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의 꽃/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세……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시 읽기> 민지의 꽃/정희성
예찬할 수 있는 당신에게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싶어진다. 내가 살면서 해온 잘난 척들 중에서 가장 최악의 장르는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분류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순화해서 잘난 척이지 사실은 오만과 무지가 결합된 악행이다.
나는 무언가를 분별하려는 마음이 발달한 사람이다. 사물들 사이의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을 잘 발견하고, 사람들과는 동질감보다 이질감을 잘 느끼는 사람이다.(나만 나 역시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해야 하기에 이걸 다 티내지 않고 살았을 뿐이다.) 이질감을 잘 느끼는 사람답게 어떤 대상의 홈과 결을 찾는 일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스스로 자신만만했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 적도 있다. 특히 자의식이 하늘을 찌르고 감수성이 잔득 벼려져 있던 20대 때는 이 소질을 마구 발휘하며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다. 잘 알지도 못하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을 잡초와 꽃으로 분류하고 평가했다.
물론 차이를 분별하고 흠결을 찾아내는 건 중요한 정신 활동 중 하나다. 비판적 사고 능력이 교육의 중요한 내용인 것처럼. 그렇지만 비판이 교육의 내용이 아니라 목표일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런 교육이 좋은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분류하고 평가하는 활동이 최종 목표가 되는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시를 좋아하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시를 쓰지는 못한다. 나처럼.
타고난 본성까지는 어찌하지 못하지만 지금 나는 경탄과 예찬이 목표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미셀 투르니에는 그의 산문집 《예찬》에서 ‘예찬’이야말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하여 그와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한계, 모자람, 왜소함은 밀어닥치는 숭고함 속에서 치유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어른들이 멋대로 ‘잡초’로 분류해 놓은 ‘꽃’에게 물을 주는 민지의 삶은 숭고하다 그 숭고함에는 귀신도 감동한다. 시는 그 숭고함의 언어적 결과물이다.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포르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