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일을 하다보면 보통 금요일 날에는 외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말에 정상적인 일처리가 힘들기 때문에 외부 업무를 보통 금요일 날 처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 지난 금요일도 일주일 내내 사무실에 있어서 답답해진 마음을 달래볼까 하고 약간 억지스러운 외부업무를 만들어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제가 찾아간 곳은 불광동 대조시장 자리에 새로 신축하여 임대자를 모집하고 있는 팜스퀘어 라는 건물이였습니다. 그곳에서 업무를 다 마치고 밖이 다 보이는 전망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순복음 교회가 보였습니다.
순간 이곳이 대조시장이란 생각이 떠오르면서 저 순복음 교회 바로 앞에서 제가 4살 때부터 지금 9살, 6살인 우리 아이들 정도 때까지 살았던 곳이란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회사로 들어가야 할 시간 이였지만 제 발걸음은 어느덧 시장 자판으로 좁아진 거리를 지나며 교회 쪽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생선가게, 방앗간, 건어물 가게 등을 지나면서 저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으로 돌아갔고 조금 좁아진 골목으로 들어서서 걸으면서는 다시 10년 전으로 더 내려갔습니다. 교회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는 다시 7~8년이 더 내려가 8, 9살짜리 꼬마로 변해 버렸습니다.
드디어 순복음 교회 앞에 섰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에 교회 모습과는 사뭇 달랐으며 위치도 여기가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어린이들은 길이 낯설 때는 어른들에게 물어보는 게 상식입니다.
지나가는 나이가 지긋하신 아저씨 한분께 여쭤보았습니다.
“ 혹시 이 교회가 원래 이 자리에 있었습니까? 제가 기억하기에는 조금 더 저 위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아저씨가 저를 한번 위 아래로 보시더니
“ 꽤 오랜 전 이야기인데 이곳은 원래 선교사들 숙소가 있던 곳이고 교회는 조금 더 위쪽에 있었지. ”
9살 꼬마의 기억치고는 제법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다가 그 교회에 있던 선교사와의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생각해 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어른한테 따귀를 맞았던 기억을 말입니다.
저희 집은 교회 정문 앞 계단과 마주 보이는 막다른 골목 집이였습니다. 대문은 철제였기에 아버지가 페인트로 대문에 칠을 하셨었고 철제 대문 위쪽 도둑을 방지 한다고 철로 빼쪽하게 하늘을 찌르는 모양의 날카로운 가시들이 보기가 싫으셨던지 대문지붕을 장미로 뒤덮어 놓은 집이였습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장미의 집이라고 불렀었습니다.
하지만 장미의 집이란 별명은 우리 집을 밖에서만 본 모습입니다.
안으로 들어오면 마당이 제법 큰 집이여서 라일락 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 밑으로 어린이 4인용 그네가 있었습니다. 화단에는 빨간 채송화가 피어 있었고 그 옆으로는 호박을 심어 노란 호박꽃이 참 예쁘게 피었던 집이였습니다.
언제나 나무와 꽃향기를 맡으면서 어머니는 그네에서 저의 동생과 저를 앉혀놓고 그네를 흔들면서 책을 읽어 주셨고 그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들기도 했던 빨간 장미만큼 이쁜집이였습니다.
교회 바로 앞이 집이다 보니 교회 마당은 당연히 저의 놀이터였고 선교사들의 숙소가 있던 조금 떨어진 곳은 풀과 나무가 제법 있어 아이들과 뛰어나니 며 놀기에 제격인곳이였죠.
제가 한 7~8살 정도 되었을 때로 기억합니다. 그날도 그곳에서 뛰어 놀고 있을 때 어떤 외국 선교사가 지나가고 있었죠.
평상시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 나름대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사촌 형에게 외국인 인사말 이라고 배운 영어를 써먹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푸른 눈의 아저씨가 드디어 제 앞에 지나갑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땡~베르 또 망치 ” (통역하면 : thank you very much )
딴에는 제법 혀를 굴려 말했습니다.
근데 갑자기 지나가던 선교사가 갑자기 저를 쳐다보더니 뭐라고 말을 했습니다. 무서운 눈빛으로.. 저는 순간적으로 “ 다시 말해봐 ”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저에게 “ I beg your pardon? " 이라고 정중하게는 요청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다시 용기를 내어 조금 더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 베르 또 망치~~ ”
그러자 갑자기 그 아저씨가 제 빰을 세게 때렸습니다. 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왜 맞아야 하는지도 당연히 알 수가 없었고요.. 두, 세 대를 맞다가 너무 무서워 울면서 뛰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명 ‘대조동 선교사 아이 구타사건’은 당시 유신시대 최고 권력기관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의 분노를 촉발 시켰고 결국 교회책임자와 저의 영어를 욕으로 이해했던 머리 나쁜 선교사의 사과와 동네 시끄러워진다며 만류하시는 어머니의 만류로 유야무야 넘어갔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대학 때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첨병이라고 무조건 적대시 했던 원인이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으면서 원래 교회가 있던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바로 장미의 집 앞으로 말입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면서 천천히 걷다가 드디어 좁고 막다른 골목을 발견했고 그 골목 끝에 주변의 집들은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아직도 단독주택의 모습으로 서있는 집 앞에 섰습니다. 마당은 없어지고 기와집을 헐고 슬래브 집으로 새롭게 크게 신축한 건물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장미도 라일락 나무도 없었고요. 슬래브 지붕위에서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한분이 화분에 호스로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혹시 이 앞이 예전 교회 앞 계단이 있지 않았나요? ”
마치 제가 집이 아닌 옛 교회를 찾아온 것처럼 말했습니다.
“ 맞아요. 예전엔 그 쪽이 교회 정문 이였지. 지금은 다 헐리고 집들이 들어섰지만 ”
“ 그렇군요. 그럼 바로 이집 대문위로 예전에 장미가 있지 않았나요?”
“ 어떻게 알아요? 맞아요. 제가 이사 오기 직전까지 장미가 많았지요. 집안에 라일락 나무도 있었고요 ”
" 제가 약 30년전에 이곳에 살았었거든요..하하 "
드디어 찾아 온 것입니다. 거의 30년 만에 저의 보금자리에 다시 온 거죠. 순간 눈앞에 집들은 사라지고 옛날 저의 집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초록색 기와집과 흰 창문틀, 넓은 마루와 장독대, 아름다운 마당과 꽃향기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언제나 단정한 모습에 머리에 예쁜 핀을 꼽고 있는 누님. 하얀 얼굴에 곱상한 얼굴로 저를 항상 따라 다녔던 저의 동생, 70년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기름 바른 짧은 공무원 머리의 아버지…….
이런.. 지금 저의 나이보다도 몇 살 정도 어린, 세 아이의 어머니라고 믿기에는 너무 고운 엄마까지.
저는 저의 옛 가족들을 하나씩 지금의 모습이 아닌 옛날 그 모습으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집에서 장남이라고 가장 큰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새카맣고 마른, 그러나 호기심이 너무나 많았던 저까지 말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조그마한 삽을 들고 마당을 가꾸셨습니다.
지금도 조그마한 베란다에 빼곡히 화분을 기르시는 분이였으니 큰 마당을 그냥 모른 채 하셨을 리 만무합니다. 채송화와 봉숭아꽃을 심으면서 이 꽃이 필 때쯤 보고 좋아할 아이들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셨을 겁니다.
장미의 가지를 치면서 장미의 향기가 아이들의 마음에 베어났으면 하는 마음이셨을 겁니다.
라일락 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 자신의 아이들이 세상의 바람 속에서도 꾿꾿히 자라나길 빌고 또 비셨을 겁니다.
그렇게 밥과 옷이 아니라 꽃같은 아름다운 마음으로 우릴 가꾸었을 것입니다.
오! 이런 세상에~~~ 갑자기 숨이 탁 막혔습니다.
과연 저는 어머니 마음을 백분지 일이나 깨달으면서 살아왔는지. 어머니의 꽃을 가꾸는 마음과 향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해왔는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화분갈이를 하는 혁신의 자세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딛고 살아야 하는 겸손한 태도로 살아왔는지…….
그 누구도 제게 가르쳐주지 않은 누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건 아닌지…….
최소한 어머니는 저를 지금처럼 ‘회사 다녀왔습니다’ 말 한마디하고 어머니와 눈동자조차 마주치지 않는 매정한 사람으로 키우시진 않은 게 분명합니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 ‘몇 년 후에 다시 올 때까지 건강하세요. 란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골목길을 벗어 났습니다.
걸으면서 30년 전 저의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누나, 동생, 아버지 또 올께요...
어머니에게는 작별 인사와 더불어 어머니의 마음을 너무 모르면서 살아왔다고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올 때는 최소한 지금처럼 참담한 기분으로 오지는 않겠다고 약속했죠..
누군가 저에게 네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 한다면 저는 0.001초도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똑 같은 질문을 받는다 해도 저라고 대답할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고갤 숙이고 땅만 보면서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 큰길을 들어서길 직전에 음악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음악은 SG wanna be 의 ‘살다가’ 였고 그 가게는 참기름 집이였던지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저는 깨를 볶는 그 고소한 냄새도 눈을 자극해 눈물이 흐를 수 있단 걸 처음으로 깨달으며 현재의 저를 향해 걸어갔고 햇볕은 저를 위로하듯 집으로 서둘러 돌아갔습니다.
첫댓글 형 팜스퀘어에는 무슨 일땜에요? 저희 회사도 그곳에 pos시스템 납품할라고 애쓰고 있는데....관련된 일인가요? 혹시 관련된 일이면 연락주세요...011-9036-8347(밸크리텍 www,valcretec.com)
ㅎㅎ...그냥 임대 자리 좀 보러 간건데..건물이 좀 복잡하더라...그래서 나중에 보자고 그냥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