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부산은 한국전쟁에 의해 확장·팽창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30만 명이던 부산인구는 피란민 70만 명을 포함해 거의 100만 명에 육박했다. 부산 곳곳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이 피란민들로 메워졌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은 무엇이든 많은 문제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먹을거리든, 입을거리든 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무엇이든 부산으로 집중되었던 당시, 부산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내어주던 도시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부산역 인근으로 수많은 피란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보따리를 하나씩 짊어지고 무작정 타향의 피란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정부는 영도, 초량, 적기 등에 피란민 수용소를 만들어 몰려드는 피란민들은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용인원 7만 명에 불과한 수용시설로는 70여만 명의 피란민을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머지 피란민들은 영주동, 보수동, 아미동, 남부민동, 영도 등지의 산등성이 일대에 임시거처를 만들어 생활하기 시작한다.
·노동과 휴식의 통로 40계단
일부 피란민들은 옛 부산역 가까이 있던 40계단 위쪽으로 천막집, 판잣집들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다. 나무판자, 종이박스, 가마니, 양철 등으로 얼기설기 지은 임시거처들이었다. 이렇게 영주동 산비탈 일대에는 4만여 채의 판자촌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이들은 40계단을 통로로 오르내리며 불안한 잠자리와 곤고한 노동의 일상을 반복했다. 40계단이 노동과 휴식의 경계지역이었던 것. 그들은 하루의 일상을 접고 판잣집으로 오르기 전, 40계단에 앉아 가족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짓곤 했다. 헤어진 가족들과 만남의 장소로 40계단을 이용했기에 더욱 그렇다.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란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러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고향/ 언제가려나~" (박재홍의 가요 '경상도 아가씨' 중)
·영도다리와 점바치 골목
40계단과 더불어 한국전쟁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공간이 영도다리이다. 겨울 어스름 추운 바닷바람은 피란의 신산함을 더욱 깊게 하는데 가족의 행방은 난망하기만 하다. 그들은 피란을 시작하며 가족들과 약속을 한다. 부산에 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그리고는 흩어진 가족들을 찾기 위해 영도다리로 몰려든다. 영도다리 난간에는 가족을 찾는 벽보가 어지러이 바람에 흩날리고, 그 벽보 하나하나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그들은 춥고 외로운 피란지에서의 기약 없는 가족상봉을 울며 기다렸던 것이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히 떴다." (현인의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중)
그때 다리 밑에 모여 든 수많은 점술인들은 가족의 소식을 묻는 피란민들에게 점을 봐주며, 그들을 도닥이고 내일을 안심시켜 주곤 했다. 점바치로 불리던 역술인들이 영도다리 양끝에서 좌판을 열었던 것. 지금도 서너 집이 존재하는 '점바치 골목'이 그곳인데, 한 때는 50여 점집이 성황을 누렸다. 그들로 인해 피란민들은 그 질곡의 시절, 불확실한 미래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피란지의 북청물장수
영도 신선동 연애약수터. 추운 날씨 탓인지 꽤 한산하다. 수도꼭지로는 물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다. "쌀은 없어도 물은 있어야만 살 수 있었던 시절"이라며 김복동(71) 씨는 한국전쟁 시절 끔찍했던 물난리를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연애골짜기 입구에서부터 양동이 줄을 세웠으니까 200~300m 정도 되겠죠? 밤새 양동이 행렬이 끊이지 않았어요." 쪽박으로 떠 물을 담았기에 더욱 애가 닳았겠다. 그나마도 물을 못 얻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온 가족의 하루 주요일과가 물 긷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물장수.' 일명 '대(竹)물 장사'가 그것이다. 산에서 수원을 찾아 대나무로 관로를 만들어 배수지까지 끌어와 물을 팔았던 것. 영도의 대물장수 김용기 씨는 봉래산 '장사 신 바위' 옆을 비롯해 3곳의 수원을 뚫어 물을 팔았다. 북청과는 100여 리 떨어진 함경남도 영흥이 고향. 1·4후퇴 때 부산에 정착하면서 대물장사를 시작하여, 1970년 중반까지 업을 계속했다. 땅 속 50㎝까지 매설한 대나무 관로를 10여 리 이어 집수하는 지난한 작업이었지만, 그만큼 수입도 괜찮았다고 한다. 당시 한 말 들이 양동이 한 통의 물값은 200~300원. 하루 노동 품값이 250원, 쌀 한 되 600원 했던 시절이었으니 물값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영도만 해도 대물장사가 네댓 명은 족히 되었다는데, 그들이 영도의 물 공급을 도맡아 해 왔다. 그들은 직접 저수조에서 동이물을 팔거나 '물 구루마꾼(물 수레꾼)'들에게 한 수레씩 물을 팔았다. 대물장수에게 물을 받은 '물 구루마꾼'들은 영도 곳곳을 돌며 몇 푼의 이문을 남기고 물을 팔았다. 이 '물 구루마꾼'을 자갈치시장에 가면 아직도 볼 수가 있다.
·피란 경제의 중심 도떼기시장
도떼기시장은 국제시장과 부평시장 일대를 일컫는다. 도떼기시장은 피란민들의 삶터였던 자갈치시장이 점점 비좁아지면서 시장 주변 공터에 생필품과 군용물품을 거래하게 됐는데, 이곳이 나중에 국제시장이 된다. 미군부대를 비롯해 유엔군 물품 등 외제물품을 사고팔았기에 '국제시장'이라 했다.
이 도떼기시장에는 미군 부대에서 먹고 남은 잔반을 한데 모아 희멀겋게 죽을 끓여 팔았다. '꿀꿀이죽', '유엔탕'이라는 불리던 이 죽은 값이 싸서 주머니가 가벼운 피란민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끼니이자 영양식이었다. 굶주린 이들의 끼니를 돕던 도떼기시장 난전의 죽집들이 지금의 '죽집 골목'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옆으로는 미군이 먹던 통조림 등 깡통음식들을 음성적인 방법으로 반출해 난전에서 사고팔았는데, 미군 통조림 캔을 사고파는 시장이라 '깡통시장'이라 했다. 때문에 깡통시장은 국제시장과 더불어 '한국동란'이라는 고난과 격동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떠안았던 시장이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더욱 애틋하게 사랑받는 시장이다.
그 부근으로 한복거리도 있는데, 한국전쟁 때 부녀자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군복이나 구제 옷들을 직접 수선해서 팔았던 곳이다. 바느질 솜씨가 좋아 옷 한 벌이면 겨울을 따뜻하게 났다고 한다. 국제시장에서 나오는 포목으로 한복도 지어 팔았는데, 한때는 입소문으로 50여 집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보수동 책방골목
6·25 전쟁 발발 직후 구덕산 일대와 보수동 뒷산 등에는 피란 온 많은 학교가 '천막교실 수업'을 했다. '전시연합학교'가 그것으로, 천막이나 판자로 칸을 만들어 야외 교사로 활용한 것이다. 때문에 학생들의 통학로였던 보수동 골목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자연히 유동인구가 많은 이곳에서 책을 팔려는 사람들과 책을 사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노점 헌책방이 성황을 이루었고, 이 노점들이 하나둘 현재의 골목에 자리 잡게 된 것이 '보수동 책방골목'의 시초다.
그 당시 지식인들은 자신이 아끼는 진귀본들을 눈물을 머금고 팔아 끼니를 해결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모여진 책들이 오늘의 '부산의 지식창고'로, 전국 최대 규모의 '헌책방 골목'으로 발전한 것이다.
·더 열악했던 문화예술인들의 피란생활
피란민 중 예술인들의 피란생활은 일반인들 보다 정신적으로 더 열악했다. 학력이 높고 문화적 혜택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은 계층이다 보니 비상식적인 피란의 삶은 그들의 정신을 송두리째 황폐화 시켰다. 그들은 하릴없이 삼삼오오 다방에 모여 하루를 지새우는 룸펜생활을 했다. 다방이 예술인이 모이고 정보를 교환하는 사랑방 역할과 창작 공간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남포동 구둣방 골목에 있던 '스타다방'이었다. 그 시절 피란예술인들이 자주 모이던 다방으로, 소설가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 시대'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피란시절 피폐했던 예술인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 이가 있었는데, 전봉래 시인이었다. 그는 유학파 시인으로 전봉건 시인의 형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부조리하고 비이성적인 전쟁 상황과 피란에서의 정신적 황폐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타다방 한 구석에서 신경안정제를 털어 넣고 자살을 한다. 그의 호주머니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서가 나왔다.
'나는 페노바르비탈을 먹었다. 30초가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2분 3분이 지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10분이 지났다. 눈시울이 무거워진다. 찬란한 이 세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히 살기 위하여 미소로써 죽음을 맞으리라.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 그리운 사람들에게 2월 16일.'
'찬란한 세상'을 맞이하고픈 자의 '정확하고 청백히' 살기 위한 몸부림이 진하게 배어있는 유서였다. 이렇게 처참한 전쟁의 후유증은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여 피란의 삶을 괴롭혀 왔던 것이다.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도 평생을 피란지 부산에서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삶을 마감했는데, 피란의 와중에도 국민가곡 '보리밭'을 작곡하는 예술혼을 불태웠다. 국민가수 김정구도 휴전 후 오랫동안 아미동 쪽방집에서 칩거하며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전쟁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부끄러운 단면이다. 전쟁에는 궁극적으로 승자가 없다. 침략의 역사는 야만의 기억을 남기고, 식민의 역사는 상실의 치욕을 남기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피 흘리고 모두가 망실의 아픔을 겪어야하기에 또 그렇다. 그러므로 침략의 통절한 반성과 미래를 향한 평화의 교훈만이, 전쟁에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단 한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