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사
명주사(明珠寺)는 1009년(고려 목종 12)에 혜명대사(慧明大師)와 대주대사(大珠大師)가 창건했으며 두 대사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서 명주사(明珠寺)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명주사는 한국전쟁 때 모든 건물이 없어져 오래된 문화유산은 많지 않지만, 만월산 중턱에 자리잡은 터는 고찰의 풍모를 충분히 느낄 만하다.
자그마한 종각 안에 있는 동종은 조선시대 18세기 초 조선시대 범종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수작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이지만 보물급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양식이 우수하다. 이 동종의 타종소리는 옛날 이 지역의 대표적 승경을 일컫는 이른바 어성십경(魚城十景)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또한 절 입구 오른쪽에는 부도밭이 있어서 모두 16기의 고승 부도와 탑비가 모아져 있는데, 강원도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부도·탑비가 있는 절은 매우 드물다.
명주사 입구
명주사 오르는 길
명주사 요사채
명주사 범종각
명주사 동종
강원도유형문화재 제64호
명주사 동종은 1704년(숙종 30)에 조성된 것이다.
종의 머리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꼬리를 맞대어 종 고리를 형성한 용뉴(龍鈕)가 있는데 다른 동종에 비해서 용의 모습이 아주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어 장인(匠人)의 높은 수준을 느끼게 한다. 다만 전통적인 한국 종에서 볼 수 있는 음관은 생략되었다.
용뉴 아래에 있는 천판(天板)은 둥그스름하게 만들어졌고, 천판 바로 아래에 놓인 상대(上帶)는 생략되었다. 연꽃과 빗살문이 새겨져 있는 4개의 유곽(乳廓)은 어깨부분에서부터 바로 시작되고 있고, 유곽 안의 9개의 유두(乳頭)는 연꽃판 위에 조그맣게 솟아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범자(梵字)와 보살상을 위아래로 배치시켜 놓았는데, 이는 이 범종의 독특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보살상이 비교적 위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동종의 중간 부분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아래에서부터 1/4되는 쯤 되는 곳에 주조연대와 시주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가장 아랫부분인 하대에는 사각형 속에 연꽃과 당초문 등을 아름답게 새겨 놓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볼 때 조선시대 후기의 뛰어난 범종이다. 그런데 이를 통해 보면 이 동종을 처음 봉안한 곳은 명주사가 아니라 태중사(太衆寺)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언제 어느 연유로 이곳에 이안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명주사 극락전
명주사 극락전 벽화
명주사 극락전 아미타불
명주사 삼성각
삼성각 칠성단
삼성각 독성단
삼성각 산신단
명주사앞 계곡 폭포
상,중,하로 나누어진 수로 상단
수로 중탕
수로 하탕
나무로 만든 수로 길
명주사 전경
명주사 부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절 입구 한쪽에 명주사에 주석했던 여러 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모아져 있어 예전 절의 규모와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부도로는 현재의 절에서 500m 아래에 있는 높이 2.5m의 중봉당선사탑(中峯堂禪師塔)을 비롯하여 무하당(無瑕堂) · 인허당(麟虛堂) · 추암당(楸庵堂) · 설봉당(雪峰堂) · 호월당(皓月堂) · 안곡당(安谷堂) · 연파당(蓮坡堂)의 부도와 성월당(晟月堂)의 치사리탑(齒舍利塔), 상정거사탑(尙淨居士塔) 등 모두 12기가 있다.
탑비로는 학운당(鶴雲堂)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비롯하여 연파당·인곡당(麟谷堂)·용악당(聳嶽堂)의 것이 있다. 이 가운데 용악당비는 용악 보위(普衛, 1817~?) 스님의 것으로, 제자 오진(旿珍) 등이 스승의 덕행을 사모하여 스님의 나이 67세 때 허훈(許薰)의 글을 받아 건립하였다. 승려로서 생전에 행적비를 세운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매우 희귀한 일이다. 글을 지은 허훈은 호가 방산거사(昉山居士)인데 유학자로서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비석, 경상북도 구미 도리사의 사적 등 불교에 관련된 글을 쓴 것이 몇 편 있다.
명주사 찾아가는 길
양양읍에서 양양교를 건너 수리 마을 방면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서 들어가거나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하조대(河趙臺) 북쪽 입구 삼거리에서 산 쪽으로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간 다음 어성전리 마을 사거리에서 명주사 가는 표지판을 따라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