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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모든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 행하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꽤 납득하기 힘든 의아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심사숙고해서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행간에 숨겨져 있는 말씀의 진의를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들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 안에서 극진히 섬겨야 할 세상 안의 하느님입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위치를 가장 중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제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입지가 참 많이도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이 하느님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심에 계셔야 할 하느님께서 밀려나고 또 밀려나서 제일 구석진 곳,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로 주방에서, 때로 들판에서 일하면서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 안으로 끌어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스프를 주걱으로 저으면서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형제들의 구두를 수선하면서도 하느님과 깊이 일치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큰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 성인의 길을 걸어갈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놓이는 작고 궂은 일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 매일 반복되는 별 의미없어 보이는 일들, 그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 역시 성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도 라우렌시오 수사님 비슷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형제들과 아이들을 위한 식단을 짜고, 시장을 봐오고, 지지고 볶고, 끓이고 튀기고 있습니다.
열심히는 하지만, 더 노력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아주 훌륭한 묵상기도요 관상 기도가 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시어머니 같은 용어들을 들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형과 동생, 누이는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이 세상사는 동안 연을 맺어주신 선물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서로를 보살펴줘야 합니다. 무한한 인내로 서로를 참아내야 합니다. 서로의 성장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하느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당연히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최고선이신 하느님보다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하느님을 우리 삶의 가장 한 가운데로 끌어와 모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이사야 1,10-17 마태오 10,34─11,1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나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삶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삶에는 본래 의미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 이라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삶의 의미가 생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면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는 죽고 싶었던 두 남녀가 살아있어야 하는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강동원 씨가 연기한 사람은 사형수입니다.
강동원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맞아서 눈이 먼 동생과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엄마를 찾아가도 아빠에게 맞으니 그냥 고아원에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동생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게 됩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자궁외임신이라 돈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형과 도둑질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강동원은 애인이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살인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나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14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신은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오빠는 결혼해서 잘만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았더니 엄마는 딸의 탓을 합니다.
사촌 오빠가 밉고 엄마도 미워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수녀님인 이모의 소개로 사형수 강동원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서로의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이제 살고 싶어집니다.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두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그 삶의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신은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에 언제부터 존재했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이유는 신의 존재와 함께합니다.
존재 이유가 없으면 존재의 의욕을 잃고 그러면 진짜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생존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유를 모르고 살면 생존이고, 이유를 알고 살면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서로를 위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존재 이유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아주 가끔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겠다는 분을 만납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사랑해서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사랑할 줄을 알아 사랑하는 사람을 많게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이들이 컸는데도 부모가 아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살아주기를 바란다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요?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저절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려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위해 살면 자살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살면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 가족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을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당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여기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영원한 존재이듯, 이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 10,34-11,1: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를 많이 짓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러운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끌어내기 위해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갈등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러운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말씀을 통하여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0-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같은 상을 받는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 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작년 휴가 때, 어떤 자연 휴양림에서 겪었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휴양림 안에 아주 근사한 식당이 있다고 해서 예약해서 시간 맞춰 입장했습니다. 그 식당의 자리는 산 중턱에 있었고 경치가 한 마디로 “끝내준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식당 주인이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렇게 여유롭게 혼자 여행도 다니고 좋겠어요.”
솔직히 저는 이 식당을 보고는 이곳의 주인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이렇게 좋은 경관 안에서 여유를 느끼면서 책도 읽고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제가 바라는 것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주인이 얼마나 좋아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이 식당 주인이 저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평화스러운 곳에 살고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음이 진정으로 평화로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분의 마음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이분께서도 저를 바라보면서 평화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혼자 여행하면서 평화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 이 식당 주인을 부러워하면서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평화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함을 아쉬워합니다. 그 아쉬움 속에서 평화는 깨지고 맙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남이 가지고 있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하고 만족하는 삶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니 평화롭지 못해서 계속 두리번거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지요. 그만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평화를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세상이 가리키는 평화와 달랐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화를 칼로 잘라버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를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함이 진정한 부러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먼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라.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기꺼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라. 다음으로 그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라(H. L. 린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이사1,13)
완전한 평화를
얻고 싶은 이들에게는
날카로운 정의의 칼이
필요하다네.
그 칼로
내면에서 솟구치는
불화와 미움을
깨끗이 제거해야만
우리의 기도가 완전해지고
핏빛으로 아문
상처의 그 자리에서
평화의 참꽃이 피어난다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평화도 칼도
함께 존재합니다.
깨어나야
평화입니다.
칼이 평화를
만들어 갑니다.
칼은 평화의
방향이 어디인지를
너무나 잘 알려줍니다.
칼의 탈출구는
평화이고
평화의 탈출구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흐지부지한 믿음엔
칼이 필요합니다.
우리모두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자를 수 있는
칼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에
묶여 있는 우리의
내면입니다.
쓸데없는 것을
자르는 순간
평화는 시작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의 칼입니다.
결단의 칼은
식별의 칼날이 되어
주님을 향해 가게하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라는 평화와
십자가라는 칼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걸어가야 할 길은
아는 것만이 아닌
올바른 실천의 길임을
기억합시다.
관계의 칼이
관계맺음의
일순위인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회개의 칼이 됨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우리 내면 깊이
받아들입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정화(淨化)의 여정!'
오늘 복음(마태10,34-11,1)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이렇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정화의 여정', 곧 '깨끗하게 되어져 가는 여정'입니다. 정화의 전제는 '깨끗하지 못함'입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오늘 독서(이사1,10-17)는 '주님께서 죄로 더럽혀진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을 질타하시면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춰라."(이사1,13-16)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 말씀은 '역설의 의미'가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14,27)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21.26)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칼의 의미'인 '정화의 여정, 회개의 여정'이 있어야 하고, 이 여정 뒤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평화'가 있다는 역설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돌아오라고 외쳤건만, 소돔과 고모라는 끝내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했습니다.
예리한 '성령의 칼'로 악과 악의 유혹을 끊어버리고, 달콤함과 쾌락을 끊어버리고, 내 멋대로 하려고 하는 마음을 끊어버립시다!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갑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복음말씀
제1독서
<너희 자신을 씻어라.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중세 최고의 교회학자, 성 보나벤투라(축일 7월 15일) - 출처 : 수원교구 주보
보나벤투라(1221~1274)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조반니 디 피단자’였으나 ‘보나벤투라’로 바꾸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조반니가 어렸을 때 큰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달려가 “아이가 살아나기만 하면 꼭 수도원에 보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성인은 아이를 안고 기도하고 축복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성인은 너무 기뻐서 “오! 보나벤투라(기쁜 일이여)”라고 외쳤습니다. 그때부터 ‘보나벤투라’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자 어머니는 성인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열일곱 살에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갔습니다. 수련 기간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 세계 최고의 신학대학인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고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파리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보나벤투라가 신학을 가르칠 때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보나벤투라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철학, 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에 대해 토론했고, 서로가 신앙적, 학문적 성장을 자극하고 독려했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에게 성체 찬미가를 작사하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 작품 중에 나은 것을 택하려 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작사하였고, 드디어 일을 끝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을 먼저 본 보나벤투라는 “토마스의 작품이 제 작품보다 훨씬 훌륭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작품을 찢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겸손했습니다. 후에 보나벤투라는 파격적으로 서른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프란치스코회 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쓰고 수도회 회칙을 만들었습니다.
보나벤투라를 얘기할 때 꼭 기억할 것이 바로 ‘삼종기도’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삼종기도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님께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드린 것을 기념해 매일 아침, 낮, 저녁 세 번 드리는 기도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어렸을 때부터 성모님을 극히 공경했습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마다 수도원 부속 성당에서 성모 찬송 미사를 봉헌했고,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릴 때마다 성모송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삼종기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그림이 있습니다. 멀리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밀레의 ‘만종(晩鐘)’입니다. 겸손을 뜻하는 영어는 ‘humility’이며, 이 말의 어원은 ‘흙’입니다. 겸손은 흙처럼 되는 것입니다. 보나벤투라는 ‘흙같이 겸손한 성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