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09
9월10일[연중 제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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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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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NFkHB3fk7aI
(황재호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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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웃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의 표현, 형제적 교정!>
돌아보니 수도공동체에 몸담은 지가 40여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수련기 때 계획으로는 지금쯤 공동체 생활의 달인이자 친교의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순간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아직도 공동체 생활이 부담스럽고 어렵습니다. 아직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보다 공동체가 내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요즘도 이런저런 수도회 회의에 참석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가 있습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입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 말은 쉬운데, 정말이지 요원한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도 저희는 또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합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해 다른 무엇에 앞서 따뜻한 형제애가 필요합니다. 특히 공동체 책임자들의 부성애, 그리고 흘러넘치는 일상적 친절과 배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책임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공동체 안에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예의주시하고 고무하는 역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춤추게 하고 살맛 나게 하는 칭찬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끝없는 용서, 한없는 인내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더 가치 있고, 꼭 필요하고, 차원이 다른 사랑의 실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형제적 교정’입니다. 그러나 형제적 교정은 말은 쉬운데,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고도의 조심성과 극도의 예민함, 숙련된 기술과 강도 높은 기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 형제가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한 형제의 눈이 뭔가에 잔뜩 씌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 형제가 본래의 정체성과 사명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래서 증거의 삶은 사라지고 반대 표양이나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를 가장 사랑하는 형제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면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아프겠지만, 정확하고 예리한 형제적 교정 작업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작업이기에 적당히 해서는 낭패를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문제의 핵심과 정확한 현실을 파악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교정 작업을 위한 로드맵을 세워야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실효성 있는 교정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오 복음 18장 15~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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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8rN39_Q_U0?si=NjI_L7vXdEXlLn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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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왜 당신이 직접 우리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고 교회에 그 권한을 위임하셨을까?>
오늘 복음은 매우 교회론적입니다. 왜 교회에 예수님께서 묶고 푸는 권한을 주셨는지 설명합니다. 누구의 죄든 먼저 혼자 가서 타이르고 안 되면 둘이나 셋이,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하신 말씀처럼 교회에도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죄를 용서 받지 못하면 당신께 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치 아드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에 반기를 든 사람이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 용서의 권한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권위를 부정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각자가 다 사제이기 때문에 직접 예수님께 죄를 용서 받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에 죄 용서 권한을 주시고 파견하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유용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예수님을 상정해 놓고 그냥 용서 받을 것이라고 믿고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실제로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며 예수님께 용서 받았다고 믿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2003년 12월 19일, 당시 나이 24세였던 이 씨는 자신의 6살짜리 아들과 5살짜리 딸을 동작대교 위에서 한강으로 던져 죽게 하였습니다. 기자가 “왜 같이 안 죽었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기자가 “기독교인인데 사람 죽이는 건 괜찮아요?”라고 묻자 그는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가톨릭 신자라면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자신이 한 행위를 직접 예수님이 아니라 사제에게 고백해야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제보다 더 쉽게 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교회에서 죄를 용서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 안에 흐르는 용서의 힘의 효과입니다. 인간에게 죄 용서의 힘을 주셨다면 나에게도 그 힘이 미치고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먼저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게 됩니다.
토니 던지는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 역사상 최악의 팀들을 최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승에서 번번이 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5년 성탄절에 끔찍한 비극이 닥쳤습니다. 던지의 큰아들, 제이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힘이 팀 전체를 감쌌습니다. 모두가 감독을 위로하기 위해 전적으로 감독을 믿고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다음 해에 콜츠는 역사에 남을 명 경기로 역전승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용서의 힘인 그 피가 돌고 있습니다. 피는 모든 세포 안으로 스며듭니다. 그 피가 곧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뜻은 그 본성으로 모인다는 뜻입니다. 개는 인간이 죽었을 때 모이지 않습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입었고 그 본성이 우리 심장에 피로서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더라도 그도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힘이 있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것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걸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그 용서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믿는 믿음은 각 개인이 누군가를 용서하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고정원 씨처럼 용서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람까지도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용서를 위한 힘은 용서의 권한이 주어진 교회의 일원이라는 믿음으로 강화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닌 교회에 와서 용서 받고 용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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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20: 용서하고 화해하라
오늘 복음은 교회의 구체적인 내적 생활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해하는 마음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오늘의 우리 교회에도 필요하다. 에제키엘서에서는 야훼께서 예언자의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언자는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위해 있는 존재이다. 그의 책임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백성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인도하는 것이다. 이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책임은 이제 각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공동체 교회에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주님께서는 형제가 잘못하더라도 그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선 방법이 세심해야 한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이것은 형제의 자존심을 상하거나 분노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더 멀어질 수 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어떤 공감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되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16절) 하신다. 이 말씀은, 사실을 명확히 밝혀 화해를 촉구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형제를 얻는 것(16절)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라”(17절) 하신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호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마지막 시도까지 실패할 때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하신다. 이때 교회로부터 이탈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교회의 특별한 권한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다.(16,19) 여기서 교회의 모습은 구성원 각자가 모두의 선익에 공동 책임을 지는 완전한 공동사회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 복음은 너라고 하면서 교회의 의미를 단수로 표현함으로써, 각자가 공동체를 대신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공동체는 각자 개인과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공동체의 아픔은 바로 나의 아픔이며, 또 그 잘못은 나의 잘못이다.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 책임이 있다. 이제 교회는 자신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려 노력하면서 맺고 풀어나가는 충만한 삶이 된다면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의미는 복음에서 더 내면화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19-20절) 두세 사람은 공동체의 최소한의 숫자이다. 공동체는 군중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합하여서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힘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에 결합하여 있음을 깨달으면서 바치는 기도의 능력에 있다. 사목의 실천 방향이 이렇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교회가 생겨날 수 있는 뿌리를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절).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룰 수 있을 때,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외적인 실체가 아니라, 내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교회 안에서보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사랑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목숨을 다해서도 다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의무라고 한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교회는 사목자들이건 신자들이건 모든 사람을 위해 사랑이라는 법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라는 말씀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위한 각 구성원의 사랑의 마음이며, 이러한 삶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를 현존시키는 삶이 따라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정 안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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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며칠 전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주도에서 5살 먹은 아이가 수영장에서 놀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급히 출동한 119 구조대의 심폐소생술로 아이는 다행히 깨어났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서 소방대에 익명으로 치킨세트 50개를 보냈습니다. 소방대에서는 선물을 보내준 분을 찾아보았고, 아이의 부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방대에서는 고마운 마음은 받겠지만 치킨은 근처의 보육원으로 보네고 싶다고 전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도 기꺼이 동의를 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선순환(善循環)’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고마워하면 고마운 일이 생기고, 기뻐하면 기쁜 일이 생기곤 합니다. 꽃 한 다발의 선순환도 있습니다. 남편이 퇴근길에 모처럼 아내를 위해서 꽃 한 다발을 사다 주었습니다. 아내는 고마운 마음에 꽃을 담을 화병을 찾았는데 너무 낡았습니다. 꽃집에 가서 화병을 하나 샀습니다. 식탁을 보니 식탁보가 찢어져 있었습니다. 식탁보도 새로 샀습니다. 식탁에 앉아 창문을 보니 커튼이 너무 낡았습니다. 큰 맘 먹고 커튼도 새로 마련했습니다. 거실을 보니 지저분했습니다. 아내는 청소기를 돌려서 거실을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보니 집이 완전히 달라 보였습니다. 꽃 한 다발이 ‘선순환’의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제게도 선순환의 경험이 있습니다. 팬데믹이 심할 때입니다. 신문을 홍보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브루클린 사목회장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몸이 아파서 한국에 갔는데 3달만 미사를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주일 미사를 도와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기 시작한 본당 미사가 어느덧 3년이 넘었습니다. 성당에서는 제가 머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는 가끔씩 숙소에 머물면서 지내곤 합니다. 교우들은 어머니가 하느님 품으로 갔을 때 함께 연도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어머니가 하느님 품으로 가신지 3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도 브루클린 교우들과 함께 연도하기로 했습니다. 브루클린 공동체는 저의 서품 30주년 미사도 함께 해 주었고, 맛있는 반찬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매주 하는 친교도 선순환이 되고 있습니다. 한 가정이 기쁜 마음으로 친교의 비용을 기부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친교는 2년이 넘었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결혼기념일, 생일, 기일, 손자의 백일, 장례가 있으면 친교의 비용을 기부하였습니다. 기쁜 일에도 기부가 있었고, 슬픈 일에도 기부가 있었습니다. 저도 오늘 어머니의 기일을 지내면서 기쁜 마음으로 친교 비용을 기부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악순환(惡循環)’도 있습니다. 짜증내면 짜증낼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불평하면 불평할 일이 생깁니다. 불가에서는 ‘인드라망’이라고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그물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악순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폭염, 가뭄, 산불’의 삼종세트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발생한 산불이 검은 연기를 내 뿜었고 뉴욕의 하늘까지 어둡게 하였습니다.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발생한 산불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하였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온실가스를 계속 생산하면 자연은 기상이변으로 되갚아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는 손님일 뿐입니다. 이 지구는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삶의 터전입니다. 악순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작은 연못’입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에 작은 연못이 있었습니다.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가 서로 싸웠습니다. 한 마리가 죽으면서 썩어갔고, 물도 따라 썩어 갔습니다. 결국 연못 속에서는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악순환이 계속되면 결국 모두가 망하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회개’입니다. 신앙인에게 선순환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나눔입니다. 악순환의 고리가 있다면 과감하게 끊어버리면 좋겠습니다. 선순환의 고리는 계속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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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공동체, 형제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5-18)
사람들 가운데에는, ‘용서’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자신도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용서하는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똑같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동체와 형제애를 강조하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우리가 모두 똑같은 죄인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위치에 있는 의인과 용서받는 위치에 있는 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를 청해야 하고, 서로 용서해야 하고, 서로 타일러야 합니다.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입니다.>
따라서 “그를 타일러라.”라는 말씀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죄를 지었을 때, 형제가 와서 너를 타이르면 그의 말을 들어라. 그래야 네가 참으로 그의 형제가 될 수 있다.” 만일에 남을 타이르는 일은 잘하면서, 남이 와서 타이르는 것은 듣기 싫어한다면? <그것은 위선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나를 타이를 때, “너나 잘해라.” 같은 반응만 보인다면?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일러서 회개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누가 와서 나를 타이르는 말을 할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다.” 라고 생각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마음속으로는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남의 충고를 듣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든 누가 와서 타이르거나 충고하기 전에 먼저 자기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없는 사람을 타이르는 일은 아무 소득 없이 끝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타이르는 말을 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가서 타이를 때, 그것을 ‘다수의 압력’이라고 생각해서 회개하기는커녕 반발심만 품고 형제애에서 더욱 멀어져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 상황에서 ‘다수의 압력’과 ‘공동체의 형제애’가 잘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평소에 형제애가(사랑이) 잘 유지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평소에 꾸준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배신자라는 말씀을 처음 하셨는데, 그때까지 사도들은 배신자가 있는지도 몰랐고, 배신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요한 13,22) 심지어 사도들은 유다가 완전히 공동체를 떠난 뒤에도 그가 배신자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요한 13,28-29) 다른 사도들과 유다 사이에는 대화가 전혀 없었을까? 동료 하나가 믿음이 흔들리고, 고민하고, 그럴 때에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까? 유다 혼자만 외톨이였을까? 따돌림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도들도 각자 따로 흩어져 있었나? 하여간에 사도단 안에서 배반자가 생겼는데도 사도들이 그것을 마지막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사도단을 공동체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모습입니다.(적어도 그때에는 그랬습니다.)
‘참된 공동체’는 구성원 모두가 서로 관심 갖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한 몸’입니다. 구성원 중에 누군가가 고민하고 있는데도, 아파하고 있는데도, 슬퍼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그것에 관심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공동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관심 갖고 있다면, 누군가가 죄를 짓기 전에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막는 것을 실패하더라도 금방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공동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일이 생긴다면, 떨어져 나간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는 말씀은, “그를 파문하여라.”, 즉 “그를 공동체에서 추방하여라.”인데, 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네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너는 공동체에서 추방될 것이다.”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도 됩니다.>
그러나 추방된 후에라도 ‘회개하면’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고. 18절의 ‘매고 푸는 권한’에 관한 말씀은, 사도들에게 ‘집행권’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뜻’을 땅에서 실행하는 ‘집행권’입니다.> 어떤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는 ‘결정권’은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사도들과 교회에는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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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죄지은 형제를 올바른 길로 이끌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 말씀은 교정을 시도하는 절차를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그의 죄가 불필요하게 알려지지 않도록 먼저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설득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개인적인 노력이 그다지 효력을 가지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로,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그를 다시 타일러 보는 것입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그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마저도 효과가 없다면, 마지막 단계로, 교회가 나서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 단계에 걸쳐 충분히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그 사람의 완고함이 계속될 경우, 마침내 교회는 판단하게 됩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부분은 교회가 그런 완고한 자에게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기보다는, 그가 회개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 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일으킬 목적으로 꾸짖거나 면박을 주는 것은 올바른 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발심만 불러일으킵니다. 교정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미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때문에 타이르고 설득합니다. 레위기는 형제를 바로잡아 주는 일이 이웃 사랑의 계명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17-18)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이 뉘우치는 데 충분한 기회를 주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답이 없다며 너무 빨리 포기하여 버리는 것은 아닌지, 또는 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수치심을 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야고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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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일들이 ‘갑자기’ 불편함을 주는 경우가 있지요. 어느 순간 다 써버린 치약, 남아있지 않은 휴지, 갑자기 기름이 부족하다는 자동차의 경고음, 필요한 순간 찾을 수 없는 식재료 같은 것들이요.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서서히 닳아 없어진 것이지요.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갑자기’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서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장애에 이르게 됩니다. 이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듣고 볼 수 없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함과 동시에 제대로 듣고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거든요.
문제는 누구나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우리는 가르침이나 질책보다 달콤한 위로와 인정의 말만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충고라는 핑계로 이웃들에게는 악과 미움이 담겨있는 소리를 함부로 하곤 하지요.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른 이에게 하는 행동이 이토록 다르니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일 듯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지혜를 알려줍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이 말씀을 들으면 나의 충고를 듣지 않는 타인이 생각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나는 다른 이의 충고를 얼마나 잘 듣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더 발전적인 신앙을 갖게 되기 때문이지요. 한편, 다른 이에게 충고할 때는 반드시 미움과 분노가 아닌 애정과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를 “지적하고 꾸중해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타일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애정 어린 충고에 앞서 미움과 분노를 먼저 품고 있지는 않은지요. 교묘한 뒷담화로 누군가를 해치려 하는 일에 너무 마음을 쏟고 있지는 않은지요. 정말 진심 어린 사랑을 담고 있는지요. 다른 이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 악을 담지 않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타이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결국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이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나 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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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우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도록 합시다. 저는 현재 안성에 소재하고 있는 요양병원에서 원목 신부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놓여 계신 분들 가까이 머물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매인 것을 풀고 떠나가신 분들은 아마도 광명의 터널을 지나가시겠지만, 풀지 못하고 떠나가신 분들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게 아닐지 상상해 봅니다. 제 부모님 돌아가신 지가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저에게는 풀지 못한 숙제, 곧 형제들 사이에 불화와 갈등을 화해시키지 못한 숙제가 있습니다. 여러 차례 시도도 해보고 끊임없이 기도도 하고 있지만 아직도 풀지 못한 매듭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화해시키고 싶지만 화해시키지 못하고, 용서해야만 하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게 사랑의 의무입니다. 사랑의 빚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겁게 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8,15) 어떻게 하면, 언제나 이 사랑의 의무, 곧 화해와 용서의 실천을 다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저에게 조금의 위로가 되는 시가 바로 이해인 수녀님의 「사랑의 의무」입니다. "내가 가장 많이 사랑하는 당신이 가장많이 나를 아프게 하네요 보이지 않게 서로 어긋나 고통스런 몸 안의 뼈들처럼 우린 왜 이리 다르게 어긋나는지 그래도 맞추도록 애를 써야죠 당신을 사랑해야죠 나의 그리움은 깨여진 항아리 물을 담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엎디여 움니다 너무 오래되니 편안 해서 어긋나는 사랑 다시 맞추려는 노력은 언제나 아름다운 의무입니다. 내 속마음 몰라주는 당신을 원망하며 미워하다가도 문득 당신이 보고 싶네요."
저는 지금도 음악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베트남에 있으면서 매주 보았던 ‘나는 가수다’는 프로그램을 참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가수 ‘인순이’가 출연해서 불렀던 「아버지」란 노래를 들은 순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전율과 함께 눈물이 나더라고요. 인순이가 부른 「아버지」란 노랫말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점점 멀어져 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 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까이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다. 제발 내 애길 들어주세요 시간이 필요해요.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담아 두기만 했던 그래 내가 사랑 했었다. 긴 시간이 지나도 말하지 못햇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세상 살아오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언제냐고 물으면 저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순간이라고 확신합니다. 노인 요양병원에서 현재도 제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고 용서받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서 이 세상 떠난 분들은 한결같이 편안한 얼굴입니다. 땅에서 매인 것을 풀고 떠나니 얼마나 마음 편하고 가볍겠습니까?
정직한 눈으로 솔직한 마음으로 살아 온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살아오면서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는 모두 잘못했고 잘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기에 용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타인은 자신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의 잘못을 잘 보면서, 자기 잘못을 잘 보지 못합니다. 두 사람이 굴속에 들어갔다고 하자고요. 한 사람의 얼굴에는 검댕이 묻어있고, 다른 사람의 얼굴은 깨끗하다고 한다면, 얼굴에 손을 갖다 댄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타인의 얼굴에 묻은 검댕이를 보면서, 타인의 잘못을 보면서 자기 잘못을 볼 수 있다면 용서하기도 사랑하기도 쉬울지 모릅니다.
지금은 수도원 밖에서 살다 보니 사랑의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 수도원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생활할 땐 그렇지 않았는데, 나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형제의 잘못을(?) 선뜻 타이르지 못하고 주춤할 때가 많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고,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격언에 충실했었는데 그러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형제의 부족보다도 저의 부족과 잘못을 더 잘 보고 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형제나 다른 이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이 자칫 갑질이거나 꼰대질로 받아들여지기에 주저하고 망설여집니다. 저 또한 역시 잘못이 많은 사람이기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하면서 형제가 잘못한 것을 보고도 지나치고 안 본 것처럼 살아가려고 합니다. 타인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은 귀찮은 일이며 위험한 일입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그 형제가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도망치기 마련입니다. 때론 내 앞에선 고맙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돌아서서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을 알기에, 이젠 ‘타일러라.’는 말을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도 ‘귀찮고 위험하지만’ 남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사랑의 의무를 다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33,8~9) 이렇게 형제를 살리고 자신도 살리는 길은 곧 형제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올바른 충고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도 동일한 맥락에서 ‘형제를 얻고 살리는 삶과 형제를 잃고 자신도 잃은 삶’은 형제의 잘못을 타이름과 기도의 실천 여부에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형제의 잘못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타일러주고,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형제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기도한다면 그는 나락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형제가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용서받은 사람은 잘못을 씻고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형제를 잃은 길도 쉽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뒤에서 들추어내고 비난하고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자기 잘못을 후회하고 괴로워 우는 형제의 아픈 곳을 더 깊이 찔러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잘못과 허물로 걸려 넘어진 형제를 일으켜 세우기보단 영영 일어서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입니다.
잘못을 타일러준다는 것은 비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비난하거나 화를 내는 것과도 다릅니다. 우월감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타이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은 남이 나의 잘못을 지적할 때, 나는 어떠한 마음 자세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곧 수용의 자세입니다. 형제나 타인으로부터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누구나 불편하고 힘듭니다. 하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에서 생각하면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고, 그러기에 공손하게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그 어려운 일, 귀찮고 위험한 일을 나를 위해서 기꺼이 용기를 내서 힘겹게 한 행동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타이르는 사람이나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에 매듭이 풀리게 되며, 하느님 또한 그 안에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18,19) 하지만 아직도 이를 실천하는 게 제게는 어렵습니다. 차라리 모를 때가 더 쉬웠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사랑의 화해와 친교를 살지 못하고, <용서와 화해>에 필요한 학점을 취득하기 위해 이곳 요양병원에서 수강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다른 사람의 지적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저에게 간곡히 말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공동번역, 로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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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임석수 바오로 신부님]
<구하고 살리는 길>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단둘이 만나서 그를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그래도 안 들으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고 하십니다.
형제를 쉽게 내쳐 버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며, 형제에 대한 깊은 사랑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자체만 떼어 놓고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마치 나는 아무 잘못도 없고 상대방만 잘못한 것으로 몰아가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고, 그래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고, 또다시 몇몇이 힘을 모아서 그의 잘못을 충고하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의 이름으로, 마침내는 그를 내치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수순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내치는 수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오늘 복음 구절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곧바로 풀립니다. 먼저 18장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네 손이나 발이,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고 하셨고, 이어지는 10절부터 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과, 길 잃은 양을 되찾아 오듯이 작은 이들 가운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며, 온 마음을 다해서 다른 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이어서 오늘 복음 말씀 즉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는 것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구구절절이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내치려는 수순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구하고 살리는 수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결코 일방적일 수 없으며 누구도 다른 형제의 잘못을 판단하고 규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먼저 돌아보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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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마석진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안에서 같이>
어릴 때 부모님은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인사를 잘해야 한다. 어른들 보면 항상 인사 잘해라.”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인사 하나는 나름 잘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들에게 함부로 어른들께 인사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회가 점점 삭막해지고 무서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사건들은 우리들을 어둡고 슬프게 만들고 사람들을 더욱더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회는 점점 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물들고 함께 인사하고 나누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이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잘못된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다른 이의 잘못된 것을 보고도 모른척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요즘 말하는 꼰대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자기가 알아서 하지 내가 굳이 뭐, 라는 생각들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나의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게 만든다는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행동이 나에게 영향을 주고, 그와 내가 잘못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바로 한 사람의 잘못이 그의 잘못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비효과처럼 번져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려, 즉 공동체에 알려 바로 잡아야 함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8)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그것을 말할 때 자기 말이 맞다는 식이 아니라 정말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가 하지 않는가입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어떤 옳다는 생각도 사랑을 앞서갈 수 없고,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회의 아픔과 병폐는 결국 이런 사랑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잘못된 것을 보고도 모른척 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분 사랑으로 가득하길 함께 기도합시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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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조용필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함께 구원의 길로!>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잘못했거나 그로 인해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주 안 볼 사이가 아니라면, 대화를 통해 어떻게든 풀려고 하지 않을까요? 만약 이러한 대화를 하게 된다면 저는 꼭 묵상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와 대화하려는 목적입니다. 즉, ‘상대방에 대한 나의 불만을 표출하기 위한 대화인가?’ 아니면 ‘함께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한 대화인가?’를 스스로 묻고 답해보아야 합니다. 서로의 구원을 위한 대화가 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상대방을 위한 대화가 되도록 인내하며 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서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8)
성경은 설사 상대방이 악인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그에게 설득의 말이라도 건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뒷담화’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의미하죠. 뒷담화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모여 주로 누군가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든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며 그의 불행을 바란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자리는 아니겠지요. 만약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면, 주님에게서 멀어진 그를 어떻게 하면 다시 교회로 이끌지에 대한 대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우리에게 주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주님의 목소리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그를 교회 밖 이방인처럼 취급하라는 걸까요? 아니면 공동체가 힘을 모아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라는 걸까요?
분명 오늘 복음 말씀에는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그를 버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를 위해 개인과 공동체 차원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하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홀로 판단하고 공동체에서 내 편을 만들며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이 혹시 나와 우리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했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언제고 나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두 주님의 자녀임을 기억한다면 형제 자매를 내치는 슬픈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합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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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듣기 좋은 소리보다 사랑이 먼저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넓고 높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사랑으로 바른 충고를 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청합니다.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고 변화와 성장을 기다립니다. 배려해 주고 존중하며 아량을 가지고 기다려 줍니다. 사랑은 진실한 만큼 상대를 인정하고 도와줄 방법을 압니다. 상대를 결코, 이용하지 않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로마 13,8)이라며 ‘사랑’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그 사랑의 구체적 행동으로 충고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18,15)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안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려라!’하십니다. 처음에는 드러내 놓지 말고 조용히 만나서 형제애로써 대해주고, 그다음은 사생활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웃의 도움과 함께 최선을 다하고, 더 나아가 교회공동체가 다 함께 노력하는 정성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점진적으로 끝까지 기다리며 기회를 주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서로 부딪히면 깨져버리는 ‘토기 그릇’과 같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니 충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칭찬은 달고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니 섣불리 쓴 약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 사랑을 갖지 않은 이상 섣불리 충고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랑이 없는 한 칭찬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칭찬은 그로 하여금 칭찬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달지만, 독이 되기 쉽고, 충고는 쓰지만, 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과 충고를 하기에 앞서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충만케 해야 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충고를 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자!”라고 하였고,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십시오.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 12,15)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고를 할 수 있는 큰 사랑과 온유함을 간직해야 하며 동시에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을 지녀야 합니다. 바른 충고를 해 줄 수 있고, 또 충고를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성경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 3,19)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다.”(히브12,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소리로, 하느님의 뜻으로 다가올 충고해줄 사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소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큰 은총입니다.
한 주간 바른 충고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도록 기도하고, 듣기 좋은 소리보다 바른말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충고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충고가 필요한 사람일수록 더욱 경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과 있고, 살아있는 충고는 사랑입니다. 더디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녀, 친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정곡을 찌르는 논리 정연한 설득과 충고가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타일러라’는 말씀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 이웃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배려하여 변화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남에게 충고는 잘하면서 남의 충고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한계를 잘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잡아내지 못하고 없애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가장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한 번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기대와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만 진심을 주고받기까지는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열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잘못을 지적받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모두가 주님과 함께 잘사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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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관광객이 이탈리아 여행을 갔습니다. 길을 걷다가 건물을 짓는 공사판으로 들어서게 되었지요. 그는 한 노동자에게 다가가 “무엇을 하는 중입니까?”라고 묻자,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관광객은 계속 걸어가다가 먼저 만난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이번에도 똑같이 “무엇을 하는 중입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이 노동자는 “벽을 세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관광객은 두 노동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세 번째 사람을 만나서 역시 같은 질문인 “무엇을 하는 중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동자는 아주 특별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성당을 짓는 중입니다.”
똑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일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시선에 따라 기쁨과 희망의 일상이 될 수도 있고, 무의미한 일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래서 일상의 삶을 특별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일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사는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만남도 의미있는 만남이 되어야 하지, 그저 그런 만남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만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일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사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곳에 주님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공동체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의 일치는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며 살아가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의 일치보다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너무나 큰 노력을 쏟아붓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을 떠올리면서,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본인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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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으로 살림으로 함께>
마태오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살림으로 함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사랑으로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사랑으로
살리려는
사람들이
땅에서
하늘로
그리하여
땅에서도
함께
하늘에서도
함께
오로지
사랑으로
살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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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우리 사랑>
어리석은 얘기인지 모르지만, 용서해 주는 사랑과 교정해주는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사랑일까? 용서해 주는 사랑과 교정해주는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이 하기 더 어려울까?
교정해주는 것이 용서해 주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렇기에 교정해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일 것입니다.
용서해 주는 것은 용서받는 사람이 반기고 고마워하는 것이지만 충고해주는 것은 충고를 받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고, 충고를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받아들이기에 하기 더 어렵지요.
실로 충고를 교정을 위한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믑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척 성숙한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고침으로써 자신도 행복해지고 충고해준 사람도 사랑의 보람을 느끼게 하겠지요.
문제는 충고를 거부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입니다. 거부하는데도 충고를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사실 충고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될 경우만 충고한다면 앞서 봤듯이 거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충고를 받아들이건 말건 우리는 나의 사랑으로 충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내 안에 없으면 아예 충고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럴 때 우리 안에 그를 위해서건 나를 위해서건 사랑부터 채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충고하려면 사랑이 내 안에 차오르도록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잘못한 그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분노가 연민보다 크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충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마음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충고할 때 공동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의 사랑만으로 안 되고 나의 충고만으로 안 될 때 그것으로 포기하지 말고 공동체 힘을 빌려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서 사랑의 의지로 간신히 충고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조금 있던 사랑마저 날아가 버리고 분노하거나 비난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가 마음을 모아 청하면”이라고 하십니다. 내 사랑만으로 안 될 때 그것으로 포기하거나 뒤에서 비난하지 말고, 내 작은 사랑만으론 불가한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같이 기도하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이런 청을 받아들여 같이 기도하고 같이 포용해 들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충고할 때 하느님 대신 충고해야 합니다.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랑을 결코, 작게 여기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고, 그러니 충고 역시 함부로 하거나 즉흥적으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만큼 나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으로 키워 충고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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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
- 기도하라, 사랑하라, 지혜로워라, 운동하라 -
참 사람되기 힘든 시절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광야 인생 여정 잘 살면 성인이요 못 살면 괴물도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만이 참 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더불어의 인생 여정, 끝까지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일간지나 인터넷 뉴스를 보면 어수선한 부정적 뉴스로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영적전투 치열한 전쟁터 같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정말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일간지 토요기획 한면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근육이 자산이다. 생존을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과욕과 과거, 채워야 할 것은 근육과 균형이다. 운동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바람이 분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중년들이 운동하기에 최적화된 계절이 왔다.”
요지의 기사였습니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삶의 근육, 삶의 균형을 돌봐야 하고 이를 위한 삶의 전략이 필수입니다.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중에 참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을까요? 구체적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참 좋은 삶의 전략, 삶의 균형에 삶의 근육을 튼튼히 하는 방법이겠습니다.
첫째, 기도하라.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정신이, 마음이, 영혼이 튼튼하면 몸의 건강도 따라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을 위해 우선적 필수 요건이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세상이 어수선하고 불확실하고 불안할수록 기도는 절실합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되지 않기 위해, 성공적 삶을 위해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의 훈련과 습관은 정말 중요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겸손의 덕입니다. 삶의 전략, 삶의 근육, 삶의 균형을 위해 기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참 자기를 알 수 있습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기도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도 결국은 기도에 대한 강조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늘과 땅은 하나로 연결되었으며, 바로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하게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땅에서 풀면 저절로 하늘에서 풀려 영육의 건강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늘 주님의 현존 안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함께 기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함께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하는 그 자리가 꽃자리이고 하늘 나라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둘째, 사랑하라.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가 바로 사랑입니다. 참으로 함께 기도할 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도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사랑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일상의 삶일 때 눈 밝은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없는 깨끗한 사랑, 한결같은 아가페 사랑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충고 역시 사랑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말도 있듯이 사랑도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을 배우고 배워도 영원히 초보자임을 인정하면서 겸손히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래서 앞서의 기도를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항구한 노력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혜로워라.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와 겸손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는 것도, 바로 잡아 주는 교정도 사랑이자 지혜입니다. 참으로 형제들의 잘못이나 죄에 대한 교정도 지혜롭고 겸손해야 합니다. 사랑의 지혜, 사랑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이런 교정의 지혜도 나옵니다. 상호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울 때, 형제의 잘못을 겸손히 잘 지적할 수 있고 자기의 잘못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형제들에 대한 잘못의 교정 절차가 참으로 침착하고 차분합니다. 절대 사감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정확히 잘못된 사실, 팩트를 지적하고 시정을 권합니다. 정말 깨어 있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라면 즉시 잘못을 인정할 것입니다. “고맙다”, “감사하다” 보다는 “미안하다”, “잘못했다.” 진솔한 사과가 백배 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도 형제적 교정을 명령합니다. 이 사랑의 의무가 형제적 교정입니다. 형제적 교정에 소홀했을 때 그 책임을 묻겠다는 주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참으로 진정한 형제 사랑은 교정의 충고에서 빛납니다. 교정과 치유, 화해를 위한 충고이지 책임 추궁이 아님을 숙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사랑과 지혜를 다해 단계적으로 충고의 절차를 밟고 최종적으로 아니다 싶을 때 공동체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 “사람은 고쳐 쓸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걸레는 빨아도 역시 걸레”라는 자조적인 거친 말도 있지만, 끝까지 희망을 갖고 한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 수 있도록 참으로 넉넉하고 자비로워야 할 것입니다. 잘못한 자나 공동체나 참된 회개가 참으로 절실합니다. 무엇보다 공동체는 하느님의 넉넉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넷째, 운동하라.
오늘 말씀에는 없지만 특히 권하고 싶은 충고입니다. 기도처럼, 공부처럼, 일처럼, 사랑처럼, 교정처럼 운동도 일정시간 한결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영육의 건강에 심신의 훈련과 단련에 운동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러니 일정한 시간 혹은 되는 대로 심신 이완이나 강화를 위한 운동을 추천합니다. 영적 삶의 전략에, 참으로 살기 위해 건강을 증진시키는 운동 역시 중요 수행입니다. 저역시 매일 한 시간 이상 침묵중에, 또는 기도중에, 또 노래하며 걷는 운동을 합니다.
참 사람되는 공부보다 어려운 평생 공부도 없을 것이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참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훈련이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사랑, 지혜와 겸손, 교정의 훈련이요 심신의 운동의 훈련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사람이 되는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에 최선의 노력과 열정을 다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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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18,15)
<율법의 완성인 사랑!>
오늘 복음(마태18,15-20)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야 하고,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너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바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고, '나와 너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33,7-9)인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완전 멸망 후 바빌론 유배 때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찬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에제33,7)
사랑은, 너를 위한 사랑은, 서로를 위한 사랑은, '서로가 서로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냉담 교우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만 하는 당위성(當爲性)'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내가 너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너를 구원으로 이끄는 나의 노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사랑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참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서로 사랑합시다! 함께 참사랑을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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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PFWbECZ9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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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 15)
형제적인
삶의 길을
제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공동체는
형제적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공동체적 사고는
화해와 수용
협력이라는
인간성 회복으로
전개됩니다.
인간성 회복은
인간적 유대와
배려를 통한
신뢰와
믿음입니다.
형제적 관계로
우리가
다시 만나고
화해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가 가야 할
성숙한 자유와
욕망의 절제를
배우게 됩니다.
서로를 향한
이해와 나눔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형제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지니는 것입니다.
삶의 본질은
조화와 협력이며
공생과 상생입니다.
협조와 수용
화해와 성찰이
공동체의 올바른
실천이 됩니다.
복음적
공동체는
파괴가 아닌
창조를
실천합니다.
창조적 삶은
다름 아닌
존중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의
애정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 변화의
기쁜 삶입니다.
어려움과 고통은
나의 십자가로부터
발생합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와
화해하는 방법을
안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형제를 다시 얻는
공동체의 힘에서
기쁘게 체험하는
편안하고 행복한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친절과 경청
조화와 행복은
공동체에 주시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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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