 선진학교시찰을 겸한 동남아여행이 있었다. 우리 내외의 결혼 후 첫 해외나들이가 되었다. 방학기간을 이용한 3박4일 여행이라 초중학생인 두 아들을 떼어놓고 홀가분하게 바깥 세상구경할 절호의 기회였다. 열두 명 일행이 한 숙소에 머물며 안내자 인솔에 따라 싱가포르, 태국 등을 돌며 그곳 문화재와 관광지, 수업 중인 학교 교실까지 둘러보았다. 특히 태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본 특이하고도 선진적인 환경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히 살아있다.
국내에서는 낯설었던 배울 점으로 교실복도에 보조교사가 배치돼 근무하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학생이나 급한 용무가 생긴 학생을 돌볼 수 있도록 교대로 근무한다는 설명을 듣고 참 좋은 제도라고 생각 되었다. 또 그곳에는 여러 층에 걸쳐 복도 계단 양쪽 벽에 대형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어린이들이 원하는 꿈의 세계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학교 고용직원의 솜씨라는 말에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미술전공 교사인 내가 봐도 아마추어 솜씨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뛰어난 실력이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청렴한 정치지도자와 담배꽁초 없는 깨끗한 도시, 동물원의 앵무새 묘기에 반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물 위의 도시촌락 풍경이 퍽 인상적이었으며, 어느 나라였는지 분명치 않지만 어떤 학교에서는 휴업 중인데도 우리를 위해 닫혔던 교문을 열고 학교 내부를 공개하는 성의를 보여 고마운 생각에 수첩에 메모도 하며 다녀온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 중국인이 그렇게 많이 살고 있다는 점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한국교직원공제회 산하 사업체 중 나는 오래 전부터 하나손해보험(K-에듀카)에 가입한 사람이다. 주행거리 마일리지 적용을 받아 매년 4분지 1정도의 보험료를 환불 받고 있다. 은퇴 이후는 장거리 운행과 시내 볼일은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니 승용차는 며칠에 한 번씩 농사일 나갈 때만 주로 운행하는 편이다.
운전대에 앉으면 떠오르는 충격적 경험이 있다. 고령자들이 젊은이에 비해 쉽게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하듯 나 역시 어쭙잖게 뺑소니로 몰릴 뻔한 일을 당한 것이다. 자동차보험에 들어있어 큰 손해는 면했지만 껌-딱지만한 하찮은 접촉사고가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커졌다. 사고처리 경험이 없는 내게 상대방은 사기꾼이나 다름없었다. 오토바이상사를 경영하는 젊은이였는데 겪고 보니 상습 접촉사고 유발 전문가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아내를 옆에 앉히고 바삐 골목을 빠져 나가는데 길 좌우로 문제의 차와 택배차량이 양쪽에 엇비슷하게 주차돼 있었다. 나는 작은 차라서 살며시 조심조심 그 사이를 빠져 나가면 될 줄 알았는데 간격이 좁아 통과할지 아리송했다. 다시 뒤로 물렸다가 차창 밖을 봐가며 천천히 조심해 빠져나갔다.
볼일을 보고 나중에 내 차를 살펴보니 운전석 쪽 몸체에 실금이 수평으로 가늘게 그어져 있었다. 지나고 보니 차종도 번호도 알 수 없어 퍽이나 찝찝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피해차량 주인이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왔다. 차가 세워졌던 곳에서 만나보니 퍽 젊은이였다.
그의 차는 외관상 깨지거나 훼손된 흔적 확인이 나로서는 힘들었다. 그는 내 차로 인해 자신의 차 오른쪽 뒷부분이 긁혔다며 모서리 차폭등 전등갓 속에 금이 갔다는 설명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 황당하기만 했다. 자신의 차량은 국내에 몇 대뿐인 일본제 000차종으로 단종 되어 고치려면 일본에까지 가서 부품을 사와야 한다 했다.
출장비, 유류비에 이것저것 보태면 부품 값까지 상당액이 들어 보험처리해도 사오백 만원 든다는 것이다. 뺑소니로 벌금을 물지 모른다는 말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니 현금보상해주겠다면 충분히 감안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예고대로 언제 연락했는지 경찰에서 출두명령이 떨어졌다. 다음날 경찰서에 갔더니 뺑소니라 할 수는 없지만 블랙박스에 나타난 흔적을 봐서 접촉사실은 인정해야 한다했다. 크게 염려는 말라고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주 만나는 친구에게 처음으로 보상 문제를 상의했다. 그는 그렇게 많이 물지 않을 거라며 보험처리를 권했다. 친구의 훈수를 받아들여 보험처리하기로 정하고 보험사 K-에듀카에 신고했다.
며칠이면 처리가 될 줄 알았는데 상대방은 과연 접촉사고 경험 많은 달인이었다. 여러 번 같은 건으로 바가지를 씌웠던 이력이 쌓여서인지 쉽사리 타결될 것 같지 않았다. K-에듀카에서는 일정 간격으로 협의 중이라는 문자를 여러 번 보내왔다. 한 달 이상 지나니 정말 피해자 측 주장대로 보상액이 불어나나 싶어 몹시 안달이 났다.
서너 달이 훌쩍 지나 보험사 담당직원의 반가운 연락이 왔다. 80만원을 보험으로 처리해주고 일을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난생 처음인 나로서는 큰 액수이지만 처음 그가 요구하던 현금액수에 비하면 3분의 1정도로 깎인 금액이었다. 보험료는 몇 년 늘어나겠지만 액땜 했다고 생각하고 하루빨리 잊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바빠도 우회해 갔으면 갔지 무리해서 억지로 좁은 차 사이를 빠져나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운전대를 잡고 있다. 운전을 그만둘 때까지 내 주위의 그 누구도 이런 피해를 당하지 않아야겠다는 경각심도 생겼다. 자동차보험 담당자도 무척 고생 많았을 것을 생각하니 고맙기 짝이 없다.
갖가지 자동차보험사기는 지금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고 듣고 있다. 의도적으로 사고를 유발시키는 일 외에도 손해액 산정 불공평 사례도 사라져야할 폐단이다. 곳곳에 폐쇄 회로 TV도 설치돼 있고 차량블랙박스가 지켜주지만 간혹 약삭빠른 가해자는 어리숙한 피해자에게 덤터기를 씌우기도 하니 이 또한 하루 속히 고쳐져야 할 것이다. 교직원공제회 The-K에듀카(하나손해보험)는 연중 나를 지켜주는 안전 지킴이이다.
세월이 흘러 종이에 인쇄된 교직원신문이 사라졌다. 그래도 인터넷이나 모바일 앱을 통해 월간지를 보는 것이 또 다른 기쁨이라 여겨진다. 젊은 사람은 몰라도 고령층의 퇴직자들은 더러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스마트폰으로 언제어디서나 기사를 쉽게 펼쳐 볼 수 있다는 점은 또 다른 장점이다. 모바일 월간지로 변한 지금도 종이신문의 감동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 공제회관에 들렀다가 종이잡지 ‘The-K’의 발간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선착순으로 신청하는 회원들에게 집에서 받아볼 수 있게 됐으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신문 잡지를 통해 더욱 친밀해진 한국교직원공제회는 내게 스승이요, 친구이다. 요즘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The-K 매거진만큼 절친한 친구가 더 이상 없다는 느낌이다.
감염병 때문에 연금센터 재능기부 강의도 중단되었다. 내게 여러 해 배우던 회원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서로가 상대를 위해 염려하고 자신부터 조심해야 하니 누구든 만나자고 먼저 말을 걸 수도 없다.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오래 전부터 네이버 밴드(대경실색 수채화)나 다음 카페(대경상록아카데미)를 통해 공제회의 사업내용을 글로 전하거나 잡지에 기사화된 글, 그림을 사이버공간에 알렸다. 공제회특별회원가입도 적극 권하고 있다.
노후 준비를 내세워 밭농사를 시작했었다. 그 일로 바빠 잠시 공제회를 떠난 적도 있었다. The-K자동차보험에 가입한 사실만으로도 공제회 특별회원자격이 유지되는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다. 나는 다시 부랴부랴 매월 일정액 불입하는 적금에 들기로 약정하고 특별회원 자격을 되찾았다.
그해는 교직원미술대전이 열리던 첫해였다. 응모 조건에 맞는 미술작품이 있었지만 크기가 맞지 않아 그해는 출품하지 못했고 다음 해에 응모 권유를 받아 전시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교육대학원 수업 때 배경처리를 미룬 채 오래 팽개쳐둔 인물화였다. 여인의 몸속 절반이 뼈대를 드러낸 특이한 작품이라 새로 촬영도 하고 사진을 복사하거나 연필과 붓으로 옮기는 과정을 수십 번 거쳐서 배경을 채워 완성한 것이다.
서울의 친구, 아들네와 지인들이 관람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운 전시회였다. 작품 도록은 내게 배우는 은퇴공무원들에게 보일 수 있었다. 또 고교졸업50주년과 칠순을 기념해 열린 동기회 모임에서도 영상으로 소개됐고 행사 후 기념앨범에까지 실리게 되어 추억을 더욱 선명히 했다. 교직원공제회가 노후에도 취미생활과 예술창작을 이어가는 전문인으로 나를 각인시켜 주었다.
요즘은 The-K 매거진이 새로운 친구로 젊은 멘토 역할을 해준다. 얼마 전 공무원연금센터에서 지금껏 이어졌던 수채화반 강의가 코로나19 때문에 개강하기 어렵다며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알려왔다. 비대면 Zoom교육으로 이어간다는 것이다. 앞으로 몇 달 후의 강의를 염두에 두고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비대면 교육을 한두 시간 들은 걸로 전혀 미덥지 않다. 은퇴 10년이 지난 내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게 보였다. 더군다나 처음 겪는 과제라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The-K 매거진 2월호의 역멘토링 기사는 아주 적절했다고 판단되었다. 매거진도 연금센터의 젊은 직원도 스승처럼 만나 확실히 배우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세월이 갈수록 급변하니 한두 달, 일이 년 만에 강산이 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네 살림살이도 편해진 게 있는 반면 더 어려워진 점도 숱하다. 물가는 오르고 돈의 가치는 낮아져 저축이 힘들고 젊은 세대는 청춘을 제대로 꽃피워 보기도 전에 웃어른을 섬겨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른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한 채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상황을 상실의 시대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다. 요즘은 우리를 바르게 이끌어줄 롤-모델을 찾기 힘들다. 어려움을 헤쳐 나갈 해결책도, 공평하거나 정의로운 세상의 갈망도 멀어지는 느낌이다. 편의와 안식과 행복감 대신 뭔가 불편하고 긴장되고 미덥지 않은 분위기에 쌓여 있다. 코로나19가 이러한 상황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창립50주년을 맞는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성장해온 발자취를 보노라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올바른 경영방침과 가려운 곳을 찾아 시원히 긁어주려는 회원과의 소통, 교육복지에 힘써 온 역사와 면모를 알 수 있다. 여기에는 The-K매거진의 역할도 크다고 본다. 달마다 ‘어제, 오늘-생각하기’와 ‘지금-쉬어가기’, ‘내일-행복 찾기’에서, 지상 강의에서 나는 잃었던 의욕을 되찾고 감동하며 삶의 교훈을 얻고 있다. 교직원공제회 가족으로 오래도록 함께할 결심을 다지게 된다.
지금까지 교직현장 안팎에서 탄생 50주년한국공제회와 나의 인연에 대해 살펴보았다. 교육계의 친구 한국교직원공제회는 7개의 산하사업체를 보유하면서 급여사업·대여사업·복리후생사업·기금조성을 위한 수익사업을 통해 교직원의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The-K호텔앤리조트(The_K호텔 서울, The_K호텔 경주, The_K설악산가족호텔, The_K지리산가족호텔), The_K제주호텔(라마다프라자제주호텔), The_K저축은행, The_K교직원나라, The_K소피아그린, The_K서드에이지, The_K예다함상조 같은 출자회사를 두고 있기도 하다.
돌이켜보니 한국교직원공제회는 정신적 경제적, 문화·예술적으로 내게 든든한 스승, 보호자 역할까지 해냈다고 생각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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