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든 연민이든 멋대로 하라지!’
우스꽝스러운 할머니가 되더라도 지켜야 할 나다움
여성과 아동, 흑인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 사회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 인정받는 소설가였던 위니프리드 홀트비의 대표작 중 하나. 국내 초역. 개인적인 사랑보다는 사회적인 성공을 꿈꾸는 일흔두 살의 주인공 ‘캐럴라인’을 둘러싼 다양한 주변 인물의 목소리를 담아낸 소설로, 가난한 비혼의 노년 여성을 향한 혐오와 연민의 시선을 가볍게 튕겨내는 작품이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장마다 다른 인물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데, 거의 매 장이 ‘불쌍한 캐럴라인’이라는 말로 끝나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꿋꿋하게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캐럴라인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정말로 ‘불쌍한’ 이들이 누구인지 되묻게 만들고 노년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한 꺼풀 벗겨낸다. 한편 《불쌍한 캐럴라인》 출간 이듬해에 신장병의 일종인 브라이트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음에도 주변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다음 소설 《사우스 라이딩》의 집필에 몰두한 홀트비의 모습은 죽음 직전까지 일을 놓지 않았던 캐럴라인과 겹쳐 보이는데,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오늘날까지 대중에 사랑받으며 홀트비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
무심한 당신은 알지 못했던
기꺼이 감내하고 기어이 꿈꾸는 삶
캐럴라인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그의 조카는 “혼자 하숙집에 사는데 집세는 밀리고, 우리가 준 헌 옷을 입고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일들을 하겠다고 종종거리며 다니고, 아무도 실어주지 않는 글을 쓰고, 저녁밥으로 마가린 바른 빵을 먹는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또 다른 조카는 더 짧게 소개할 수도 있다. “대단한 기생충, 엄청난 멍청이, 기막히게 지루한 분, 크나큰 고통거리지.” 미혼에, 가난하고, 이렇다 할 업적도 없는 일흔두 살의 캐럴라인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 캐럴라인이 죽은 뒤에도 친척들은 그를 애도하는 대신 귀찮은 존재 하나가 사라졌다며 안도한다. “일흔 넘은 여자 인생에 뭐 그리 대단한 게 있겠”느냐면서 캐럴라인을 조롱하고, 캐럴라인의 인생 전체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캐럴라인이 작성했다는 유언장의 내용을 들어보면 누구라도 이상함을 느낄 만하다. 평생을 가난하게, 여기저기 빚을 지며 살았으면서 수천 파운드나 되는 돈을 어떤 사람에게 얼마씩 나눠주겠다고 자세히도 적어뒀으니 말이다. 캐럴라인, 당신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건가요?
조지프는 덴턴스미스가 크리스천 키네마사 그 자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는 그녀의 말에서 생겨났다. 그녀의 노동으로 존재했다. 회사는 그녀의 이상을 향했다.(66쪽)
일흔두 살의 캐럴라인은 어떤 삶을 살았나. 《불쌍한 캐럴라인》은 곧바로 캐럴라인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대신 캐럴라인의 주변 인물들, 그러니까 캐럴라인이 온몸을 바쳐 성공시키고자 한 영화사 ‘크리스천 키네마사’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내 펼쳐놓는다. 한몫 챙기려고, 인맥을 쌓으려고, 필름을 팔기 위해, 불쌍한 캐럴라인을 돕고 싶어서 등등 회사에 모인 이유는 저마다지만 “크리스천 키네마사 그 자체”인 캐럴라인을 향한 시선은 고만고만하다. 연민 혹은 혐오. 회사에 ‘한 발씩만 걸친’ 사람들은 성공 가능성이 낮은 사업에 온몸을 바쳐 일하는 캐럴라인을 안쓰러워하거나,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이라고는 나이뿐이면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그를 혐오스럽게 여기거나. 거의 매 장이 ‘불쌍한 캐럴라인’이라는 말로 끝나는 소설의 형식적 특징은 캐럴라인을 향한 이런 시선을 잘 나타낸다.
개인적인 사랑보다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열정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정말 있어요. 적어도 저 같은 여자들에게는 있어요.(331쪽)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독자는 비로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닌 캐럴라인 스스로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온갖 고통과 불편과 외로움과 실패도 지켜야 할 큰 뜻만 있다면 가치 있는 것이 된다”라며 남들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캐럴라인의 모습은 앞서 쌓아온 가난한 노년 여성을 향한 편견을 깨부순다. ‘실현 가능성 낮은 일에 아등바등 목매다는 가난한 할머니’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기대하는 용기를 잃지 않는 멋진 할머니’가 되고,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해서 혐오스러운 할머니’는 ‘우스꽝스러워지더라도 나다움을 잃지 않는 단단한 할머니’로 바뀐다. 그러나 변한 것은 캐럴라인이 아닌 그를 바라보는 시선뿐. 위니프리드 홀트비는 ‘불쌍한’ 캐럴라인을 통해 편협한 시선과 짧은 수식어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그러니 당신 역시 나이가 많든 적든, 가난하든 아니든,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규정되고 고정되지 말고 살아가라는 찬란한 응원은 덤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와 애나 번스 등이 수상한
‘위니프리드 홀트비 기념상’
위니프리드 홀트비는 사회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로서 《타임 앤드 타이드》와 《맨체스터 가디언》을 비롯한 정기간행물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독립노동당에서 활동했으며, 페미니스트 단체 ‘식스 포인트 그룹’의 일원으로 과부, 비혼모, 아동 등을 위한 인권 운동을 펼쳤다. 또한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의 연사로서 세계 각국을 방문했는데, 이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열악한 상황을 목격하고는 흑인 노동조합 결성을 열렬히 주장했다. 홀트비는 서른일곱 살에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유산과 책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거주구인 소웨토에 남겼고, 이를 토대로 비유럽인을 위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도서관인 ‘위니프리드 홀트비 기념 도서관’이 개관했다. 아울러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린 ‘위니프리드 홀트비 기념상’도 제정되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와 애나 번스 등이 이 상을 수상했다. 홀트비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를 선선히 남겼기에 “나는 항상 정신적인 것을 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라고 했던 캐럴라인의 목소리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