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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8)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5구간 (현풍→합천) ② [창동제→ 합천·창녕보]
2020년 11월 01일 (일요일) [독보 30km]▶ 백파
* [현풍 홍시호텔]→ (가을비 속에서)→ 도동서원→ 구지하얀가람→ 강둑 길→ 수변공원 길→ 구지오토캠핑장→ (대구교육청 낙동강수련원)→ 긴 강둑길→ (중앙119구조본부→ 구지면 대구국가산업단지)→ 창동1제→ 대암4제→ (넥센타이어)→ 내동배수문→ 강변 구비길→ [이노정}→ 전원교회→ 쌍용부페식당→ 고갯마루 점심→ 강변 테크길→ 대암교회→ 목단2리→ 곽재우장군 묘소→ 우곡교 앞→ 강변 길→ 송곡제→ 무심사→ 무심사 임도 정상 (고령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회천 조망)→ 중마→ 창녕 이방면 우산리→ 장천 제방길→ 합천-창녕보→ [기원섭 이상배 마중]→ 황강→ 합천(읍)→ 가고파식당 → 합천 [제우스모텔]
* [현풍 ; 대구 달성군 현풍읍 원교리] ← 동남쪽에서 ‘차천’ 합류(천왕산 발원, 달창저수지 경유)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 북쪽에서 ‘회천(會川)’ 합류 (김천 수도산 / 합천 가야산 발원, 고령 대가야읍 경유)
창동제(堤), 대암제4제(堤)
오전 10시 57분, 계속해서 구지의 대구국가산업단지를 끼고 재방 길을 걷는다. 다행이 세차게 내리던 비가 완전히 그쳤다. 빗방울이 성가시게 얼굴을 때리지 않으니 좋다! 길가에 서 있는 이정표('합천-창녕보 13,8km')를 지났다. 오늘의 종주 거리 중 이제 절반 이상을 걸었다. 좌측의 대구국가산업단지를 두고 바이크로드는 작은 언덕의 숲길 아래 강안의 길로 접어들었다. 강물이 발아래까지 와 있는 강안의 굽이 길을 지나 다시 제방 길로 올라섰다. ‘창동제1제(堤)’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다시 이어지는 직선이 주로, 좌측은 산업단지에 ‘起昇’이라고 쓴 공장 건물들과 아스팔트로 정비한 공장부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구지면주민센터가 있는 아파트 군이 보이고 멀리 하얀 구름을 허리에 감은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창동제(堤) 표지석을 지나서, 다시 강안의 길로 접어들었다. 낙동강 강물이 제방 가까이 다가와 호수처럼 고여 있다. 강안에는 여기저기 다양한 습지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제방 길, ‘대암4제(堤)’이다. 다시 아득한 직선의 주로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 좌측은 구지면 응암리 지역의 대규모 국가산업단지이다. ‘지능형자동차부품진흥원’, ‘넥센타이어 주행평가 시험장’등의 표시를 한 건물들이 제방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
강안의 수상 테크 탐방로
오전 11시 41분, 이정표(→ 합천-창녕보 11.2km)를 지났다. 낙동강은 여전히 호수처럼 고여 있고 강안에는 잡초와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습지가 이어진다. 응암천 배수문을 지나, 길은 강안으로 접어든다. ‘구지하얀가람’에서 20km 내려온 지점이다. 강안으로 내려가 초록이 퇴색한 여름나무가 드리워져 있는 산굽이 길을 지나 강변의 테크 탐방로로 이어져 나아간다. 오른쪽 발밑에는 고요한 강물이 와 머물고 주변은 자연스럽게 습지를 이루고 있었다. 강안을 몇 구비 돌아가는 수상 테크탐방로, 깔끔한 시설이 강물과 어울려 멋진 낙동강 풍경을 보여준다.
긴 강변 길을 돌아서 고개로 올라가는 길의 좌측, 가지런히 쌓은 높은 옹벽 위에 아담한 기와집이 있다. 이노정(二老亭)이다.
이노정(二老亭)
이노정(二老亭)은 조선시대 조선 성종 때 대유학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이 시(詩)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두 사람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화를 입었고, 1504년(연산군 10) 이곳에서 상봉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정자의 이름인 ‘이노(二老)’는 한훤당과 일두 두 사람을 가리킨다. 이노정을 ‘第一江亭’(제일강정) 또는 ‘第一江山’(제일강산)이라고도 하는데 이름에 걸맞게 낙동강을 바라보는 풍광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다.
정자가 처음 지어진 것은 일두가 함양의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1495년부터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화를 입어 두 사람이 유배된 1498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885년 영남 유림에서 두 분을 기리기 위해 다시 지었고, 1904년 건물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팔작지붕이다. 정면 중앙 2칸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각 1칸의 방이 있으며, 우물마루 뒤로 2칸의 방이 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조선 초기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대립]▶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은 중앙집권과 부국강병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에 따라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운 훈구(勳舊) 대신들이 권세가 높아지고 재산을 모으면서 부정부패와 폐단이 일어,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 정계로 진출하였다. 사림파는 3사(三司, 司諫院 ·司憲府 ·弘文館)의 관직(官職)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專制化)를 반대하였다. … 한편 훈구파는 사림(士林)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비난하여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직(金宗直)과 유자광(柳子光)은 일찍이 개인감정이 있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에 기록한 일로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도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 유자광·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보복에 착수하였다.
[무오사화의 원인]▶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李克墩)은,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삽입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 삼아 사림파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金馹孫)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부관참시(剖棺斬屍)]
[화(禍)를 입은 사림파]▶ 사림파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이목(李穆)·허반(許盤)·권경유(權景裕) 등은 선왕(先王)을 무고하여 기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鄭汝昌)·강겸(姜謙)·이수공(李守恭)·정승조(鄭承祖)·홍한(洪澣)·정희랑(鄭希良)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金宏弼)·이종준(李宗準)·이주(李胄)·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康伯珍)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 보냈다.
한편, 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어세겸(魚世謙)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이극돈(李克墩)이 파면된 뒤 유자광(柳子光)은 그 위세가 더해진 반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난 사화(士禍)라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는 6년 전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와 여러 측면에서 사뭇 다른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갑자사화에서는 239명(사형·부관참시 122명, 51.1%)이라는 화(禍)를 입은 규모가 보여주듯 전면적이고 가혹(苛酷)한 숙청이었다. 또한 무오사화가 국왕과 훈구파 대신이 연합해 주도하여 자행한 사림파에 대한 권력적 살상이었다면, 갑자사화는 폭정과 황음(荒淫)에 빠진 연산군이 감정적인 보복으로 신하 전체를 대상으로 자행한 잔인하고 거대한 폭력이었다. 갑자사화는 광폭한 연산군의 무자비한 폭정의 절정이다.
[갑자사화의 원인]▶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은 사치·사냥·연회·음행에 탐닉하면서, 금표(禁標) 설치와 민가의 철거, 발언의 통제 같은 일탈적 행위를 일삼았다. 이런 행위의 궁극적인 결과는 정무의 태만과 지나친 재정 지출에 따른 민생의 파탄이었다.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나자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任士洪)이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때 폐비 윤씨의 생모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과 사사(賜死)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密告)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연산군의 생모, 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 10) 폐출(廢黜)되었다가 1482년 사사(賜死)되었다.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갑자사화의 발단]▶ 갑자사화의 발단은 국왕의 하사주를 이세좌(李世佐)가 엎지른 실수(1503년 9월 11일)와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홍귀달(洪貴達)이 즉시 따르지 않은 사건이었다.(1504년 3월 11일). 연산군은 이런 대신의 행동을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로 생각했다. 이 사건은 곧 폐모 사건의 보복으로 번졌다. 3월 20일 연산군은 성종에게 참소해 폐모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판단한 후궁 정씨(성종의 후궁 정숙의)의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을 창덕궁으로 끌고 와서 폭행했다. 아울러 사건의 전말을 조사했는데, 공교롭게도 갑자사화의 발단을 제공한 두 인물인 이세좌와 홍귀달이 모두 연루되어 있었다. 이세좌는 윤씨를 사사할 때 승지였고, 홍귀달은 폐비할 때 승지였다.
[갑자사화의 경과]▶ 연산군은 정·엄 두 숙의를 궁중에서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 보냈다가 다 죽여버렸다. 그리고 조모 인수대비도 정·엄 두 숙의와 한패라 하여 병상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그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權達手)·이행(李荇)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 보냈다. 또한 윤씨의 폐출과 사사에 연관된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을 극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이 외에도 홍귀달(洪貴達)·주계군(朱溪君) 등 수십 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는 그 규모와 방식이 매우 방대하고 참혹했다. 화(禍)를 입은 대상은 현직 대신과 삼사(三司)를 아우른 거의 모든 신하들을 비롯하여 이미 사망한 사람들까지 확대되었으며, 그 방식도 일반적인 처형 외에 부관참시(剖棺斬屍), 쇄골표풍(碎骨飄風), 파가저택(破家瀦宅)처럼 극한적인 형벌을 적용했다. 화(禍)를 당한 239명 중에서 사형과 옥사(獄死), 부관참시의 극형을 받은 부류는 절반이 넘었다(122명, 51.1%). 이것은 무오사화보다 압도적인 수치다. 무오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은 모두 52명이었고 그 중에서 사형은 6명이었다. / * 쇄골표풍(碎骨飄風) : 뼈를 부숴 바람에 날리는 형벌. / * 파가저택(破家瀦宅) : 집을 파괴하고 그 터에 물을 대 연못으로 만드는 형벌.
[갑자사화의 결과]▶ 이 사건은 표면상 연산군(燕山君)이 생모 윤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벌인 살육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연산군의 극에 달한 향락 생활과 사치로 인해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이를 제어하려는 신하들과 연산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신장하려는 신하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궁중세력(宮中勢力)과 훈구파 사림파 중심의 부중세력(府中勢力)으로 나뉘게 되었고, 임사홍(任士洪)이 이러한 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임사홍은 무오사화 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인 궁중세력의 신수근(愼守勤)을 끌어들여 부중세력의 훈구파와 무오사화 때 남은 사림파 선비들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던 것이다.
[갑자사화의 영향]▶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큰 패악(悖惡)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연산군의 비행과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이 발생하자 글을 아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옥사를 벌였고, 이를 계기로 한글서적을 불사르는 등 이른바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 자행되어 이후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연산군의 계속된 실정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모색하는 사람들에 의해 중종반정(中宗反正)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야산과 강변을 따라가는 길목
낮 12시, 이노정 탐방을 마치고 고개를 넘어가니, 왼쪽 산록에 산뜻한 ‘전원교회’가 있고 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쌍룡한식부페’집이 있다. 그 옆의 작은 고갯마루에서 달성의 국가산업단지를 연결하는 지방도로를 잠시 만났다가 다시 강안의 제방 길로 들어섰다. 강안은 잡초와 버드나무가 무성했다. 강안의 바이크로드는 굽이굽이 야산(野山)을 돌아나간다. 그리고 나무가 없는 곳에서 낙동강 하류를 바라보니 멀리 아득하게 큰 교량이 낙동강을 가로질러 간다. 달성 구지면 대암리와 고령군 우곡을 잇는 ‘우곡교’이다. 저 우곡교 앞은 오늘 내가 지나야 할 곳이다. ‘하, 아직도 갈 길이 아득하구나!’ 다시 지방도로를 만나서 얕은 산길을 지났다. 길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리며 강안을 돌아나간다.
강변 야산의 고갯마루에서 점심 요기
배가 고팠다. 작은 고갯마루, 낙동강을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배낭을 풀고, 아침 현풍에서 준비한 김밥 한 줄, 생수 한 병으로 점심 요기를 했다. 저 만큼 부부인 듯한 두 기(基)의 묘지가 있다. 적막한 강산, 온 세상을 외면한 듯한 야산(野山), 거기 망자가 잠들어 있는 언덕에서 낙동강 나그네가 한 끼의 식사를 했다. 알고 보면 삶과 죽음의 거리가 이만큼이다. 비에 젖은 옷은 걸어오면서 거의 말랐지만 흐린 날씨에 공기는 음산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고개를 넘었다. 이어지는 길은 강안을 곡선을 따라 나무테크 길이 굽이를 돈다. 길은 그렇게 한참 동안 완만하게 지그재그 S자를 그리며 휘어져 가는데, 강변의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개를 넘어가니 ‘낙동강 취수장’이 있다.
구지면 대암1리 삼거리
그리고 다시 작은 고개 산굽이를 돌아나가니 마을이 나왔다. 한적한 시골마을,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1리이다. 이노정에서 강변 길을 따라서 2km 내려온 지점이다. ‘대암교회’ 앞을 지나 마을길을 내려오면 길은 지방도로(국가산단남로)에 합류한다. 좌측으로는 내가 지나온 구지의 대구국가산업단지로 가고, 우측으로 창녕의 합천보로 가는 삼거리이다. 도로 건너편에는 ‘달성 제2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가림막이 길게 설치되어 있다.
가야 할 길은 이곳 대암1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낙동강을 따라가야 하지만, 좌측으로 약 1km 떨어진 지점에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명종 7)~1617(광해군 9)) 장군의 묘소(墓所)가 있다. 비록 다리가 무겁고 피곤한 몸이지만,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을 당하여 결연히 의병(義兵)을 일으켜 국난 극복에 선봉에 섰던 홍의장군(紅衣將軍)의 묘소를 참배(參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평소 존경해 마지 않는 홍의장군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묘소
비는 개었지만, 음산한 날씨였다.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는 2차선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장군의 묘소로 가는 길 도로의 좌측, 완만한 산비탈이 잘 정비된 방대한 묘역이 있다. 서흥 김씨 선산이다. 한훤당 김굉필이 서흥 김씨이지만, 내 알기에 그의 묘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다. ... 인적이 전혀 없는 곽재우(郭再祐) 장군 묘역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곽재우 장군의 무덤이 있는 이곳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달성군 구지면사무소에서 지나 경상남도 창녕군 방향으로 가다 보면 ‘현풍 곽씨의 친족 묘역’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완만한 산비탈에 여러 기의 묘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암공신도비(定岩公神道碑)
단정하게 정비된 묘역 아래, 여러 그루의 노거송(老巨松)이 지키고 있는 한 가운데, 아주 산뜻하고 우아하게 조성한 ‘定岩郭先生神道碑’(정암곽선생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곽재우의 아버지인 정암공(定岩公) 곽월(郭越)의 신도비이다. 정암공신도비의 비문(碑文)을 읽어본다. … 곽월(郭越)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목사,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분으로, 재희(再禧), 재록(再祿), 재우(再祐), 재지(再祉), 재기(再祺) 등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1559년 의령의 세간천 용연암 위에 용연정(龍淵亭)을 짓고 아들들로 하여금 학문과 심신을 연마하게 하는 등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의주목사로 있을 때나, 동지사로 중국에 갈 때 특히 셋째 아들 재우(再祐)를 대동하여 아들 재우로 하여금 견문을 넓히고 선진문물을 익히게 하였다. 뒷날 곽재우가 의병장이 되어 구국의 대열에 앞장 선 의기와 도량을 키운 것이다.
그리고 가문의 이야기도 있다. … 막내 아들 재기(再祺)의 처 광주 이씨는 임란 때 왜적을 만나자 자결하였으며, 진주 하씨 가문에 출가한 둘째아들 재록(再祿)의 딸도 순사하였다. 선조가 정려(旌閭)를 명하여 광주 이씨는 솔예 12정려각에, 재록의 딸, 포산(苞山, 현풍) 곽씨는 절부로서 진주에 모셔져 있다.
정암공은 1586년 8월에 69세를 일기로 서세하여 이곳 선산(先山)에 안장되었다. … 여기까지가 비문의 내용이다. 당초 정암공신도비는 여기서 동남쪽 300m 떨어진 대암리 한길 가에 있었으나, 오랜 세월 풍우에 깎여 판독조차 어렵게 되었다. 2002년 9월에 후손들이 이곳에 새로 신도비를 건립한 것이다. 당초의 신도비는 이곳 새 신도비 죄측에 옮겨 놓았다. 신도비 우측에는 의병장 곽재우 장군을 기리는 구국창의(救國倡義)비가 있다.
현풍 곽씨 비조 서간공 묘소와 곽재우 장군의 묘소
묘역의 제일 상단의 좌측에 포산(苞山) 곽씨(郭氏) 비조(鼻祖)인 통덕랑 서간공(西磵公)의 묘소와 묘비가 있고 곽재우 장군의 무덤은 그 오른쪽, 묘역의 상단 중간쯤에 있는데, 봉분이 거의 없는 묘소 앞에 소박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최초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크게 활약을 했다. 그러나 죽음에 임하여 장군은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백 년 이상 묘비가 없었다. 그런데 그 후 현풍수령 이우인(李友仁)에 의해 1732년에 묘비가 건립되었다. 포산(苞山)은 지금의 현풍이다.
곽재우 장군의 묘비에 의하면, “나의 장례를 예법에 따라 치르지 말고 흙만 겨우 덮일 정도로만 묻으며 묘비도 세우지 말라.”라는 유언이 새겨져 있다. 이로 인해 백 년도 넘게 묘비가 없다가, 현풍 수령 이우인이 “봉분을 더 높이 쌓지 못하는 것은 곽재우 선생의 뜻을 따르겠으나 묘비마저 없으면 어찌 후세의 사람들이 선생의 무덤임을 알겠는가?”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조문명(趙文命)이 글을 지었고 이덕수(李德壽)가 글씨를 썼다. … 묘비는 받침돌 위에 비석이 서 있는 형태로 윗부분이 반원처럼 둥그런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 132cm, 폭 50cm, 두께 17.5cm이다. 비문에는 곽재우 장군의 생애와 공적, 묘비가 세워지게 된 과정이 담긴 글이 새겨져 있다.
곽재우(郭再祐)는 1552년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1585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임금의 뜻에 거슬리는 답안을 작성하였다고 하여 무효로 처리되자, 과거에 뜻을 접고 강촌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크게 패하니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의병(義兵)을 모아 전장에 나가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자신을 ‘하늘이 내린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의미의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입고 백마에 높이 앉아, 아군과 적군에 위엄을 보이고 함안, 영산, 창녕 등지에서 위장전술 등 여러 가지 전법으로 적을 공격, 크게 승리하였다. 이렇게 장군이 이끄는 의병은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여 그들이 계획한 호남진출을 막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성주목사, 경상좌도 방어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그 후 계모 허씨가 세상을 뜨자 벼슬을 내려놓고 장례에 치르고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로 유배를 갔다가 풀려나 현풍 비슬산에서 솔잎을 먹으며 지내다, 경상도 영산현 청암진 망우정(現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 ‘망우정(忘憂亭)’을 지어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조정에서 복귀하기를 수차례 명하였으나 계속해서 거절하다가 1617년 에서 세상을 떠났다.
곽재우 장군의 무덤은 봉분도 묘비도 만들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무덤은 오랫동안 볼품없이 누구의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후세 사람들이 뜻을 모아 곽재우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무덤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묘비가 세웠다. … 그리고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는 곽재우의 호를 따 이름을 지은 ‘망우당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말을 탄 채로 손을 들어 달려 나가려는 듯한 모습을 한 곽재우 동상이 있으며 망우당기념관에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대구광역시는 곽재우의 묘지와 공원 등을 조성하여 그의 생애와 업적이 온전히 기리고 있다.
우곡교, 대암리 제방 길
오후 1시 55분, 곽재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다시 길 위에 섰다. 날씨는 계속 흐렸다. 창녕의 합천보는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야 한다. 대암1리 삼거리를 지나 자동차가 오고 가는 (대구산단남로에서 이어지는) 67번 지방도로를 따라 걷는다. 바이크로드와 도로가 겸해 있는 구간이다.
오후 2시 15분, 우곡교를 지났다. 낙동강 우곡교는 고령군청이 있는 대가야읍으로 가는 67번 도로의 교량이다. 우곡교의 교각 아래로 바이크로드가 조성되어 있다. 좌측에는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로 가는 지방도로가 있고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흐른다.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씽씽 달린다. 강 건너편은 고령(우곡면) 땅이다. 바이크로드는 도로와 별도로 가이드레일이 설치되어 있어 강안을 따라 가는 길이 비교적 호젓하다. 오른쪽 낙동강 강안은 자연적인 습지(濕地)가 이어진다. 길의 중간에 나무테크 쉼터도 있다. 걸음을 멈추고 강안을 둘러본다. 하류의 합천-창녕보의 담수로 인해 물은 호수가 되어 고요하다. 수중의 고사목이 즐비하고 물에 잠긴 둔덕을 중심으로 온갖 식생이 자라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난 뒤 날씨는 계속 흐린 상태,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아득하게 보이는 길을 다시 또 걷는다. 무심사(無心寺)를 안내하는 작은 간판이 보인다.
낙동강 강안의 습지
송곡제(堤) 표지석, 갈림길
오후 2시 46분, 길목에 뿌리가 뽑힌 송곡제(堤) 표지석이 있다. 우곡교에서 2km를 걸어온 지점이다. 여기까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이다. 지금부터는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이다. 여기에서 합천-창녕보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이방면 거남리에 1034번 도로를 따라가면 합천보 제방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이요, 또 하나는 강안을 따라 1.3km를 가서 낙동강 절벽 위에 있는 무심사(無心寺)를 경유하여 산(山)을 넘어서 낙동강 제방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도로보다 무심사 산길이 두 배 이상 멀고 또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하는, 힘든 노정이다. 그러나 낙동강 종주는 빠르고 편안함보다 낙동강의 물길을 제대로 따라가는 것이 정석이라고 생각하여, 지름길이 아닌 무심사로 길을 잡았다. 절 이름처럼 마음을 비우고 걸었다.
그때 이상배 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기원섭 일행과 함께 합천-창녕보에 거의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두 발보다는 네 바퀴가 기동성이 있다. 그래서 현재의 나의 위치와 앞으로 남은 여정을 이야기 했다. 아무래도 나는 저들보다 한참 늦을 것 같다.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낙동강은 호수처럼 고요하게 머물러 있지만 나는 오직 걸어야만 한다.
무심사(無心寺) 가는 길
송곡제에서 무심사 입구까지는 강안의 둔치, 평탄한 바이크로드이다. 이 길은 절을 왕래하는 차들도 다니는 길이다. 내가 무심사로 가는 동안 차량 두어 대가 지나갔다. 길의 중간쯤에 작은 용호천이 낙동강에 유입된다. 그런데 길가에 ‘낙동강 무심사’ 입간판이 서 있는데, ‘자기를 바로 봅시다’ 제하에 나그네에게 마음을 두드리는 무심사 부처님의 질문(법어)이다.
— “지금 그대 어디로 가는가? 왜?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낙동강 멀고 먼 길을 고단하게 걷고 있는 나그네의 가슴에 쥐어박듯 던지는 말씀이다. “지금 그대 어디로 가는가?" 가슴이 먹먹했다.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먼 길을 걸어가는 불쌍한 중생에게 건네는 부처님의 ‘살가움’이 느껴진다. 하, 낙동강 1300리를 종주한다고 죽자고 걷고 또 걸어온 나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왜 그렇게 가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다름 아닌 인생의 근본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 아닌가. ‘그대 인생, 무엇을 지향하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하는가?’를 묻는다. 시인 김상용은 ‘왜 사냐건? / 웃지요’ 했다. 달관한 시인은 은근한 웃음으로 가름했지만, 나는 오늘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 사는 것이 어디 간단한 일인가?
‘그대 어디로 가는가? 왜?’ … 이 ‘물음’에 대한 응답(應答)이 우리의 삶이라고 막연히 생각을 할 뿐이다. 그리고 슬쩍 곁들인 말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 그렇다! 나는 아프다! 요즘 세상이 나를 많이 아프게 한다. 무능하고 불량한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국정을 마구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더욱 아프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무심사 부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래서 ‘인생(人生)의 고통(苦痛)’을 새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머나 먼 여정, 나는 이렇게 세상의 무거운 등짐을 지고 그 아픔을 낙동강에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디 나뿐인가. 세상이 얼마나 힘들면, 불세출의 가인 나훈아가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울부짖듯 노래하면서 2500년 전의 소크라테스에게 '이 시대(時代)의 고통(苦痛)'을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한참을 걸어가는데, 또 한 번 묻는다. “그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 어찌하면 참된 행복이던고?” 인생의 참다운 길을 확인하고 중생의 마음을 다잡는 말씀이다. 이렇게 무심사에 들어가면서 두 차례의 면접시험(?)을 보았다. 나는 내 스스로 무엇인가를 제대로 찾아야 한다. 유기이불유타(由己而不由他),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좌우간 오늘 나는, 지금 숙명적으로 무심사(無心寺)를 가야 하고 또 그 산(山)을 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절의 이름대로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그리고 힘든 고개를 착한 마음으로 넘을 일이다! 무심사 올라가는 절벽 아래의 길목에 입간판이 있다. ‘무심사는 무료로 식사와 숙소를 제공합니다’는 내용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편안한 잠자리’ 생각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진다.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고 지치고 힘든 사람을 편안히 쉬게 주는 것, 이것이 무심사의 사랑법이다!
낙동강(洛東江) 무심사(無心寺)
오후 3시 15분, 가파른 오르막길을 돌아 올라가니 은은한 독경소리가 무심사 경내를 채우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무심사는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에 위치해 있다. 창녕군의 최북단 낙동강 절벽 위에 있는 절이다. 무심사는 ‘낙동강(洛東江) 무심사(無心寺)’로 불린다. 보통 산을 앞세우는 일반 사찰과는 달리 강(江)을 앞세우고 있다. 무심사(無心寺)에 올라서 낙동강을 바라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낙동강 위에 솟은 연꽃처럼 그 풍광이 참으로 장엄하고 아름답다. 절벽 위에 연해 있는 나한전(羅漢殿)의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낙동강은 참으로 장관이다. 합천-창녕보의 담수로 말미암아 거대한 호수를 이루고 있는 낙동강이, 장대한 노송과 어울려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 멀리 동쪽의 우곡교 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심사 절벽 아래를 지나 좌측에서 남쪽으로 감아 돌아가는 낙동강이다. 낙동강 건너편은 회천(會川)이 유입되는 고령군 덕적면이다.
무심사(無心寺)는, 새로 축성한 높다란 삼층석탑(三層石塔) 옆에, 대웅전(大雄殿) 중창 불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신축 대웅전은 기와는 산뜻하게 올렸지만, 아직 기둥은 단청을 하지 않은 원목 그대로다. 무심사는 이름 그대로 자비로운 무심도량이다. 낙동강 종주 바이크로드가 절의 경내를 지나 산으로 올라간다. 낙동강 종주에서 가장 가파른 산을 오르고 내려야 하는 곳이 무심사 코스이다. 달성 대암리의 경계 송곡제에서 이방면의 도로를 이용하여 합천보까지 가는 것보다 몇 배 힘들고 돌아가는 길이지만, 일단 올라오면 그림같은 낙동강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노스님의 독경소리, 그 무심한 자비심이 중생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무심사(無心寺) 독경소리, 반야심경
내가 무심사 경내를 지나, 가파른 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계속해서 스피커를 통하여 구성지고 자비로운 독경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단한 중생의 마음을 따뜻이 위무하고 참다운 깨달음을 두드리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이었다. 무심사가 낙동강 나그네[중생]에게 베푸는 따뜻한 보시(布施)라는 생각이 들었다.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요점을 간략하게 엮은 짧은 경전으로, 당나라 삼장법사인 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이다. 총 260자로 되어 있다. 원전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이다. 다음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부처님의 지혜를 일으키는 진실한 가르침>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이 깊이 지혜를 일으키는 수행을 할 때에 우리의 몸과 마음[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밝게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났느니라. 지혜를 구하는 사리불이여, 물질과 육신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도 물질과 육신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라. 물질과 육신이 곧 공이요 공이 바로 물질과 육신이로다. 우리의 마음도 또한 그와 같음을 알지니라.
지혜를 구하는 사리불이여,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공의 나타난 모습이니 생겨나도 참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요 없어져도 진실로 없어진 것이 아니며 더럽다하여도 참으로 더러운 것이 아니요 깨끗하다 하여도 참으로 맑은 것이 아니며 많아졌다고 하던지 적어졌다고 하여도 참으로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지니라. 그러므로 공(空)을 체득한 경계에서는 물질과 마음. 육신과 정신 같은 것은 없고 우리의 눈, 귀, 코, 입, 몸, 의식 같은 것도 없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맛, 촉감, 모양 같은 것도 없으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알음알이의 세계도 없느니라. 또한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열 두 가지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없어지는 윤회(輪回)의 법도 없고, 일체가 괴로움이라느니, 괴로움은 집착과 번뇌로부터 생겨난다느니, 집착과 번뇌는 반드시 없애야 할 것이라느니, 번뇌와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을 닦아야만 한다느니 하는 것도 본래 있지도 아니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알려고 할 것도 없고, 얻으려고 할 것도 없으며 본래 얻을 수 있는 곳도 없으므로, 깨닫고자 하는 자는, 오로지 지혜(知慧)를 일으켜야만, 마음에 장애가 없어지고, 장애가 없으니, 두려움과 무서움도 없어지고, 이제껏 잘못된 생각으로 대하며 살던 세상을 뛰어넘어, 결국은 열반(涅槃)에 이르게 되느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한결같이 지혜를 일으켜서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러므로 알지니라. 지혜(知慧)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가장 신비로운 가르침이요, 가장 밝은 가르침이요, 가장 높은 가르침이요, 비교할 바 없는 가르침이므로 이것은 모든 괴로움과 재앙을 없애고, 완전하고 진실하여 조금도 거짓이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지혜를 일으키는 가르침을 설하노라. 곧 설하여 가로되, '가거라, 어서 가거라, 어서 빨리 저 피안(彼岸)의 세상으로 가서, 지극한 깨달음을 이루도록 할지어다.'(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 ‘마하’는 크다, 많다, 뛰어나다, 초월하다의 뜻이고, ‘반야’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며, ‘바라밀다’는 저 언덕, 곧 열반에 이른다는 뜻이고, ‘심’은 핵심, 진수(眞髓)이고, ‘경’은 성인의 가르침이자 피안으로 이르는 길을 뜻하니, 곧 ‘큰 지혜로 열반에 이르는 부처님의 진수를 가르치는 경전’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불교의 종지를 깨닫는 지름길은 바로 ≪반야심경≫에 있다고 한다. 큰 지혜와 총명을 얻어 근심 걱정이나 번뇌와 고액이 없는 청정무구한 열락의 경계에 들어가는 길을 바로 260자의 …「반야심경(般若心經)」 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무심사(無心寺) 산을 넘으며
독경소리를 들으며 경내를 둘러보고 장대한 낙동강을 풍경을 조망한 뒤 바이크로드를 따라 산을 올랐다. 산길은 가팔랐다. 그리고 한참을 오르다가 산허리를 지나 우회하여 다시 가파른 경사의 산길을 오른다. 길목에 주홍빛으로 탐스럽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과수원이 있다. 무심사(無心寺)를 감싸 안고 낙동강을 굽어보며 걷는 산길은 호젓하기 이를 데 없다. 산의 정상에 쉼터가 있다. 이 ‘무심사의 임도(林道), 바이크로드’는 행정안전부가 선정한 ‘바이크로드 20대 명품 길’에 선정되었다. 그런데 정상에서 강안으로 나가보면, 강 건너 고령군 덕적면, 낙동강에 유입되는 회천(會川)이 보인다. 회천은 저 수도산과 가야산 산곡에서 발원하여 성주와 고령을 경유하여 내려오는, 유서 깊은 장천(長川)이다. 회천(會川) 이야기는 별장(別章)에서 풀어 나갈까 한다.
경상남도 창녕시 이방면 장천리
오후 4시, 무심사 산의 정상의 쉼터에서 뜨거운 숨을 고르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길은 거의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호젓한 산길, 가을 색이 물들어 가는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임도(바이크로드)를 질주하듯이 내려왔다. 무심사를 비롯하여 하산한 곳은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장천리. 이제 낙동강이 경상북도 여정을 끝내고, 지금부터는 경상남도의 한 복판을 흘러가는 낙동강 여정이다.
그때 이상배, 기원섭 일행이 합천-창녕보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에서 무심사를 경유하여 이방면 장천리로 넘어온 거리는 4.2km였다. 바로 도로(1034번)를 이용하면 송곡리에서 장천리까지는 2km도 채 안 되는 거리이다.
산을 내려오니, 거대한 축사(畜舍)가 있다. 그 유명한 창녕 ‘우산목장’이다. 가만히 보니 여러 채의 창고 같은 철골 건물에 누런 황소가 가득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구유를 앞에 둔 황소들이 쇠막대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특유의 굵은 눈을 멀겋게 뜨고 지나는 길손을 바라본다. 황소의 눈은 언제 보아도 무심하고 애틋하다. 하, 무심사에서 마음을 비우고 산을 넘어온 중생의 마음을 확인이라도 하듯, 그렇게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나도 잠시 무심한 마음으로 황소와 눈을 맞춘다. 나중 창녕의 오두환 공의 말을 의하면, 목장주는 '제주식'이라는 분인데, 이 우산목장에는 지금도 1,000마리의 한우를 키우는 큰 사육장이라고 한다. 오늘 외형으로 언뜻 보아도 그 규모가 대단하다. … 축사에서 내려와 마을 앞 큰 길(1034번 지방도로)을 건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제방이 보인다. 바이크로드는 그 제방 길로 이어진다. 길의 코너마다 화살표 안내판이 있다.
☆ 「산토끼」 노래의 발상지 — 경남 창녕 이방초등학교, 이일래 선생
예전 어린 시절 초등학교 다닐 때 많이 불렀고, 요즘은 유치원에서 즐겨 부르는 국민동요인 ‘산토끼’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산 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서 올 테야
동요 「산토끼」는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 뒤편에 위치한 고장산이 바로 그 주 무대이다. 당시 이방공립보통학교 교사였던 이일래 선생(1903-1979)은 그해 가을 1살배기 딸 ‘명주’를 안고 학교 뒷산에 올라서 밤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뛰노는 산토끼를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사·작곡하였다.
당시 산 위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다가, 바로 앞에서 산토끼가 깡충깡충 뛰노는 모습을 보고 "우리 민족도 하루빨리 해방이 되어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서 가락을 흥얼거렸고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오선지에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여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 노래는 당시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의 애환을 달래기 위한 노래로 널리 퍼지자 일제는 반일(反日) 정서의 노래로 규정하여 금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자신을 숨겼고 해방과 6·25 전쟁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산토끼' 노래는 작사·작곡 미상으로 남아 있다가 1938년에 출판된 '조선동요 작곡집'의 영인본이 1975년도에 나오면서 뒤늦게 그가 만든 노래임이 세상에 알려졌다.
영인본에 실린 이 선생의 원본 노래 가사는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로 가나/ 깡충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 / 산고개 고개를 나 넘어 가아서 / 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로 되어 있다. 훗날 부르기 쉽고 어감이 편리하게 노랫말이 약간 바뀌었다.
[‘산토끼 노래비’ —창녕 이방초등학교] 산토끼 동요를 작사·작곡한 이일래 선생은 1978년 12월 8일 이방초등학교 ‘산토끼 노래비’ 제막식에 참석하여 “산토끼의 작사·작곡가는 내가 아니라 1928년도의 조국을 잃은 슬픔의 우리 민족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산토끼 노래동산’] 2013년에 경남 창녕 이방초등학교와 연결된 ‘산토끼 노래동산’이 개장되면서 산토끼 노래의 가치가 재조명됐고 이방초등학교도 ‘산토끼 노래학교’로 국민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창녕군 이방면 일대에 만 칠천여 평(58,827㎡) 규모로 조성된 "산토끼 노래동산"은 산토끼 동요 탄생 배경과 환경의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는 ‘산토끼 동요관’과 토끼 체험이 가능한 ‘토끼 먹이 체험장’, 가까이에서 동물들의 생태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작은 동물원’ 등 다양한 시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광지 유입보다는 국민 동요 산토끼의 발상지에서 어른들과 어린이들이 추억을 만들고 간직하며 가족들과 좋은 추억을 쌓기를 만드는 맘으로 시설을 조성해 놓았다.
합천-창녕보
오후 4시 20분, 이방면 장천리 낙동강 제방 길로 들어섰다. 날씨는 흐린 가운데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직선의 바이크로드 일자로 쫙 뻗어있다. 주변에는 전혀 인적이 없다. 제방의 오른쪽에는 너른 둔치 너머에 낙동강물이 호수처럼 고여 있다. 이제 합천-창녕보까지 남은 거리는 1km, 무거운 몸, 아픈 발바닥이지만 기다리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속도를 내어 걸었다. 오늘의 여정 막바지, 흐릿한 우무(雨霧)가 끼어있는 길이다. 한참을 내려오니 합천-창녕보의 모습이 어렴풋이 사야에 들어온다. 얼마간을 내려오니 보의 구조물이 선명하게 보이고 제방 길의 끝, 그 초점에서 사람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창녕보는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등림리와 합천군 청덕면 삼학리를 연결한 낙동강에 설치된 보이다. 창녕군과 합천군 일대 농업용수와 상수원 확보를 목적으로 설치 되었으며 2009년 10월 공사가 시작되어 2011년 11월에 준공되었다. 보의 교각은 우포늪 일대 서식하는 따오기를 상징하는 형태로 만들어져 '새오름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합천-창녕보 좌측에는 관리사무소와 부속시설인 홍보관과 전망대가 있으며 주변으로는 체육시설과 습지탐방로로 등이 있는 생태하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상배 대장, 그리고 기원섭 일행과의 만남
오후 4시 40분, 합천-창녕보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기원섭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이진애, 김옥연 대원과 이상배 대장이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극적인 해후였다. 8월 3일 한여름, 태백 황지에서 함께 출발한 「낙동강 1300리 종주」 원초 대원들이, 만추의 11월 1일, 여기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합천보 앞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반가웠다. 그리고 감사했다. … 비가 내리고 음산한 가을 날 하루 종일 혼자서 걸어온, 기진한 나그네가 이렇게 따뜻한 마중을 받으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이상배 대장은 3일 전 나와 함께 왜관~강정보 구간을 함께 걷고 나서, 다음날 양산에 내려가 일을 보고 오늘 기원섭 팀과 왜관에서 합류하여 내려온 것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만남의 순간을 기념하여 합천보를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고, 모두 기원섭의 차에 동승했다.
합천 '왕후시장' / ‘가고파식당’, 그리하여 유쾌한 …
오늘밤은 합천에서 유숙(留宿)할 것이라면서, 핸들을 잡은 기원섭이 카니발을 몰았다. 거기 합천에 가면, 지인이 소개한 좋은 식당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내일의 일정을 함께 하자고 했다. 일단 내 나름의 일정을 멈추고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합천-창녕보에서 합천군 청덕(면)을 경유하는 24번 국도를 타고 합천으로 향했다. 합천-창녕보에서 합천(읍)까지는 24km이다.
오후 5시 15분, 합천(왕후시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시장의 뒷골목에 위치한 ‘가고파식당’을 찾아서 들어갔다. 이 식당은 기원섭의 지인인 이곳 합천 출신 한국주택금융공사 이정환 사장이 소개한 집이라고 했다. 보기에 비록 허름한 식당이지만 고향의 맛, 어머니의 손맛이 나는 집이라고 했다. 식당은 노부부가 운영하는데, 할머니의 걸직한 입담과 정성어린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고향집에 와서 밥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구수한 파전에 맛깔스러운 돼지고기 두루치기에다 합천 생막걸리를 곁들여 하루의 노고를 풀었다. 오늘의 만남을 자축하면서 환담했다. 참으로 유쾌한 저녁이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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