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62]아름다운 인연(14)-김영준이라는 분
KBS1 TV에서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에 방영되는 <TV 진품명품>과 소생이 인연이 깊은 까닭은, 그 프로그램에 단골 출연하는 김영준 감정위원 때문이다.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지만(15년 전인 듯), 성균관대 홍보위원으로 일할 때 ‘동문 선배를 찾아서’기획으로 그 분을 인터뷰하면서 알게 됐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근현대사 유물이나 서적 등을 수집하는 콜렉터Collector이다. 우리 나이 희수喜壽(77)인데도 얼마든지 늘 현역이시다.
'라디오쇼' 김영준 감정위원 "진품명품 15년 출연, 출연료 박해" (daum.net)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게 보이는 물건이나 서적도 그분의 손에 들어가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어느 문화해설가의 말처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모를 때와 천지차이”가 된다. 두어 달 전에 사직동 사무실을 자택과 가까운 분당으로 옮기셨다길레 찾아뵈었다. 사무실은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로 정리도 안돼 뒤죽박죽이고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형상이지만, 무슨 자료든 용케도 찾아내신다. 한마디로 없는 것빼고 다 있다고 보면 된다. 언제나 까마득한 후배(68학번)인데도 경칭을 써가며 뭐라도 못줘 안타까워 하고 극진히 접대를 해주는 바람에 몸둘 바를 모른다.
그날도 그랬다. 내가 흥미로워할 자료들을 설명하기에 바빴다. 그중에 두 권의 앨범식 자료를 빌려와 샅샅이 훑어봤다. 오늘 오전에 졸문으로 소개한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의 이색전시회(저자 사인본展) 도록과 재야 서지학자 박영돈 선생이 평생 유명한 학자와 문인으로부터 받은 편지 모음집이 그것이다. 아무튼, 선배는 수집의 촉수觸手가 남다르다. 원래 수집벽蒐集癖은 우표나 성냥곽 등을 모으는 데서 시작하는데, 이것은 장난(?)에 불과하다. 한국전쟁때 지리산에 뿌려진 수많은 삐라와 선동 포스터 등을 모아 전지크기의 앨범으로 만들었다. 보통사람은 도무지 흉내내지 못할 수집벽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된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위원회 판사의 법복法服은 왜 구해 놓았을까? 세월이 가면 언제든 ‘소용’(의미와 가치)이 있고 ‘수요’가 창출될(돈이 된다?) 것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1920년 3월 5일자)가 정작 그 신문사에는 없는데, 마침내 창간호 일부를 찾아내 무료로 기증했으니, 그 신문사로선 일등공신인 셈이다. 해방 직후 혼란한 정치상황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가시적인 자료를 그분만큼 갖고 있는 분이 없다고 한다. 자료나 물건의 시대적 의미나 가치를 아주 쉽게 설명하는 특기까지 갖고 있다. 소생이 의뢰한 해방직후 미군이 인천상공에 뿌린 작은 삐라 3장이나 프랑스 헌책방에서 구한 구한말 프랑스어로 번안한 <춘향전> 판본에 대한 궁금증도 금세 풀린다. 그만큼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여 내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 어떤 계기로 영향을 받아 특정분야를 연구하거나 물건들을 수집하는 등에 인생을 걸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모양이다. 흔히 하는 말로 취미趣味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특기特技가 되었고, 그 특기로 말미암아 생업生業까지 책임지게 되는 것만큼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어디 있으랴. 평생토록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숫자로 표시되는 나이가 무슨 걸림돌이 되랴. 그런 분들, 그런 분야는 따지고 보면 쌔고쌨다. 우리가 몰라서 모를 뿐이고, 우리는 그분들처럼 어떤 자극도 받지 안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전문가專門家’라고 부르며 부러워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피와 땀이 있게 마련이다.
<해방만화 1년사>라는 포스터 한 장<사진>을 보면, 당시 좌우합작으로 독립을 촉성하려던 정치상황과 움직임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이 만화에서 보니,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15일에는 남북우편물 제1회 교환이 있었는데, 교환되는 편지봉투의 말미에는 교환 표시가 있다. 그로부터 78년 동안 우리는 우편교환은커녕 어떠한 교류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면 어떤 게 비극일까? 옛 자료는 역사가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일러준다. 옛 자료들이 이렇게 증거하고 증명하고 증빙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도 콜렉터들의 임무는 막중하다 할 것이다.
추기: 성균관대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총장이 1953년 부산에서 쓴 졸업식 치사가 <진품명품>에 의뢰품으로 나온 적이 있다. 사료 가치가 충분하기에 우여곡절 끝에 성균관대 박물관에 기증이 되었다. 그것이 또한 홍보위원이었던 소생과 콜렉터 선배와 깊은 인연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