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다니는 남자도 똑같더라”
교회오빠 장단점 심층 분석
누나, 이번에는 ‘교회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거야. 교회 오빠의 대중적 이미지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뽀얀 피부에 감미로운 목소리, 귀티 나는 브라운 가디건에 듬직한 어깨 라인, 선한 미소와 몸에 밴 매너와 젠틀, 거기다 통기타까지 메면 금상첨화!!
그. 러. 나. 정작 교회 오빠랑 연애해본 크리스천 여성들은 오히려 교회 다니는 남자에 학을 떼는 경우가 정말 많아.
예를 들어 이런 거지. ‘사귀어 보니 교회 오빠가 더하더라’, ‘본인이 잘못해놓고 뭐만 하면 하나님 이야기로 퉁(?)치려고 하더라’, ‘주위에 교회 여자가 많다 보니 큐티한다고 하면서 바람을 피우더라’, ‘당연한 잘못을 지적하면 또 하나님 운운하더라’, ‘나한테 대하는 모습과 교회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의 간극이 너무 커서 내 신앙심까지 흔들리더라’ 등등.
이것을 그냥 가볍게 넘길 수가 없는 게 실제로 크리스천 남성과 헤어지고 교회를 옮기거나 아예 발길을 끊는 크리스천 여성이 매우 많아.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 자체가 식거나 그 남자 개인의 인격적 결함에 교회와 기독교를 투영해서 그로 인한 상처와 실망감이 교회와 기독교 전체를 향한 적대감 · 증오감으로 바뀌는 사례도 적지 않거든.
설상가상으로 만약에 그 상대와 혼전 성관계까지 한 경우라면 영혼의 상처가 더 깊어지는 건 당연지사고, 아예 임신까지 했다면… 원치 않는 낙태까지 하게 됐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거지.
극단적인 예를 들면서 공포심을 자극하는 게 아니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18년에 15-44세 한국 여성 1만 명을 조사했는데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 5명 중 1명은 낙태 수술 경험이 있다고 해.
누나도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수년째 낙태율 1위인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태아가 [단지 배 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잃는지 정확한 통계조차 내지 못하고 있어.
1부에서 이야기했던 결혼과 성관계가 갖는 신앙적 · 신학적 의미를 기억해봐. 크리스천 남녀가 사귄다, 혼전 성관계를 ‘연애’의 일환으로 여긴다, 어쩌다(또는 당연히) 아이가 생긴다, 그런데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야.
크리스천 남녀 청년 모두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매우 중차대한 일이지. ‘교회 오빠’ 이야기에 갑자기 너무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예 연관 없는 주제도 아니기에 쓰지만 꼭 삼켜야 하는 약이라고 생각해줘.
교회 안에서도 프리섹스 문화가 창궐한다면 [당연히] 예상될 수 있는 일이니까…. 누군가는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교회 오빠는 정말 하나같이 언행불일치에 내로남불만 시전하는 나쁜 놈들의 대명사인 걸까? 오브 콜스 낫! 당연히 아니지.
물론 교회 안에 신앙 양심이 닳고 닳은 나쁜 놈도 많지만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고) [여전히]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훌륭한 ‘원석’들도 많아.
교회 남자들 사이에 인격 편차, 지식 편차, 신앙심 편차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들 모두 ‘복음 안에서 예배 생활을 한다’라는 공통 분모는 전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본질적인 최장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
개인이 기독교인으로서 훌륭하게 못 사는 거랑 아예 ‘기독교 관점’ 자체를 부정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거든.
특히나 요즘처럼 성경적 가치 기준이 비주류인 시대를 지나 적대시하는 시대라면 ‘복음 안에서 예배 생활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선교적 삶을 감당한다고 볼 수도 있는 거거든.
교회 오빠들은 (이론적으로는)
첫째, 우리 삶에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옳고 그름의 절대 기준이 있으며
둘째, 그 기준이 성경이라는 것을 알고, 믿고, 따르는 사람이야.
그 자체로 [귀한 사람]이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이 기준인 사람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사람!? 이건 절대 평범한 게 아니거든.
지금처럼 한국 20대 청년 10명 중 약 1명만 크리스천인 시기에는 더더욱 말이야. 그럼 교회 오빠들은 ‘비(非) 교회 오빠’들과 뭐가 그렇게 다를까?
뭐니뭐니 해도 [관점]이야.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느냐는 하나만 다른 게 아니라 전부 다른 거거든. 교회 오빠의 성경적 관점을 연애 · 결혼 버전으로 크게 세 가지만 말해볼게.
첫째, 아내를 대하는 태도
둘째, 기독교적 성 가치관
셋째, 결혼관 및 가정관이야.
크리스천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본인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아내를 대접하고(마 7:12) 아내를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지(마 22:39, 엡 5:28). 더 나아가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섬기고 사랑해야 해(엡 5:25).
기준대로 못 사는 것과 기준 자체를 부정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라는 사실!? 부부가 서로 자기 기준만을 옳다고 주장하며 평행선 싸움을 하는 것과 예수님을 기준 삼아 의견을 조율하는 건 정말 엄청난 차이라는 걸 잊지 마.
크리스천 부부의 가장 강력한 강점은 두 사람이 지향하는 목적지가 ‘예수님’, 단 한 곳이라는 거야.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한 미시적인 방법론은 다를 수 있지만 그건 분명 부차적인 문제거든.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성 가치관이나 결혼관, 가정관 역시 마찬가지야.
야한 생각을 품고 상대 이성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간음’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치 기준에(마 5:28)부합할 수 있는 남자 여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만큼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죄에서 돌이키라는 건데 크리스천 부부의 핵심은 두 사람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절대 기준]이 있다는 거야. 배우자가 아닌 이에게 음욕을 품거나 실제로 외도를 하거나 배우자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지 않거나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는 건 ‘옳지 않다’라는 분명한 기준.
자칫 무단횡단을 할 수도 있으나 원래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 기준. 교회 오빠는 (이론적으로) 이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물론 성경이 제시하는 거룩의 기준이 높아서 어느 누구도 그 기준대로 못 살지. 하지만 나는 못 해도 하나님이 하셔(고후 13:4).
아내에게 집중하는 게 아닌 하나님께 [먼저] 집중할 때 아내를 성경대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셔(마 6:33).
비록 이 은혜의 통로에 이물질이 가득 차있어서 은혜가 조금씩‘이라도’ 떨어지는 사람과 아예 이 은혜의 통로가 시멘트로 꽉 막혀있는 사람은 아예 다르지.
하물며 하나님을 향한 이 은혜의 통로가 크게 뚫려있는 남자라면 얼마나 좋겠어. 본인이 의도적으로 악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보혈에 녹지 않는 완고함이란 존재하지 않아. 이 가능성 하나로도 교회 오빠들은따뜻한 가정생활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해.
교회 오빠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 때문이지. 이밖에도 교회 오빠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게 익숙하다 보니 인간관계가 보다 성숙할 수 있고, 예배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찬양하고 말씀으로 죄 씻음을 받기에 넌크리스천은 누리지 못하는 정서적 평강을 누릴 수 있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라는 [인생의 목적]이 있기에 언제든 ‘나는 죄인이다’, ‘나는 틀릴 수 있다’라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고의 유연함을 갖출 가능성이 크고, 뭐니뭐니 해도 크리스천 부부가 함께 복음 안에 거할 때 생기는 영적 유사성과 동질감에서 비롯된 안정감과 친밀감이 가장 큰 장점이겠지.
물론 이렇게 좋은 이야기만 잔뜩 해놓으면 기대감만 높아져서 ‘무늬만 교회 오빠’들에게 느끼는 실망감의 낙차가 클 수도 있어.
하지만 그 누구도 완성형 크리스천은 없어. 다이아몬드만 찾는 심리도 일종의 교만일 수 있거든.
하나님 앞에 겸손, 이 거룩을 향한 진지한 열정을 품은 성품이라면 비록 지금은 원석이라 모난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주님의 다이아몬드로 반짝반짝 빛나는 멋진 교회 오빠가 될 거야. 물론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겠고.
자 누나, 정리해보자. 교회 오빠는 누나를 보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보물로 여기는 사람이야.
교회 오빠는 누나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야.
그래서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 누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줄 수 있는 거고. 그러니 멋있는 오빠를 찾지 말고 신실한 오빠를 만나야 해.
심장이 뛰는 오빠를 찾지 말고 신앙 코드가 잘 맞는 오빠를 만나야 해. 귀한 사람을 귀하게 볼 줄 아는 것이 금보다 값진 지혜거든.
원석을 찾아, 누나. 원석을 볼 줄 아는 거룩한 분별력을 누나부터 갖춰야 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원석과 원석을 발굴한 누나를 신실하게 다듬고 또 다듬으실 거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성품 때문에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우리의 죄값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적인 생각은 죽음을 뜻하고 영적인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뜻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맙니다. 육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 롬 8:1-8
– 누나 내가 결혼해보니까 말이야, 책읽는 사자
†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 마태복음 19장 4, 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 에베소서 5장 25절
† 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믿음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거룩한 분별력을 허락해주세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당신과 신앙의 코드가 잘 맞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고 또한 당신을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나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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